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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868회 작성일 2017-03-04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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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惡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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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악 그 자체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비상식이 상식 덮을 때마다 민족 위태로워져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

지난 2월 하순,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에 의해 진주 용산고개 일대에서 한국전쟁 당시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유골이 상당수 발견되었다. 학살 당시의 목격자에 의하면 용산고개 3개 골짜기 5개 지점에 718구의 시신이 매장되어 있다고 한다. 카빈소총, 5구경 권총 및 M1 소총으로 살해당한 이들은 대부분 ‘보도연맹’에 연루된 양민들이었고, 살해 총기를 근거로 추정컨대 살해자들은 당시의 경찰과 국군이었다고 한다. 도대체 무엇이 한 집단으로 하여금 다른 집단의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게 했을까. 도대체 무엇이 다른 사람을 ‘죽이고 싶도록’ 밉게 만들었을까.
 
테리 이글턴은 “악이란 이해 너머에 있는 것, 이해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악의 치열성이고 절대성이다. 악인들은 본인들이 악하다는 생각을 절대 하지 않는다. 다시 이글턴을 인용하면 “악이란 자기 너머에 있는 어떤 것, 가령 대의(大義) 같은 것과 아무런 관련을 갖고 있지 않다.” 악은 악 그 자체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악인들은 자신들을 향한 모든 비난에 대해 (그들의 입장에서는) 정당하게(?!), 진실하게(?!) 분개하는 것이다. 그들의 억울함과 분노는 가짜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폭력에 가담한 많은 사람들이 개인 단위에서는 양심적이고 선하며 순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선한 ‘개인’들을 악한 ‘집단’으로 몰고 갈까. 그것은 바로 사회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그러나 개인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사회적 ‘시스템’이다. 해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보여준 것처럼, 600만 명의 유대인 학살에 깊이 연루되었던 나치 전범 아이히만은 자신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 당시 그를 진찰했던 여섯 명의 정신과 의사들은 그의 정신 상태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심지어 “정상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대법원에서 그의 항소를 지켜보고 그를 자주 방문한 한 성직자는 실제로 그가 “매우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판단하였다. 이것이 바로 아렌트가 이야기한 바, “악의 평범성”이다. 아이히만은 자신은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했는데, 이 “명령”이 바로 선한 개인들을 악인으로 만드는 시스템의 (허상이라는 의미에서) 시뮬라크르(simulacre)이다.
 
나치들은 소위 “민족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이념에 포획되어 ‘민족’과 ‘혁명’의 시뮬라크르에 충실했던 사람들이다. 알랭 바디유에 의하면 정치적 시뮬라크르는 “충성의 형식을 실제로 지니기 때문에… ‘어떤 자’에게 희생과 줄기찬 참여를 요구”하며 “전쟁과 학살을 그 내용으로 한다.” 말하자면 ‘명령’ ‘민족’ ‘혁명’ 이런 기표들이 형식(허상)으로서의 시뮬라크르라면, 전쟁과 학살은 그 내용(실상)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DA 300


한 사회를 집단 광기로 몰고 가는 여러 가지 시뮬라크르들이 있다. 근대 국가의 형성과 발전의 과정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것들이 바로 ‘민족’ ‘애국’ ‘혁명’과 같은 시뮬라크르들이다. 이런 기표들은 대부분 ‘국가주의’의 기의(記意)를 가지고 있고,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개인이나 집단들을 ‘애국’의 이름으로 적대시한다. 대신 그것들은 그 안에 참여하는 개인들을 동질성의 확고한 틀로 묶어내며, 그것에 열광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정의의 투사’라는 판타지를 갖게 만든다. 그들은 개인 단위에서 자신들이 겪은 비극들을 ‘국가를 위한 희생’으로 승화시키며, 헌신의 숭고미(崇高美)에 빠져 자신들을 역경과 고통으로 몰아넣은 구조적 악을 망각한다. 자신들이 지나온 불행의 역사를 조국을 위한 헌신으로 해석할 때, 그들은 피해자가 아니라 숭고한 전사로 둔갑되는 것이다.
 
지금은 근대가 아니라 후기 근대 혹은 탈(脫)근대의 21세기이다. ‘상식’에 근거하여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는 문화가 “상상적 공동체”(베네딕트 앤더슨)로서의 민족보다 더 중요한 시대이다. 상식이 존중될 때, 민족에 집착하지 않아도 민족은 아무 탈 없이 무사하다. 비상식이 상식을 덮을 때마다 민족이 위태로워지고, 그 틈에서 애국애민의 판타지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시스템이 가동되는 것이다.
 
오민석 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영문학


[출처: 중앙일보] [삶의 향기] 악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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