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1960년 4·19혁명 직후
북한주도의 남북통일이 가능하다고 판단,
실제로 대남전략 추진에 들어갔다는 문서가
미국에서
공개됐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북한의 대남전략 추진은
남한에서 군부 쿠데타가 발발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던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공공 싱크탱크인 우드로윌슨센터(WWC)는 2013.1.17일
옛 소련의 평양주재 대사였던 알렉산더 푸자노프가
1960년 3∼12월까지 작성한 20건의 저널(개인기록)을
분석한
내용을
보고서를 통해 공개했다.
푸자노프 전 대사는 7월 25일자 저널에서
“김일성이 ‘남한 문제에 대한 발빠른 정책결정을 위해
남한문제중앙국(CBSKI)을 설립했다’고 말했다”면서
“CBSKI 설립은 남한내 지하조직을 부활시키고 평화통일
선전작업을 위한 것”이라고 전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김일성은 푸자노프 전 대사에게
“남한 출신의 인민군 10만 명 가운데 일부를 통일인력으로
양성하기 위해 공산대학을 설립했다”고 언급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북한 지도부는 4·19혁명이 진정한 계급혁명으로 발전하지 않을 것으로 봤지만
남한내 진보단체와
접촉을 시도하면서 대책수립에 나섰던 것으로 밝혀졌다.
오스트만 국장 등은 보고서에서
“김일성은 당시 북한이 정치·경제적으로 남한보다 안정돼 있기 때문에
북한주도 통일이 가능할 것으로 자신했다”고 푸자노프 전 대사의 기록을 인용해 밝혔다.
보고서는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는 4·19혁명 직후
남북통일이 가능성의 단계가 아니고 실제로 임박한 것으로 판단했지만
결국 남한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수포로 돌아갔다”고 전했다.
푸자노프 전 대사는 4월 21일 작성한 저널에서
“김일성은 이승만이 고령이어서 업무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에 교체가 불가피하지만
이기붕 자유당 의장은 인기가 없고,
장면 민주당 대표는 가톨릭 신자인 데다가 적합하지 않고,
장택상 반공투쟁위원장은 친일 성향이 있다고 평가했다”고 전했다.
특히 김일성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1959년 처형된 조봉암 진보당 위원장에 대해서는
“그 부분과 관련해서는 우리도 실수한 게 있다”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워싱턴 = 이제교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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