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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인-인생 10대 터닝 포인트-5년간 참고로 알아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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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4,271회 작성일 2012-12-23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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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안서 내내 울던 朴 "심장에 칼 꽂힌듯…"

[중앙일보]입력 2012.12.20 01:32 / 수정 2012.12.20 15:30

박근혜 운명 가른 10장면 <상>
34년 만에 청와대 돌아가는 대통령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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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가 34년 만에 청와대로 돌아간다. 박근혜는 1979년 11월 21일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9일장을 치른 뒤 두 동생 근령·지만과 쓸쓸히 청와대를 떠났다. 그가 2013년 2월 25일 국민의 환호 속에 18대 대통령으로 청와대에 입성한다.

 한때 교수를 꿈꾸던 대통령의 딸이 한국의 첫 여성 대통령이 되기까지 박근혜가 걸어온 삶의 궤적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부모를 모두 흉탄에 잃었고, 자신도 목숨을 앗아갈 뻔한 테러를 당했다. 야당 대표를 지냈지만 대선 경선에서 패배한 뒤 비주류의 설움도 톡톡히 겪었다. 박근혜의 운명을 가른 열 장면을 골라봤다.

① 1974년 어머니 피격 사망

 박근혜는 74년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 그르노블대의 어학 과정에 들어갔다. 그해 8월 박근혜는 친구들과 여행 도중 대사관 측으로부터 급히 귀국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고 하숙집으로 돌아갔다. 대사관 직원들은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만 할 뿐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 속에 드골 공항에 갔다가 가판대에 꽂힌 신문 제목을 통해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됐다. ‘Madam Park, Assassinated(육 여사 암살되다)’.

 당시 상황에 대해 박근혜는 “날카로운 칼이 심장 깊숙이 꽂힌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고 회고했다. 귀국 비행기에서 내내 울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박근혜에겐 새로운 역할이 주어졌다. 22세의 퍼스트 레이디였다. 박근혜는 유신 정권에서 5년간 퍼스트 레이디로서 각종 행사를 주관하면서 국정을 보는 식견을 키워 갔다. 박정희 대통령과 아침식사 때는 조간신문을 놓고 시사토론을 벌였다. 박 대통령은 장녀가 지도자의 자질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② 아버지마저 총탄에 잃어

 79년 10월 26일 박근혜는 다음 날 빡빡한 일정 때문에 평소보다 일찍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새벽 1시30분쯤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잠시 후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이 관저로 찾아와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라고 전했다.

 이때 박근혜가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다는 것은 그의 안보관과 관련해 외국 언론에까지 인용된 유명한 일화다. 다시 찾아온 부모의 비극에 박근혜는 극심한 충격을 받았다. 박근혜는 피 묻은 아버지의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빨면서 오열했다.

 박근혜는 그해 11월 청와대를 나와 부모가 살았던 서울 신당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박근혜는 아버지가 쓰던 낡은 책상에 앉아 전국 각지와 외교 사절들이 보낸 추모 편지를 읽고 일일이 답장하는 일로 소일했다. 박근령은 “어쩌다 외출에서 돌아오면 언니는 혼자 TV문학관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염량세태(炎凉世態)는 박근혜의 가슴속 깊이 ‘배신의 트라우마’를 새겼다. 아버지 살아생전엔 깍듯하게 대하던 사람들이 세상이 바뀌자 언제 봤느냐는 식으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일기장에 이런 글을 남겼다.

 “지금 상냥하고 친절했던 사람이 나중에 보니 이(利)에 기가 막히게 밝은 사람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덧없는 인간 사이다.”(81년 3월 2일)



③ 대구 달성서 정계 입문

 박근혜를 세상에 다시 불러낸 것은 1997년 외환위기였다. 그는 “외환위기 이후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면서 ‘나라가 이렇게 흔들리는데 나 혼자만 편하게 산다면 죽어서 부모님을 떳떳하게 뵐 수 있을까’란 질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고 말했다. 97년 12월 10일 15대 대선을 8일 앞두고 박근혜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정치에 투신했다.

 한나라당이 대선에서 패배하자 1998년 4·2 재·보선은 당의 명운이 걸린 중요한 선거가 됐다. 박근혜는 원래 아버지가 젊은 시절 교편을 잡았던 문경-예천 출마를 마음먹었다. 하지만 당에서 판세가 만만찮은 대구 달성 출마를 요청해 오자 박근혜는 군말 없이 수락했다.

 국민회의가 달성에 내보낸 엄삼탁 후보는 만만찮은 상대였다. 정권 초라 자금과 조직을 앞세운 여당 후보의 프리미엄도 컸다. 당시 달성 선대위원장이던 강재섭이 “선거자금이 얼마나 있느냐”고 묻자 박근혜는 간단히 “없습니다”라고 말해 강재섭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대신 박근혜는 하루에 10만 보 넘게 걸으면서 유권자들과 대면 접촉을 늘리는 데 전력투구했다. 막판까지 여론조사에선 계속 밀렸지만 박근혜는 여론조사에 안 잡히는 ‘바닥 민심’의 힘을 믿었다. 결국 뚜껑을 열어 보니 박근혜의 완승이었다. 정치공학을 멀리하고 바닥 민심에 직접 호소하는 박근혜의 정치 스타일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④ 2002년 김정일 면담

 박근혜는 2002년 5월 11일부터 3박4일간 평양을 방문했다. 유럽-코리아재단 이사 자격으로 북한 민족화해협의회의 초청을 받은 것이다. 당시 그는 이회창과의 갈등 끝에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한국미래연합 창당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정일은 자신의 전용기를 중국 베이징으로 보내 박근혜를 태워왔을 정도로 극진한 예우를 했다. 5월 13일 저녁 김정일이 예고 없이 박 전 위원장이 머물던 백화원영빈관을 찾아왔다. 박정희의 장녀와 김일성의 장남 사이에 이뤄진 역사적 회동이었다.

 

두 사람은 속기사 한 명만 배석한 상태에서 한 시간 동안 면담했다. 박근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솔직하고 거침없는 사람이었다. 화법과 태도는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김정일은 68년 북한군 특수부대의 1·21 청와대 습격사건에 대해 


“당시 극단주의자들이 일을 잘못 저질렀다.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 일을 저지른 사람들은 다 응분의 벌을 받았다”고 사과했다


박근혜가 “답방을 하기로 했으니까 그 약속을 지키면 어떻습니까”라고 하자, 김정일은 적당한 기회에 가겠다고 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하겠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⑤ 천막당사 ‘선거여왕’으로

 

2004년 3월 24일 한나라당 대표로서 처음 출근한 박근혜는 여의도 국회 앞의 10층짜리 당사 건물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대신 당원들과 함께 당사 입구의 현판을 떼어낸 뒤 1㎞ 정도 떨어진 여의도 중소기업전시장 부지의 천막 당사로 들어갔다. 당시 한나라당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으로 침몰 직전이었다. 총선에서 50석도 어렵다는 여론조사도 나왔다.

 

구원투수로 등판한 박근혜는 당의 통렬한 반성을 상징하는 이벤트로 소장파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천막당사로 당을 옮겼다. 당직자들은 황사를 막기 위해 마스크를 쓴 채 근무했고, 곳곳에서 빗물이 새는 통에 양동이를 받쳐야 했다. 혹독한 반성의 시간은 84일간 계속됐다. 선거운동 기간 박근혜는 “부패·기득권 정당에서 벗어나겠다. 마지막으로 한번 기회를 달라”며 읍소하며 전국을 누볐다. 악수를 너무 많이 해 손이 붓는 바람에 선거 닷새 전부턴 오른손에 붕대를 감고 다녔다.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121석이라는 예상 밖의 선전을 거두며 기사회생했다. 박근혜가 보수 진영의 새 아이콘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는 순간이었다. 박근혜는 그해 6월 염창동으로 당사를 옮겨서도 ‘천막당사 정신’을 강조하며 각종 개혁을 진두지휘했다.


박근혜 운명 가른 10장면 <하>

⑥ 2006년 신촌 테러
⑦ 2007년 경선 승복
⑧ 2010년 세종시 본회의 연설
⑨ 2011년 비대위원장 복귀
⑩ 2012년 과거사 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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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복' 입고 본회의 선 박근혜, MB계에…

[중앙일보]입력 2012.12.21 01:01 / 수정 2012.12.21 10:16

박근혜 운명 가른 10장면 (하) 보수 위기마다 그의 리더십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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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2006년 신촌 테러

2006년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 대표로서 동분서주하던 박근혜는 5월 20일 오후 7시20분 서울 신촌 현대백화점 앞에 도착했다. 박근혜가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의 지원유세를 위해 연설차량에 오르려는 찰나 갑자기 나타난 괴한의 손길이 박근혜의 얼굴을 스쳤다. 박근혜는 오른쪽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테러범 지충호가 커터칼로 박근혜의 얼굴에 10㎝가 넘는 상처를 입힌 것이다. 벌어진 속살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상처는 깊었다.

 박근혜는 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긴급 후송됐다. 박근혜는 응급실에서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유정복 비서실장을 “나 때문에 많이 놀라셨죠”라며 안심시켰다. 박근혜는 두 시간여에 걸친 수술로 60바늘을 꿰맸다.

 수술을 받고 안정을 취하던 중 유 실장이 지방선거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하자 박근혜는 대뜸 “대전은요?”라고 물어 화제를 뿌렸다. 

당시 대전은 염홍철 시장이 지방선거 직전 한나라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으로 옮긴 상태여서 박근혜가 필승을 다짐하던 곳이었다. 

실제로 박근혜는 5월 29일 퇴원하자마자 오른뺨에 테이프를 붙인 채 대전으로 달려가 불완전한 발음으로 한 표를 호소했다. 이런 박근혜의 투혼은 5·31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대전을 비롯해 서울·경기 등 광역단체 12곳을 휩쓰는 결과를 가져왔다.



⑦ 2007년 경선 승복

 

2007년 8월 20일 오후 2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개표가 진행 중이던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 경선에서 대격돌을 벌였던 박근혜와 이명박이 함께 무대 위에 올라갔다. 


당시 박근혜의 하얀색 재킷 오른쪽 주머니엔 후보 수락 연설문이, 왼쪽 주머니엔 경선 승복 연설문이 들어 있었다. 단상에 오르기 직전 박근혜는 유정복 비서실장으로부터 “지금까지 4분의 1가량 개표가 진행됐는데 대표님이 2000여 표 이기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유정복은 “절대 강세 지역인 충남·북과 강원은 아직 개표가 시작되지도 않아 당선이 확실해 보인다”는 관측도 곁들였다. 이 때문에 박근혜는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그 뒤 개표에선 두 사람의 득표 차는 432표로 줄었고 이미 여론조사에서 박근혜가 2800여 표 뒤져 있었기 때문에 역전패가 확정됐다. 오후 3시50분쯤 유정복이 단상에 올라가 박근혜에게 “죄송합니다. 선거인단에서 이겼지만 여론조사에서 져서 결국 지는 것으로 나왔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순간 박근혜는 얼굴이 흐려졌지만 이내 담담해지면서 “안 된 거죠? 알았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잠시 뒤 승복 연설에서 왼쪽 주머니에 있던 원고를 꺼내 또박또박한 어조로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한다. 


경선 과정의 모든 일들을 이젠 잊어버리자. 이명박 후보님께서 반드시 정권 교체에 성공해 주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당시 박근혜가 워낙 강렬한 인상을 남긴 탓에 지금도 당시 이명박의 후보 수락 연설보다 박근혜의 연설을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다.



⑧ 2010년 세종시 수정 반대

 
박근혜는 2010년 6월 29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세종시 수정안의 반대 토론자로 직접 나섰다. 2005년 4월 당시 당 대표 자격으로 본회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한 지 5년2개월여 만에 본회의 발언대에 나선 것이다. 흔히 그의 ‘전투복’이라고 불리는 회색 바지 차림이었다. 



박근혜는 짧지만 강한 어조로 한나라당 이명박계 의원들이 제출한 세종시 수정안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세종시 문제는 미래의 문제다. 미래로 가려면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며 약속과 신뢰의 정치를 강조했다.

 

박근혜에게 세종시 문제는 조금도 타협할 수 없는, 자신의 정치 생명과 직결된 사안이었다. 박근혜는 야당 대표 시절이던 2005년 이재오·김문수 등 수도권 의원들의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세종시법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키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당내 반발이 계속되자 박근혜는 그해 2월 23일 열린 의원총회에서 이 문제를 표결에 부쳐 찬성 46, 반대 37로 찬성 당론을 정했다. 그러나 의총 직후 열린 본회의에 한나라당 의원들은 불과 23명만 참석했으며, 이 중 8명만이 세종시법에 찬성표를 던졌다. 


박근혜가 이 같은 정치적 위기상황을 감수하면서까지 세종시법을 지지한 이유는 국토균형 발전에 대한 철학 때문이었다. 결국 2010년 한나라당 박근혜계와 야당이 대부분 반대표를 던지면서 세종시 수정안은 105 대 164로 부결됐다. 그가 세종시 논란 과정에서 보여준 일관된 자세 덕분에 충청권의 민심을 붙잡을 수 있었고 이게 이번 대선 승리의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⑨ 2011년 비대위원장 취임

 

한나라당은 지난해 8월 서울시 무상급식 투표 무산과 연이은 10월 서울시장 보선 패배로 심각한 위기 국면에 처했다. 박근혜의 당초 대선 구상은 2012년 4월 총선 국면에서부터 정치 활동을 재개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디도스 사건이 터지면서 결국 홍준표 대표 체제가 붕괴하자 박근혜는 어쩔 수 없이 2004년에 이어 또다시 당의 구원투수로 조기 등판하게 됐다.

 

그가 당의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취임하던 12월 19일은 공교롭게도 북한이 김정일 사망을 공표한 날이었다. 박근혜는 취임식 직후 북한 관련 긴급 회의를 주재하는 것으로 공식 임무를 시작했다.

 

박근혜는 김종인·이상돈·이준석 등 기존에 당내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외부 인사들을 대거 비대위에 끌어들여 당의 체질을 바꾸려 했다. 올 1월 돈봉투 사건까지 터지면서 한나라당의 이미지가 회복불능 상태가 되자 박근혜는 아예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당의 상징색도 파란색에서 붉은색으로 바꾸는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했다. 당 정강·정책에도 경제민주화 개념을 대폭 반영시켜 한나라당 시절보다 이념적 지표를 좌클릭 시켰다.

 

4월 총선 공천은 당의 주류가 이명박계에서 자연스럽게 박근혜계로 넘어가는 계기가 됐다. 정권심판 여론이 뜨거웠지만 박근혜는 새누리당이 과거 한나라당과 다른 새 정치세력이란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 주력했다. 이런 전략이 주효해 새누리당은 4월 총선에서 152석이란 예상 밖의 대승을 거뒀다. 12월 대선의 예고편이나 마찬가지였다.



⑩ 2012년 과거사 회견

 지난 8월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박근혜에게 최대 아킬레스건은 과거사 문제였다. 그가 유신·정수장학회 등의 문제에서 좀처럼 명쾌한 입장을 내놓지 못하면서 야권은 집중적으로 이 문제를 공격했다. 특히 인혁당 사건에 대한 ‘두 개의 판결’ 발언은 당내에서조차 “법적 인식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로 후폭풍이 거셌다.

 

이에 박근혜는 9월 24일 유신 시절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사과하는 긴급 회견을 열었다. 박근혜는 “정치에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음은 과거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래야 할 민주주의 가치”라며 “그런 점에서 5·16,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밝혔다. 


기존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적과 과오를 반반씩 언급하던 입장에서 한걸음 더 나간 것이다. 그는 “국민이 저에게 진정 원하시는 게 딸인 제가 아버지 무덤에 침을 뱉는 것을 원하시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고도 했다.

 



이날 회견은 그가 과거사 논란에서 탈출하는 전환점이 됐다. 박근혜는 이후 한광옥 전 민주당 대표를 국민대통합위 수석부위원장으로 영입해 적극적으로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화해를 추진했다. 


그는 20일 대통령 당선인 대국민 인사에서도 “과거 반세기 동안 극한 분열과 갈등을 빚어 왔던 역사의 고리를 화해와 대탕평책으로 끊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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