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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년前-오늘 1월4일-韓半島에 무슨 비극이 이번 기회에 알아두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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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481회 작성일 2013-01-04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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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共軍 개입으로 빚어진 51년 1.4후퇴의 비극!
 
 
1.6.25전쟁이 벌어지고 9.15 인천상륙작전 성공하고 9.28 서울 수복하고 그리고 10.1 운명의 38선을 통과하고--이 38선 통과시 국제법적으로 사실상 문제는 있었다고 함!- 필자주
그리고 한국군 1사단이 미군 경기병사단보다 먼저--약간 먼저 기적에 가까운 행군끝에 먼저 평양에 입성하고-
-그리고 한달여가 지난 50년 그해 11월21일 무렵, 미 7사단이 압록강변의 그 유명한 혜산진에 입성--
우리의 한국군이 먼저 수통에 먼저 압록강 물을 받아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바쳤다는 일화가 있는 그 혜산진이고 그 이름을 따서 혜산진 부대가 오랜동안 남한의 부대 정식이름으로 존속한 기간이 있었음!-
2.미 7사단이 혜산진에 입성한 그날 이미 '중국인민지원군'은 북한 접경선을 넘어 이 땅에 잠복하고 있었다.
3.그리하여, 미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50만 중국군의 파상공세에 후퇴를 거듭할 수 밖에 없었다.
** 나중에 맥아더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겠지만 성급한 북진 통일로 인한 엄청난 물적 인마살상의 대부분은 맥아더의 경솔한 다음 말에 이의를 제기못한 참모 수뇌진에 있다고 저는 봅니다.(한준구 견해)
"부하 장병들이여, 전진하라! 그리고 크리스 마스는 미국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이 말로 인해 들떠있던 미군들은 흥남 철수등의 비극과 더불어
장진호 전투의 미군 역사상 최악의 치욕 패배등으로 인해 1만여명이 얼어죽거나 굶어죽거나 포위되어 생포되거나 사살당하였다는 정설이 바로 맥아더의 경솔한 책임이란 얘기다.
(당시 영국군 수뇌부는
성급히 진격하지 말고 평양과 원산을 연결하는 토치카를 견고히 쌓고
겨울을 대비해야 한다 라고 역설하였다는 데
만일 맥아더사령관이 영국측의 말을 들었다면
아마도 중공군이 이렇게 한동안 파죽지세로 서울을 점령하고 평택등지 까지 인해전술로 물밀듯이 밀려 내려오지는 못하였리라 저는 무척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어쩌면 현재의 휴전선도 평양과 원산을 연결하는 라인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었으리라 생각되어 더욱 맥아더가 원망스럽습니다.
4.이 당시 흥남 철수 상황은 사진이나 화보 등지 그리고 짧은 흑백필름에서 얼마나 비극적인 상황이었는 지 능히 짐작이 가는 데
이 한국인의 비극적인 상황을 대표적으로 노래한 것이 그 유명한
"굳세어라 금순아" 라는 노래가 그 뒤
한동안 이산가족의 심금을 울렸고
저 한준구도 북한 주민들의 피맺힌 흥남철수 장면을 상기할 때 마다 가슴이 저미어 올 정도입니다.
가사내용은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 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들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해매었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1.4이후 나홀로 왔다.
듣는 이의 가슴을 시리게 하는 대중가요로
50년 12월15일부터 10일간 10여만명의 피란민이 유엔군 선박에
올라 흥남부두를 뒤로 한 그때의 참극을 아프게 노래하고 있다.
특히 정원을 몇배 초과한 철수 인원을 배려한 선장의 헌신적인 노력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맥아더의 과욕과 실수 및 참모들의 직언부족으로 인한 장진호 전투등의 참패는 미군 전투사에 있어서 최악의 패배로 기록될 뿐만 아니라
당시 크리스마스를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보낼 희망을 가졌던
다수의 미군중 적어도 1만명 안팎이 동사하거나 굶어죽거나 하여 제대로 전투도 못해 보고 죽어간 것도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약 3만 6천여명에서 3만 7천여명이 사망하였다는 데 이 참패를 미국측은 기억하고자
몇년전 만든 구축함에 장전호 이름의 일본식 이름인 초신호를 만들어
진수시켰을 정도입니다.
흥남 철수 당시 미쳐 가져오지 못한 미군측의 무기및 각종 장비등을 북괴측이 못 쓰게 파괴하는 장면도 저는 흑백필름을 통해 몇번 보았습니다.
5.12월31일의 중국군의 정월 공세가 있기 전 약 84만명의 서울 시민이 다시 짐을 싸고 한강을 미리 건넜으며 ---
첫번째로 서울에서 피난갈 때 즉 6월28일경 당시 최창식 공병감(대령)이 상부의 상황 판단 미스로 인한 한강인도교 폭파 지시를 조금 빨리 하여
폭파당시 수많은 피란민들이 한강다리 위에 있었음에도
최창식 대령은 명령을 거부 못하여 인마살상을 뻔히 알고도 폭파명령을 실행하였는 데 --
이당시 적어도 4시간이상의 시간을 늦추어도 무방하였다는 추후 판단이 나와 다수의 서울 시민이 한강다리 폭파당시 및 떠밀려 강에 떨어져 죽은 억울한 시민들도 부지기수 였다고 합니다.
이 당시 작전국장 장창국장군은 밀려 오는 피란민에 대처를 어찌 못하여 너무 일찍 폭파한 것을 무척 안타까워하는 회고문도 쓴 바 있고
당시 최창식 폭파책임 대령은
군 수뇌부의 책임 모면 차원에서 총살형을 당하였다고
하며
그는 억울한 가족들의 염원이 50년여의 세월이 흘러
이루어져 몇년전 명예가 드디어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2차 피란과정에서 84만명이 도강하였고 며칠뒤 1월3일 주한 미8군사령관 리지웨이(1895-1993)장군이 서울 포기를 선언하자 나머지 30만명의 서울시민이 피란길을 재촉하였다.
종전후 14년이 지나 완성한 그의 유명한 회고록인
'the Korean War'(1967년작)
다음과 같이 살얼음도 있는 살살 얼어붙은 한강을 도강하는 모습을 처절하게 기록하고 있다.
"부교의 상,하류에는 인류의 일대 비극이 연출되고 있었다. 혹한 설풍 중에 수많은 피란민들이 채 얼지도 않은 얼음 위를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 건너고 있었다.
그중에는 얕은 얼음 속에 빠지거나 넘어져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누구 한 사람 이웃을 돌볼 여력이라고는 없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거나 흐느껴 우는 사람도 없었다. 눈을 밟은 신발소리만이 가팔랐고 탄식만을 남갠 채 피란민들은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
**위의 내용은 리지웨이 사령관의 회고록의 일부 내용입니다.
6.다음은 중국군 사령관 팽덕회(1898-1974)가 정월 공세 12일 전쯤인
50년 12월19일 마오쩌둥 즉 모택동에게 보낸 전문 내용입니다.
"적군(미군및 한국군)의 사기가 한풀 꺾였다고는 보지만 아직 26만명의 병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바로 떠날 리가 만무하다. 따라서 아군(중공군)은 점진적으로 전진하는 공격 방침을 써야 합니다."(팽덕회 연보 인민출판사 1998년)
**위의 전문에서 보듯 중국군은 정월 공세를 앞두고 장기전을 점치고 있었다.
7.다음은 서울을 포기한 1.4후퇴 12일뒤쯤인 1월16일 중공 최고 지도자 모택동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이 확전 불가를 건의하였다.
"우리 중국군이 충분히 준비를 갖추고 있을 때에만 계속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북한군이 50년6월25일에서 9월28일까지 범한 중대한 과실을 다시 저지르는 꼴이 될 것이다.중국과 북한 당국의 동지들은 인내심을 갖고 필요한 준비를 모두 해두어야 한다."
***위의 전문은 보급선이 길어지고 제때에 무기 및 보급 물자가 오지 않는 다면 북한군이 당한 꼴을 또 당하니 신중을 기해 차츰 차츰 만만디 정신으로 야금 야금 땅을 먹어가자 는 의미가 포함되고 어쩌면 아마도 고구려에 의해 수나라가 보급선이 길어 고구려에 참패하고 나라까지 말아먹었던 기억을 당시 팽덕회
와 모택동은 회상하였을 것이다.--필자주
8.그러나, 위의 신중론이 담긴 전문을 보낸 지 9일뒤인 1월25일에 시작된
유엔군의 반격으로 평택근처까지 내려간 유엔군의 후퇴선을 서울쪽으로 끌어 밀어 올리기 시작하여 50여일뒤 쯤인 3월25일 다시 서울을 탈환하게 되었고 전선은 이내 38선 근처에서 밀고 밀리는 진퇴를 거듭하는 소모전으로 상호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9.다음에 상술할 기회가 있겠지만
6.25전쟁은 내전 즉, civil war 인면 뿐만 아니라 분명 국제전이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국제대리전이었다는 해석도 많다.
10.대국굴기를 외치며 세계 양대 제국의 반열에 오른 중국은 100여년전의
굴욕적인 중국대륙 침탈당하는 순망치한의 아픔을 되풀이 하지는 않을 것이며 나아가 동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려 최근 10년간의 연 경제성장율 10%의 경제력으로 재무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북한도 6.25전쟁의 학습효과로 각종 미사일및 핵무장으로 다시 우리를 위협하고 있어 지난 수십년간 몇번의 일촉즉발 직전까지 간 위기일발이 있었는 데 절대 전쟁은 앞으로는 있어서는 안될 것이므로 우리 한국의 한미동맹과 한중 관계 한러관계등이 선린외교에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프러시아의 전략가 클라우제비츠가 한 명언!
" 전쟁은 정치,외교의 연장선상에 있다."
@@@위의 내용의 80%는 경희대학교 학부대학장이며 근현대사 전공교수인 허동현 교수의 기고문임을 참고로 알려드립니다.
@@ 위의 내용중 혹시 이견이 있거나 사실과 다른 것이 있다면
특히 숫자상으로 틀린것이 있다면 반드시 댓글 올려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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