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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0년 강원 화천군 하남면 원천리에서 발굴된 3∼4세기
대규모 마을 유적. 한성백제가 이른 시기 북한강 상류지역까지 진출해 직접 지배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다.문화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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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고흥 안동고분 출토 백제 금동관과 금동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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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으로는 대동강 하류에서 전남 남해안까지, 동으로는 춘천·화천,
서로는 바다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확보했다.”
“동으로는
춘천·화천 일대, 남북은 예성강 이남에서 전북 고부와 김제 일대까지만 영유했다.”
백제의 최대 전성기를 이룩한 제13대 임금인
근초고왕(재위 346∼375) 때 백제 영토는?
과연 어느 정도 범위였을까.
지난 3월 30일 서울 송파구 위례성대로 올림픽공원 내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종합토론의 좌장을 맡은 이현혜(사학) 한림대 교수는
근초고왕대 영토의 최대 범위와 최소치를 이같이 정리했다.
‘근초고왕 때 백제 영토는 어디까지였나’를
주제로 열린
이날 행사는 한성백제박물관(관장 이인숙)이 매년 봄·가을 두 차례씩 백제사 가운데 쟁점이 되는 주제를 잡아 끝장토론 형식을 가미해 열고
있는 학술회의로, 지난해 하반기에 이어 두 번째로 열렸다.
이날 학술회의는 노중국(사학) 계명대 교수의 주제제안 발표에 이어
백제의 동북 및 서남 방면 진출에 대해
,
문헌사학자인 임기환 서울교대 교수와
강종원 충남역사
고고학자인 심재연 예맥문화재연구원 조사부장과
서현주(문화유적학) 한국전통문화대 교수가 각각 주제발표를
진행했다.
◆ 초기 한성백제(기원전
18∼475년)의 영토와 근초고왕 때
북쪽 경계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조에는
“북으로 패하(浿河·예성강),
남으로는 웅천(熊川·안성),
서로는 대해(大海·서해),
동으로는 주양(走壤·춘천)에 이르는 강장(疆場·영토)을 확정했다”
고 나온다.
그러나 임 교수가 주제발표에서 밝힌 대로,
백제가 기원 전후 시기인 온조왕대에 이 같은 영토를 확보했다고
믿는 연구자는
없다.
후대의 상황이 온조왕대
노 교수는?
통설인 백제 고대국가의 기틀을 닦은 8대 임금
고이왕(재위
234∼286)대의 상황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그는 “3∼4세기 한성백제의 대단위 취락이 발굴된 강원 화천군 원천리 유적의 존재가 고이왕대 백제가 이곳까지 영토를 확장한 것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라고 말했다.
노 교수는 근초고왕 때 백제의 영토가 수곡성(황해도 신계)까지
확대됐다고
덧붙였다.
반면, 고조선 시대 이후 패수(패하)의 위치 또는
패수로 불린 강이?
압록강에서 대동강, 청천강, 예성강으로
계속 바뀌어 온 사실을
지적한 임 교수는?
“온조왕 본기의 강역(영토) 확정 기사는
패하를 대동강으로 인식한 근초고왕대 백제인의
인식이 투영돼 있다”며
“고이왕대가 아니라, 대동강 이남까지 영역으로 확보했던 근초고왕대의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 동북쪽 경계인 화천군 원천리 유적의 연대는 = 지난 2010년 확인된
화천군 원천리 유적은 한성백제가 춘천 등 강원 영서
지역을 영유해 내륙교역로를 확보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지만,
유적의 연대와 관련해선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렸다.
유적을 직접 발굴한 심 부장은?
한성백제 중앙양식 토기를 기준으로 3세기 후반부터 5세기 전반 사이를,
종합토론에 참여한 이성주(고고인류학) 경북대 교수는?
마구를 기준으로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후반을 각각 원천리 마을의 연대로 제시해 100년
정도의 차이가 났다.
◆ 남쪽 경계의
쟁점:
영산강 유역과 전남 남해안 일대까지 지배했는가 = 노 교수는 전북 김제
벽골제가 근초고왕의
시기가 분명하진 않지만 고사부리성(전북 고부)이 축조됨으로써
근초고왕 이전에 백제의 전북 지역 영역화가 일단락된 것으로 보았다.
이런 바탕 위에 ‘일본서기’ 신공기 49년(249)조에 나오는
백제장군 목라근자(木羅斤資)의 남방 경략이 단행됐다는 것이다.
신라를 물리치고 가야 7국을 평정한 뒤 군사를 서쪽으로 이동해 고해진(古奚津·전남 강진)에 이른 목라근자가
심미다례(沈彌多禮·신미국) 등 영산강 유역 일대 국가들을 도륙(정복)했다는 게 신공기 49년조의
내용이다.
신공기 49년조는 일본사학자들의 수정 연대로 근초고왕 24년(369)에 해당한다.
영산강 유역 공격에는 근초고왕과 태자 근구수도 함께 참전하는데, 노 교수는 한성백제가 4세기
중반쯤 심미다례 세력을 정복해 영산강 유역을 영역으로 편입한 사실을 나타내주는 사료로
이해했다.
이에 대해, 토론자로 나선 백승옥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국내 학계에서는 신공기 49년조 기사의 행위 주체를 백제로 바꿔 이해하지만,
신공기 내용의
상당 부분이 후대에 꾸며진 것이란 최근 일본 학계 연구에 따르면
근초고왕의 영산강 유역 정복 자체가 성립이 안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한성백제의 금동관과
금동신발이 출토된 전남 고흥 안동고분 등 고고학
자료에 대한 해석도 엇갈렸다.
서 교수는 느슨한 형태의 간접지배를 포함할 경우, 백제 근초고왕대 영역에 영산강 유역과 전남 남해안 지역까지 포함된 증거로 이
자료를 활용한 반면,
임영진(인류학) 전남대 교수는 영산강 유역과 전남 남해안 지역의 독자성을 입증하는 사례로 이를
제시했다.
최영창 기자
yccho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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