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집 ‘우리 얼마나 함께’ 펴낸 마종기 시인넓고 긴 지평선을 여러 개 만났다.
적적한 날씨여서인지
모두들 이마를 맞대고
사이좋게 살고 있었다.
나도 안락한 삶을 살고 싶었다.
비 오는 날에는 하늘이 녹아
지평선의 살결을 지워버린다.
가지 않는 시간이 소문에 젖는다.
구겨진 살벌한 여정은
어차피 시야보다 멀리 지나가버리고
내 종점을 찾지 못할까 두려워한다.
반쯤은 허물어진 집에
황량한 나라에서 몰려오는 안개,
숲과 땅은 지평선을 다시 만드느라
계획했던 낙향을 미루고 있다.
- 시 ‘지평선, 내 종점’ 전문‘떠나온 곳은 있으나 돌아갈 곳이 없는 자.’ 마종기(74) 시인에 대해 이보다 더 적절한 비유가 있을까. 1966년 도미(渡美), 50년 가까운 세월을
미국에서 의사로 살아온 그에겐 분명 ‘떠나온 곳’이 있다. 바로 고국(故國)이다. 하지만 이제 의료 일선에서도 은퇴한 그는 마땅히 돌아갈 곳을 찾지 못한다. 시인에게 왜 돌아갈 곳이 없는가. 더욱이 그는 지난 50년간 끊임없이 모국어로 시를 발표해온 시인이 아닌가. 무엇 때문에 돌아오지 못하는가. 그 대답을 듣기 위해 지난 5월 28일 마 시인을 서울 중구 충정로1가
문화일보에서 만났다. 마 시인은 지난 5월 초 산문집 ‘우리 얼마나 함께’(달 출판사)를 펴내기도 했다.
―서울 날씨가 만만찮죠.
“매년 봄에 귀국, 두 달 정도 서울에서 머무는데 올해는 정말 고생했어요. 날씨가 워낙 돌변해서 감기까지 걸렸어요. 점점 더 날씨가 변덕을 부리는 것 같습니다.”
대뜸 날씨 얘기부터 꺼낸 건 무엇보다 시인의
건강이 염려돼서다. 아니나 다를까, 시인은 유난히 기상이변이 잦았던 올해 봄, 톡톡히 그 값을 치른 듯했다. 서울에 돌아오면 머무는 광화문의 한 오피스텔에서 부인과 함께 지내는 것이 마냥 쉬운 일만은 아닐 터였다.
―서울에선 어떻게 지내시나요. 적적하지는 않은가요.
“적적하다고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틈이 없어요. 미국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서울에서 더 바빠요. 친구에 동문에 아는 이들을 만나다 보면 너무 재밌어요. 그에 비하면 오히려 미국에서 적적하다고 할 수 있지요. 의사를 하면서 만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한국에서처럼 다양한 이들을 만나지 못해요. 애들도 다 장성해서 제각각
가정을 꾸리고 있으니 간혹 볼 수밖에 없고요. 한국에 오면 문인 친구들을 많이 만나죠. 특히 젊은 친구들과 함께 하는 자리가 적지 않아요. 젊은 문인들과 소주도 같이 마시며 얘기를 나누다 보면 ‘한국 문단이 참 많이 변했구나’는 생각이 들어요.”
―젊은 문인들과 함께 하는 자리가 많다니 의외입니다.
“나로선 너무나 행복한 일이지요. 젊은 친구들과 소통이 된다는 사실이 정말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이병률, 김경주, 권혁웅 등 젊은 시인들이 자리를 만들어 줘요. 신경숙, 정끝별 등 여성 문인들과도 만나고요. 물론 김병익, 황동규, 정현종 시인 등 제 연배의 문인들과 만나는 자리가 잦은 것은 당연하고요. 내가 젊은 문인들과 곧잘 얘기가 된다는 사실이 친구들에겐 의외의 일일 겁니다.”
뜻밖일 뿐만 아니라 시샘이 나는 일이기도 하겠다. 그도 그럴 것이 70대의 문인들이 30·40대 후배들과 술자리를 함께 하기는 그닥 쉬운 일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국내 젊은 문인들에겐 ‘하늘 같은’ 선배와 마음놓고 술을 마시기가 부담스러울 터. 외국에서 살다 1년에 한 번씩 고국을 찾는 마 시인이 오히려 ‘부담 없는 어른’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꼭 그런 이유만도 아니다. 마 시인의 시 세계가 이들 젊은 문인들과 닿아 있는 지점이 분명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곧 ‘디아스포라(이산) 의식’을 갖고 있는 마 시인의 시 세계가 젊은 시인들이 추구하는 보편성과 통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올해로 의사가 된 지 50년이 됐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1959년에 연세대 의과
대학에 진학, 1963년에 의예과를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복무를 시작했지요. 그렇게 따지면 ‘의사 면허’를 딴 지 50년이 됐군요. 이번에 산문집 ‘우리 얼마나 함께’를 펴낸 것도 그런 의미가 조금은 있습니다. 그동안 이곳저곳에 썼던 글들을 모아 나름대로 나 자신에 대해 정리를 한 셈이지요.”
―산문집을 보니 그야말로 일생을 정리한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의사 생활에서 은퇴한 후 10년간 고국의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글들과 새롭게 쓴 몇 편의 글을 엮었습니다. 살아온 이야기는 물론,
가족에 얽힌 사연들, 일상에서 느낀 생각들을 모두 담았습니다. 동화작가셨던 아버지(마해송), 현대무용가였던 어머니(박외선)에 대한 추억을 비롯해 동생들과 세 아들, 친구들, 문단의 지인들과의 만남에 얽힌 사연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산문집은 총 다섯 개의 챕터로 나뉘어 있다. 각각의 챕터 제목은 모두 마 시인의 시구에서 따왔다. 1부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에선 어린
나이 피란을 갔던 마산에서의 추억에서 시작해 철없던 시절 떠난 경주 여행, 미국에서 만난 특별한 인연, 아버지의 묘를 개장해 어머니의 유분(遺粉)과 합장했던 날, 존경하던 신부님과의 추억, 장욱진 화백과의 인연 등 사소하지만
가슴에 사무치는 에피소드들을 소개하고 있다.
2부 ‘당신이 와서야 파란 하늘이 생겼다’엔 시인의 생활 속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상들이 들어 있다. 집 앞마당의 꽃밭 가꾸기, 아내가
배우던 가야금 소리, 아무 이유도 없이 눈물이 왈칵 쏟아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던 날, 세계 이곳저곳을 여행하던 추억, 50년 만에 고국에서 맞은 함박눈에 대한 감격 등이 손에 잡힐 듯 펼쳐진다. 이어 3부 ‘하늘을 향해 다시 날아오르는 외로운 새처럼’에선 주변 사람들, 특히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었던 가족 이야기를 전한다. 항상 듬직하게 곁을 지키면서도 다양한 분야의 책과 예술을 접하도록 해주셨던 아버지와 어머니, 타국에서 나고 자란 세 아들들에 얽힌 사연들이 읽는 이의 가슴을 훈훈하게 한다.
4부 ‘극진한 사랑은 아마 사람의 추위 속에서 완성된다’로 넘어오면 이야기의 외연이 보다 넓어진다. 미식축구 선수 하인스 워드를 비롯한 혼혈인에 대한 문제를 비롯,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의 인권 문제에 대한 시인의 생각들이 펼쳐진다. 아울러 미국의 물질만능 세태를 꼬집기도 하고, 세계인의 행복지수와 기부 문화에 대한 견해 등 사회 전반에 걸친 다양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마지막 5부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은 산문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챕터다. 시 쓰는 의사로서, 또한 미국에 사는 한국인으로서, 그렇게 경계인으로 평생을 살아왔던 마 시인의 일생에 걸친 깊은 고뇌와 성찰을 엿볼 수 있다. 그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들리는 소리에도 스스로 귀를 기울인다. 예컨대 이런 대목.
“의사와 문인. 내게는 동전의 양면이었다. 때로는 분초를 아껴 허둥대며 살아왔지만 뒤돌아봐도 나는 한 점의 후회도 없다. 나는 내가 시인이었기에 외국에서 힘들다는 의사 생활을 잘 이겨냈고 오히려 동료 의사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었다. 내가 의사였기에 오랜 세월 한 해도 그치지 않고 모국어로 시를 써올 수 있었다고 믿는다. 낙오되고 잊혀진 시인이 아니고 이 나이까지 현역 시인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렇게 이상하고 복잡한 내 삶은 생의 끝까지 틀림없이 이어질 것이고 그 어느 누구 앞에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주눅들지 않은 채로 이 기구한 생(生)을 사랑하며 살아가리라고 약속할 수 있다.”
―‘모국어를 떠난 시인’의 심사는 어떤 것입니까.
“복잡다단하지요. 글 쓰는 것에 열등감을 갖고 있다고 할까요. ‘
과학(의학)
공부했다’고 내세우는 것도 이 같은 열등감의 소산이 아닐까요. 즉 실수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대한 변명일 겁니다. 한데, 이 같은 두려움이 어떤 땐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해요. 모르는 척하고 쓰고 싶은 단어나 문장을 과감하게 사용하는 거지요. 내 또래 시인이 차마 쓰지 못하는 시어를 ‘난 몰라’ 하면서 과감히 쓸 때도 있어요. 하하.”
그러나 말이 쉽지, 고국을 떠나 수십 년을 보내면서 모국어로 시를 쓴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얼마나 숱한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뒤척거렸을 것인가. 마 시인처럼 꾸준히 시를 발표하고, 시집을 묶어내는 일은 이 땅에 붙박고 살아온 시인들에게도 만만찮은 일이다.
“모국어를 떠나 있다는 게 기본적인 아픔이지요. 이를 이겨내고 승화시킬 수 있는가 항상
고민해 왔습니다. 1966년 미국으로 떠나면서 ‘1년에 7∼8편의 시를 발표하겠다’고 나 자신과 약속했지요. 이 결심을 한번도 어긋나지 않고 지켰습니다. 무척 어려웠습니다. 지난 30여 년 동안 단 한 해도 9편을 발표해본 적이 없어요. 8편까지 쓰고 나면 완전히 지쳐 버려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그처럼 치열하게 살아온 인생에 대해 혹시 아쉬움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고국을 너무 오래 떠나 있었다는 겁니다. 의사 생활에서 은퇴 후 완전 귀국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너무 오래 미국에서 살았어요. 내 모든 걸 걸고 조언하자면, 오래 외국에서 사는 것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에요. 아무리 그 사회에서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그게 전부가 아니에요. 어느 날 문득 ‘돌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있어요. 그때 ‘뿌리 뽑힌 삶’을 절절하게 느끼게 돼요. 그 공허감과 좌절감은 당사자가 아니면 절대 이해 못할 겁니다.”
이 대목에서 시인은 눈시울을 붉혔다. ‘내가 아무리 떠나 있어도 조국은 항상 내 옆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시인의 어조는 어느새 회한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맨 앞에 인용한 시에서처럼 시인은 “반쯤은 허물어진 집에/ 황량한 나라에서 몰려오는 안개,/ 숲과 땅은 지평선을 다시 만드느라/ 계획했던 낙향을 미루고 있다.”고 읊었나 보다.
인터뷰 = 김영번 차장(문화부) zero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