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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의 귀감-백병원 86세 **백낙환 이사장-80주년 인터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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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815회 작성일 2012-12-22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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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병원 80주년’ 백낙환 이사장

“아픈 사람 상대로 돈 벌기 싫어 



병원 늘릴 때 부유층 지역은 안 가”




송현숙 기자 song@kyunghyang.com



ㆍ89년 종합대학 되면서 총장 취임



ㆍ학생회서 ‘재산사유화’라며 농성



   … 학교 경리장부 다 보여주자 승복



생후 5달 만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아버지는 재혼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서 자란 소년은 10대 들어 서울의 큰 집으로 가 곁방살이를 했다. 고달픈 처지였지만 이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큰아버지의 든든한 믿음과 기대 덕분이었다. 


늘 개인적인 성공보다 사회에 대한 책임을 앞세웠던 큰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소년은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려가고 있다. 

당대의 명의였던 큰아버지처럼 의사가 됐고, 6·25 전쟁 중 큰아버지가 납북되자 유산처럼 남겨진 병원을 살려내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수많은 위기를 겪으면서 파산 직전의 병원을 살려냈고, 

이를 전국 5개의 병원체인으로 키웠다. 큰아버지의 또 다른 꿈이었던 대학도 세웠다. 



백병원과 인제대학교 이사장인 




백낙환 박사(86) 얘기다. 






그가 인생을 걸다시피 하며 키운 백병원이 올해 설립 80주년을 맞았다. 지난 11일 서울 저동의 백병원 인제대 이사장실에서 그를 만났다. 평생 강골이었던 백 이사장은 지난 여름 발을 헛디디며 부상을 입어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백 이사장의 방에 들어서자 먼저 정면에 걸린 백인제 박사의 초상화가 눈에 띄었다. “큰아버지는 늘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한결같은 가르침을 삶으로 보여주셨어요. 제게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모범을 보여주셨죠. 큰아버지가 납북되면서 그가 세웠던 꿈이 제 꿈이 되었습니다.”






백낙환 인제대학교 이사장이 지난 11일 서울 저동 백병원 내 인제대 이사장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백 이사장은 평생을 큰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을 위해 달려 왔다고 했다. 큰아버지가 납북된 후 파산 직전의 병원을 살리기 위해 의사로, 돈을 꾸러 다니는 사람으로, 원무과장으로 1인 3, 4역을 하면서 백방으로 뛰었다. 




그 덕에 병원의 형편이 좋아지면서 부산(1979)과 상계(1989), 일산(1999), 해운대(2010)에 병원을 늘려갔다. 부유층이 있는 지역은 피하고 서민이나 중산층이 많은 지역을 택했다. 아픈 사람들에게서 돈 벌 생각이 없었다. 




병원들이 자리를 잡아갈 무렵 대학 설립에 나섰다. 교육을 통해 나라와 겨레를 구할 인재를 양성하고 싶었던 것이 큰아버지의 또 다른 꿈이었다. 




인제대학교 교명도 큰아버지의 이름을 땄다. 



백병원의 ‘인술제세(仁術濟世)’(참 인술로 세상을 구한다) 정신에

인제대의 ‘인덕제세(仁德濟世)’(어짊과 덕으로 세상을 구한다)


라는 건학이념이 더해졌다. 



1979년 80명 정원의 인제의과대학으로 출발한 인제대는 1989년에 종합대학으로 승격했고, 현재 8개 단과대학에 14개 학부, 30개 학과, 재학생 1만5697명의 규모로 성장했다. 

백 이사장은 그러나 인제대의 외형적인 성장보다 투명한 경영, 윤리 경영이란 평판을 더 소중히 여긴다. “1989년에 종합대학이 되면서 제가 초대 총장이 돼 12년간 재임했어요. 그러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소속 학생회가 불신임을 결의했지요. 재단이 학교재산을 사유화했다는 겁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학생 대표에게 학교 경리장부를 모두 공개했습니다.”



학교가 경리장부를 공개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총장실을 점거했던 학생들은 일주일 만에 농성을 풀었다. 누구에게나 떳떳하게 모든 장부를 공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경영원칙에 학생들이 승복한 것이다. 

많은 대학이 갖고 있는 또 다른 고질병을 인제대는 갖고 있지 않다. 교수 채용비리 얘기다. 인제대 한 교수의 고백이다. 

“손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대학 문을 두드렸어요.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녔지요. 이런저런 이유로 안 되더군요. 일류대 출신이 아니어서 안 되고, 학위받은 곳이 미국이 아니라서 안 되고, 연고가 없어서 안 되고…. 돈을 요구하는 대학들도 많았습니다.” 



그는 7년 동안 전국의 대학을 돌며 교수직에 31번 지원했지만 모두 떨어지고 32번째 인제대에 지원해 임용됐다. 


그 과정에서 여러 대학의 부정직하고 불투명한 교수채용 과정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이 교수는 재임하면서 윤리 경영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고 새롭게 감명을 받았다. 



백 이사장은 “학교를 설립하자 ‘아주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다”고 했다. 스스로 지역사회의 실세라고 믿는 이들이 막무가내로 찾아와 자신의 친인척을 교수로 임용해 달라는 청탁이었다.



“아마 그들의 요구를 다 받아주었다면 인제대학교 교수진은 거의 모두 낙하산부대로 채워졌을 거예요.” 


후환을 두려워하는 내부의 시선도 있었지만 백 이사장은 “나는 압력에 강한 사람이다. 


누르면 누를수록 일어나는 오기가 있다. 불이익은 단 한번도 없을 테니 걱정 말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이런 일은 애초에 발을 못 딛게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이렇게 자리잡은 ‘실력 우선주의’는 어느덧 지역에서 유명해졌고, 이 학교 교수들은 모두 실력있고 떳떳하다는 자부심을 갖고 산다고 한다. 

그는 학생들에게도 실력을 강조한다. ‘정직·성실·근면’은 백 이사장 가족의 가훈이자 인제대의 교훈이다.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한 것 같지만 지키기는 쉽지 않은 덕목이다. 

세속적인 성공만을 좇는 의사 사회의 분위기에 대해선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의사라는 직업은 봉사하는 자리입니다. 돈을 버는 자리가 아니죠. 병원은 병을 고쳐주는 곳, 사회에 봉사하는 곳입니다.” 전국 어느 대학이든 의대의 합격선이 가장 높지만 소명의식을 가진 학생들이 그리 많지는 않은 풍토에서, 그는 의술로 세상을 구해야 한다고 늘 학생들에게 강조한다. 인성을 갖춘 좋은 의사를 기르는 것이 인제대 의대의 가장 큰 목표다.

또한 인제대와 백병원에는 약품 납품 등과 관련한 리베이트도 없다. 교수들이 외부 프로젝트를 수주할 때 백 이사장이 직접 다 체크한다. 이사장이 이 명단을 챙기고 감시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교수들이 당연히 조심할 수밖에 없다.

백 이사장은 병원을 운영해 번 돈 대부분을 장학회 몇 곳과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데 쓴다. 1989년엔 서울 약수동의 집을 팔아 인당장학회를 만들었다. 1990년부터 22년 동안 2145명의 중·고·대학생에게 17억6500여만원을 지급했다. 장학금을 받아 공부한 학생으로부터 엽서나 편지를 받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다고 했다. 가끔 사무실에 사회복지사가 찾아오는데, 지갑에 있는 몇푼까지 탈탈 털리면서도 흐뭇하다고 했다. 물욕이 없는 것은 집안 내력인 것 같다고 했다. 재산도 별로 없지만 이것도 자녀들한테 물려줄 생각이 없다. 대학까지 보냈으니 그만하면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산의 32평 백 이사장 사택은 세면기며 가전제품 등을 고치러 가끔 들르는 수리공들이 자기 집보다 못하다고 말할 정도다. 어렸을 때부터 친척집에서 곁방살이를 했던 경험, 파산 직전의 백병원을 살리느라 동분서주하던 경험이 있어 자연스럽게 절약이 몸에 뱄다고 한다. 학교 교수들에겐 ‘짠돌이’로 통한다. 주로 6000~7000원짜리 칼국수나 복국 등 일품요리를 시키는데, 계산은 법인카드가 아닌 개인카드로 한다. 



백 이사장에겐 그만큼 유명한 아우가 있다. 진보학자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가 이복동생이다. 백 이사장은 백낙청 교수에 대해 말할 때 “동생이기 전에 참으로 귀한 사람”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백 교수는 백씨 가문의 올곧음을 그대로 물려받았어요.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일제시대 때도 창씨개명을 거부했듯 낙청이도 유신 때 소신을 굽히지 않고 독재정권을 향해 시퍼런 사상의 칼을 세웠습니다. 재야에서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지주로서 많은 이들의 사표가 됐고 <창작과비평>을 창간해 민주화에 목말랐던 지성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죠.” 백낙청 교수는 미국 유학 중 군에 입대하겠다며 귀국한 일로 유명하다. 북한이 고향인 만큼 형제 모두 통일문제에 관심이 많다. 백 이사장은 인제대에 통일학부도 만들었다. 학교에서 하는 통일관련 세미나 때 만나기도 하고, 다른 학교 행사에 백 교수에게 특강을 부탁하기도 한다.

이러다보니 그의 이념 및 정치 성향이 가끔 다른 사람들의 입초에 오르내릴 때가 있다. “자기 일만 잘하면 됐다고 생각합니다. 동생 길은 동생의 길이고, 나는 정치적 성향이 없습니다. 내가 북한과 통일문제에 관심이 많다 보니 때때로 나를 친북 좌파적 성향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내 목표는 의술과 교육으로 사회에 공헌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는 신문을 좋아해 매일 빠뜨리지 않고 본다. 조·중·동 등 보수신문과 경향신문·한겨레 등 색깔이 다른 신문들 모두 고루 읽는다고도 덧붙였다. 



올해 86살인 백 이사장에겐 꼭 이루고 싶은 두가지 꿈이 남았다. 인제대를 큰아버지가 꿈꿨던 민족의 대학, 세계의 대학으로 키우는 것과 통일에 기여하는 것이다. 




인제대가 지방에 있다 보니, 정말 좋은 대학인데도 학교 성장에 여러모로 불리한 것이 그렇게 속이 상할 수 없다고 한다. 프로젝트를 할 때나 학교평가에서도 기대치를 밑돈다. 



지방대의 여건이 계속 안 좋아지고 있다고 했다. 학교의 비상을 위해서 수도권이나 서울에 있는 대학과의 합병도 고려 중이다. 




고향인 북한에 병원을 지어 어려운 북한 주민들을 돕는 것도 꼭 직접 하고 싶은 일이다. 내년 1월부터는 일산 백병원이 개성공단 내에서 응급의료시설을 2년간위탁운영한다. 



의사 2명과 응급구조사, 임상병리사, 간호사 등 9명이 상주하는데, 개성공단에 상주하는 남측 직원들이 대상이지만, 비상시엔 북측 근로자들도 의료혜택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는 다시 한 번 초상화 속 50대의 큰아버지 얼굴을 올려다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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