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세웅 神父--황해도 안중근 의사 生家 최근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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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488회 작성일 2012-12-01 15:29본문
[이사람] “安 의사 생가 복원 통해
남북관계도 복원되길”
등록 : 2012.11.29 19:40수정 : 2012.11.29 22:08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 함세웅(70) 신부 |
북한 다녀온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함세웅 이사장
남-북 함께 존경하는 위인 ‘안 의사’
황해남도 청계동 방문 생가 터 확인
“북쪽도 긍정적…대화 물꼬 열릴 것”
11월 13~17일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북한을 방문하고 온 함세웅 신부는 좀처럼 약속을 잡기 힘들었다. 문재인 안철수 두 후보의 단일화 협상이 벽에 부닥치자 그 역시 바빠졌기 때문이다. 두 후보의 중재에 나선 민주진영의 원로 모임격인 ‘희망 2013 승리 2012 원탁회의’는 수시로 만났다. 그는 이 원탁회의에 참석하느라 일정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연유로 인터뷰는 지난주 성북구 종암동 안 의사 기념사업회 사무실과 한겨레 신문사를 오가며 두 번에 걸쳐 진행했다.
74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창립의 주역으로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된 그는 올 8월 이임 감사미사를 끝으로 사제생활 44년을 마감했다. 그럼에도 그의 모습은 변함없는 신부였다. ‘원로 사목자’로 두 번째 삶을 시작한 그에게 천주교 신자였던 안 의사를 기리는 사업은 그 중심에 있다. 안 의사는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으나 3월25일(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날) 형을 집행해주길 바란다는 뜻을 전할 만큼 신심이 깊은 천주교 신자였으며 형장에서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묵도를 올린 것으로 전해진다.
-이명박 정부 임기 말인데다 대선국면 속에서 이뤄진 방북이라 세간의 관심이 큰데 북의 태도는 어땠나?
“이번이 5번째 방북이다. 4년 만에 갔는데 이번 방문이 가장 편안했다. 일정을 다투지 않고 편안히 갔다. 북에서 신경을 많이 써줬다. 이게 다 안중근 의사의 덕이라고 생각했다.(웃음) 처음 간 사람들은 순안공항에 내리자마자 공기도 답답하고 거대한 장벽으로 둘러싸인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자유로웠다. 대화할 때 북쪽과 서로 긴장이 없었다. 그래서 교회공동체 문제에 대해서도 직언을 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10년 동안 남북관계는 큰 진전이 있었지만 다툼이나 긴장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북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크게 실망하지는 않고 그 전의 약속은 지킬 것이라고 봤다. 그런데 그들도 겪어보고 이건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는지 전임 대통령들이 했던 일에 대해서 새롭게 평가하게 된 것 같았다.”
-5.24 조처로 모든 게 막혀 있는 상황에서 정부가 이번 방북을 허용했는데.
“윤원일 사무총장이 애를 썼다. 통일부 공무원들 가운데도 건강한 사람들이 있다. 통일부 관계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청와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안중근 의사니까 여러 측면에서 뜻이 있어서 허용했다고 본다.”
-안의사 생가를 직접 둘러봤다고 하던데
구체적 성과는?
“예전부터 안중근 의사가 살았던 황해남도 신천군 청계동 생가를 가보려 했는데 이번 방문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북이 동의했다.
그래도 모든 일이라는 게 가봐야 알지 않겠나 반신반의했는데, 뜻밖에 북에서 청계동뿐 아니라, 안 의사 유적지인 남포를 비롯해 인근 정방산의 성불사까지 다 안내했다.
조선카톨릭교협회 중앙위원회의 장재언 위원장은
북의 종교인협의회의 회장과 조선 적십자사위원장을 겸하고 있는데 이분이 함께했다. 안 의사 생가를 가려면 북한의 어려운 모습, 시골, 비포장 도로 등 안 보여주고 싶은 게 많았을 텐데 거의 모든 일정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배려해줬다.
안 의사가 자서전 <안응칠의 역사>에서 언급했던 21년 동안 살았던 곳, 기도했던 생가 터를 직접 가보니 모두가 감격해 통일을 염원하는 기도를 드리고 성가를 부르며 기쁨을 나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처럼 땅에 입을 맞추려 했는데, 비가 온 뒤라 못했다.(웃음) 생가는 물론이고 인근에 있던 청계동 성당도 함께 복원하자고 우리가 제안했다. 북은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했다. 안 의사의 부친인 안태훈 진사의 묘소가 부근 망대산에 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그곳은 가지 못했다.”
-안 의사가 학교를 세웠던 남포나 청계동 생가는 어떤 상태였나.
“안 의사의 어린 시절에는 70가구 정도가 살았다는데, 의거 뒤에 핍박을 받았고 지금은 다 허물어져 벽돌만 남았다.
해방 뒤 청계동 성당은 인민 교육장으로 바뀌었고
6·25 때 폭격을 받아서 없어졌다고 한다.
생가 일대에는 농장 등이 들어섰는데, 저수지가 상수원 보호구역이 되면서 인근에 살던 집들은 다 이전했다.
관리인이 사는 집 정도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당시의 안 의사 생가와 청계 성당은 예전에 독일 신부들이 찍은 사진이 있어서 복원할 수 있다. 평양 등에 성당을 지으면 이름을 안중근 성당으로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북은 안 의사가 세운 남포의 삼흥학교에 순국 55년인 65년에 안중근 열사 기념비를 세웠는데 이를 탄생 120주년에 즈음해 남포공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남포에는 역시 안 의사가 세운 돈의학교도 있는데, 그곳은 못 가봤다.”
-이미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지난 2010년 3월26일 중국 뤼순(여순) 감옥에서 공동 추모식을 한 바 있고 신천 청계동의 생가 복원 등에 합의했던 걸로 아는데 앞으로의 남북 공동사업은 어떻게 추진할 생각인가?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도 중요하지만, 순국선열의 뜻을 이어받는 것 역시 중요하다. 생가, 성당, 삼흥학교, 돈의학교 등의 안 의사 관련 유적지 복원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면서 북쪽에서 안 의사의 독립운동 행로를 찾아보려 한다. 안 의사 유적지 순례와 현재 6권까지 나온 안중근 전집을 북과 공동으로 내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 내년에 이른 시일 안에 현장도 다시 방문하고 103주년 순국일을 함께 추모하려고 한다.”
-올 성탄절에 남북 공동행사를 추진한다는 얘기도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평양의 장충성당에는 사제가 없다. 성당에는 사제가 상주해야 하는데 그 전 단계로서 성탄 축제와 부활 축제에 남한 사제들이 방문해서 일주일이든 열흘이든 머물 수 있도록 하려고 한다. 시간이 촉박하긴 했지만 성탄을 맞아서 남북이 함께 미사를 했으면 했는데, 북에서 의외로 긍정적인 대답을 해서 성사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일본과 미국의 많은 교포 사제들이 장충 성당을 방문했다. 이번 성탄에 우리가 가면 의미가 크다. 가서 잘하면 좋겠다. 사제가 상주하는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북에서 사제를 두겠다고 하면 남쪽에서 지원할 수 있고, 남쪽에 위탁 교육도 가능하다. 북한 사람들도 중국 통해서 사제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런 점도 남한이 돕고 교류할 수 있다. 안 의사의 좋은 뜻, 선각자, 독립운동가로서의 삶 등 공유할 가치를 강조하면서 장충성당에 사제가 없어서 약한 공동체, 가난한 공동체인데, 이걸 건강한 공동체로 한 단계 높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앞으로 북과 바티칸 교황청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현재 평양 교구장을 서울 교구장이 대리하고 있는데, 장기적으로 평양교구를 복원하는 교회적 방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하였다.”
-안 의사 생가 복원 등 공동사업을 추진하려면 당국 차원에서의 합의와 지원 등이 필요할 텐데
“남북관계가 더 잘 돼야 한다. 열린 정부, 열린 대통령이 나와서 남북대화가 잘 되면 그런 사업도 더 잘 될 것이다. 지원이 필요한 부분이 있는데, 남북 정부가 대화하고 두 정상선언을 지켜주기를 바란다. 그것만이 희망이자 소망이다. 그러나 당국 간에 잘 안 돼도 민간이나 종교단체들이 적극 참여하면 꾸려나갈 수 있을 것이다.
또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남북의 공동사업이 당국간 대화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북쪽에서는 이번 방문에서 금강산도 열겠다고 했다. 남북관계가 정상화되고 통일이 돼야 남쪽의 민주화도 완성된다. 궁극적으로 남북관계 정상화를 위해서 안 의사 기념사업을 하는 것이다. 친일 극복도 그렇고, 민주주의 완성도 그렇다.”
-앞서 노무현 정부 당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에 합의했고, 해주공단도 추진하겠다고 한 바 있는데 안의사 생가가 있는 신천군은 해주와도 가까운데.
“이번 합의로 북의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고 본다. 남의 좋은 뜻, 북의 좋은 뜻을 서로 전하고, 오해를 줄이는 데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보고 그런 점에서도 이번 사업이 잘됐으면 한다.”
-안 의사에 대한 북쪽의 평가는 어떤가?
“북은 안중근 의사라 하지 않고 ‘렬사’라고 하는데, 내가 98년에 가보니 이미 70년대 중반에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 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사실 북은 진정한 항일 무장투쟁을 한 독립운동가는 김일성 주석밖에 없다며 안중근 의사를 높게 평가할 수 없다는 의식이 깔려 있었고 다른 민족운동 진영의 독립투사를 폄하해 온 것으로 알려졌지만 80년대 들어서는 이미 평가가 이뤄진 것 같다. 안 의사가 김 주석이 태어나기 전에 활동하고 순국했던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남북의 이념적 대결 속에서 존경하는 독립지사는 안 의사 한 분인 것 같다.”
-남쪽 내부에서는 안 의사 기념사업회와 안 의사 숭모회의 두 단체가 존재하면서 진보와 보수로 대립하는 것처럼 돼 있는데다 북과의 공동사업이 기념사업회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자칫하면 남남갈등으로 비칠 우려도 있는데.
“실천적으로 풀어가야 한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시절에 안중근 의사 모시는 데 두 단체가 있는 것은 바람직 않다고 해서 안중근 기념관을 새로 건립하는 문제 등에서 숭모회와 함께 일을 하려고 노력했으나 내면적인 갈등으로 어려움이 컸다.
안 의사에게 누가 될까 봐 기념관 건립은 숭모회 중심으로 진행되도록 하고, 기념사업회는 오히려 조광 고대 교수(한국사) 등을 중심으로 안중근 전집을 만드는 데 역점을 뒀다.
사실 두 단체의 문제는 보수 진보의 문제는 아니다. 순국선열의 참뜻을 대변하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 숭모회는 박정희가 5·16 군사반란 이후 이순신 장군을 내세웠듯이 친일 행적을 덮으려고 안 의사를 부각시키려 했던 게 아닌가. 숭모회에 참여했던 과거 인사들을 보더라도 그런 의문이 든다.”
-지난 여름 사제로서의 직을 마감하고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시점에 안 의사를 기리는 사업이 본격화 되는듯한데 안 의사와의 만남에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
“어렸을 때 초등학교 시절 안 의사를 배웠다. 당시엔 안 의사가 천주교 신자인 줄 몰랐다. 성당에서도 안 의사 이야기를 안했다. 나중에 안 의사가 신자인걸 알고 기뻐했던 기억이 있다. 65년 로마에 유학을 가보니 이탈리아의 역사와 가톨릭 역사가 다르지 않았다.
이탈리아 독립 운동가를 교회 내에서 같이 기억하고 있었다. 왜 안중근 유관순 같은 분들을 성당과 교회에서는 기억하지 않는가. 민족과 함께해야 하는 교회여야 한다. 그들은 교회의 성인이기도 하다. 그동안 나는 유신 철폐를 위해 싸웠고 정의구현사제단을 만드는데 참여했다.
안중근 의사는 교육자이면서 독립운동가로 민족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다. 그에 대해 알면 알수록 더욱 재평가하게 된다. 안 의사 의거일이나 기일에는 문익환 목사 이돈명 변호사, 유현석 변호사, 김승훈 신부 등과 함께 남산의 안의사 동상에 가서 함께 참배를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동상을 친일파가 만들었다는 걸 알았다.
50년대 있었던 안 의사 기념사업회를 재출범시켰는데 그분들은 거의 다 돌아가셨고 내가 맡게 됐다. 우리 가톨릭은 일제시대 천주교를 이끌고 있던 프랑스인 뮈텔 주교 등이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살인 행위라며 안 의사를 천주교 신자로 인정하지 않은 걸 그대로 받아들였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1993년에 안 의사의 행동을 ‘정당방위·의거’라며 신학적으로 재평가했다.
서울대교구는 안의사를 생전에 덕행이 뛰어났거나 순교한 이들을 추대하는 시복 시성의 첫 단계인 ‘하느님의 종’으로 추대했다.”
-천안함 사건 연평도 포격 등 남북관계가 크게 악화된 현실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앞으로 남북관계를 풀어가기 위해선 넘어야 할 고비가 많을 것으로 보이는데.
“교회 일치 운동을 이야기하고 싶다. 마르틴 루터 이후에 신구교가 서로 갈등을 겪고 미워하면서 서로 모순적이었다. 그러다가 2차 바티칸 공의회가 50년 전에 열려서 교리적인 접근으로는 안 된다,
예수가 말한 사랑, 평화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교회 일치 운동의 원리를 남북 관계에도 적용하고 싶다. 해방 이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내세우며 갈라져 살아왔는데 이를 한꺼번에 극복하기는 어려우니 6·15정상선언을 출발로 삼아서 동포애와 역사적인 동질성을 바탕으로 함께 이념과 정치 현실을 변화시켜 나가자.
북의 요구도 큰 게 아니라, 두 정상선언을 지키겠다고 약속하자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전임자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동족을 외면한 것은 역사에 대한 죄악이다.”
강태호·김규원 기자 kankan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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