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북한축구 대표팀 감독의 딸·
'외화벌이' 북한식당 복무원… 팝페라 가수 명성희씨]
"중국의 北식당서 '타이타닉' 주제가 부른 사람은
나밖에 없어… 長春에서 노래 잘한다고 소문나"
"안기부가 공작한다는 말 많이 들어 처음엔 남한 손님 경계한 '복무원'들… 사랑에 빠져 종종 도망가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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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 명동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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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일 할 줄을 몰라 평양으로 들여보내야겠다고 했지만, 내가 노래를 잘하니까요. 창춘(長春)의 북한 식당에서 '타이타닉' 주제가 '마이 하트 윌 고 온(My Heart Will Go On)'을 부른 사람은 나밖에 없었어요. 북한 영사관도 부르는 걸 허락해줬어요. 그때 창춘에서 '노래를 최고 잘하는 가수'로 소문났어요."
명성희(33)씨는 내 앞에서 실력을 증명해 보이려는 듯 노래 한 소절을 불렀다.
"식당 음식 맛은 그저 그랬지만, 내 노래를 들으러 온 남한 사람이 많았어요. 나는 자랑할 줄 몰라요. 실제 그랬다니까요."
한때는 탈북자 개개인의 사연이 모두 '뉴스'였다. 이제 탈북자는 국내로 들어오기 전까지만 뉴스가 될 뿐이다. 우리 사회 속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개인으로서 이들은 잊힌다. 현재 2만여 탈북자가 우리 주변에 있다.
그중 한 명이, 자본주의 때가 묻은 것 같기도 하고 전혀 물정을 모르는 것 같기도 한 젊은 여성이 앉아 있다.
"나는 남한 노래를 부르고 싶어 탈북했어요. 최진희·김완선 노래를 좋아했어요. 내 목소리는 두껍고 허스키한 진성이에요. 얇고 간드러지는 북한 스타일에는 잘 맞지 않았어요. 남한에 오면 노래로써 성공할 줄 알았어요. 어떤 연예 기획사에 소속돼 트로트를 불렀어요. 앨범을 냈지만 실망이 컸죠. 지금은 팝페라 가수 준비 중이에요."
그녀는 1990년 '남북통일축구대회' 때 서울에 내려왔던 북한 축구 대표팀 명동찬 감독의 딸이다. 명 감독은 1999년 미국 LA 여자월드컵축구대회에 북한 여자팀을 이끌고 나가기도 했다. 나이지리아팀과 맞붙어 예선 탈락해 국내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다. 그 시합 뒤 숨졌다.
이런 아버지를 둔 그녀가 탈북 전에 외화 벌이를 위한 '북한 식당 복무원'으로 근무했다는 점이 특히 내 관심을 끌었다. 북한 식당 복무원들의 세계는 지금껏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복무원이 되기 전까지 나는 한 번도 평양 바깥을 떠나본 적이 없었어요. 탈출을 하려면 중국을 알아야 했어요. 그래서 중국 지안(集安)에 있는 북한 식당에 지원했던 거죠."
내가 북한 식당에 처음 들어가 본 것은 1994년 김일성 사망 직후 취재를 위해 옌지(延吉)에 갔을 때다. 김일성에 관해 말을 꺼내자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던 복무원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다. 그 뒤로도 중국·러시아·네팔·캄보디아 등에서 여러 차례 북한 식당을 가봤다. 이 '외화벌이' 복무원은 집안과 당성이 좋은 최고 엘리트를 뽑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식당마다 인력이 필요하면 뽑아요. 문건 사업(신원 조회)을 합니다. 2003년 내가 지원했을 때만 해도 학력은 크게 따지지 않았어요. 봉사직에서 일했거나 미모가 뛰어나면 유리했어요. 식당에서 공연을 해야 하니까 노래와 무용을 잘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었죠."
―북한 체제 바깥으로 내보내는 데 생각보다 까다롭지 않은 것 같군요.
"배치되기 전에 한두 달간 자본주의에 대한 정신교육은 받아요."
―교육 내용은?
"오래돼서 다 기억은 나지 않는데, '자본주의가 아무리 잘살고 눈앞에 황금(黃金)이 보인다고 현혹되지 마라. 그 순간뿐이다. 영원한 것이 아니다. 내 조국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이에요. 사실 그런 걱정이 필요 없어요. 우리는 인민학교·중학교·대학교를 거치면서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교육을 받아왔어요. 인민학교 때는 '경애하는 원수님의 어린 시절' '친애하는 지도자의 어린 시절' 같은 과목이 있고, 중학교에는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의 혁명 역사'를 배우니까요. 당원이 되려면 아침마다 장군님 초상화와 말씀 게시판을 닦고, 학교 안의 사적지를 청소해야지요. 그런 교육을 쭉 받아왔기 때문에 식당에서 누군가가 꼬여도 넘어가지 않아요."
그녀는 중국 지안의 북한 식당으로 발령 났으나, 한 달 뒤 창춘으로 옮겨 갔다. 거기서 1년 8개월을 복무원으로 일했다. 모두 식당 안 숙소 한방에서 잤다. 밤에는 방문을 걸어 잠갔다. 외출할 때도 서로 감시하기 위해 꼭 두세 명이 함께 움직였다. 새벽 6시 기상. 8시가 되면 식당 앞에 나와 음악을 틀어놓고 손님을 끌기 위해 율동을 했다고 한다.
―북한 식당의 음식값은 비싸더군요.
"한국인 관광객이 대상이라 일부러 그렇게 해요. 동포 아가씨(복무원)를 보겠다고 와서는 돈을 잘 써요. 내가 일한 식당은 그 수입을 김일성이 외국 수반들로부터 받은 선물을 보관하고 있는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 관리에 쓴다고 했어요."
―과거에는 식당 복무원들이 경직됐는데 최근에는 먼저 말을 걸고 농담하는 경우도 있더군요.
"처음 배치되면 남한 손님들이 경계 대상이지요. 또 안기부에서 공작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거든요. 오래 생활하면 원칙이 깨지잖아요. 그래도 사상에는 투철한데, 다만 '사랑'에는 넘어져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러브(love)…, 남녀가 계속 접촉하면 사랑이 생기게 돼요."
―데이트를 하는 게 가능해요?
"불가능하죠. 식당에서 자주 보다 보면 눈이 맞는 거죠. 남자가 휴대폰을 건네주는 경우가 있어요. 화장실에서 몰래 전화로 연락하는 거죠. 내가 들은 것만, 한국 남자를 따라 그렇게 뛴 애가 서너 명 됐어요. 하지만 결국 다 잡혔어요."
―명성희씨도 식당에서 탈출 기회를 엿보았나요?
"나도 원래 거기서 뛰려고 했는데, 중국에서 뛰면 보위부가 집중해서 더 잡히기 쉽다는 걸 알았죠. 나는 북한으로 다시 들어와서 브로커를 통해 탈출했어요."
―북한에서 집안도 괜찮았는데 왜 탈출하려고 했나요?
"이모가 큰 외화벌이 사업을 했어요. 1년에 100만달러를 국가에 납부할 정도였다고 해요. 하지만 어떤 일이 생겨 1995년에 요덕수용소로 갔어요. 그 일로 나는 '칠보산음악단'에 시험 쳤지만 신분 조회에서 떨어졌어요. 인민무력부 산하 '적공국'에도 지원했지요. 남한 곡조에 혁명성 가사로 바꿔 불러서 대남 방송에 틀어주는 부서죠. 선발 시험에서 민해경의 '내 마음 당신 곁으로'를 불러보라고 했어요. 심사위원들의 칭찬을 받았어요. 그때는 노래로 장군님께 기쁨을 드려 이모님을 구해야겠다는 마음이었어요. 하지만 신분 조회에서 떨어졌어요."
―그때 합격했다면 대남 공작 요원이 될 뻔했군요.
"한마디로 말하면 그렇지요. 그랬다면 장군님을 위하고 안 나왔겠지요."
―솔직하군요.
"그때는 다른 생각이 없었으니까요. 결국 평양의 음악무용대학에 진학해 클래식 음악을 배웠어요. 그 무렵 '왕재산경음악단' 관계자가 내게 시험을 보라고 했지만, 또 합격이 취소됐어요. 북에서 음악하는 사람에게는 '칠보산' '적공국' '왕재산'에 들어가는 게 꿈이에요. 앞이 막막했어요. 그때 담배를 피우고. 수면제로 자살을 시도했어요. 사흘 만에 깨어났어요."
그 뒤 그녀는 친지들의 도움으로 '영화방송음악단'에 스카우트됐다. 이번에는 신원 조회에서 넘어갈 수 있었다.
"집에서 출퇴근하는 사회음악단이었으니까요. 여기서 영화 주제가 두 곡을 불렸어요. 그 영화 중 하나가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더군요(그녀는 스마트폰에 저장된 주제가 '엄마를 깨우지 마'를 들려줬다)."
―그 음악단에 다니면서 체념하고 살 수도 있었을 텐데요.
"당시 평양에 이미자와 윤도현씨가 공연을 왔어요. 남한에서는 시대에 따라 음악 흐름이 바뀌는데, 북한 음악은 늘 같은 장르에 머물러 있어요. 한국에 가서 음악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절실했죠. 남한의 라디오 방송도 많이 들었어요. 우리 아파트 층수가 높아 KBS와 국군방송이 들릴 때가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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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희씨는 "신원 조회로 북한에서 원하는 음악단에 들어가지 못해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명원 기자
―그걸로 남한에 오겠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나요?
"한국 음악을 못 하니까 미칠 것 같았어요. 음악을 안 하는 사람은 이런 마음을 알 수가 없어요."
―그게 불온하고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고?
"내 주변에 뛴 사람이 있었어요. 혹시 강철환(탈북 후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했음. 요덕수용소 경험을 담은 '수용소의 노래'를 썼고 부시 대통령을 면담)씨를 아나요? 그 아내가 우리와 같은 평양 만경대 구역의 체육인 아파트에 살았어요. 그분 아버지가 제 아버지 동료로 축구 감독(윤명찬·1999년 탈북)이었어요."
―어떻게 그런 인연이?
"그 언니는 1997년 한 번 탈출했다가 잡혀 들어왔어요. 운 좋게 수용소에 갇히지는 않았어요. 그때 그 언니를 통해 처음 국경 지대를 알게 됐어요. '강이 깊어, 얕아?'라고 물으니, '걸어서 건널 수 있을 만큼 얕은 데도 있다. 돈만 있으면 브로커 도움으로 탈출할 수 있다'고 했어요. 결국 언니는 탈북에 성공했어요. 이런 얘기를 안 들었으면 마음먹기 어려웠겠지요. 그 뒤로 나도 한국에 가게 해달라고 울면서 기도한 적이 있어요."
―기도를?
"혼자서. 내가 기도하게 된 것은 오래전 임수경씨가 평양에 와서 그렇게 하는 것을 봤거든요. 나는 어떤 때는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가는 꿈을 꾸기도 했어요."
그렇게 해서 그녀는 식당 복무원에 지원했고, 2004년 평양으로 돌아온 뒤 어머니·여동생과 함께 탈북을 결행했다. 함경북도 무산(茂山)까지 열차를 타고 간 뒤 이들은 브로커의 안내를 받아 두만강을 건넜다.
"한국 영사관에만 뛰어 들어가면 된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그 시점 탈북자들이 집단으로 영사관 담을 넘는 장면이 국제적 뉴스가 됐어요. 경비는 삼엄했고 북한 보위부가 탈북자 색출을 위해 돌아다녔어요. 어머니는 짐을 싸놓고 북한으로 되돌아가겠다고 했어요. 사흘간 어머니를 설득했어요."
마침내 모녀는 브로커를 통해 위조 여권을 만들어 중국 다롄(大連)에서 비행기를 타고 들어왔다. 북한에서는 그녀 가족이 요덕수용소에 잡혀 들어갔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1999년 돌아가셨다고 했지요?
"간암으로 돌아가셨어요. 대표팀 감독 시절 장성택이 체육위원장이었는데 함께 술도 마시고 후원을 많이 받았다고 해요. "
―축구 감독으로 외국을 다녀본 아버지가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얘기해주던가요?
"북에 아버지 형제분이 살아 계셔서 그런 얘기는 할 수 없어요. 다만 아버지가 내게 노래에 대한 의욕을 불어넣어 줬어요. 조선인민군협주단에서 뮤지컬 배우로 활동했던 어머니는 '너는 북한에서 통하는 목소리가 아니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외국에 가보면 우리 성희 목소리 같은 음악 소리가 많이 들리더라'며 인정해주셨죠."
―한국에서 살아보니 어떤가요?
"음악을 위해 왔는데 아직 뜻대로 되진 않았어요. 처음 3년간은 모든 걸 버리고 괜히 왔다 싶었어요. 여기 시스템은 꼭 노래 실력으로 결정되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가을쯤 팝페라 앨범이 나오면 미국 무대에서도 공연하게 될 거예요."
점심 자리에서 그녀는 밥 먹는 대신 여러 번 노래를 불렀다. 내 비록 음악 귀가 없어도 그녀가 가수로서 꼭 성공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