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중도 우파의 고민--서울대 송호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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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2,248회 작성일 2013-04-15 01:04본문
- 송호근 교수 “좌파나 우파나 저를 감동시킨 글 없어…특히 좌파 지식인 글은 엉망”
-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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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사회학과 송호근 교수(57)는 최근 가장 주목받는 지식인 중 한 명이다. 선대위원장과 인수위원장, 총리 후보까지 박근혜 대통령의 주요 인사 때마다 그에 대한 하마평이 언론에 오르내렸다.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폴리페서의 이미지가 덧입혀지는가 싶을 때 그는 이 땅 50대의 보고서 <그들은 소리내 울지 않는다>를 세상에 내놓았다. 송 교수 자신의 이야기가 가미된 이 에세이는 발간 한 달 만인 현재 2만부가 팔렸을 정도로 반응이 좋다. 그의 내면에 따뜻하고 풍성한 감성이 꿈틀거리고 있음은 의외였다. 정치·경제·사회를 넘나드는 폭넓은 식견과 날카로운 현실인식을 담은 그간 그의 신문 칼럼에선 차가운 이성의 기운이 넘쳐흘렀기 때문이다.
그와 인터뷰 약속을 하면서 굳이 교수실이 아닌 술집에서 만나기로 한 것도 교수나 논객 송호근이 아닌 무장해제된 ‘인간 송호근’을 만나고 싶어서였다. 지난 8일 저녁 약속시간에 맞춰 나타난 그는 짙은 카키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베레모를 쓴 모습이었다. 날카로운 눈매에 표정마저 없어서일까. 사진으로 본 것보다 인상이 더 차갑고 매서웠다. 길 건너 주점에 자리를 잡고 술잔이 몇 번 오가고 나서야 이야기가 익어갔다. 그의 표정이 조금씩 살아났다. 말도 거침없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비판과 좌파 지식인들의 글에 대한 질타까지 성역이 없었다.
인터뷰는 고 박경리 작가와 그의 청년시절을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전날 전화통화에서 그가 통영의 박경리 묘소에 내려가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지난 8일 경향신문사 인근 한 선술집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송 교수는 인사실패로 드러난 박근혜 대통령의 불통과 독단적인 국정운영에 대해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를 들으면서 도망다녀보지 않아서 그렇다”고 말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 “민주당은 70년대 청와대 향해 돌 던졌던 사람들…
박 대통령도 청와대 안의 자신 향해 돌 던져봐야”
■ 대학시절, 어쩌지 못한 문학에의 갈증과 기질
- 무슨 일로 박경리 선생 묘소를 찾으셨나요.
“기일 즈음인 매년 이맘때 찾아봬요. 박 선생은 저의 정신적 사부시거든요. 인연이 길죠. 선생은 장모의 선배인데 제 처를 어릴 적부터 예뻐했어요. 제가 한림대 교수로 재직하던 1991년 선생이 강의차 춘천에 왔다가 집에 들르셨죠. 제가 어떤 놈인지 궁금하셨던 거예요. 겨우 합격선을 넘었던 것 같아요(웃음). 그 후 대하소설 <토지>가 완간된 1993년 ‘작가세계’에서 박경리 특집을 기획하면서 제게 선생과의 인터뷰를 의뢰했어요. 선생께서 ‘너라면 하겠다’고 수락하셔서 소설 완독 후 강원도 원주 선생댁에서 심층 인터뷰를 했죠. 선생이 좋아졌어요. 자주 뵈면서 인연도 깊어졌죠. 2005년 마산MBC가 제작한 3시간30분 분량 선생과의 인터뷰도 선생이 저를 대담자로 지목해 이뤄졌어요.”
고 박경리 선생이 그를 인터뷰어로 연거푸 지목한 건 송 교수의 남다른 문학적 소양과 감성을 간파한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그는 청년시절 문학을 꿈꿨다. 경북 영주 두메산골에서 2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돌이 갓 지날 무렵 초등학교 교사인 아버지가 서울로 발령나서 서울 용산구 원효로 판잣집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문학에 눈 뜬 건 까까머리 중학생 때였다. 시, 소설, 인문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었고, 당시 지식인들이 보던 ‘사상계’까지 넘봤다. 헌책방에서 살다시피했다. 고교(서울고)에 진학해선 학생회장과 문예반 반장을 했다. 당시 이화여고 문예반이었던 한 학년 위 아내를 만나 연애를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재수 끝에 서울대 사회계열 75학번으로 입학했다. 그는 “아들이 법관이 되기를 바란 아버지의 강권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강금실 전 법무장관, 박원순 서울시장 등이 사회계열 동기생이다. 하지만 문학을 향한 갈증과 기질은 어쩌지 못했다. 전공과 달리 그가 들은 강의목록은 모조리 인문학이었다. 인문대생이던 소설가 이인성, 시인 황지우·이성복 등과 어울렸다. 대학신문 기자로도 활동했다. 1978년엔 ‘대학문학상’ 평론부문을 수상했다.
- 그런데 왜 문학을 업으로 삼지 않았습니까.
“당시는 문학 열병을 앓는 사람이 많았어요. 유신시대 망명처로 언어의 성을 쌓는 거죠. 대가가 이성복 시인이에요. 하루는 제가 쓴 시를 그에게 보여줬더니 ‘안되겠다’고 해요. 낙심 후 평론가 전업을 선언했죠. 그런데 평론을 하려면 사회를 연구해야겠더라고요. 당시 문학평론은 심미비평이 주를 이뤘고 문학을 사회현상 속에 넣어 평론한 사람이 드물었어요. 백낙청 선생이 ‘창작과 비평’을 창간하고 문학을 사회과학적으로 비평했지만 마음에 안 들었어요. 이데올로기와 결부된 비평이었기 때문이에요. 제가 해보자 결심했죠. 4학년이 되면서 전공인 사회학으로 돌아간 이유예요.”
- 대학신문 기자였고, 당시는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이 격화된 시기인데 데모는 안 하셨나요.
“고교 학생회장 출신이라 저는 안기부 특별관리 대상이었어요. 진짜 웃긴다고 생각했죠. 전 학생운동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어요. 지켜보기만 했죠. 당시 사회계열은 학생운동 기지여서 수난이 컸어요. 감옥에 끌려간 친구도 여럿이었고요. 들어올 땐 20명이었는데 졸업할 땐 10명만 남았어요.”
■ “광주항쟁에 충격… 자괴감에 압사할 것 같았다”
- 그래도 대학원 2년 때인 1980년 서울의 봄에 서울대 대학원출정식 선언문을 쓰셨잖아요.
“80년 5월2일 연구실로 인문대 대학원생인 고교 후배가 찾아왔어요. ‘내일 아침 대학원생들이 시국선언을 하는데 형이 선언문을 써달라’는 거였어요. 안 써줄 이유가 없잖아요. 다음날 동틀 무렵에야 1600자 원고지 두 장 분량으로 완성했어요. 후배는 기왕 썼으니 낭독도 저더러 하라더군요. 저는 ‘임마, 밤새 담배 피우면서 썼더니 목이 칼칼해서 못 읽어’라고 했죠. 그런데 그게 운명을 갈랐어요. 운동권이 아니었지만 목소리 좋다는 이유로 또 다른 사회학과 대학원생이 발탁됐고 그가 1만명이 모인 교정에서 낭독했어요.”
- 운명을 갈랐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요.
“5월17일 계엄령과 함께 시국사범 체포 명단이 작성됐어요. 당시 필동에 위치한 수도경비사령부 정보과장 부관이던 제대말년 친구가 우연히 검거 리스트에서 제 이름을 발견하곤 저더러 피신하라고 했어요. 제물포로 튀었죠. 2주 후 집에 전화했더니 돌아와도 된다고 해요. 친구가 ‘송호근은 빨갱이가 아니고 부화뇌동한 학생’이라며 수십번 읍소해 정보과장이 선심을 베푼 거예요. 단, 조건이 있었어요. 정보과장이 저와 논쟁을 벌이겠다는 거였어요.”
6월22일 폭우로 정전돼 촛불을 켜놓은 수도경비사령부에서 마주앉은 정보과장은 김일성, 광주항쟁 등을 주제로 내놓았다.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요령껏 답변했고 정보과장은 만족해했다. 직후 송 교수는 훈방조치돼 학교로 돌아가 그해 12월 결혼도 했지만 선언문을 낭독한 친구는 체포돼 3년 징역을 살았다. 최근에야 알게 된 사실은 그 친구가 승려가 된 지 꽤 오래됐다는 것이다.
- 그땐 살아남은 안도감 한편으로 자괴감, 자책감이 컸을 것 같아요.
“광주항쟁을 겪고 정신적 충격이 컸어요. 술 마시고 자책하는 거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 하루는 사회학과 대학원생들이 교수 전원을 학교로 불러내 막 공격했어요.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뭐하셨냐고. 괴롭지 않으시냐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참담한 자괴감에 압사할 것 같았으니까요.”
■ 박 대통령이 선대위원장 등 두차례 제안
육사 교관으로 군복무를 마친 그는 전액 장학금을 받고 1984년 미국 하버드대 유학길에 올랐다. 박사학위 받고 1989년 귀국해 춘천의 한림대를 거쳐 1994년부터 서울대에서 교편을 잡았다. 논객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해온 그의 이념적 성향을 언론은 흔히 ‘중도 보수’ 또는 ‘합리적 보수’로 표현해왔다.
- 중도 보수라는 구분에 동의하시는지요.
“전 자유로운 영혼이에요. 굳이 따지자면 경제는 우, 노동은 조금 좌죠. 전 한진중공업 크레인 고공농성을 벌인 김진숙씨의 열정을 굉장히 높게 평가해요. 2011년 8월 말 혼자 농성현장을 다녀온 후 관련 칼럼을 쓰기도 했어요. 생활에선 자유롭고 정치는 반권력적 성향이죠.”
- 그동안 동아, 중앙 등 보수신문에만 기고하셨지요.
“1990년대 초중반 한겨레에도 썼어요. 하지만 글의 깊이와 맛과 무게를 모르는 매체라고 생각해 중단했어요. 3년 전 구독도 끊었어요. 제가 돌 맞겠지만 정성을 쏟은 칼럼과 기사가 잘 보이지 않아서요. 특히 좌파 지식인들의 글이 엉망이죠. 지식인의 집은 언어로 짓는 것인데, 그들은 자기고백은 전혀 없이 뒤에서 연출만 하는 존재예요. 좌파나 우파나 지금껏 저를 감동시킨 글이 하나도 없었어요. 대중의 마음을 읽고 대중의 언어로 써야 하는데 이데올로기만 있으니까요.”
- 박근혜 대통령의 영입 제안이 많았던 것으로 알아요. 친분이 있나요.
“2006년 만나자는 연락이 왔어요. 이후 1년에 한두 번씩 요청이 오면 만났어요. 주로 복지나 일자리 문제에 대한 조언을 듣고자 했어요.”
- 실제로 영입 제안을 받았나요.
“대통령이 직접 영입 제안을 한 건 지난해 8월 말 선거캠프에 합류해달라는 것과 9월 말 선대위원장을 맡아달라는 것이었어요. 고사했죠. 거기 가서 호령하고 기획할 주제도 안될뿐더러 제 인생을 거기에 얽매이고 싶지도 않았어요. 언론에 보도된 다른 자리는 직접 제안받지 않았어요. 짐작하건대 물망에 오르지 않았을 거예요. 계기가 있었고요.”
- 어떤 일이 있었는데요.
“선대위원장을 고사하는 자리에서 당시 박근혜 후보에게 저는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은 대통령 할 자격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 하려면 이건 정말 알아야 합니다. 문재인, 이해찬 등 당신이 대적할 민주당 의원들은 1970년대에 거리에서 청와대를 향해 돌을 던진 사람들입니다. 당신이 저들과 함께 대한민국을 끌고가고자 한다면 그 시절 그들과 청년기를 같이 보낸 당신 역시 거리로 나가 청와대 안에 있는 당신을 향해 돌을 던져 보세요.’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가 불가피한 면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만들어낸 또 다른 불가피한 저항을 그 딸인 박근혜 대통령이 이해해야만 대통령도 살고 대한민국도 산다고 판단해서 솔직하게 말씀드린 겁니다.”
- 박 대통령이 박정희 시대의 통치를 재현하고 있다는 시선이 많아요. 아버지와 인연있는 사람을 기용하고 1인 통치방식도 그렇고요.
“대통령이 정신적 아버지와 결별하지 못한 듯해요. 1970년대 젊은이들은 생물학적 아버지와 정신적 아버지를 분리해 정신적 아버지를 찾아다녔어요. 마르크스, 레닌, 체 게바라, 루카치였죠. 하지만 박 대통령은 생물학적·정신적 아버지가 한몸처럼 보여요. 현 정부 들어서서 나온 경제부흥, 문화융성 다 1970년대 말에 나온 말이에요. 조금 있으면 근면·자조·자립과 증산·수출·건설이란 말이 나올지도 모르죠(웃음).”
■ “안철수도 귀국 때 미래지평을 보여줬어야 했어요”
뼈 있는 농담이었다. 술이 올라 불콰해진 그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1930년대 정지용의 시를 가수 이동원이 1980년대에 부른 ‘향수’였다. 내친 김에 더 파고들었다.
- 정권 초부터 부실인사로 우려 목소리가 많습니다.
“차라리 인사문제는 지엽적이에요. 정치는 언어와 타이밍이에요. 그 점에서 대통령은 결정적 실수를 했죠. 당선 후 가장 먼저 통치철학을 밝히는 등 개혁 언어를 내놨어야 하는데 수첩만 보고 있었으니까요. 안철수씨도 마찬가지예요. 대선 당일 미국으로 떠난 그는 귀국 비행기 안에서 대통령이 뭐가 부족한지 감을 잡고 인천공항에 내려서자마자 신문에 대서특필될 만한 미래지평을 여는 발언을 했어야 해요. 그러나 못했죠. 지난해 그의 인기가 절정이었지만 대중의 마음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을 거예요.”
- 대통령의 불통과 독단, 그 근원적 원인이 뭘까요.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를 들으면서 도망다녀보지 않아서 그래요. 동시대를 산 이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게 우선이에요.”
■ “진정한 통치는 공론장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정치”
- 대통령 주변에 눈치만 보지 직언, 충언을 하는 인물이 없는 건 아닐까요.
“박 대통령의 카리스마가 자신과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원치 않기 때문이죠. 무엇보다 대통령을 보좌해야 할 청와대 참모들에게서 한국 사회에 대한 비전 제시 감각이 아직 보이지 않아요.”
- 대통령의 철통보안에 대한 불만이 많습니다. 대통령이 “어느 촉새가 나불거려가지고”라고 말한 게 회자되기도 했고요.
“진정한 통치자가 되려면 촉새가 나불거리도록 해야 해요. 공론장을 만들어줘야죠. 그게 정치잖아요. 국민은 통치자가 하루 24시간 누굴 만나는지, 뭘 하는지 알 권리가 있어요. 통치자는 프라이버시가 없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밤 8시 이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뭘 하는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로 인해 애를 먹는 건 언론이다. 문득 그가 2006년 중앙일보 칼럼에서 황우석 논문조작 의혹을 제기한 MBC ‘PD수첩’을 군부정권보다 더 ‘군부적’이라고 비난했던 게 생각났다. 2008년에도 그는 MBC와 KBS가 ‘PD들의 공국’이라며 공격했다.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고백이었다.
“3년 전쯤 ‘PD수첩’ 한학수 PD에게 사과했어요. ‘정말 잘못했다. 미안하다. 황우석 교수의 말만 믿고 전반을 파악하지 못했다. 용서해달라’고요.”
- 역대 대통령 중 누구를 가장 인정합니까.
“DJ예요. 경제에서 사회로 패러다임을 바꾼 분이니까요. 박 대통령은 DJ를 계승해야 해요. 전 노무현씨를 무지 좋아해요. 통치 말고 인간적인 면을요. 그래도 노무현 하면 떠오르는 게 있잖아요. 권위주의 타파와 비주류를 주류로 등극시키고 싶어한 전복의 정치요. 하지만 이명박씨는 10년 뒤 기억할 게 없어요. 임기 내내 정치 안 하고 장사만 했으니까요. 이 대통령이 사회정책수석 자리를 제게 제안했지만 거절했어요.”
오후 6시30분 주점에서 시작한 인터뷰는 인근 LP카페로 자리를 옮겨 자정까지 이어졌다. 그곳에서 그는 15년간 일궈온 춘천의 아지트 이야기, 쓰고 싶은 소설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문학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그에게 묘비명은 떠올랐는지 물었다. <그들은 소리내 울지 않는다>에서 궁리중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돌아온 말은 이랬다. “좌충우돌하면서 청년시대의 불꽃을 불태우려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초승달처럼 사위어들었다.” 쓸쓸해 보이는 그의 마른 얼굴이 카페 조명 아래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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