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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준 소령-김오랑 소령-장태완 장군-강창성 장군!-김진기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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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762회 작성일 2013-06-01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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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와 폄글을 금하오니 양해 바랍니다.
***혹시 사실(fact)과 다른 내용이 있다면 반드시 지적 댓글바랍니다.
일부 삭제 및 수정 보완할 것입니다.
@@제목: 2명의 수도경비사령관
-참 군인 장태완 將軍과
정치 군인 윤필용 將軍에 대해!
1.윤필용 장군은 1973년 4월 어느 술자리에서 박정희 친위세력이자 박정희 敎徒 이후락과 함께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 대한 不敬罪로 매우 억울하게 강제 예편은 물론, 이런 저런 죄목으로 2년 餘의 감옥생활도 하게 되었다.
2.그 이후 이후락은 안절부절하다 김대중 납치를 실행에 옮기다가 국제적인 망신을 당했다.
3.그 이후 조총련계 젊은이 문세광의 총탄에 의해 박정희는 목숨을 건지고 그대신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즉사하였다.
4.그 사건으로 최측근의 박종규 경호실장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 2선으로 물러나고
제2친위세력格이라 볼 수 있는 차지철과 김재규가
각각 그들의 자리를 이어받게 되었다. 그들의 5년간의 반목과 갈등이 결과적으로 박정희 시해를 불렀다.
5.박정희 절대 권력 공백기에 전두환은 12.12쿠데타를 통해 군권을 장악하고 나아가 대통령까지 오르는 행운을 갖게 된다.
6.윤필용은 군대내 하나회의 회장인 전두환 그룹의 적극적인 후원자였으나 본인이 1973년4월--억울하게 제거되자
그를 떠받들었던 전두환 그룹은 약 6년 8개월뒤
소위 12.12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승화 참모총장 및 최규하 대통령을 無力化시키고 드디어 전두환은 5공화국의 대통령에 오르는 행운을 가져온다.
7.윤필용 사건과 그 재판을 지켜본 주한 미국 대사는?
본국에 비밀보고서를 다음과 같이 보낸 바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윤필용 장군 사례를 차후에 같은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본보기로 삼으려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최측근세력에 대한 권력 관리 차원에서의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8.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61년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후 오랜동안 장기 집권하면서 측근 세력의 충성 경쟁을 부추겼고 어떤 때에는 야비(?)하리 만큼 토사구팽을 자행하는 경우가 있었고 --대통령 재선 및 3선개헌의 1등 공신이었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을 과감히 잘랐던 일 등--
9.박정희는 고급 장교들에 대한 충성 경쟁 부추김도 그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5.16군사쿠데타 훨씬 이전부터인 사단장시절부터 데리고 다니던 가장 총애하는 부하 윤필용장군 및 손영길 장군도 가차없이 군복을 벗긴 것이 바로 이 윤필용 사건(73년 4월)이었다.
10.1973년 '날으는 새도 떨어뜨리던' 박정희 측근의 제2인자로 소문나던 윤필용 장군도
하루 아침에 가막소에 가고 인생의 막장으로 몰리고
2년뒤의 출옥후에 한동안 낚시등으로 소일하곤 하였다.
11.그러나, 6년餘 뒤- 전두환이 중령, 대령 시절 정치장교로 맹활약하던 시절에 그가 적극 후원한 덕에-
1979년 12.12군사쿠데타 성공이후 전두환이 군권을 장악하고 나아가 정권까지 거머쥐게 되자
윤필용은 과거 부하 전두환대통령의 요청을 받고
도로공사 사장등의 공기업 사장을 3번 연임하면서 전두환의 後光을 입으면서 1980년대를 비교적 잘 보낸듯하다.
12.박정희 대통령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姜昌成 장군은 ?
윤필용장군과 육사 8기 동기생이었고 나이도 같은 1927년생이었으나
박대통령의 강력 지시에 따라 할 수 없이
친구 윤필용은 물론 다수의 정치 장교 등에 대한 강제 예편과 인사 이동 및 감시 대상을 선정하는 데
본의아닌 惡役을 맡게 되어 손에 피를 뭍히게 되었고
이게 훗날 야비한 보복의 단초가 될 줄이야!
13.강창성장군은 윤필용 장군 사건 처리後
內心 박대통령으로 부터 3성장군을 받고 군단장으로 진급하리라 철석같이 믿었으나
하나회 지원 세력이자 박정희 최측근 세력의 견제 및 모함등으로--사실은 박정희대통령의 또 다른 토사구팽이라 보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필자주!
그냥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게 되고 나중에 해운항만청장으로 근무하게 된다.
14.그러나, 손에 피를 뭍힌 지 6년이 지나 전두환 장군이 軍權을 장악하게 되자 ---73년 당시 윤필용 장군 사건으로 전두환과 노태우 등도 거의 죽다 살아났다--
박정희 친위 세력 박종규 경호실장의 결정적인 비호 덕분이었다고 함-필자주-
강창성은 피의 보복을 당하게 되어 그 惡名 높았던
삼청교육대에서
--과거 최고의 인기 드라마 '모래시계'에서도
그 학대 내용의 일부가 적나라하게 나온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자식뻘되는 사람들과 함께 온갖 非인간적인 수모와 학대를 당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53살의 당시로서는 고령의 나이이고 대부분 자식 뻘 되는 사람들과 삼청교육대 생활 7개월을 보냈고 --거기서 상호 뺨때리기등의 체벌도 당했다고 한다-
-거기에다가
2년 餘의 감옥생활도 하게 되어 몸에 이곳저곳 동상에 걸리는 등 피의 보복을 당한 格이 되었다.
15.강창성은 후일 약 12년후 정치인으로
- 자의半 타의半-필자주-변신하게 되어
14대 민주당의원, 16대 한나라당 의원을 하면서
'12.12군사쿠데타 진상조사위원회 간사'등으로
맹활약하면서 전두환에게 다소나마(?) 설욕하게 된다.
***1993년 장태완도 당시 위의 진상조사위원회에 공개증언자로 나서 진실알리기에 힘을 기울인 바 있다.
16.7년의 집권이후, 전두환은 대통령 퇴직후
절친한 친구이자 오랜동안 그의 알짜 보직을 주선해 주었던 노태우대통령의 정략적 배신(?)에 의해
삼청교육대에 버금갈지도 모를 추운 겨울의 백담사 유배 생활을 하게 됨.-물론 언론에 크게 보도된 바 있었다.
17.그리고 나중에는 청문회에 불려와 전두환은 온갖 고역과 고초를 겪게 되고 심지어는
당시 혈기 방장한 국회의원 노무현--청문회 스타가 됨-이로 因해 그는 대통령에 오르게 된다-하여튼 간에-
이 노무현 청문회 스타에게 이름 명패로 얼굴을 맞을 뻔하는 치욕을 당하게 되어 전국적인 망신을 톡톡히 당하게 된다.
18.장태완 前 수도경비사령관의 경우는?
ㄱ.경북 칠곡에서 태어난 장태완은 대구상고를 다니던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전두환은 대구공고를 다닌 바 있음-육군종합학교에 지원하게 되고--수많은 死線을 드나들었다.
ㄴ.그는 전쟁후 소령으로 광주 보병학교 교관시절
중위 계급을 달고 교육받으러 온 육사 11기생을 접하게 되는 데 이때 후일 12.12사태 당시 전두환편이 되는 후배 군인들을 가르치게 된다.
ㄷ.그는 박정희가 장교 시절 그의 집에서 약 한달 안팎 하숙을 한 인연이 되어 그가 순수 야전군 장교로 승승 장구하는 데 다소 도움을 주었으리라 보며
박정희 시해 후 당시 정승화 참모총장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견제할 장군으로 적극 수경사령관으로 기용하는 데 순수 야전사령관이며 강직함이 크게 고려된 듯 하다.
-필자주!
ㄹ.특히 그는 본인의 육군대학 졸업 논문에서 당시로서는 정말 용기백배하게도(?) 순수 야전 군인의 자격으로 보안사령부의 페해를 들어 국군보안사령부 해체를 주장하는 파격을 보였다.
ㅁ.그로 인해, 그는 베트남 참전 당시 사상불순자로 분류되기도 하였다.
ㅂ.장태완은 전두환-손영길-최성택-등의 육사11기 보다
2년 먼저인 1971년 대망의 장군 진급을 하게 된다.
ㅅ.장군 진급후 장태완은 수도경비사령부의 참모장을 거쳐 26사단장을 하고 육본 교육참보부 차장을 한 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10.26사건 직후에
당시 정승화 참모총장의 적극 천거에 의해-전두환 보안사령관을 견제하라고-
정치적 성향의 수도경비사령관에 79년11월 오르게 되어 순수 야전군 사령관에게 불운이 닥친다.
ㅇ.그는 수경사령관에 온 후 채 한달이 지나지 않을 무렵
불운의 12.12군사쿠데타에 직면하게 된다.
**1979년 운명의 12월12일
군사 반란에 가담한 장성 및 장교들이 확인된 것은 밤9시 경이었다.
수경사령관 장태완 소장은 참모장 김기택준장으로 부터
경복궁 30단에 모여있던 반란군 명단을 입수하게 된다.
ㄱ황영시 중장-- 1군단장.
ㄴ.차규헌(육사8기) 중장-- 수도군단장
ㄷ.유학성 중장--군수차관보
ㄹ.전두환 소장(육사11기)--보안사령관
ㅁ.노태우 소장(육사11기)--9사단장
ㅂ.박준병 소장(육사12기)--20사단장
ㅅ.백운택 준장(육사11기)--71방어사단장
ㅇ.박희도 준장(육사12기)--제1공수여단장
ㅈ.최세창 준장(육사13기)--제3공수여단장
ㅊ.장기오 준장--제5공수여단장
ㅋ.장세동 대령(육사16기)--30단 단장
ㅍ.김진영 대령(육사17기)--33단 단장
ㅎ.조홍 대령--수경사 헌병단장
***이 반란군 주모자들은 후일 대통령 2명을 배출하고
육군 대장 황영시-차규헌-전두환-노태우-박준병-박희도-최세창-김진영등을 배출하고
9사단장을 동원하였던 노태우사단장 계열의
참모장-연대장급이었던-신말업-이필섭-구창회-대령등은
후일 6공 노태우 정권 시절 모두 대장으로 승진하게 된다.
백운택은 쿠데타이후 소장까지 진급하였다가 지병으로 일찍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음-필자주
장세동은 안기부장 맡기는 바람에 육군 중장으로 퇴역함
-본인은 육군 대장으로 승진하길 원했으나 전두환대통령의 강력 요청으로 중장으로 퇴역하게 됨!
차규헌은 육사 8기로 전두환의 선배였으나 소장에서 대장까지 촏고속 승진한 박정희 처럼-무척 일찍 승진한 전두환은 후일 차규헌 중장을 대장 진급시켜주는 임관식에 대통령으로 등장하는 모습도 기억됩니다-필자주!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89년경의 검찰의 최종 판단도 기억됩니다만,
위의 가담자들중 전두환 노태우는 둘다 가막소에 들어갔다
나오고 다른 사람들중 일부도 가막소에 갔다 온 사람들이 있음-필자주!
@@바로 그날 장태완 장군은
"나쁜 놈들! 정치군인으로 안하무인격으로 놀더니 이젠
모반까지 하다니....."
당시 장태완 소장은 자신의 휘하 부대인 경복궁의 30단이 반란 주모 장소 인데다
450여명의 장교 중 390명 안팎이 하나회의 지령에 의한
-반란군에 합세한 것을 보고 이성을 잃었다고 한다.
79년 12.12 쿠데타이후 당시 장태완 장군 휘하의 경복궁 30단의 장세동 대령은
쿠데타 성공 이후 수십년간 장태완 장군을
조우할 때마다 늘 "사령관님! 죄송합니다!"라고 하며
수십년 지나도 사령관님 이란 호칭을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필자주!
ㅂ.장태완장군은 훗날 회고하길:
"나는 전두환과 그들 패거리 들 보다는 배신자들을
증오한다."
"정병주 특전 사령관 , 김진기 헌병감 이
외에는 거의 모든 장교들이 배신하였다."
***수도경비 사령부내 450여명의 장교들중에서
장태완사령관을 따르는 장교들은 약 60명안팎에 불과하였
고 나머지는 전두환 패거리에 동조하였다고 함
***정병주 특전사령관도 장태완 수경사령관 만큼 박정희의 총애를 받았으나
3공수 특공조의 기습을 받아 비서실장이 즉사하고 본인은 팔에 부상을 입고 끌려 가는 등 非運의 장군이 되어 강제 예편되었고 1989년 반란군 침입로였던 곳을 배회하다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김진기 당시 육군본부 헌병감은 지병으로 2006년 세상을 떠났다.
2010년 7월26일 79세를 일기로 운명한 전 수도 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은 79년 12.12쿠데타 당시 수경사령관으로서 전두환 세력에 대항하다가
대립 초기에는 전두환에게
"너 거기 그대로 있어! 전차로 깔아버리
겠어!"
라고 강하게 대항하려 하였으나 참모진의 간곡한 청에 의해
서울시내에서 피를 부를지도 모르는 相互 총격전과 전차포의 사용을 차마 하지 못하고
전두환세력에 의해 강제 예편당하고 그 이후 가정적으로도 큰 불운에 직면하게 된다.
19.장태완의 가정 不運은?
--전두환의 간접 살인은 혹시 아닌가?---
--12.12당시 김오랑 육사25기 소령및 그와 같이 맡은 바 책임을 다하다 죽음을 당한 것도 전두환 그룹의 간접 살인 아닌가?-필자주-아니라고 보는 분은 댓글 요망함!
ㄱ.장태완 장군이 군복을 벗고 지하 감방에서 고초를 당하고 강제 예편당하게 되자 특히, 텔레비젼을 통해 보안사로 끌려 들어가는 아들 장태완장군을 지켜 본
그의 부친은 곡기를 끊고 막걸리만 드시다가 죽음을 맞이하였다.
ㄴ.할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본 (장태완의)아들--
당시 서울대 공과대학 전자공학과에 다니던 전도유망한 청년--서울대 자연대 수석입학한 수재였다고 함!-
이 외아들(1남1녀중에서)이 그의 할아버지 묘소를 정처없이 배회하다가
1982년의 추운 한겨울에 낙동강 근처의 할아버지 묘소에서 얼어죽은 모습으로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20.장태완은 서울서빙고 보안사 지하 분실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고 강제 예편후 ---전두환은? 당시에는
"약 6개월만 쉬고 계시면 일자리를 주선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였는 데
"敗將을 죽이지 않고 내보내 준다니 가야지!"하면서
예편서를 썼다.
그리고 그는 약 2년간 가택 연금도 당했다.
그런데, 당시를 회고한 전두환은?
만일 장태완장군이 고분고분 쿠데타세력의 말을 잘들었더라면?
軍權 장악후 3성장군을 달아주고 군단장으로 보낼 요량이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었음!
--이것은 쿠데타에 본의아니게 협조하게된 박희모 장군의 경우를 보더라도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필자주!(쿠데타 주역 1등 공신 박희도와 다름)
21.참 군인 장태완 장군은?
텔레비젼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 목숨을 초개처럼 던지려던 강직한 장군의 모습으로 재연되어
참군인의 표상으로 앞으로 영원히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이완용이나 전두환은 遺臭萬年(유취만년-악취) 이고
안중근이나 장태완의 경우는 遺芳(꽃다울방)百世가 아니런가?
22.장태완장군은 한참 세월이 흘러 1994년 자유경선에 의해 재향군인회장으로 6년간이나 책무를 다하였고
2000년 3월 민주당에 입당하였으며 16대 국회의원으로 전국구의원으로 활약하게 된다.
그 후에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활약했고 2002년 과거 전두환 에게 청문회 상에서 명패를 던져 버린 바 있던 첨문회 스타 출신- 노무현 대통령후보 -보훈특보 도 하게 된다.
23.장태완은 정계 은퇴후에는 79년의 12.12군사쿠데타를 막지 못한 恨을 풀고자 쿠데타를 막는 국가 시스템 연구에 일로매진하기도 하였다.
***이제 돌아가신 참군인 장태완 장군은 그와같은 걱정은 하실 필요가 없다는 이유가 나온 적이 있는 데
그것는 바로 휴대폰 문화덕이라고 한다.
*** 그 당시 지금처럼 휴대폰이 성행하였다면?
쿠데타는 성공시키기 다소 어려웠으리라 보는 시각도 있는 데
최근 앞으로는 절대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지 못하는
8대 이유가 일요신문등에 보도된 적이 있었는 데
그중 대표적인 사례가 휴대폰의 사용이라는 것이다--우스개 소리아님(곰곰히 생각하면 옳은 말 아닌가?)
***12.12쿠데타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비서실장으로
반란 특공조의 총격으로 죽음을 당한
당시 육사25기 출신의 육군소령 김오랑의 묘소에
(김오랑소령의 부인 백 여사는 이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아 얼마 안있어 失明하였고 불교에 귀의하였다가 투신 자살하였다고 함)
유일하게 참배하였던 -신군부의 보안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던 시대였으므로 진급과 맞바꿀 모험을 걸 동기생들은 거의 없었으리라 그당시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25기 동기생이던
남재준小領은 참배를 한 유일한 동기생이었는 데
그는 참배 이후 중령 진급에서도 거의 막차로 진급하였고-그는 그 당시 예편을 각오하고 제2인생를 준비하려던 참이었다고 함-대령진급도 뒤늦게 하는 등 선두 그룹에서는 다소 멀었으나
세월과 정권이 바뀌어 가면서 그는 장군진급부터 승승 장구하여 4성장군의 꽃인 육참총장도 하게 되어 후배 군인들에게 또 다른 참군인으로서의 표상이 되었다.
그는 4성장군 예편후
몇몇 대학에서 군사학 관련 강의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고 하며 육참총장 시절 정치권의 입김에 의한 장군 진급 심사등에 큰 심적 충격과 고통을 당한 바도 있었다고 하며
육참총장을 자진 사퇴하는 일까지 감수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는 총장시절에도 관용차 사용을 가급적 배제하였고 그의 자그마한 소형차량으로 출퇴근하였다는 전설적인 얘기도 있다.
24.정치 군인 윤필용 장군이 세상을 하직한 후
2일 뒤 참 군인 순수 야전군 사령관 장태완 장군도
이제 고인이 되었다.
25. 저세상에서 만일 이들 두명의 前 수경사령관이
조우한다면?
그리고, 이 2명의 장군보다 고문후유증으로 먼저 저세상으로 간 강창성 장군과 함께 다시 만난다면?
나중에 올 전두환에 대해 무슨 얘기를 나눌지 자못 궁금하기도 하다.
26.전두환이 나중에 만난다면
이들중 전두환과 윤필용등은 아마도
솔로몬 王이 온갖 영화를 누리다 죽을 당시 그냥 후회하면서 다음의 말을 6번 반복했다는 말을 혹시 떠올리지는 않을 까?
"헛되도다,헛되도다. 헛되도다.............."
27. 이 자리를 빌어
이미 돌아가신 김오랑 소령,
강창성 장군,윤필용 장군 및 장태완 장군의
명복을 충심으로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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