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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잔치는 끝났다'--유명한 여류詩人^^최영미의 새로운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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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2건 조회 1,890회 작성일 2013-06-20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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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에서] 시인 최영미의 어떤 고백

어수웅 문화부 차장

입력 : 2013.06.13




어수웅 문화부 차장


어수웅 문화부 차장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남인 시공사 전재국(54) 대표

싱가포르에 개설했다는 페이퍼 컴퍼니의 이름은 '블루 아도니스'다.



시인 최영미(52)씨의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는


'아도니스를 위한 연가'라는 시가 있다.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이 소재로 소설을 준비 중인 시인은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1992년, 그녀는 막 문을 연 시공사에 취직했다.


아직 등단 전이었고, 한 푼이 아쉽던 시절이었다.

대학교 4학년에 감행했던 결혼은 파탄 났고, 운동권 선배가 운영하던 출판사에서도 막 '짤린' 참이었으며, 집안까지 몰락했을 때였다.

등록금 때문에 홍익대 미술사학과 대학원도 휴학했는데,
한 선배가 출판사 취직을 제안했다.



'타도 대상'으로 불렀던 사람의 아들이


취직한 그 회사의 사장이라는 사실은,

회사에 들어가고 나서야 알았다고 했다.


대학 입학하자마자 5월 광주를 겪었던 서울대 서양사학과 80학번.


그 시절 운동을 했던 이유가 누구 때문인데.


시인은 1980년을 지나 12년 세월이 흐른 후


1992 당시 일기에 이렇게 썼다고 했다.


"전두환 아들 회사에 다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지만

ㄱ.나는 서른 살 실업자.

ㄴ.오라는 곳이 없다.

ㄷ.집안도 어렵고,

ㄹ.남자와는 헤어졌고,

ㅁ.월급은 절실하게 필요하다.

ㅂ.착잡하다."


자신보다 훨씬 더 치열하게 학생운동을 했던 선배 언니에게 물었다.
시인의 형편을 알았던 선배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녀의 업무는 미술 출판 관련 기획이었다.

외서를 준비하면서 여러 명에게 번역을 부탁했다.

홍익대 대학원과 운동권 친구들이 많았고,

그중에는 동갑내기였던 유시민 전 장관의 동생 유시주 희망제작소장도 있었다고 했다.


시공사에는 그렇게 8개월을 다녔다.

출퇴근하던 지하철에서,
출판사 점심시간을 이용해 쓴

시편들로 그녀는 등단한다.



1992년 창비 겨울호였다.


386 학생운동 세대의 내면 풍경이라는 평가를 받은

초대형 베스트셀러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는 그렇게 탄생했다.


60~70%가 시공사 시절 쓴 시편이었다.


'아도니스'는 당시 출판사를 자주 찾던 (전재국 대표의) 친구에게
시인이 붙인 별명.

시집 발표 후 '아도니스'에게 그 사실을 알렸을 때,

그는 영광이라며 자신의 친구와 함께 시인의 탄생을 축하했다.


어떨까.

이 삶의 아이러니가 추징금을 납부하지 않고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를 옹호하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반대로 타도 대상이었던 사람의 아들에게 월급을 받게 된 시인의 처지를 동정하는가. 물론 그것도 아닐 것이다.


단지 대의명분이나 거대담론만으로는 해결되거나 굴러가지 않는,
우리 삶 어느 순간을 도려낸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시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어떻게 독재자 아들의 돈을 받을 수 있느냐고 비난한다면?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생각 안 해봤어요.

하지만 그렇게 묻는다면?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어요.

나는 그때 정말 힘들었다고.

당신이 내게 쌀과 방세를 줄 수 있느냐고.


내가 존경하는 운동권 선배의 표현을 빌리면,

80년대는 내게 그 의미를 해독하지 못해 아직도 낯선 과거입니다."
 
 

내 20代를 이해하기까지 꼬박 30년


입력 : 2013.06.19 


[어수웅 기자의 북앤수다]



'80년대' 연재하는 최영미




-등단 20년 만에 쓰는 '80년대'


소설 제목 '토닉 두세르'는 명품 화장품의 화장수 이름


'운동 주변인' 여대생 고백 담아… 초고는 1988년에 쓴 4500장


-'386'을 대변하는 소설?


'서른, 잔치는 끝났다' 두고 '운동은 끝났다'고 해석하는데


난 '운동' 제대로 한 적 없다 '불완전한 개인' 말하고 싶을 뿐


어수웅 기자
 어수웅 기자















20년 동안 전업작가로 모든 주제를 사양 없이 쓰면서도, 시인 최영미(崔永美·52)는 단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는 원고 청탁을 거절해 왔다. '80년대'다. 그랬던 시인이 80년대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문예 계간지 '문학의 오늘' 여름호에 연재를 시작한 장편 소설 '토닉 두세르'다. 토닉 두세르는 랑콤의 화장수 이름. '80년대 운동권'과 '명품 화장품'이라는 기우뚱한 조합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지만, 이런 생각도 함께 들었다. 후일담 문학도 시효를 지난 시대, "아직도 386인가?"

―우선 결심을 바꾼 이유부터.

"전제가 있다. 나는 386을 대변하지도 않고, 할 생각도 없다. 그런데도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학생 운동은 끝났다'로 읽는 사람들이 있다. 분명히 말하는데, 아니다. 근본적으로 난 개인주의자다. 시집 출간 이후 386에 대해 써달라는 청탁이 계속돼 왔다. 당연히 쓸 수 없었다. 이제는 다시 돌아볼 수 있을 만큼 시간이 흘렀다. 이 책의 초고(草稿)는 1988년, 200자 원고지로 450장 분량을 썼다. 그리고 25년 동안 주물러 왔다."

―운동권의 386 후일담 문학은 숱하게 많다.

"기존 후일담 문학은 운동의 전선(前線)에 있던 사람만을 다룬 게 아닐까. 주변부 개인의 내면으로 들어간 작품은 만나기 어려웠다고 본다. 386이란 단어로 그 세대를 뭉뚱그리는 데 대한 거부감이 있다. 나는 본격적으로 운동을 한 사람이 아니다. 이 소설을 쓰면서 '눈치 보지 말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겠다' 다짐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 모든 욕망을 대의에 투사할 수는 없다."

소설은 80년대 운동권 주변부에 있던 여대생 진주의 1인칭 주인공 시점이다. '토닉 두세르'는 진주가 사용하는 브랜드. 연재물 1회에서 진주는 "투쟁의 현장에서 멀어진 죄의식을, 혁명의 나라에서 수입한 꽃향기와 방부제가 덮어주었다"고 했다.

―운동권 여대생과 랑콤 화장품은 얼핏 어울리지 않는데.

"바로 그 어울리지 않는 부조화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80년대가 요구하는 대로 세상을 산 사람도 있지만, 그러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 큰 강물이 흘러가면 그 주변에는 여러 작은 물줄기가 있는 법이다."

―대학생 최영미에 대한 고백인가.

"나는 늦된 아이였다. 대학교 1학년을 고등학교 4학년처럼 보냈다. 80학번(서울대 서양사학과)으로 입학하자마자 광주가 터졌는데, 운동권 언어는 너무나 생소했다. 투쟁, 모순, 매판자본…. 주변에는 똑똑한 사람들이 정말 많았고, 나는 늘 주눅 들어 땅을 내려다보며 다녔다. 1학년이 끝날 무렵, 처음으로 서클(고전연구회)을 시작했다. 적(籍)은 뒀지만 운동에서는 늘 주변인이었다."

당시 운동권 여학생의 전형적 패션이 있다. 화장기 없는 짧은 커트머리, 헐렁한 윗도리에 치마는 금물. 그런데 여대생 최영미는 긴 머리에 레이스 달린 치마를 입고 다녔다. 자신은 '탐미주의자'라 믿었고, 친구들은 '너 운동권 맞느냐'고 물었다. '소극적 운동권'이었던 최영미가 기억하는, 몇몇 미묘한 순간들이 있다. 이념과 명분이라는 완강한 보도블록 틈새에서 수줍게 솟은 풀잎 같은 순간들.

최영미의 새 소설에는 자전적이라 오해될 수 있는 대목이 많다. 하지만 작가는“내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이야기”라면서“80년대는 단지 배경일 뿐, 소설로 읽어달라”고 했다. /이진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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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미의 새 소설에는 자전적이라 오해될 수 있는 대목이 많다. 하지만 작가는“내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이야기”라면서“80년대는 단지 배경일 뿐, 소설로 읽어달라”고 했다. /이진한 기자
―2학년 때 무기정학까지 받지 않았나.

"남학생에게 돌 주워주다 경찰 사진에 찍혔다. 철학과, 사범대 친구랑 함께 걸렸다. (웃으며) 우리가 '미녀 3총사'로 불리던 시절이다. 일단 잡혀가면 무조건 정학 먹을 때였다. 관악서 유치장에 수감됐는데, 밤이 되니까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저쪽 유치장 남학생들이 간수에게 부탁을 한 거다. 우리랑 미팅 시켜달라고. 알고보니 의대 신입생들이었다. 선배인 우리 '미녀 3총사'가 꾸짖었다. 정신이 틀려먹었다고."

―소설은 '19세 이하 불가' 문장도 많더라. 1980년대 성(性)의 미시사(微視史)라 불러도 되겠다.

"대학 3학년 때인가. 여학생끼리 포르노 비디오를 빌렸다. '최소한 뭔지는 알아보자'는 데 의기투합한 거지. 보는데 '오럴 섹스'라는 표현이 나왔다. 함께 본 4명 중 1명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중 하나가 '입으로 EDPS(음담패설)하는 거 아니야?'라고 묻더라. 이게 당시 내 주변 여대생들의 수준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div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padding: 0 5px 0 0;'> <a href='http://www.yes24.com/24/goods/9046872?CategoryNumber=001001017001007001&pid=106710' target='_blank' title='새창열기'><img src='http://image.chosun.com/books/200811/buy_0528.gif' width='60' height='20' border='0' alt='구매하기'></a></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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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진주도, 당신도 결혼과 운동 사이에서 결혼을 선택했다.

"그때 운동권 여대생들은 취업, 결혼, 운동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20대 전반을 이 고민으로 보냈다. 운동할 자신은 없으니, 운동하는 사람 아내가 되어 뒷바라지나 하자고 선택한 결혼이었다. 결국 실패했다. (웃으며) 혼인신고를 한 적은 없으니, 법적으로는 미혼이지만. 지금의 20대는 이해하기 힘들 거다. 나도 나를 이해하는 데 30년 걸렸으니까. 그게 희생이었을까. 정확히 맞는 단어는 아닌 것 같다. 그냥 시대에 눌려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번 소설을 통해 나 자신을 치유하고, 나처럼 아팠던 청춘도 위로하고 싶다."

주지하다시피 역사는 집단의 기억을, 문학은 개인의 기억을 그린다. 최영미는 "개인의 기억이 집단의 기억보다 더 정확하고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 자칭 회색인이 자신의 상처와 흉터에 대해 눈치 보지 않는다면, 하고 싶은 말을 참지 않는다면, 우리는 80년대에 대한 새롭고 의미 있는 벽화 하나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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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준구님의 댓글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저의 이전 글 2489번 올린 글인---최영미 시인과 전두환 아들의 관계를 읽어보시면 위의 글에 참고가 되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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