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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서거 103주기및 이등박문과 같은점과 다른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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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2,908회 작성일 2013-04-01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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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교사 "안중근 의사, 이토 저격 옳은 행동"<세계일보>

        

요코하마中 스즈키 히토시씨
전주 중학교 학생들에 강의
9년째 ‘한일역사 공동수업’
“일본서도 소신대로 가르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행동은 옳았습니다.” 

한국 교단에 선 일본 요코하마중학교 교사 스즈키 히토시(59·사진)씨는 힘주어 말했다. 스즈키씨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오자 교실의 아이들은 일본인 교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 믿기지 않는 듯 어안이 벙벙해졌다.

스즈키씨가 한국을 찾아 자신의 소신을 밝혀 온 지 올해로 9년째.

스즈키씨는 일본인으로서 쉽지 않은 내용의 수업을 본인의 소신대로 꿋꿋이 이어가고 있다.

29일 전북 전주 근영중학교에서 열린 ‘제9차 한일역사 공동수업’에서도 스즈키씨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에 대해 정당한 행동을 한 훌륭한 분이라고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스즈키씨가 9년째 공을 들인 공동수업은 일본의 쓰나미 이후 현재 상황과 한·일 우호에 이바지한 인물 탐구,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 재조명, 역사의 아픔 속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한·일 우정 등 한·일 관계를 재정립할 수 있는 내용으로 운영되고 있다.

스즈키씨는 이날 공동수업에서 “안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은 옳은 행동이라고 생각한다”며 “일본에서도 학생들에게 그렇게 교육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이런 행동들이 쌓여 안 의사가 옳았다고 생각하는 일본인들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스즈키씨는 독도 문제에 대해서도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그는 “독도를 일본에서는 ’다케시마’라고 부른다. 하지만 학생과 일반인 등 독도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매우 적다”면서 “독도 문제 등에 많은 관심이 있는 한국 학생들과 국민이 부럽다”고 말했다. 

전주=한현묵 기자, 연합뉴스
 
 
 
@@@ 이번 2013년 3월26일은
안중근 의사 서거 103주기 되는 뜻깊은 날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언론에서는 크게 보도하지 않아 저로서는 엄청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런 실망중에 다행히도 최완근 서울지방보훈청장의 아주 좋은 글이 눈에 띄어 올리오니
대승적 見地에서
우리 검색자 제위는?
안의사의 그 숭고한 살신성인의뜻을 가족, 친지 및 동료 선후배 친구 등에게 널리 홍보하여 주시길 요망합니다.
안중근 義士를 추모하며
2013032901033737191004_b.jpg
최완근/서울지방보훈청장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3년 동안 해외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000만 형제자매(兄弟姉妹)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겨레의 영웅 안중근 의사(義士)
1910년 3월 26일 중국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기 직전에 남긴 말씀이다.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게 조국의 자주독립을 염원하는 모습에서 나라를 향한 사랑이 절절히 묻어난다.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의 윤택한 가정에서 태어난 안중근 의사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동양철학과 서양 문물을 고루 접하며 사회를 넓은 시야로 바라보게 됐다.
개인적인 일보다는 의로운 일을 우선하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아
평생을 대한민국의 아들로 살았다.
‘교육’이야말로 나라가 바로서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라 생각하고,
사재(私財)를 털어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워
나라의 대들보를 키워냈다.

안중근
의사는?
국채보상운
이 전개됐을 때는
가족의 패물까지도 기꺼이 내놓았고,
이후 해외로 망명해 의병부대를 직접 이끌면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다 1909년 10월 26일에는
중국 하얼빈역에서 우리나라 침략에 앞장선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백 마디의 말보다 스스로 의(義)를 실천하는 모습이 배우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법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기라도 하듯이.

교육은 백년대계(百年大計)라는 말이 있다.
바른 교육이야말로 국가와 사회가 더 크고, 강하게 발전하는 근간을 이룬다는 뜻일 게다.
한 나라가 선진국에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척도에는 경제적 번영과 같은 물질적 팩터도 있지만,
국민의 건강한 역사 의식과 나라 사랑과 같은 정신적 가치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무형의 자산은 생활 속에 녹아 있는 교육을 통해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자연스럽게 전해진다.

우리나라 국민은
우수한 두뇌와 성실성을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받지만 일제의 식민 지배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궁핍해질 대로 궁핍해진 나라를 오늘과 같은 풍요와 번영의 시대로 이끈 것은 무엇보다 높은 교육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 청소년들에 대한 학교와 가정의 교육이 상급학교 입시를 위한 지식의 전달에 치우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풍요를 위해서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고, 그 정신을 심어주는 것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더 중요한 덕목이 아닌가 한다.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올바른 우리의 역사를 알려주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교육은 그렇게 거창하거나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녀들과 함께 태극기를 달거나
애국가를 4절까지 불러보는 일도,
주말에
아이들의 손을 잡고 주위 현충 시설을 찾아보거나
삼일절·현충일과 같은 기념일에 나라를 위한 선조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한 번 더 돌아보는 것도
모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쌓이는 작은 실천들은?
아이들의 마음 속에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리할 것이다.

지난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 순국 103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봄이 성큼 다가와 나들이하기에 좋은 요즘,
이번 주말에는 안중근의사기념관에라도 들러
나라 사랑과 세계 평화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
나라를 위하는 마음을 중심으로 온 국민이 화합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대한민국은 더 크고 밝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의 공통점과 다른점은?
by 한선비read 22990vote 02009.07.01 (20:54:41)

다음은 지난 3월말경에 저 한준구가 다른데 올린 바 있는 데 우리 민족 단합 차원에서 참여연대 회원및 이 연대에 우호적인 분들의 일독을 권해보며 특히 20대및 30대 들은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 지 무척 궁금하오니 댓글로 짧게라도 남겨 주심이 어떨지요?

%%%다음 내용은 다른 곳에 퍼올리기 해도 무방합니다.


***지금부터 정확히 99년 전 하고도 5일전인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

뤼순감옥에서 일본측 검찰관과 감옥 소장등이 입회한 가운데 마지막으로

유언이 있느냐고 물었다

안중근은 "별로 없으나 나의 이번 행동은 오직 동양의 평화와 평화를 도모하는 성의에서 나온 것이므로 이 자리에 있는 일본 관헌 각의도 내 뜻을 이해하고 피차의 구별없이 합심해 동양의 평화를 기할 것을 기원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안중근은 '동양 평화' 삼창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고

바로 이어서 태연하게 형집행을 받았다.(소노키 스에요시 통역관의 기록)

그날은 온종일 비가 내리고 세찬 바람이 불었다고 합니다.



*** 이 사형집행 정확히 5개월전인 1909년 10월26일 오전 9시15분경.

ㄱ.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 역에 도착.

ㄴ.군악대의 환영곡과 일장기를 든 일본인들의 만세 소리!

ㄷ.러시아 제정대신 코코프체프 의 안내로 러시아군 수비대 사열

ㄹ.안중근 의사---뚜벅뚜벅 앞으로 걸어나가 10보 남짓한 거리에서

이토의 오른쪽 가슴에 브로닝 권총 3발을 명중시킴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안중근 평전에서)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의 닮은 점!

ㄱ.둘다 모두 무사 집안임

ㄴ.무사집안이면서도 둘다 학문 연마에 열중하여 식견과 시야를 세계로

넓혔음

ㄷ.소년 시절의 안중근은 집안 서당에서 초빙한 스승에게서

유교 경전은 물론 조선의 역사와 세계사를 배웠으며 어머니(조 마리아)

의 영향으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됨.

ㄹ.이토 역시 메이지 유신의 선각자인 요시다 쇼인이 세운 쇼가손 학원에서

수학하였으며 해군학을 배우러 영국에 다녀오기도 함.

ㅁ.안중근과 이토는 문명 개화론자이면서도 서구 제국주의의 열강의 침략

에 맞서 한국과 중국및 일본 3국이 함께 동양의 평화를 지켜나가야 한다

는 생각에 일치하였음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다른점은?

ㄱ.위의 공통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죽일 수 밖에 없었

던 이유는?------바로 이 '동양 평화론'에 대한 엄청한 시각차의 존재때문!

ㄴ.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비록 옥중에서의 집필로 인해 그 끝을 맺지 못

하였는 데 '대저 합하면 성공하고 흩어지면 패망한다.'로 시작되었는 바

이토의 서구 방식을 흉내낸 국권침탈을 통한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이

아니었음!

ㄷ.즉,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지금으로 치면 유럽연합의 공조와 협력및

연대를 통한 평화체제 구축으로 평화회의 조직, 공동 은행 설립과 공동

화폐의 발행까지 구상했음!

ㄹ.그런데, 안중근에게 이토는 평화의 약탈자였음.

ㅁ. 그리하여, 그의 저격은 테러가 아닌, 지금도 살아있는 '평화의 메시지'

였다고 봄-----위의 모든 글은 한국일보 3월26일자 이대현 논설위원의

글임.



***다음은 저 한준구의 오랜 기간의 기억에 담아온 몇가지 단상을 적어

봅니다.-인터넷 검색없이 생각나는 대로 적습니다.

ㄱ.안중근의 어릴적 이름은 안응칠-모친께서 태몽을 북두칠성을 하여서---

ㄴ.어릴적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그의 일생을 소개한 내용이 기억남!

ㄷ.안춘생님이 조카로서 독립기념관장을 역임함.

ㄹ.안중근의사의 부인은 위의 저격사건으로 인해 엄청난 고문을 당함-이 내용이

아마도 십여년전 서울에서 연극으로 부활하였음!

ㅁ.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의 15개 조항은 정말 지금도 동양 3국에게 금과옥조

로 아로새겨도 무방할 정도의 훌륭한 내용으로 기억하고 있음!

ㅂ.일제 침략의 엄청난 악행을 잘 모르던 초등학교의 어릴적에 저 한준구는 일본의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정말 인자하고 너그럽게 보여 그렇게 심하게 우리 민

족을 말살이야 했지는 안했으리라 막연히 생각한 적도 있었는 데

ㅅ. 아마도 4년전 이토 히로부미의 20대 시절의 얼굴을 본 순간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는 데 인자한 할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표독스러운 사무라이 그 자체여서

--아마도 임진왜란 시절 이순신장군에게 패전을 거듭하였던 와키자카의 모습

과 흡사하여 정말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습니다-저의 스크랩 어딘가 있을 터

인 데 하도 많아 어디 있는 지 그 사진을 다시 체크해 보고 싶고 인터넷에 검색을

우리 모두 해봅시다!

ㅇ.1907년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 당할 무렵

이토는 무엄하게도 우리 황제앞에서 위협하려고 칼을 빼 휘둘렀다는 역사 증언도

있고 우리의 대신들이 숨을 죽였다는 슬픈 증언도 있었음

ㅈ.고종황제의 임종을 한 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독살 하였음에 틀림없다고 봄

ㅊ.고종 생전에 순종에게 양위식을 할 적에도 순종이 이를 거부하자 가짜 순종을 내

세워 양위식을 하였다는 역사적 사실도 가슴아픔!

ㅋ.해방이후 오랜동안 가톨릭 교회에서는 안중근의 이토 저격사건을 테러로 규정하

느니 마느니 등으로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으며 저의 기억으로는 최근에 와서야

의로운 행동으로 규정한 것으로 알고 있음!

ㅍ.1909년 10월26일이 안중근 의사 저격일인 데 저격100년을 7개월뒤에 맞이할

즈음에 정부는 과연 어떤 공식 발표를 할 지 참 걱정이 되며 나아가 일본의 공식

발표는 어떻게 나올지 자못 궁금하다.

ㅎ.몇년전 관동(간또-일본 서울 동경및 인근지역) 대지진 조선인 학살-80주기에도- 7000명 안팎의 대학살 사건에도 우리 정부는 일언반구 없었으니 위의 공식 발표 크게 기대할 것도 없으리라 사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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