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당시 유격대 출신-납북 46년만에 무공훈장--최원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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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848회 작성일 2013-06-26 21:21본문
입력 : 2013.06.25 03:02
[유격백마부대서 활약 최원모씨]
군번도 없는 2600여명 부대서
40t급 동력선 北進號 함장맡아 서해 도서 지역의 敵선단 섬멸
연평도 조기잡이 나갔다 피랍… 유격軍 활동 드러나 못돌아와
◇군번·계급 없던 유격 백마부대
유격 백마부대는 1950년 11월 22일 이승훈(李昇薰) 선생이 평북 정주에 설립한 오산학교 출신 학생들과 정주군 일대에서 치안 활동을 하던 청년들이 중공군에 맞서기 위해 조직했다. 당시 북진하던 유엔군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내려오던 상황이었다.
김응수(2003년 작고)를 부대장으로 한 대원 2600여명은 군번도 계급도 없었다. 이들은 부대 창설 직후 섬인 평북 정주 부근 애도로 들어가 방어선을 구축했다. 대원 중에는 여성도 적지 않았다. 이들이 가진 무기는 소총 130여정과 경기관총 3정이 전부였다. 이들은 나무를 깎아 만든 창(槍)으로 무장하고 목숨을 걸고 중공군에 맞서기로 했다. 1950년 12월 17일 인민군 500~600여명이 포 사격 지원을 받으며 애도로 침공해 왔다. 그러나 애도는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물이 빠져도 허벅지까지 차올랐다. 백마부대원들은 적이 사정거리에 들어올 때까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기다렸다. 마침내 적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 사격이 시작됐다. 적들이 쓰러졌고, 인민군들은 총알을 피해 차가운 겨울 바다에 엎어졌다. 당황한 인민군은 황급히 퇴각하려고 했지만 이번엔 바닷물이 엄청난 속도로 몰려들며 적을 삼켰다. 이날 전투에서 인민군 650여명이 숨졌고, 유격대는 박격포와 중·경기관총, 소총과 실탄, 쌀 11가마를 노획했다. 아군은 단 한 사람의 부상자도 없는 대승이었다.
김응수(2003년 작고)를 부대장으로 한 대원 2600여명은 군번도 계급도 없었다. 이들은 부대 창설 직후 섬인 평북 정주 부근 애도로 들어가 방어선을 구축했다. 대원 중에는 여성도 적지 않았다. 이들이 가진 무기는 소총 130여정과 경기관총 3정이 전부였다. 이들은 나무를 깎아 만든 창(槍)으로 무장하고 목숨을 걸고 중공군에 맞서기로 했다. 1950년 12월 17일 인민군 500~600여명이 포 사격 지원을 받으며 애도로 침공해 왔다. 그러나 애도는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물이 빠져도 허벅지까지 차올랐다. 백마부대원들은 적이 사정거리에 들어올 때까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기다렸다. 마침내 적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 사격이 시작됐다. 적들이 쓰러졌고, 인민군들은 총알을 피해 차가운 겨울 바다에 엎어졌다. 당황한 인민군은 황급히 퇴각하려고 했지만 이번엔 바닷물이 엄청난 속도로 몰려들며 적을 삼켰다. 이날 전투에서 인민군 650여명이 숨졌고, 유격대는 박격포와 중·경기관총, 소총과 실탄, 쌀 11가마를 노획했다. 아군은 단 한 사람의 부상자도 없는 대승이었다.
◇유격대의 사투
백마부대는 1951년 11월 평북 대화도 전투에서 중공군 2개 사단과 사투를 벌인 끝에 500여명의 전사자를 내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50여명의 잔여 병력을 이끌고 사투를 벌이다 총상을 입은 정광남 제3연대장은 총으로 자결했고, 최광조 제2연대장은 수류탄으로 토굴에서 자결했다. 동료들에게 부담을 줄 수 없다는 이유였다. 대원들은 최광조 연대장이 자결한 토굴을 '피굴'이라고 불렀다. 50명 중 8명만이 살아남은 지옥 같은 전투였다.
유격 백마부대는 1954년 2월 인천 용유도에서 해산될 때까지 500여회 교전하면서 적군 3000여명을 사살하고 중공군 600여명을 생포했으며 애국 청년 2800여명, 동포 1만5000여명을 구출했다.
북진호 함장이었던 최원모씨는 정전 뒤 충남 서천에서 선주(船主)가 됐지만 1967년 6월 풍복호를 몰고 선원 7명과 함께 연평도 부근에서 조기잡이를 하던 중 북한 경비정에 납북됐다. 다른 선원 5명은 풀려났지만 최씨는 유격대에서 활동한 전력(前歷)이 드러나 다른 선원 2명과 함께 북한에 억류됐다. 그 후 총살됐다는 풍문만 들려올 뿐 정확한 사망 날짜도 알 수 없다. 김일용씨는 "우리들은 지금의 NLL이 있는 서북 도서지방을 피로써 지켰다"고 했다.
백마부대는 1951년 11월 평북 대화도 전투에서 중공군 2개 사단과 사투를 벌인 끝에 500여명의 전사자를 내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50여명의 잔여 병력을 이끌고 사투를 벌이다 총상을 입은 정광남 제3연대장은 총으로 자결했고, 최광조 제2연대장은 수류탄으로 토굴에서 자결했다. 동료들에게 부담을 줄 수 없다는 이유였다. 대원들은 최광조 연대장이 자결한 토굴을 '피굴'이라고 불렀다. 50명 중 8명만이 살아남은 지옥 같은 전투였다.
유격 백마부대는 1954년 2월 인천 용유도에서 해산될 때까지 500여회 교전하면서 적군 3000여명을 사살하고 중공군 600여명을 생포했으며 애국 청년 2800여명, 동포 1만5000여명을 구출했다.
북진호 함장이었던 최원모씨는 정전 뒤 충남 서천에서 선주(船主)가 됐지만 1967년 6월 풍복호를 몰고 선원 7명과 함께 연평도 부근에서 조기잡이를 하던 중 북한 경비정에 납북됐다. 다른 선원 5명은 풀려났지만 최씨는 유격대에서 활동한 전력(前歷)이 드러나 다른 선원 2명과 함께 북한에 억류됐다. 그 후 총살됐다는 풍문만 들려올 뿐 정확한 사망 날짜도 알 수 없다. 김일용씨는 "우리들은 지금의 NLL이 있는 서북 도서지방을 피로써 지켰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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