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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빈 베르크가세 19번지에 있는 프로이트 박물관. 프로이트는 47년 동안 이 집에서 살았다. 프로이트는 낮에는 이 집의 진료실에서 상담과 치료를 했고, 저녁에는 서재에서 이를 정리하고 이론화하는 작업을 했다. |
[김덕영의 사상의 고향을 찾아서]
<20> ‘프로이트의 도시’ 빈
누군가 말하기를, 서구 사상사에는 세번의 대혁명이 있었다. 첫번째는 우주론적 혁명으로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의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관념이 전복되었다. 두번째는 생물학적 혁명으로서, 다윈의 진화론에 의해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는 관념이 전복되었다. 세번째는 심리학적 혁명으로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의해 인간의 정신은 의식이라는 관념이 전복되었다.
이번 추로지향 순례의 마지막은 이 세번째 대혁명의 주인공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로 장식하게 되었다. 나는 독일에서 정신분석학을 제1 부전공으로 공부했기 때문에 프로이트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다. 참고로 위에서 한 말은 다름 아닌 프로이트가 한 것이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이 가운데 가장 중대한 혁명은 바로 자신에 의한 심리학적 혁명이라고 말했다.
지난 2월 셋째 주 월요일 빈을 향해 출발했다. 1박 2일의 일정이었다. 학기가 막 끝나서 그런지 마음이 홀가분했다. 도둑질도 자꾸 하면 는다고, 국경도 넘다 보니 이제는 아예 대놓고 넘게 되었다. 러시아, 프랑스, 스위스, 이번에는 오스트리아! 다만 (에라스뮈스의 나라) 네덜란드 국경을 넘어 못하고 (카프카의 나라) 체코 국경을 넘지 못한 것이 끝내 진한 아쉬움으로 남는다.
프로이트는 1856년 오스트리아 모라비아 지방(오늘날에는 체코 공화국에 속함)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1860년 가족이 빈에 정착하면서부터 프로이트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1938년 영국 런던으로 망명할 때까지 빈에서 살았다. 그것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이었다. 빈은 프로이트의 전부였다. 카셀에서 빈까지는 고속열차(ICE)로 7시간 정도 걸렸다. 이번 추로지향 순례에서 가장 긴 열차여행이었으며, 칸트의 고향 쾨니히스베르크(칼리닌그라드) 다음으로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었다. 빈 서부역에 도착한 후 도시가 너무 커서 우반(도시 내를 천천히 운행하는 지하열차)과 슈트라센반(도시 내를 천천히 운행하는 지상열차)을 타고 돌아다녔다.
빈은 프로이트의 전부이면서 프로이트의 도시이다. 곳곳에 프로이트의 흔적이 남아 있고, 누구나 프로이트를 안다. 빈의 프로이트 또는 프로이트의 빈은 한 지점으로 수렴한다. ‘베르크가세’ 19번지! 이것은 인구 176만 정도로 오스트리아 최대 도시인 빈에서 가장 유명한 주소일 것이다. 프로이트는 1891년 늦여름 이 집의 이층으로 이사한 후 1938년 6월까지 거의 반세기 동안 살았다. 또한 이 집은 프로이트 가족의 삶의 터전이기도 했다. 프로이트는 빈대학의 교수였으나 아무런 보수도 없는 명예직이었기 때문에 그가 이 집에서 개업의로 벌어들이는 돈이 가족의 생계 유지 수단이었다.
저녁에 프로이트는 이 집에 있는 서재에서 독서하고 연구하고 집필했으며 수많은 편지를 읽고 썼다. 이처럼 베르크가세 19번지는 프로이트의 가정이자 일터이며 연구실이었다. 정신분석학은 바로 이 집의 진료실에서 이루어진 상담과 치료 그리고 서재에서 이루어진 정리와 분석 및 이론화 작업의 결과였다. 말하자면 베르크가세 19번지는 프로이트의 전부였던 것이다.
프로이트가 살던 집은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박물관은 빈의 명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거기에 전시되어 있는 물건은 어떻게 보면 ‘찌꺼기’라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1938년 9월 런던 북서쪽에 위치한 (주로 예술가들과 문인들이 거주하는) 햄프스티드 지역에 정착했다. 그리고 빈에 놔두고 온 가구와 책 그리고 수집품을 그리로 보내도록 했다. 프로이트는 그것들을 빈에서와 똑같이 배치함으로써 런던을 마치 그의 영원한 정신적 고향인 빈에서처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도 환자를 진료하고 저술을 하며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는 등 생의 마지막까지 매우 활동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살았다. 런던의 이 집도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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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박물관 현관 모습. 프로이트가 사용하던 모자와 지팡이, 진료 갈 때 썼던 큰 가방이 놓여 있다. |
이렇듯 빈의 프로이트 박물관에는 찌꺼기만 남아 있음에도 전시된 물건이 아주 많았으며 프로이트의 체취를 직접 느낄 수 있는 유품도 상당히 눈에 띄었다. 프로이트를 제1 부전공으로 공부하고 한국 사회에 대한 사회과학적 논의에서 자주 정신분석학에 준거하는 나에게 설명서를 읽어가며 그의 삶이 배어 있는 공간과 사물을 찬찬히 감상하는 것은 여간 큰 즐거움이 아니었다. 특히 1934년 모습 그대로 재현해 놓은 현관이 눈길을 끌었다. 프로이트가 사용하던 모자와 지팡이가 걸려 있고 진료 갈 때 쓴 것으로 보이는 큰 가방도 있는데, 그 가방에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이니셜 S. F.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그곳에 서니 마치 시간을 뛰어넘어 직접 프로이트를 방문하는 것 같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또한 방문객들을 위해 틀어 놓은 비디오에서 매일 사진으로만 보던 대사상가의 생생한 모습을 대하니 그렇게 감격스러울 수가 없었다.
이 박물관의 한 공간은 안나 프로이트(1895~1982)에 할애되어 있다. 안나 프로이트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3남 3녀 중 막내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정신분석학의 역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는 아동정신분석학의 창시자로 간주되며(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원칙적으로 성인을 그 대상으로 한다) 자아심리학의 개척자 중 한 명이다. 이렇듯 프로이트의 막내딸이 정신분석학 역사의 한 장을 장식했다면, 과연 그의 부인은 어떠했을까? 그는 정신분석학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언젠가 정신분석학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받자 그는 다음과 같이 반문했다고 한다. “정신분석학은 외설문학의 한 형태가 아니던가요?”
베르크가세 19번지에서 ‘프로이트 삼매경’에 빠져 있다 보니 훌쩍 시간이 흘렀다. 꼭 먹던 과자를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마지못해 그곳을 나섰다. 아주 가까운 곳에 ‘포티프 교회’가 있다. ‘봉헌교회’라는 의미의 이 교회는 19세기 후반 네오고딕 양식(18~19세기에 부활된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로서 하늘로 쭉 뻗은 두 개의 첨탑이 인상적이었다. 바로 그 포티프 교회 앞에 공원이 하나 펼쳐져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공원’이다. 대략 2만9000㎡로 그렇게 크다 할 수 없는 이 도심 공원은 빈 시민들이 즐겨 찾는, 그리고 시위장소로 애용하는 곳이라고 한다. 내가 간 날은 약간의 눈만이 겨울의 끝자락임을 알리고 있었고 사람들이 여름에 남기고 간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와 웃음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 공원에 프로이트 기념비가 있는데, 그 기념비의 상단에는 그리스어 ΨΑ(프시 알파)가 새겨져 있고 하단에는 독일어로 “지성의 목소리는 부드럽다”는 아주 짤막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ΨΑ는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을 표시하는 약자였다. 그리고 그 아래의 문구는 프로이트의 한 저서에서 따온 것인데, 원래는 다음과 같이 좀 더 길다. “지성의 목소리는 부드럽다. 그러나 누군가 들어줄 때까지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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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박물관의 내부 모습. |
이처럼 지성을 강조한 것을 보면 프로이트는 계몽주의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누구보다도 계몽주의를 철저하게 파괴한 사상가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계몽주의는 이성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서 출발한다. 이에 반해 프로이트는 인간이 무의식에 의해 지배되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그가 창시한 정신분석학은 반계몽주의의 전형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런 프로이트야말로 계몽주의의 진정하고도 위대한 후계자이다. 프로이트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인간의 자연적인 본능과 욕망을 합리적으로 충족시키는 문화, 쾌락과 노동이 조화를 이루는 문화, 인간과 사회가 조화를 이루는 문화이다. 그는 이러한 문화의 가능성을 다름 아닌 인간의 이성에서 찾는다. 요컨대 프로이트는 반계몽주의적 계몽주의자였던 것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공원 옆에 난 큰 차도를 건너니 바로 빈대학이 나왔다. 이 대학은 1365년 독일어권에서 두번째로 창립되었으며(첫번째는 1348년에 문을 연 프라하대학) 현재 학생 수가 9만명이 넘어 독일어권에서 가장 큰 대학이다. 대학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니 프로이트의 기념상이 있었다. 게다가 이 대학을 빛낸 인물들의 기념상이 죽 늘어서 있는 게 아닌가? 마치 거대한 정신의 공화국에 온 기분이었다. 가뜩이나 작은 어깨가 더욱더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저 큰 정신들은 나에게 한층 더 치열하게 인식과 사유를 하라고 격려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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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박물관의 내부 모습. |
이튿날 아침 일찍 벨뷔 궁전으로 향했다. 프로이트는 1895년 6월을 이 궁전에서 보냈는데 그 어느 날 꿈이 소망충족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다. 이 사상사적 대사건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가 있다는 말을 오래전부터 들어서 꼭 한번 보고 싶었다. 세 시간을 헤맸지만 찾지 못했다(나중에 확인해보니까, 이 궁전은 오래전에 허물어지고 그 터 위에 기념비를 세운 것인데 나는 그와 이름이 비슷한 벨베데레 궁전의 주위를 맴돌았던 것이다). 완전 녹초가 되어 ‘지그문트 프로이트 사립대학’으로 가는 슈트라센반을 탔다. 이 대학은 2005년 개교했으며 정신치료학에 중점을 두고 있다. 현재 학생 수는 약 1200명이다. 솔직히 말해 독일어권에서 그렇게 정나미 떨어지는 대학 건물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강의 내용을 보니 나 같은 아마추어 정신분석학자의 구미를 끌 만한 것이 꽤 많이 눈에 띄었다.
마지막으로 빈 시청 근처에 있는 프로이트의 단골 카페를 찾기로 했다. 그런데 도중에 문득 좀 미신적인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찾을 것을 무어라도 하나 남겨두어야 프로이트와의, 그리고 거대한 지적 유산을 보듬고 있는 문화와 정신의 도시 빈과의 인연이 지속될 것 같았다. 언젠가 벨뷔 궁전의 프로이트 기념비를 찾고 난 후 프로이트의 단골 카페에서 차 한 잔 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그래서 우반으로 한 정거장 남겨두고 발길을 돌려 빈 서부역으로 향했다.
지난 2월 셋째 주 화요일 오후 독일행 열차의 차창 밖으로 멀어지는 빈을 바라보자 그동안 방문했던 도시들이 무의식에 잠재해 있다가 다투어 의식의 문턱으로 밀치고 올라왔다. 하나같이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서 그런지 모두 다시 한번 가보고 싶어졌다.
김덕영 사회학자·독일 카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