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31 19:14수정 : 2012.12.31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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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
‘2012년을 점령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떠난 ‘민주주의자’ 김근태 선생의 1주기가 엊그제 지나갔다. 이번 대선 결과를 알면 지하에서 얼마나 상심하실까 마음이 무겁다.
유신에 이어 전두환 군사독재까지 민주주의가 유린되고 많은 지식인이 침묵과 보신에 긍긍할 때 고인은 금단의 벽에 도전했다. 제적-강제징집-지명수배-위장취업-노동운동-민주화운동-투옥-고문 등 한 시대의 고난을 온몸으로 겪었다. 민청련을 조직할 때는 두꺼비를 그 상징으로 삼았다. 뱀에게 잡아먹히면서도 자신의 독성으로 끝내 뱀의 생명을 빼앗고, 그 뱀을 자양분 삼아 뱃속의 새끼들이 알을 까고 나오게 하자는 각오였다. 그렇게 5공의 철벽을 뚫었다.
그 시대에 고인은 결코 관념적인 민주주의자가 아닌 파수꾼이었다. 동시대인으로 민주사회에 무임승차한 5060세대와 유신·전두환 독재의 참혹함을 잘 모르는 2030세대는 영화 <남영동 1985>에서 ‘역사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인이 생애를 걸고 추구한 가치는 인간의 존엄이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해 반민주세력과의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정치권에 입문해서도 그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동교동계와, 노무현 정부에서는 친노그룹과 대립하면서 정치개혁을 위해 힘겹게 싸웠다. 3선 의원과 장관을 지내면서도 그의 삶은 조금도 삿됨이 없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오는 고문을 당하고도 “그의 얼굴에 늘 보이는 미소는 그가 독재정권에서 당했던 고문의 흔적을 가렸다”(<뉴욕 타임스>). 올곧게 산 맑은 심성이 고난의 생애에도 항상 밝은 미소를 짓게 했다.
에두르지 않고 말해, 반란단체를 만들지 못하게 하느라 정당이 있고, 폭력혁명을 막고자 선거제도가 있는 것이다. 한데 유신·전두환 군사독재는 정당과 선거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김근태 선생 등 민주인사들이 육탄으로 맞섰다. 이런 사정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5년의 실정과 폭정으로 정권교체의 열망이 높았음에도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민주진보진영으로서는 정당·선거제에 본질적 의구심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고인이 생명을 걸고 싸웠던 유신·전두환 독재세력은 건재하다. 국회·언론·학계·검경·재계·대형교회에 포진한다. 여기에 ‘유신에 중독’된 다수의 국민이 좀체 해독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고인이 그토록 고치고자 했던 민주당의 고질병도 선거와 정당의 존재이유에 부정적인 한몫을 한다. “지려야 질 수 없다”던 대선이 결국 4·11 총선의 판박이가 될 만큼 국민의 뜻도, 시대정신도 반영하지 못했다. ‘변할수록 옛것을 닮아가는’ 프랑스혁명 뒤의 바로 그 모습이다. ‘탕평인사’의 첫 인물이 극우 인사의 등용이듯이 권력은 회귀하는데 야당 의원들이 ‘정치귀족’으로 안일하게 지낸다면 야당 후보를 찍은 1470만은 절망을 넘어 공황상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전혀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다. 김근태 선생의 신앙이었던 성서(구약)의 어떤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고 바른 쪽을 택한 ‘남은 자’들, 정의감에 불타는 2030 젊은이들, ‘1000배 사죄’에 나선 민주당 초선들이다. 김근태 선생은 이근안 무리가 라디오에 왈츠곡을 틀어놓고 고문을 하던 그 절망의 순간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결국 ‘희망’은 고인이 우리에게 남겨준 소중한 메시지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64세의 생애를 의롭고 치열하게 살다 가신 김근태 선생의 영면을 다시금 기원한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