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추위에 강원도에선 폭설이 내리던 날. 지난 6일 토요일 서울 반포동 방배중학교 운동장에 대형 현수막이 걸렸다. ‘용필 오빠와 함께하는 제6회 Pil&Friend 체육대회’. 위대한 탄생(이하 ‘위탄’)과 미지의 세계, 이터널리 등 조용필 3대 팬클럽 회원 500여 명이 비를 뚫고 운동장에 모였다. 중년의 여성이 8~9할쯤 돼 보였지만 성인 남성에 알록달록한 비옷으로 무장한 어린이들도 보였다. 이날은 조용필 팬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오빠’가 오시기로 돼 있던 날이었다.
진행을 맡은 ‘위탄’의 행사 운영자 정지원(44)씨가 마이크를 잡았다. “여러분, 비 맞기 겁나십니까? 우산 접읍시다. 머리털 빠져도 괜찮습니다. 오빠 오신다고 경기 중 화장 고치실 필요 없습니다. 35주년 공연, 그때 그 느낌으로 오빠를 맞이합시다!”
2003년 8월 잠실주경기장에서 열린 조용필 35주년 콘서트는 4만5000여 명이 비옷 입고 객석을 채우며 ‘오빠 부대’의 귀환을 알린 역사적인 공연이었다. 그로부터 10년. 이날 참가자들은 청팀과 백팀으로 나뉘어 단체 줄넘기, 여자 축구대회 등의 프로그램을 착실히 진행했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져 갔다. 그래도 즐겁게 뛰고 굴렀다. 이날 마지막 프로그램은 팬클럽 대 밴드 축구대회. 밴드팀이 5대3으로 이겼다. 지금껏 팬클럽팀은 밴드팀을 이겨본 적이 없었다. 축구선수 출신인 기타리스트 최희선(52)씨 활약 때문이다. 경기가 종료되자 진행요원들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어제 나는 사랑에 젖고 오늘 나는 비에 젖네-’. 조용필이 노래한 ‘내 가슴에 내리는 비’의 가사처럼 먼발치에서만 보던 ‘오빠’를 처음 만난 팬들은 기념사진을 함께 찍으며 비에 젖고, 사랑에 젖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오빠가 오고 계십니다. 다들 운동장으로 내려오세요!” “꺅! 오빠!!!”
단체로 비명을 질렀다. 검은 우산을 쓴 작은 거인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굉장히 오랜만이네. 비가 오는데 이렇게 많이…. 다들 미친 거 같아. 앨범은, 그냥 하나 내는 거야.”
짧은 인사말을 마치고 조용필은 팬들과 30명 단위로 기념촬영을 했다. 질서를 지키던 팬들 중 일부가 이성을 잃었다. 혼란스러운 틈에서도 조용필은 웃으며 사진을 찍은 뒤 유유히 행사장을 떠났다. 팬들에겐 꿈같은 20분이었다. 행사가 끝난 뒤 ‘위탄’ 게시판은 “이렇게 가까이에서 뵌 건 팬 생활 30년 만에 처음”(배수연) “내 생애 최고의 하루”(비련효숙) “오빠를 보는 순간 이성은 사라지고 나는 더 이상 아줌마가 아니었죠! 그냥 오빠의 소녀팬일 뿐!”(나는 너 좋아) 등의 후기로 북적였다.
조용필 밴드인 ‘위대한 탄생’과 팬클럽이 체육대회라는 이름으로 만나기 시작한 건 2004년. 팬과의 첫 교류였다. 첫 대회엔 200명가량이 참석했다. 혹시 오빠가 오실지도 모르니까. 2회 때도 2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번엔 진짜 오실지도 모르니까.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고, 3~5회를 거치면서 체육대회는 100명 정도의 규모로 정착됐다. 하지만 10년 만에 19집 정규 앨범 ‘헬로(Hello)’가 나오고 45주년 전국투어도 예정된 올해엔 “스킨십이 필요하다”는 팬클럽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다. 공연장이 아닌 곳에서 조용필이 팬과 직접 대면한 건 이날이 처음이다. 궂은 날씨가 아니었다면 얼마나 더 왔을지 모를 일이었다.
① 지난 6일 체육대회에 참석해 팬들에게 인사하는 조용필. ② 여자 축구 경기. 청팀 백팀 10명씩 나와 공 2개를 쫓아다니며 15분간 뛰었다. ③ 팬들이 자체제작한 조용필 기념 우산. ④ 팬들의 기원을 담은 박터뜨리기. [사진 조용필 팬클럽 ‘위대한 탄생’] ‘오빠 부대’와 ‘형님 부대’의 조우
조용필 팬클럽은 지난 45년간 명멸을 거듭하다 현재 3개가 남아 있다. 대부분 조용필이 방송활동을 접고 무대에서 대중과 만나겠다고 나선 1990년대 정체기 이후 결성됐다. 가장 역사가 오래된 건 오프라인 중심의 모임인 ‘이터널리’. 규모가 가장 크고 제일 활성화된 팬클럽은 2만 회원을 확보한 ‘위탄’이다. 팬페이지로 시작해 팬클럽으로 진화한 ‘미지의 세계’ 회원은 1만 명에 육박한다.
공교롭게도 3대 팬클럽 회장은 모두 남자다. ‘오빠 부대’에 가세한 ‘형님 부대’가 최전선에 나서 조용필 제2의 전성기를 뒷받침하고 있는 셈이다. 미지의 세계 의장 손덕원(40)씨는 “초창기 여성팬이 워낙 강성이라 남자들은 오히려 거리를 둔 측면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남자들은 ‘팝은 좋은데 조용필은 싫어’라거나 ‘조용필 음악은 좋은데 조용필은 싫어’라는 식의 몽니를 부렸죠. 나는 인터넷 세대였지만 뒤늦게 음반을 찾아 들으며 빠져들게 됐어요. 마르지 않는 조용필의 방대한 음악 세계는 끊을 수 없는 마약이었죠. 팬클럽 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직업까지 두 번이나 바꿨습니다.”
‘위탄’ 운영책임자 윤석수(50·안동대 물리학과 교수)씨는 “전성기 땐 좋아한다는 표현을 못했지만 그의 음악에 영향을 받으며 청년기를 보냈다. 이제 먹고살 만해지니 저분의 음악으로부터 너무나 받은 게 많다는 게 보이더라.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남자 팬이 많다”고 말했다.
‘위탄’의 설립 모토는 ‘행동하는 팬클럽’이었다. 기획홍보 운영자 이상희(44)씨는 “오빠가 워낙 인기가 높아 상대적으로 음악적으론 저평가된 측면이 있었다. 그걸 제대로 알리자는 취지에서 2001년 결성했고, 이에 공감하는 사람이 늘며 지금은 가장 커졌다”고 설명했다. 그들은 ‘못 말리는 팬클럽’이었다. 관객에게 태극기를 나눠주고 ‘꿈의 아리랑’을 부를 때 다같이 흔들게 했다. 500만원어치 풍선을 나눠줘 동시에 날린 적도 있다. “풍선 갖고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라며 막아서는 공연기획사 경호팀과 부딪쳐 가며 가까스로 치러냈다.
어느 공연에선 60m짜리 초대형 현수막을 걸었다. 눈에 띄라고 회원 집 베란다에 모여 마스크 쓰고 형광 페인트를 빼곡히 칠한 역작이었다. 하지만 기껏 달아놓았더니 공연기획사 측에서 “공식 현수막을 달아야 하니 떼라”고 했다. 운영진은 팬클럽 부스를 만들기 위해 철제 구조물을 차에 싣고 공연장을 따라다니기도 했다. 윤 회장은 “나도 명색이 교수인데 공연 땐 목장갑 끼고 나선다. 현수막 다느라 고소공포증도 극복했다”고 말했다.
팬들의 역량을 모아 조용필의 음악 세계와인생을 담은 책자를 만들었지만 허락받지 못하다 가까스로 출간했고, ‘오빠’의 어느 생일날엔 팬 수백 명이 집 앞에 찾아가 생일 축하노래를 불렀지만 창문은 열리지 않았다. ‘위탄’은 올 초 ‘클래식으로 듣는 조용필의 음악’ 콘서트를 기획해 세종문화회관에 올렸다. 하지만 여기에도 조용필은 참석하지 않았다.
“기획사 허락 먼저 받고 시작하려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먼저 저지르고 봐야 한다. 그렇게 수많은 이벤트를 벌였지만 형님이 그걸 좋아하시는지, 싫어하시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10여 년, 너무 긴 세월이 흘렀다. 우리는 19집에 대한 절실함이 있다. 형님이 새 음반을 파격적으로 준비하셨다는데 음악 시장이 들썩해야 앞으로 20집, 21집이 나올 수 있지 않겠는가. 그 문턱을 못 넘으면 우리가 더이상 그의 새로운 음악을 접하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이런 상황에서 교감 없이는 팬이나 대중이 새 음반을 구매할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윤석수)
조용필처럼, 팬클럽도 진화한다
‘위탄’은 올해 팬클럽의 방향으로 ‘교감·헌정·열광’을 설정했다. 윤 회장은 “19집이 나오는 상황에서 팬·대중과 진지한 교감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기획서를 만들어 조용필 소속사인 YPC 프로덕션 측에 전달했다”고 말했다. 기획서 안에는 ▶새 앨범이 나오면 팬들 앞에서 처음으로 쇼케이스를 열어 달라 ▶젊은 층과 교감하도록 록 페스티벌에 나와 달라 ▶체육대회에 나와 달라 ▶TV에 출연하라 등의 요청이 담겨 있었다. 최근 KBS 2TV ‘불후의 명곡’ 게시판은 “100회 특집을 조용필과 함께하라”는 글로 도배됐다. “오빠가 움직일 수 있게 방송국을 접수하라”는 지령에 따라 팬들이 단체행동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100회 특집은 이미 들국화로 확정돼 있었다는 사실이 YPC를 통해 알려졌고, 그제야 팬들은 도배를 멈췄다.
어쨌든 ‘오빠’는 체육대회에 참석했고, 23일 서울 올림픽공원 내 올림픽홀에서 쇼케이스를 연다. 조용필은 팬들의 열망을 훌쩍 뛰어넘어 쇼케이스를 하나의 완벽한 공연으로 만들어 네이버로 생중계할 예정이다. 밴드 리더 최희선씨는 “올해 처음으로 록 페스티벌에도 나가기로 했다”며 “거기선 꼭 웃통을 벗고 기타를 치겠다”고 기자에게 귀띔했다. 결국 ‘오빠’가 팬클럽의 주요 요구사항을 대부분 들어준 것이다.
윤 회장은 “무심한 듯하면서 공연 막바지에 팬클럽이 준비한 티셔츠를 입고 나오시거나 ‘내 동생들이 많아’라고 슬쩍 이야기하신다. 공연의 안 좋았던 점을 팬클럽 게시판에 올리면 다음번엔 꼭 고치신다. 결국 우리의 진정성을 인정해 주시는 거다. 그런 점에 우리는 또 감동하고 힘 내서 목장갑 끼고 쫓아다닌다. 조용필은 한마디로 ‘밀당(밀고 당기기)’의 고수”라고 말했다.
‘위탄’은 조용필 45주년을 맞아 10일 홈페이지(www.choyongpil.net)를 개편했다. 이른바 ‘위대한 탄생 조용필 테마파크’다. 초기 화면 속 대형 전광판에선 조용필 공연 영상이 흘러나오고, 그 둘레에는 팬클럽·박물관·전시관·방송국·콘서트홀·음악카페 등이 배치돼 있다. 팬심이 아니라 돈으로 해결했다면 얼마가 들었을지 모를 작업이다.
팬클럽의 주축은 인터넷에 익숙지 않은 60년대생이다. 하지만 조용필에 대한 애정 하나로 갈고닦은 실력 덕에 웬만한 기획사 부럽지 않은 기획력과 조직력, 웹마스터 능력을 갖추게 됐다. 팬클럽에서 익힌 기술을 바탕으로 윤 회장은 DB 설계를, 홍보 담당인 이상희씨는 글쓰기를 부업으로 할 수 있을 정도다. 이들에게 팬클럽 활동은 곧 ‘자기계발’이다.
이들은 조용필 팬클럽이 한국의 공연문화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자부심도 갖고 있다. “처음 방송에서 내려와 공연장에 섰을 때는 공연문화라는 게 없었다. 형님도 꼿꼿이 서서 마이크만 잡았고 관객은 목석 같았다. 초창기엔 공연문화를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야광봉을 무료로 나눠주며 열광의 본보기를 보여줬다. 멍석을 깔아드리면 형님은 팬들의 기대를 뛰어넘는 무대로 보답하셨고, 그렇게 팬들도 조용필처럼 진화해왔다.”(윤석수)
팬클럽의 여러 기획이 난관에 부닥치면 늘 “나도 조용필의 팬”이란 이들이 어디선가 나타나 도움을 줬다. 윤 회장은 “그게 우리도 모르는 조용필이 가진 힘”이라고 했다. 이렇게 팬클럽 활동을 하다 만나 결혼한 커플만 6쌍이고,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14명에 달한다. ‘위탄’ 총무 노길숙(44)씨는 “우리는 매년 MT를 같이 가고 서로의 아이들이 기저귀 찬 모습부터 보며 함께 나이가 들었다. 애사가 있으면 진심으로 위로를 받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진정한 가족 공동체”라고 말했다.
글=이경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