부시장시절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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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4 김용구 이름으로 검색 댓글 0건 조회 3,109회 작성일 2003-02-26 21:36본문
모나지 않는 둥그스런 얼굴, 도툼한 입술에다 적당하게 튀어나온 이마, 그리고 도수(度數) 높은 안경이 매우 지적이다. 거기에다가 그는 성실하게 노력하는 것을 좌우명으로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이쯤 되면 성공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우리 사회에 적응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갖춘 셈이다.
권선택 대전시 행정부시장(46).
누구든지 홍선기 대전시장 후임으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인물이다. 여론이란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다는 속성이 있기는 하지만 세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7일 오후 약속된 시각에 그를 찾았을 때 막 외부 행사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깨끗하게 정돈된 둔산 대전시 청사 10층 남쪽에 자리잡은 사무실은 단아했다. 접견 소파 옆의 노오란 꽃이 핀 화분은 딱딱해지기 쉬운 사무실 분위기를 한결 부드럽게 해주었다.
″김부장이 나에 대해서는 더 잘 알잖아요. 특별히 얘기할 게 있나요″
권 부시장의 기자에 대한 호칭은 항상 '부장'이다. 신문사 정치부장 시절 서울지사에 근무할 당시 여러 번 만나 식사도 하고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고향 얘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그에게는 편안했고 시간이 거기에 멈춰 있었던 모양이다.
대담은 차 한잔 마시면서 시작되었다.
부시장을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다.
민선 대전시장에 대한 생각이었다.
″지방자치 단체장은 본인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그만한 위치에 와 있으니까 나오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로서는 그럴만한 입장은 아닙니다. 다만 그 때가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한번은 때가 올 것이라고 봅니다. ″
적극적인 의사표현은 아니다. 충청도 말이 상당히 우회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기회가 되면 반드시 도전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면서 약간의 말을 부연(敷衍)했다.
″부시장을 하면서 항상 민선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합니다. 그래야 행정이 겸허해지고 어려운 사람을 위한 행정을 할 수 있습니다.″
딱히 그런 표현은 아니었지만 듣기에 따라서는 민선시장 연습을 하고 있다는 말로도 들릴 수 있다. 어째든 해석은 독자의 고유 권한이 아닌가.
"때가 되면 민선시장 도전"
조금은 흔한 질문을 해보았다.
- 어떤 철학을 가지고 행정을 하고 있는지요.
″원칙과 소신, 그리고 행정은 투명해야 한다는 겁니다. 부시장을 벌써 2년 10개월을 했는 데 공직 생활하면서 한자리에서 2년을 넘기기는 처음입니다. 직업 공무원으로서 시장을 보필하면서 대전시정 전체를 조정하는 게 제 역할입니다. 홍선기 시장님은 오랜 행정 경험을 가진 경륜 행정가인 만큼 저는 젊은 마인드로 미진한 부분을 보완해나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시장님도 늘 그런 말씀을 합니다. 행정부시장이 나를 보완해주어야 한다고... ″
하지만 권 부시장은 자기목소리를 내지 않는 데 아주 철저하다. 어쩌면 2인자로서 갖추어야 할 한국형 덕목이지만 자칫하다가는 소신이 없다는 비판을 듣기도 한다. 철저하게 몸을 낮춰야 하는 게 현실이라면 그 속에서 자기 목소리를 찾아야 하는 게 또한 미래를 위한 대비일 수도 있다. 이를 어떻게 조화하는 가는 곧 능력이다.
- 고향에서 공직생활은 어려운 점도 많을 텐 데요.
″대전시는 고향이라서 더 없이 보람을 느낍니다. 하지만 고향 때문에 어려운 점도 많습니다. 그러나 정실에 얽매이고 특정인을 봐주기 위한 행정은 절대 안 됩니다. 행정의 상식이지요. 지금도 저는 욕먹고 있어요. 고향동네를 그린벨트에서 해제시켜주지 않는다는 게 이유입니다.″
고향동네 민원 얘기는 농담 삼아 나온 말이었다. 적절한 비유는 아닐지 몰라도 행정하기가 그 만큼 어렵다는 말로 들렸다. 더구나 아직도 상당수 시골 사람들은 직위가 높을수록 말만 하면 다 되는 걸로 여기고 있다. 당장 동네 아무개 아들이 부시장할 때 그린벨트를 푸는 숙원 사업을 이뤄보자는 시도는 순박함에서 나오는 발상으로 이해가 된다.
고향 얘기는 누구에게나 자꾸 하고 싶은 화두다.
내친 김에 더 들어보기로 했다.
권부시장의 고향은 대전시 중구 목달동. 보문산 뒷켠이다. 지금은 시내버스도 다니고 신작로도 확 뚫려 편리해졌지만 당시는 오지 중 오지였다. 무수동, 산서동 등 일대가 안동 권씨 집성촌이다. 산서국민학교를 다녔다. 전교 1등은 안동권씨 35대 손(孫) 권승원씨(78)의 아들 몫이었다. 하지만 전교생이 300명이었고 학년당 한 학급만 있었다면 전교 1등의 가치는 조금은 떨어지게 된다.
오지에서 공부를 잘 하니 유학 온 곳이 대전이었다. 최고 명문이었던 대전중은 엄두도 못 냈고 충남중은 가능했다.
당시 그가 오늘의 부시장 꿈을 갖고 살았을까.
″어릴 때 만들기에 무척 관심이 많았고 재주도 있었습니다. 그 비싼 라디오를 분해해서 혼나기도 했고 기타를 좋아해 삐삐선(까만 전선)으로 만들어 보기도 했습니다. 동네 아이들 스케이트는 물론 제 차지였고 시냇물로 하는 수력발전이 있었는 데 고장이 나면 제가 다 고쳤어요. 손톱이 빠지고 손이 성할 날이 없었지요. 저는 공대가 적성에 맞는 걸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도시로 나와보니 역사학을 전공하여 대학교수가 되는 걸로 바뀌어 지더군요. 중학교를 다니면서 변했지요.″
대전고 입학은 비교적 수월했다.
손재주 탓에 이과를 선택했다가 도중에 문과로 돌렸다. 같은 경우가 한 학년에 약 50명 정도여서 이들 학생만 모아 별도로 한반을 만들었다. 그게 '돌반'이다. 돌반에서 전교 50등까지만 게시하는 방(傍)에는 항상 이름이 올랐다.
충남중에서 대전고 진학에도 우여곡절은 있었다. 아버지는 5년제 대전공전을 강요했다. 당시 담임이던 정필복 선생님이 ″네가 포기하면 우리 반에서는 대전고에 한명도 못간다″는 강권이 있었고 아버지를 책임지고 설득해 진학을 하게되었다.
고교시절 친구 남승철씨(47·충청하나은행 한밭대로 지점장)는 ″학교 다닐 때야 모범생에다 공부도 잘하는 편이었습니다″라며 ″머리도 좋지만 많은 노력을 하는 편″이라고 강조해 역시 타고난 재주보다는 성실함으로 승부를 거는 쪽이었다.
행정고시 최연소 수석 합격
이름과는 달리 선택이 필요로 하는 시점에서 그는 여러 번 망설였다.
평소 안정된 직업을 선호하던 아버지의 고집은 대학 선택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 3 때 한참 공부할 즈음 지역에 있는 사대를 진학을 권했다. 역시 공부에 손을 놓고 있다가 학교 측의 권유로 서울모대학를 지망했다. 하지만 중요한 시기에 목표치를 잃어버린 짧은 방황은 당락에 절대적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들어간 곳이 성균관대 경상대 경영학과였다.
1학년 때는 민청학연 등 학내 소요로 인해 공부를 거의 못했고 2학년 때부터 고시공부를 생각했다. 남들은 일류대에 가서 멋지게 다니는 데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버지가 문제였다. 마침 이웃동네에 고시에 미쳐 10년째 낙방한 서생이 있어 아버지가 그것을 본 것이다. 공부는 몰래 시작했다.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공부를 해도 불투명한 고시를 몰래했으니 어려움은 배가했다.
″정말 어려웠습니다. 중간에 포기할 생각도 많이 했지만 승부라고 생각하고 공부를 했습니다. ″
3학년 때 1차 합격하고 2차는 두 번만에 당당하게 통과했다. 그것도 22살 최연소에다 수석이었으니 매스컴에서 그냥 둘 리가 없었다. 당시 성균관대가 삼성그룹에서 운영하고 있어 계열사인 동양방송과 중앙일보, 그리고 지방에서는 대전일보 등 중앙과 지방할 것 없이 놀라움으로 한 목소리를 냈다.
″고시 출신들이 가장 선호하는 부처는 경제기획원, 재무부, 내무부였죠. 소위 잘 나가는 부처였습니다. 수석합격이어서 어디든 골라서 갈 수 있었지만 공직자는 일선 행정을 해봐야 보람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학 4학년 때 내무부에 대기했다가 맨 먼저 보직을 받은 곳이 충청남도 확인 평가계장이었습니다. 나이가 24살이었죠″
충남도 근무 시절 일화도 많았다.
손수익 지사에게 발탁된 일이나 파격적인 인사 구상으로 오히려 지사에게 승진의 강도를 낮춰 달라고 부탁해야만 했던 일등은 지금도 즐거운 얘기 거리가 되고 있다.
안응모 지사때 일이다.
서슬이 퍼렇던 전두환 정권 시절이니 대통령의 위엄은 지금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예산에 모내기 행사에 참석한 전대통령은 예정에도 없던 충남도 순시를 지시했다.
준비할 시간은 꼭 2시간.
안응모 지사와 단둘이서 정말 급하게 업무보고서 작업을 끝내니 약 10분이 남았다. 한시간 50분만에 그 엄청난 대통령 순시보고 자료를 마친 것이다. 물론 업무보고는 안지사의 유창한 말솜씨와 빈틈없는 의전으로 아주 성공리에 끝이 났다.
그는 이 일로 다시 한번 인사청탁이 아니라 낮은 인사를 부탁해야 만 했다.
이후 내무부 기획담당, 충남도 기획관, 대통령 비서실 민정담당, 내무부 기획과장, 행정과장 등을 거치면서 고시 수석 합격이라는 전력보다 빈틈없는 행정력으로 지금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기획과장시절 시군통합의 주무과장으로 시군통합의 국가적 업무를 원만히 처리,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이후 행정기관의 3대과장의 하나인 행정과장을 역임했다.
″남들보다는 열심히 일을 했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습니다.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하는 것만이 남들보다 앞장 설 수 있는 길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타성에 젖은 행정이나 생각을 버리고 전향적으로 모든 일을 구상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노래도 흘러간 옛날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가능하면 요즘 젊은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배우고 부르려고 합니다. 작은 예지만 그런 노래를 부르다 보면 요즘 젊은이들 문화를 조금은 이해 할 수 있어요. 행정가는 생각이 젊어야 합니다.″
형식보다 내실 행정 지향
업무 스타일도 파격이다.
형식주의를 탈피, 혁신적이라고 할 만큼 간단 명료한 업무체계를 강조한다.
〃상사에게 결재 시 불필요한 표지까지 깨끗하게 만들다보니 시간을 낭비하고 때를 놓치는 경우가 있었지요. 그런 것을 과감하게 없애는 작업을 했습니다. 형식보다 내실위주의 행정이 일반화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권 부시장은 두주불사(斗酒不辭)형이다. 저녁에 술자리에 어울리면 동료들에게 가벼운 욕으로 친근감을 나타내기도 해 주변에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태평동 삼부아파트 부시장 관사에 살고 있다. 장남 현구(19)는 외국어 고등학교를 나와 일본쪽으로 유학을 준비중에 있다. 둘째 재구(16)는 고1 재학중이다. 부인 윤수의씨(46)은 교편을 잡고 있다.
지금까지 권 부시장은 타고난 성실성에다 고시출신이라는 점이 한데 맞물리면서 남들이 쉽게 오를 수 없는 자리인 시장 바로 밑에 위치하고 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제 대전지역을 이끌어 갈 차세대 주자중의 한사람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앞으로 권 부시장 행보의 끝은 어디이고 얼마나 지역 민들의 기대에 부응할 것인지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인재란 쉽게 만들어지거나 얻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선택이는 '범생'이었어요″
고교동창 남승철씨가 본 권부시장
"선택이는 학교 다닐 때 요즘 젊은애들 하는 소리로 '범생'이었어요. 그 친구집이 목달동 시골입니다. 버스도 잘 안 다니는 곳에서 고등학교 3년 동안 지각, 결석 한번 안한 성실한 친구였죠"
권 부시장의 칭찬은 익히 들어 알고 있으니 단점을 말해달라고 부탁하자 남지점장은 흠 잡기가 힘든 친구라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학창시절 시험기간 중이었어요. 권 부시장이 공부를 잘하는 편인데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서 농구만 하고 공부는 안 하더군요. 혼자 생각에 '저 친구 이번 시험은 포기했구나'라는 생각을 했죠. 그런데 성적표가 나왔는데 아니었어요. '도대체 공부를 어떻게 하길래 시험기간에 놀아도 성적이 잘 나오냐'고 그랬더니 하는 말이 "나는 시험 볼 때 노트를 넘기면서 시험을 본다"고 그러지 않겠어요. 자기는 머리 속으로 무슨 내용이 교과서 몇 페이지에 나와 있는 것까지 외워서 시험을 본다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척 노력하는 친구라는 걸 새삼 깨달았죠"
험담을 부탁했는데 다시 칭찬이다.
사람이 가장 흐트러지기 쉬운 장소가 술자리다. 알코올이 적당히 들어가면 자기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곳이 그 곳이다. 혹시 남에게 밝히기 힘든 술버릇은 없을까.
"술 엄청 먹죠. 체력이 대단한 친구예요. 아무리 술을 마셔도 먼저 취하는 법이 없어요. 특별한 주사도 없구요. 아! 주사라고 하기엔 그렇고 그 친구 Y담을 무척 잘해요. 남자들 술자리에서 Y담들 많이 하잖아요. 그럼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다 잃어버리는데 토씨하나 안 틀리고 다 기억해요. 하긴 고(故) 정주영 현대명예회장은 Y담을 적어서 외우고 다녔다고는 하지만 권 부시장은 적어서 외우는 게 아니라 들으면 그 자리에서 외우는 것 같아요. 참 머리가 비상한 친구죠. 그래서 술자리는 항상 즐거워요"
평소 권부시장이 무엇에 관심 있는지 물어 보았다.
"집에를 놀러 간 적이 있었어요. 입구에 들어서자 처음 눈에 띄는 게 컴퓨터더군요. 아무리 디지털 시대니 인터넷이니 해도 우리나이에 컴퓨터하기가 쉽지는 않거든요. 근데 이 친구는 시간 나면 인터넷 검색하고 자료 찾아본다고 해요. 서재에도 최근 시사잡지부터 시작해서 각종 행정관련서적들이 꽉 채워져 있어요. 독서량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예요. 시간도 별로 없을 텐데 노력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또 노래방에를 가면 무슨 내용인지 알아듣기도 힘든 최신가요를 불러요. 젊은 감각을 유지하려고 아이들한테 최신곡 녹음해달라고 해서 배운다는군요"
마지막으로 친구로서 바램을 질문했다.
"개인적으로는 바램같은 건 없어요. 국가와 지역사회를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예요. 좁은 무대를 벗어나 큰 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는 꿈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모르는 사람을 알아보려면 친구를 만나보라는 옛말이 있다. 내가 만나본 남승철씨는 친구에 대한 신뢰가 대단했다. 집요하게 험담을 유도했지만 기자의 실력이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권부시장이 정말 흠이 없어서인지 실패하고 말았다.
<김중규기자·iota-@dtnews24.com, 우종윤기자·man-pa@dtnews24.com>
권선택 대전시 행정부시장(46).
누구든지 홍선기 대전시장 후임으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인물이다. 여론이란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다는 속성이 있기는 하지만 세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7일 오후 약속된 시각에 그를 찾았을 때 막 외부 행사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깨끗하게 정돈된 둔산 대전시 청사 10층 남쪽에 자리잡은 사무실은 단아했다. 접견 소파 옆의 노오란 꽃이 핀 화분은 딱딱해지기 쉬운 사무실 분위기를 한결 부드럽게 해주었다.
″김부장이 나에 대해서는 더 잘 알잖아요. 특별히 얘기할 게 있나요″
권 부시장의 기자에 대한 호칭은 항상 '부장'이다. 신문사 정치부장 시절 서울지사에 근무할 당시 여러 번 만나 식사도 하고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고향 얘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그에게는 편안했고 시간이 거기에 멈춰 있었던 모양이다.
대담은 차 한잔 마시면서 시작되었다.
부시장을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다.
민선 대전시장에 대한 생각이었다.
″지방자치 단체장은 본인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그만한 위치에 와 있으니까 나오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로서는 그럴만한 입장은 아닙니다. 다만 그 때가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한번은 때가 올 것이라고 봅니다. ″
적극적인 의사표현은 아니다. 충청도 말이 상당히 우회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기회가 되면 반드시 도전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면서 약간의 말을 부연(敷衍)했다.
″부시장을 하면서 항상 민선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합니다. 그래야 행정이 겸허해지고 어려운 사람을 위한 행정을 할 수 있습니다.″
딱히 그런 표현은 아니었지만 듣기에 따라서는 민선시장 연습을 하고 있다는 말로도 들릴 수 있다. 어째든 해석은 독자의 고유 권한이 아닌가.
"때가 되면 민선시장 도전"
조금은 흔한 질문을 해보았다.
- 어떤 철학을 가지고 행정을 하고 있는지요.
″원칙과 소신, 그리고 행정은 투명해야 한다는 겁니다. 부시장을 벌써 2년 10개월을 했는 데 공직 생활하면서 한자리에서 2년을 넘기기는 처음입니다. 직업 공무원으로서 시장을 보필하면서 대전시정 전체를 조정하는 게 제 역할입니다. 홍선기 시장님은 오랜 행정 경험을 가진 경륜 행정가인 만큼 저는 젊은 마인드로 미진한 부분을 보완해나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시장님도 늘 그런 말씀을 합니다. 행정부시장이 나를 보완해주어야 한다고... ″
하지만 권 부시장은 자기목소리를 내지 않는 데 아주 철저하다. 어쩌면 2인자로서 갖추어야 할 한국형 덕목이지만 자칫하다가는 소신이 없다는 비판을 듣기도 한다. 철저하게 몸을 낮춰야 하는 게 현실이라면 그 속에서 자기 목소리를 찾아야 하는 게 또한 미래를 위한 대비일 수도 있다. 이를 어떻게 조화하는 가는 곧 능력이다.
- 고향에서 공직생활은 어려운 점도 많을 텐 데요.
″대전시는 고향이라서 더 없이 보람을 느낍니다. 하지만 고향 때문에 어려운 점도 많습니다. 그러나 정실에 얽매이고 특정인을 봐주기 위한 행정은 절대 안 됩니다. 행정의 상식이지요. 지금도 저는 욕먹고 있어요. 고향동네를 그린벨트에서 해제시켜주지 않는다는 게 이유입니다.″
고향동네 민원 얘기는 농담 삼아 나온 말이었다. 적절한 비유는 아닐지 몰라도 행정하기가 그 만큼 어렵다는 말로 들렸다. 더구나 아직도 상당수 시골 사람들은 직위가 높을수록 말만 하면 다 되는 걸로 여기고 있다. 당장 동네 아무개 아들이 부시장할 때 그린벨트를 푸는 숙원 사업을 이뤄보자는 시도는 순박함에서 나오는 발상으로 이해가 된다.
고향 얘기는 누구에게나 자꾸 하고 싶은 화두다.
내친 김에 더 들어보기로 했다.
권부시장의 고향은 대전시 중구 목달동. 보문산 뒷켠이다. 지금은 시내버스도 다니고 신작로도 확 뚫려 편리해졌지만 당시는 오지 중 오지였다. 무수동, 산서동 등 일대가 안동 권씨 집성촌이다. 산서국민학교를 다녔다. 전교 1등은 안동권씨 35대 손(孫) 권승원씨(78)의 아들 몫이었다. 하지만 전교생이 300명이었고 학년당 한 학급만 있었다면 전교 1등의 가치는 조금은 떨어지게 된다.
오지에서 공부를 잘 하니 유학 온 곳이 대전이었다. 최고 명문이었던 대전중은 엄두도 못 냈고 충남중은 가능했다.
당시 그가 오늘의 부시장 꿈을 갖고 살았을까.
″어릴 때 만들기에 무척 관심이 많았고 재주도 있었습니다. 그 비싼 라디오를 분해해서 혼나기도 했고 기타를 좋아해 삐삐선(까만 전선)으로 만들어 보기도 했습니다. 동네 아이들 스케이트는 물론 제 차지였고 시냇물로 하는 수력발전이 있었는 데 고장이 나면 제가 다 고쳤어요. 손톱이 빠지고 손이 성할 날이 없었지요. 저는 공대가 적성에 맞는 걸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도시로 나와보니 역사학을 전공하여 대학교수가 되는 걸로 바뀌어 지더군요. 중학교를 다니면서 변했지요.″
대전고 입학은 비교적 수월했다.
손재주 탓에 이과를 선택했다가 도중에 문과로 돌렸다. 같은 경우가 한 학년에 약 50명 정도여서 이들 학생만 모아 별도로 한반을 만들었다. 그게 '돌반'이다. 돌반에서 전교 50등까지만 게시하는 방(傍)에는 항상 이름이 올랐다.
충남중에서 대전고 진학에도 우여곡절은 있었다. 아버지는 5년제 대전공전을 강요했다. 당시 담임이던 정필복 선생님이 ″네가 포기하면 우리 반에서는 대전고에 한명도 못간다″는 강권이 있었고 아버지를 책임지고 설득해 진학을 하게되었다.
고교시절 친구 남승철씨(47·충청하나은행 한밭대로 지점장)는 ″학교 다닐 때야 모범생에다 공부도 잘하는 편이었습니다″라며 ″머리도 좋지만 많은 노력을 하는 편″이라고 강조해 역시 타고난 재주보다는 성실함으로 승부를 거는 쪽이었다.
행정고시 최연소 수석 합격
이름과는 달리 선택이 필요로 하는 시점에서 그는 여러 번 망설였다.
평소 안정된 직업을 선호하던 아버지의 고집은 대학 선택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 3 때 한참 공부할 즈음 지역에 있는 사대를 진학을 권했다. 역시 공부에 손을 놓고 있다가 학교 측의 권유로 서울모대학를 지망했다. 하지만 중요한 시기에 목표치를 잃어버린 짧은 방황은 당락에 절대적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들어간 곳이 성균관대 경상대 경영학과였다.
1학년 때는 민청학연 등 학내 소요로 인해 공부를 거의 못했고 2학년 때부터 고시공부를 생각했다. 남들은 일류대에 가서 멋지게 다니는 데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버지가 문제였다. 마침 이웃동네에 고시에 미쳐 10년째 낙방한 서생이 있어 아버지가 그것을 본 것이다. 공부는 몰래 시작했다.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공부를 해도 불투명한 고시를 몰래했으니 어려움은 배가했다.
″정말 어려웠습니다. 중간에 포기할 생각도 많이 했지만 승부라고 생각하고 공부를 했습니다. ″
3학년 때 1차 합격하고 2차는 두 번만에 당당하게 통과했다. 그것도 22살 최연소에다 수석이었으니 매스컴에서 그냥 둘 리가 없었다. 당시 성균관대가 삼성그룹에서 운영하고 있어 계열사인 동양방송과 중앙일보, 그리고 지방에서는 대전일보 등 중앙과 지방할 것 없이 놀라움으로 한 목소리를 냈다.
″고시 출신들이 가장 선호하는 부처는 경제기획원, 재무부, 내무부였죠. 소위 잘 나가는 부처였습니다. 수석합격이어서 어디든 골라서 갈 수 있었지만 공직자는 일선 행정을 해봐야 보람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학 4학년 때 내무부에 대기했다가 맨 먼저 보직을 받은 곳이 충청남도 확인 평가계장이었습니다. 나이가 24살이었죠″
충남도 근무 시절 일화도 많았다.
손수익 지사에게 발탁된 일이나 파격적인 인사 구상으로 오히려 지사에게 승진의 강도를 낮춰 달라고 부탁해야만 했던 일등은 지금도 즐거운 얘기 거리가 되고 있다.
안응모 지사때 일이다.
서슬이 퍼렇던 전두환 정권 시절이니 대통령의 위엄은 지금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예산에 모내기 행사에 참석한 전대통령은 예정에도 없던 충남도 순시를 지시했다.
준비할 시간은 꼭 2시간.
안응모 지사와 단둘이서 정말 급하게 업무보고서 작업을 끝내니 약 10분이 남았다. 한시간 50분만에 그 엄청난 대통령 순시보고 자료를 마친 것이다. 물론 업무보고는 안지사의 유창한 말솜씨와 빈틈없는 의전으로 아주 성공리에 끝이 났다.
그는 이 일로 다시 한번 인사청탁이 아니라 낮은 인사를 부탁해야 만 했다.
이후 내무부 기획담당, 충남도 기획관, 대통령 비서실 민정담당, 내무부 기획과장, 행정과장 등을 거치면서 고시 수석 합격이라는 전력보다 빈틈없는 행정력으로 지금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기획과장시절 시군통합의 주무과장으로 시군통합의 국가적 업무를 원만히 처리,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이후 행정기관의 3대과장의 하나인 행정과장을 역임했다.
″남들보다는 열심히 일을 했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습니다.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하는 것만이 남들보다 앞장 설 수 있는 길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타성에 젖은 행정이나 생각을 버리고 전향적으로 모든 일을 구상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노래도 흘러간 옛날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가능하면 요즘 젊은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배우고 부르려고 합니다. 작은 예지만 그런 노래를 부르다 보면 요즘 젊은이들 문화를 조금은 이해 할 수 있어요. 행정가는 생각이 젊어야 합니다.″
형식보다 내실 행정 지향
업무 스타일도 파격이다.
형식주의를 탈피, 혁신적이라고 할 만큼 간단 명료한 업무체계를 강조한다.
〃상사에게 결재 시 불필요한 표지까지 깨끗하게 만들다보니 시간을 낭비하고 때를 놓치는 경우가 있었지요. 그런 것을 과감하게 없애는 작업을 했습니다. 형식보다 내실위주의 행정이 일반화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권 부시장은 두주불사(斗酒不辭)형이다. 저녁에 술자리에 어울리면 동료들에게 가벼운 욕으로 친근감을 나타내기도 해 주변에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태평동 삼부아파트 부시장 관사에 살고 있다. 장남 현구(19)는 외국어 고등학교를 나와 일본쪽으로 유학을 준비중에 있다. 둘째 재구(16)는 고1 재학중이다. 부인 윤수의씨(46)은 교편을 잡고 있다.
지금까지 권 부시장은 타고난 성실성에다 고시출신이라는 점이 한데 맞물리면서 남들이 쉽게 오를 수 없는 자리인 시장 바로 밑에 위치하고 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제 대전지역을 이끌어 갈 차세대 주자중의 한사람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앞으로 권 부시장 행보의 끝은 어디이고 얼마나 지역 민들의 기대에 부응할 것인지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인재란 쉽게 만들어지거나 얻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선택이는 '범생'이었어요″
고교동창 남승철씨가 본 권부시장
"선택이는 학교 다닐 때 요즘 젊은애들 하는 소리로 '범생'이었어요. 그 친구집이 목달동 시골입니다. 버스도 잘 안 다니는 곳에서 고등학교 3년 동안 지각, 결석 한번 안한 성실한 친구였죠"
권 부시장의 칭찬은 익히 들어 알고 있으니 단점을 말해달라고 부탁하자 남지점장은 흠 잡기가 힘든 친구라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학창시절 시험기간 중이었어요. 권 부시장이 공부를 잘하는 편인데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서 농구만 하고 공부는 안 하더군요. 혼자 생각에 '저 친구 이번 시험은 포기했구나'라는 생각을 했죠. 그런데 성적표가 나왔는데 아니었어요. '도대체 공부를 어떻게 하길래 시험기간에 놀아도 성적이 잘 나오냐'고 그랬더니 하는 말이 "나는 시험 볼 때 노트를 넘기면서 시험을 본다"고 그러지 않겠어요. 자기는 머리 속으로 무슨 내용이 교과서 몇 페이지에 나와 있는 것까지 외워서 시험을 본다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척 노력하는 친구라는 걸 새삼 깨달았죠"
험담을 부탁했는데 다시 칭찬이다.
사람이 가장 흐트러지기 쉬운 장소가 술자리다. 알코올이 적당히 들어가면 자기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곳이 그 곳이다. 혹시 남에게 밝히기 힘든 술버릇은 없을까.
"술 엄청 먹죠. 체력이 대단한 친구예요. 아무리 술을 마셔도 먼저 취하는 법이 없어요. 특별한 주사도 없구요. 아! 주사라고 하기엔 그렇고 그 친구 Y담을 무척 잘해요. 남자들 술자리에서 Y담들 많이 하잖아요. 그럼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다 잃어버리는데 토씨하나 안 틀리고 다 기억해요. 하긴 고(故) 정주영 현대명예회장은 Y담을 적어서 외우고 다녔다고는 하지만 권 부시장은 적어서 외우는 게 아니라 들으면 그 자리에서 외우는 것 같아요. 참 머리가 비상한 친구죠. 그래서 술자리는 항상 즐거워요"
평소 권부시장이 무엇에 관심 있는지 물어 보았다.
"집에를 놀러 간 적이 있었어요. 입구에 들어서자 처음 눈에 띄는 게 컴퓨터더군요. 아무리 디지털 시대니 인터넷이니 해도 우리나이에 컴퓨터하기가 쉽지는 않거든요. 근데 이 친구는 시간 나면 인터넷 검색하고 자료 찾아본다고 해요. 서재에도 최근 시사잡지부터 시작해서 각종 행정관련서적들이 꽉 채워져 있어요. 독서량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예요. 시간도 별로 없을 텐데 노력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또 노래방에를 가면 무슨 내용인지 알아듣기도 힘든 최신가요를 불러요. 젊은 감각을 유지하려고 아이들한테 최신곡 녹음해달라고 해서 배운다는군요"
마지막으로 친구로서 바램을 질문했다.
"개인적으로는 바램같은 건 없어요. 국가와 지역사회를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예요. 좁은 무대를 벗어나 큰 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는 꿈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모르는 사람을 알아보려면 친구를 만나보라는 옛말이 있다. 내가 만나본 남승철씨는 친구에 대한 신뢰가 대단했다. 집요하게 험담을 유도했지만 기자의 실력이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권부시장이 정말 흠이 없어서인지 실패하고 말았다.
<김중규기자·iota-@dtnews24.com, 우종윤기자·man-pa@dt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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