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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대한 오해와 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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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2,787회 작성일 2012-12-02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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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임원빈]

백의종군이란 말, 함부로 쓰지 마라

기사입력 2012-12-01 03:00:00
임원빈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해군사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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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종군(白衣從軍)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분이 충무공 이순신이다.
그런데 요즘 이 말을 가장 많이 쓰는 사람은 정치인들일 것이다.
국면 전환을 꾀하거나 불리한 상황을 반전하고자 할 때 흔히들 “백의종군하겠다”고 한다. 안철수 후보도 사퇴회견문에서 그렇게 말했다.

상황은 약간씩 다르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초심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으로 쓰는 것 같다. 그런데 이는 본래의 의미와는 많이 다르다.

우선 백의종군은
계급이나 직책 없이(白衣)
군문에 종사한다(從軍)는 뜻이다.
본인이 자발적으로 내리는 결정이 아니라 조선시대 무인 관료들에게 내리는 처벌의 하나였다. 사형, 유형, 도형, 장형, 태형 등 5단계 처벌 중 감옥에 가두는 도형과 곤장을 때리는 장형 사이의 벌(罰)로 비교적 경징계 범주에 속한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백의종군은 무과 과거 급제자의 신분은 유지시킨 채 계급이나 직책만 박탈한 상태에서 군문에 종사시키는 처벌로 이후 다시 공을 세우면 관직을 회복시켜 주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선의의 처벌이었다.
이순신도 백의종군 처분을 받았지만 나중에 복직된 것을 보면 인재를 함부로 버리지 않고 재기의 기회를 주기 위한 제도로
오늘날에도 참조할 만한 선진적 측면이 있다.


조선시대 무인관료 처벌의 하나


이순신은
두 번의 백의종군 처분을 받는다.
첫 번째는
함경도 조산보 만호(지금의 대령)로 근무하면서 두만강 하구 녹둔도(鹿屯島) 둔전관을 겸할 때 오랑캐 공격을 받고 피해를 본 사건이 빌미가 되었다.
이순신은 녹둔도 병력이 오랑캐를 지키기에 역부족임을 알고 수차례에 걸쳐 직속상관인 함경도 북병사 이일(李鎰)에게 병력 증원을 요청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결국 1587년 8월 오랑캐가 녹둔도를 기습해 10여 명이 전사하는 등 피해가 났다.
이순신은 곧바로 반격을 시도해 다수의 오랑캐를 사살하고 또 포로로 잡혀가던 60여 명을 구출했다.

그러나 북병사 이일은 병력 증원 요청을 무시한 자신의 과오를 숨길 목적으로 이순신에게 책임을 물으려 했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패전한 장수는 아니니 백의종군하라”는 처분을 내린다.
이순신은 무보직으로 있다가
이듬해인 1588년 1월
시전부락 전투에
우화열장(右火烈將)이란 지휘관 직책으로
참전해 공을 세운다.
이 공로로 백의종군 처분에서 벗어나 훈련원에 복직한다.

두 번째 백의종군은
1597년 1월 가토 기요마사(왜군의 선봉장)를 잡으라는
임금 선조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이 빌미가 되었다
.
이순신은 선조의 명령이 당시로서는 전세에 득이 되지 않는 무리한 주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조는 이순신에게 누적된 불만을 엮어 그를 통제사에서 파직한다.
그러고는 한성으로 압송하고 의금부에 투옥하여 죄상을 조사한다.
이순신은 의금부에서 한 달여 신문을 받다가
초계에 있는 도원수 권율 밑에
백의종군하라는 처분을 받는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은 이때 도원수 권율의 군사 자문에 응한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15일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대패하자 권율로부터 패전의 상황을
파악하라는 임무를 받고 노량 등 남해 연안을 돌아보던 중
8월 3일 진주의 손경례 집에서
‘통제사로 임명되었다’는 교지를
받고 관직에 복귀한다.


어떻든, 백의종군 처벌을 받은 사람이 이순신만은 아닐진대
유독 우리가 백의종군 하면 이순신을 떠올리는 이유는 뭘까.
그리고 지금의 정치인들이 그 정신을 계승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름 아닌
이순신이 백의종군 때 보여준
나라 사랑, 백성 사랑의 정신 때문이다.


이순신은 종4품인 만호 벼슬에서 파직되었을 때도,
종2품인 삼도 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었을 때에도
마음속에 언제나 나라와 백성이 있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치욕과 모욕이라 생각하며 자포자기했을 텐데
억울한 처벌을 받아도 언제나 그것을 받아들이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
첫 번째 백의종군 시절에는 시전부락 전투를 지휘해 승리했고
두 번째 백의종군을 마치고는 복귀 후 궤멸 직전의 조선 수군을 추슬러 절대 열세였던 명량해전을 기적 같은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앞으로 백의종군을 말하는 정치인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념해야 할 것 같다.
우선 백의종군은 자발적으로, 스스로 하는 게 아니라 처벌이란 의미이니 당당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 된 심정으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럴 상황에 놓였다는 것은 다수 국민의 무언의 명령으로 자신에게 경고를 내렸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국민의 ‘무언의 경고’로 받아들여야


둘째, 백의종군은 모든 것을 버리고 절간 같은 데 혼자 숨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순신이 그랬듯 자리나 지위에 상관없이,
그 어떤 조건도 버리고 나라와 국민을 위해 혼신의 힘을 바치는 것이다.
그리하여 국민에 의해 다시 기회가 주어졌을 때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국민의 열망에 화답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또 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백의종군’을 말한 안철수 씨가 그 의미를 제대로 살려낼지 지켜볼 일이다.


임원빈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해군사관학교 명예교수
***************

4월28일은 이순신 탄신 467주년…

우리가 알고 있는 ‘충무공 상식’은

모두 진실일까

기사입력 2012-04-23 03:00:00
졸병으로 백의종군? 권율장군 진영서 자문역할

■ 이순신연구소 내일 학술대회

photolink
충무공 탄신 467주년인 28일을 앞두고 순천향대에서 이순신 장군의 생애에 대해 역사적 진실을 알리는 학술대회가 열린다. 서울 광화문광장 지하의 기념관인 ‘충무공 이야기’에 전시된 55% 크기의 거북선 모형. 연합뉴스
‘이순신이 흰옷을 입고 병사 행렬 사이에서 터벅터벅 걷는다. 병사들의 막사에서 생활할 때 대다수 병사는 극진히 예우하지만 일부는 같은 병사라며 멸시한다.’

졸병으로 백의종군(白衣從軍)하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은 드라마 등에서 이렇게 묘사돼 왔다.
하지만
역사적 문헌은 이순신 장군이 졸병으로
백의종군한 적은 없다고 전한다.

이순신 장군과 관련한 우리의 상식과 역사적 진실 사이에는 이처럼 괴리가 적지 않다. 충남 아산의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소장 임원빈)가 충무공 탄신 467주년(28일)을 앞두고 24일 아산시 충무교육원에서 학술대회를 열어 ‘이순신 정론(正論) 찾기’에 나선다. 폄훼가 아니라 ‘성웅 이순신’에 대한 바로 알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뉴스이미지[동영상] 세종대왕함 “전투기 출...PLAY


학자별로 고증 내용을 나눠 맡았다.
해군리더십센터 제장명 교수는 ‘백의종군 면사첩(免死帖) 해전횟수’를, 해군사관학교 이민웅 교수는 ‘출신배경, 명량해전 철쇄설’을, 임원빈 소장은 ‘명량해전 승리 원인과 그 이후의 전황’을, 해군사관학교 정진술 해군사 해양사편찬위원은 ‘거북선 철갑선설’을, 연기교육청 홍순승 장학관은 ‘자살·은둔설’에 대해 발표한다.

① 졸병으로 백의종군한 게 아니다

이순신 장군은 조정으로부터 2차례에 걸쳐 백의종군을 명령받았다.
삼도수군통제사이던 1597년(당시 52세) 조정신료의 모함으로
백의종군 형벌을 명령받았지만
도원수 권율의 진영에서 똑같은 통제사 예우를 받으며 지휘부 전쟁자문을 하고 한산도 수군 지휘관들에게서 수군 상황을 보고 받았다.
또 그에 앞서 조산보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이던 1587년 녹둔도 전투에서 패해 백의종군 형을 받은 뒤에도
만호(중령 또는 대령)급인 우화열장(右火烈將)이라는 지휘관 자격으로
여진족을 토벌했다.
과거 급제자 이상에게만 적용되는 백의종군은
조선 문종 때 처음 문헌에 등장해
조선왕조실록에 60건의 사례가 나온다.
다만 백의종군 형을 받더라도 대부분은 직전 계급의 예우를 받았다.

② 거북선은 철갑을 두르지 않았다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주장은 임란 때의 일본 문헌인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가 안골포 해전을 묘사하면서 ‘조선의 큰 함선 3척이 맹선(盲船)이며 핵심 부분이 철로 장식돼 있었다’고 기록한 데 따른 것이다.
1929년 편찬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도 ‘거북선이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이순신의 장계를 비롯한
우리 측 사료에는
거북선 등에 판자를 깔고
송곳과 칼을 꽂았다고만 돼 있다
.
‘이충무공전서’의 거북선도(圖)에도 판자만 깔려 있다. 일본군이 패배를 변명하기 위해 철갑선으로 과장한 것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는 분석도 있다.

③ ‘23전 23승’도 부정확한 통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등장한 ‘23전 23승’ 역시 근거가 불분명하다.
제장명 교수는 “2008년 드라마 제작진에게 전화로 문의한 결과 ‘대략적으로 셈을 해본 것’이라고 답했다”며 말했다.
그는 “연구 결과 이순신이 참여한
해전(조선 육군 및 명나라 수군 및 육군과의 합동 전투
포함)은 45회인데
이 중 이순신 장군이 직접 지휘한
36회 전투에서 모두 승리해
‘36전 36승’이 맞다
”고 밝혔다.

④ 명량해전엔 철쇄 없었고 일본군도 전멸하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서 바다에 철쇄를 설치해 일본 해군을 격파했다는 얘기는 당대의 1차 사료인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없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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