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 바둑 일류 기사 열전 -흥미 만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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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548회 작성일 2012-12-03 01:21본문
@ 바둑 리포트
참고 서적-제목: 요순에서 이창호까지(박치문 에세이)
--지은이 바둑평론가 박치문
--지은이 바둑평론가 박치문
1.들어가는 말
이 책은 바둑 해설가로서 이름이 높은 박치문 아마 7단의 바둑 에세이 집
입니다. 서울대 국문학과 출신의 박치문님은 구수한 입담으로 바둑텔레비전에서도 인기가 아주 높다고 합니다.
이 책은
제1부 바둑이야기
제2부 프로기사 이야기
제3부 일본 바둑 삼국지
제4부 바둑 기행으로 엮어져 있습니다.
특히 제2부 프로기사 이야기중에서
한국의 유명한 프로바둑기사님들에 대힌
내용을 요약하고 그 소감을 써 보기로 하겠습니다.
2.한국의 대표적인 프로기사 이야기
다음에 나오는 한국의 대표적인 프로바둑 기사들은 위의 책 및
인터넷 이곳 저곳에서 추려 모아 나름대로 엮어 본 내용이기도 합니다.
ㄱ. 한국 현대 바둑의 개척자 故 조남철 프로9단
일제 시대 일본에 건너가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
오직 인내심으로 온갖 민족 차별등의 굴욕을
일본에서 정식 프로기사가 된 한국인으로서는 첫번째 분이십니다.
그는 해방이후 바둑 보급을 위해 수십년 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오늘날 한국 바둑이 종주국을 오랜 동안 자처하던 일본과 한국을 한동안 깔보던 중국을 모두 이기고
바둑 후배들이 세계 최강의 자리를 오래도록 굳건히 사수할 수 있었던 근원적 배경은?
바로 고 조남철 선생님의 공이 가장 우선적이라고 저는 봅니다.
소감: 조남철 선생님은 해방 이후 오직 바둑 보급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치셨으며 그의 집안에서 일본에서 불멸의 대기록을 수없이 작성한
불세출의 조치훈 9단이 자랑스럽게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봅니다.
고인의 명복을 다시금 빌며 하늘나라에서 세계 바둑을 제패하는 후배들의 연속적인 쾌거를 보시면서 편안히 잘 계시리라 믿습니다.
ㄴ. 김인 九段
그는 일본 바둑 유학을 다녀온 1960년대 중반 이후
광복이후 수십년 동안 조남철 선생이 거의모든 타이틀을 거머쥐던 분위기를 바꾼 최초의 인물입니다.
김인 프로기사가 한국에 돌아온 이후
광복이후 수십년 동안 조남철 선생이 거의모든 타이틀을 거머쥐던 분위기를 바꾼 최초의 인물입니다.
김인 프로기사가 한국에 돌아온 이후
조남철 선생이 가지고 있던 주요 타이틀은 거의 모두 김인 9단의 차지가 되었던 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초반 까지가 그의 전성기였다고 봅니다.
일부 자료에 의하면?
한국프로바둑사상 최다 연승은 이창호 9단의 41연승
한국프로바둑사상 최다 연승은 이창호 9단의 41연승
이라고 하며
그다음은 이세돌로 생각하는 바둑팬이 많다고 하는 데
그게 아니고
김인 9단이 작성한 전성기 시절의 40연승을 아는
바둑 애호가들은 별로 없다고 할 정도로 그 당시 대단한 기록이었으며
수십년뒤 이창호 등장까지 깨지지 않았던 대기록입니다.
아마도 위의 조남철 선생은 물론 41연승 이상을 하였으리라 사료되지
만 그 당시에는 제대로 된 기록이나 타이틀이 적어서 그런지 지금은
하여튼 이창호9단의 41연승을 최고로 친다고 합니다.
그 다음이 3위로 이세돌 9단의 32연승이라고 합니다.
그다음은 이세돌로 생각하는 바둑팬이 많다고 하는 데
그게 아니고
김인 9단이 작성한 전성기 시절의 40연승을 아는
바둑 애호가들은 별로 없다고 할 정도로 그 당시 대단한 기록이었으며
수십년뒤 이창호 등장까지 깨지지 않았던 대기록입니다.
아마도 위의 조남철 선생은 물론 41연승 이상을 하였으리라 사료되지
만 그 당시에는 제대로 된 기록이나 타이틀이 적어서 그런지 지금은
하여튼 이창호9단의 41연승을 최고로 친다고 합니다.
그 다음이 3위로 이세돌 9단의 32연승이라고 합니다.
프로바둑에서는 10연승도 확률적으로도 엄청난 대기록이라고 흔히들
말하는 데 실로 엄청난 대기록이 아닐수 없습니다.
지금은 대개 17연승 언저리에서 연승이 마감되는 경우가 다수 있습니다.
약 10년전 쯤 한국기원 사무총장을 역임한 故 임선근 9단이 25연승을
작성한 바 있습니다.
프로바둑에서는 10연승도 확률적으로도 엄청난 대기록이라고 흔히들
말하는 데 실로 엄청난 대기록이 아닐수 없습니다.
지금은 대개 17연승 언저리에서 연승이 마감되는 경우가 다수 있습니다.
약 10년전 쯤 한국기원 사무총장을 역임한 故 임선근 9단이 25연승을
작성한 바 있습니다.
김인 9단은?
일본 유학후 군복무차 한국에 돌아온 천재 조훈현과 토종 된장바둑의
일본 유학후 군복무차 한국에 돌아온 천재 조훈현과 토종 된장바둑의
서봉수
위의 2명의 소위 兩强시대에 접어드는 70 년대 중반부터는?
타이틀 전선에서는 김인9단은 후배들에게 밀려 멀어지게 됩니다.
타이틀 전선에서는 김인9단은 후배들에게 밀려 멀어지게 됩니다.
소감: 김인 9단이 일본에 그냥 머물러 아래 나오는 조훈현 및 조치훈
이 소위3총사로서 일본 바둑계에서 맹활약하였더라면? 일본 바둑계
는 아마도 이들 3명에 의해 완전 정복되었을 거라는 후문입니다.
조치훈 1명으로도 일본에서 주요 타이틀을 엄청 획득하였는 데 이들
3명이었더라면 허리케인 급의 태풍으로 일본 바둑을 석권하였을 것입
니다. 김인 9단은 바둑 매너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반상의
신사였다고 합니다. 그의 외모 뿐만 아니라 그의 후덕한 인상은 정말
반상무인이라는 4자 성어가 저절로 떠오를 정도 였다고 합니다.
이젠 바둑계에서 거의 은퇴한 김인 9단의 명성을 되새기면서 그 분의
높은 인격과 고매한 바둑 매너에 많은 바둑인및 바둑팬들은 잊을 수 없는 바둑 기사라고 저는 봅니다.
ㄷ.부드러운 바람 빠른 창:조훈현 9단(戰神)
조훈현은 지금도 전세계적으로 무려 50년 동안 깨지지 않은
9세 프로 입단의 경이적인 최연소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조치훈의 최연소 입단 기록(11세 몇개월)이 수십년 지켜오다가
몇년전에 일본의 어느 기사에 의해 그의 최연소 입단 기록이 수십년 만에 다소 아쉽게도 깨졌다고 합니다.
9세 프로 입단의 경이적인 최연소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조치훈의 최연소 입단 기록(11세 몇개월)이 수십년 지켜오다가
몇년전에 일본의 어느 기사에 의해 그의 최연소 입단 기록이 수십년 만에 다소 아쉽게도 깨졌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조치훈의 최연소 입단 기록(11세 몇개월)이 수십년 지켜오다가
몇년전에 일본의 어느 기사에 의해 그의 최연소 입단 기록이 수십년 만에 다소 아쉽게도 깨졌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이창호 9단이 최연소 입단 기록을 조훈현 다음으로 가지고 있으며 (역시 11세 몇개월)
그 다음은 거의 모든 아마추어 애기가들이 모른다는 데
여자프로 최강 3인방중의 한 명인 조혜연 프로8단이
한국에서 3번째 최연소라고 합니다.
전반적으로 만 14세 이전에 입단해야 대성할 기미가 보인다고 하며
만 24세 이전에 주요 타이틀 하나정도는 획득해야
프로기사로서 대성할 수 있다는 속설도 아주 유효하다고 합니다.
그 최연소 입단 다음으로는 최철한 이세돌등이 12세 안팎의 입단
기록으로
역시 어린 시절 입단하는 천재들이 프로바둑계의 선두 주자로 나서고 있음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봅니다.
농구 황제라 칭해지는 마이클 조던,
한국에서는 이창호 9단이 최연소 입단 기록을 조훈현 다음으로 가지고 있으며 (역시 11세 몇개월)
그 다음은 거의 모든 아마추어 애기가들이 모른다는 데
여자프로 최강 3인방중의 한 명인 조혜연 프로8단이
한국에서 3번째 최연소라고 합니다.
전반적으로 만 14세 이전에 입단해야 대성할 기미가 보인다고 하며
만 24세 이전에 주요 타이틀 하나정도는 획득해야
프로기사로서 대성할 수 있다는 속설도 아주 유효하다고 합니다.
그 최연소 입단 다음으로는 최철한 이세돌등이 12세 안팎의 입단
기록으로
역시 어린 시절 입단하는 천재들이 프로바둑계의 선두 주자로 나서고 있음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봅니다.
농구 황제라 칭해지는 마이클 조던,
그 다음은 거의 모든 아마추어 애기가들이 모른다는 데
여자프로 최강 3인방중의 한 명인 조혜연 프로8단이
한국에서 3번째 최연소라고 합니다.
전반적으로 만 14세 이전에 입단해야 대성할 기미가 보인다고 하며
만 24세 이전에 주요 타이틀 하나정도는 획득해야
프로기사로서 대성할 수 있다는 속설도 아주 유효하다고 합니다.
그 최연소 입단 다음으로는 최철한 이세돌등이 12세 안팎의 입단
기록으로
역시 어린 시절 입단하는 천재들이 프로바둑계의 선두 주자로 나서고 있음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봅니다.
농구 황제라 칭해지는 마이클 조던,
축구 황제로 불리는 브라질의 펠레가
神이 빚은 최고의 수퍼 스타이듯
神이 빚은 최고의 수퍼 스타이듯
조훈현 9단이야 말로 신이 빚은 수퍼스타 반열에 오른
누구도 부인 못하는 세계 바둑의 초대 황제라고 저는 봅니다.
神이 빚은 최고의 수퍼 스타이듯
조훈현 9단이야 말로 신이 빚은 수퍼스타 반열에 오른
누구도 부인 못하는 세계 바둑의 초대 황제라고 저는 봅니다.
물론2대 황제는 이창호라고 보는 견해가 다수 있으며
중국에서 이창호9단은?
그가 세계 주요 타이틀을 25회나 차지하는 동안
거의 神적인 존재감으로
2대 바둑 황제로 칭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2대 황제는 이창호라고 보는 견해가 다수 있으며
중국에서 이창호9단은?
그가 세계 주요 타이틀을 25회나 차지하는 동안
거의 神적인 존재감으로
2대 바둑 황제로 칭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조훈현 9단은?
지난 50년간 깨지지 않는 세계 최연소 9세 입단 기록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국내외 합하여 최다 타이틀 보유자이며(10년전에 이미 157회 기록중임) 세계 최다승을 역시 기록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 천재 바둑 기사 조훈현이지만 그는?
운전 면허증도 없고 그 흔한 휴대폰도 없다고 하여
늘 부인되시는 분이 운전도 하고 매니저 역할도 한다고 합니다.
운전 면허증도 없고 그 흔한 휴대폰도 없다고 하여
늘 부인되시는 분이 운전도 하고 매니저 역할도 한다고 합니다.
늘 부인되시는 분이 운전도 하고 매니저 역할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일본 기원 5단의 실력으로 군복무를 위해 귀국하자
얼마 안있어 그 귀국 여파로 추정되는 이유로
있어 그 귀국 여파로 추정되는 이유로
일본의 조훈현의 스승 세고에 선생이 자살했다고 합니다.
이 세고에 선생은 한국,중국,대만,일본에서 각각
단 한명씩의 천재 기사들을 데리고 지도한 바 있는 성장시킨 바 있는 데
일본의 조훈현의 스승 세고에 선생이 자살했다고 합니다.
이 세고에 선생은 한국,중국,대만,일본에서 각각
단 한명씩의 천재 기사들을 데리고 지도한 바 있는 성장시킨 바 있는 데
데리고 지도한 바 있는 성장시킨 바 있는 데
중국에서 온 최고의 프로바둑기사이며
후일 지난 100년 이래 최고의 기사라고 공인되는 오청원9단을
지도한 바 있고-조훈현도 이 오청원 9단을 세계바둑계의 신포석의
창시자로서 세계 최고로 인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만에서 일본에 유학온 천재 임해봉 9단--단단한 바둑으로 유명하여
2중허리라는 별명을 가진 그 임해봉9단을 역시 세고에 선생이 지도했습니다.
임해봉9단은 또다른 한국의 천재 기사인 조치훈 9단이 몇년 전 깰 때까지
임해봉9단은 또다른 한국의 천재 기사인 조치훈 9단이 몇년 전 깰 때까지
일본 최다승을 아주 오랜동안 유지한 바 있습니다.
그는 일본 최고 권위의 명인전에서는 본선 멤버로30년이상 활약한 바 있을 정도의 끈기의 대명사로서 엄청난 실력을 발휘한 바 있습니다.
그런 세고에 선생이
한국에서 유학온 천재 조훈현 어린이를 기꺼이 받아들여
세계 초대 바둑 황제로 성장하는 데 그 기본을 여러모로 가르쳤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유학온 천재 조훈현 어린이를 기꺼이 받아들여
세계 초대 바둑 황제로 성장하는 데 그 기본을 여러모로 가르쳤다고 합니다.
특히 어린 시절 철없이 소소한 내기 바둑하던조훈현의 뺨을 냅다 때린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고 합니다.
조훈현9단은 최근에는 나이탓인 지 주요 타이틀 추가가
점점 어려워 지고 있습니다
일본 프로기사중에서 세고에 선생은 스승으로서 그를 가장 사랑했지만
선배프로기사로서 조훈현을 가장 사랑했다는 후지사와 9단이
66세에
일본 7대 기전중의 하나인 왕좌전을 차지하여 당시 일본 바둑계를 놀라게 한 바도 있으므로
왕좌전을 차지하여 당시 일본 바둑계를 놀라게 한 바도 있으므로
조훈현 9단의 60세 이후의 분발이 적극 요구되고 있기도 합니다
조훈현의 대선배인 후지사와 9단은 조훈현의 스파링 파트너를 자임할 정도로 지도대국(친선대국)을 가장 많이 하였으며
조훈현이 한국에서의 전성기 시절에서
양주병을 허리에 꿰차고 한국을 홀연듯 방문하여
조훈현을 만나고 친선대국을 해준 다음
다시 홀현히 일본으로 간 적이 있을 정도로
조훈현을 진정 아끼고 사랑했다는 후문입니다.
조훈현이 한국에서의 전성기 시절에서
양주병을 허리에 꿰차고 한국을 홀연듯 방문하여
조훈현을 만나고 친선대국을 해준 다음
다시 홀현히 일본으로 간 적이 있을 정도로
조훈현을 진정 아끼고 사랑했다는 후문입니다.
조훈현이 1974년부처 약 20년동안 지존으로 군림하는 동안 가장 눈물을
많이 흘렸던 준우승자로서는?
손오공 서능욱 9단으로서 그는
각종 타이틀 전에서 13번이나 결승전에 올랐으나 거의 모두 다
조훈현에게 패배하여
지난 40년 안팎 이렇다할 타이틀 한 번도 못 획득하는 불운을 겪은
대표적인 조훈현 희생타 케이스(트라우마)였다고 합니다.
서능욱은 최근 프로 입단 40년만에 대주盃 라는 다소 소규모 타이틀을
평생 처음으로 차지하여 실로 감격의 눈물을 펑펑 쏟았다는 후문입니다.
그리고 조훈현 희생타의 제2인자로는
별명이 장비(관우,장비의 장비)장수영 9단이었는 데
별명이 장비(관우,장비의 장비)장수영 9단이었는 데
그도 역시 9번 결승전에 진출하여 모두 준우승한 비운의 사나이가 되었고
지난 40년동안 그 후유증으로 단 한 번도 타이틀을 차지하지
그도 역시 9번 결승전에 진출하여 모두 준우승한 비운의 사나이가 되었고
지난 40년동안 그 후유증으로 단 한 번도 타이틀을 차지하지
못했다고 하는 불운의 프로기사중의 한 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장비 장수영 9단은 바둑해설에서 두각을 나타낸 바 있습니다.
그리하여, 위의 서능욱 장수영등
당시 젊은 실력자이던
백성호,김수장,강훈 등과 함께 소위 도전5강으로
꾸준히 합심하여 조훈현의 아성에 도전하였으나
꾸준히 합심하여 조훈현의 아성에 도전하였으나
20년간 번번이 조훈현에 도전하기도 전에
백성호,김수장,강훈 등과 함께 소위 도전5강으로
꾸준히 합심하여 조훈현의 아성에 도전하였으나
꾸준히 합심하여 조훈현의 아성에 도전하였으나
20년간 번번이 조훈현에 도전하기도 전에
여러번 서봉수에 막혀 그 꿈을 결국에는 저버리는 비운의 도전 5강
여러번 서봉수에 막혀 그 꿈을 결국에는 저버리는 비운의 도전 5강
으로 남았다는 후문입니다.
소감: 세계프로바둑의 초대 황제로서 지난 40년간 2류급이던 한국 바둑
을 일약 세계 일류급으로 끌어올린 지대한 공을 높이 삽니다. 이젠 60세의 초로의 신사가 된 조훈현이 후배들의 롤모델로서 바둑 인생의 후반부
를 멋지게 장식해 주시길 바랍니다.
ㄹ.된장 바둑 ,야생의 표범 서봉수 9단
만일 서봉수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한마디로 조훈현은 일본으로 돌아가 일본 바둑계를 조치훈과 함께
쌍두 마차로 쌍끌이로서 호령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조훈현은 한국에서 천하통일을 3번이나 하였지만,
서봉수에게 주요 대국에서 가끔 지는 바람에
가끔 지는 바람에
(사실900판을 두면 600판은 조훈현이 이기고 300판은 서봉수가 이기는 정도 였지만)
조훈현 나름대로의 자존심이 상하여 그 서봉수를 완전히 제압한 다음
일본에 다시 가서
일본을 조치훈9단과 함께 일본을 완전 제압할 심산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조치훈-조훈현이 일본 바둑을 휩쓸거라는 소위 쓰나미가 능히 예상될 정도 였다고 합니다.
김인 9단도 함께 일본에 그냥 남아 3총사로서 활약을 했다면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일본 바둑은 한국인이 일찌기 거의 점령
했으리라 봅니다.
***최근 한국의 여자 프로 골퍼들이 합심하여 일본의 프로여자골프계를
석권하듯이 말입니다.
(사실900판을 두면 600판은 조훈현이 이기고 300판은 서봉수가 이기는 정도 였지만)
조훈현 나름대로의 자존심이 상하여 그 서봉수를 완전히 제압한 다음
일본에 다시 가서
일본을 조치훈9단과 함께 일본을 완전 제압할 심산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조치훈-조훈현이 일본 바둑을 휩쓸거라는 소위 쓰나미가 능히 예상될 정도 였다고 합니다.
김인 9단도 함께 일본에 그냥 남아 3총사로서 활약을 했다면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일본 바둑은 한국인이 일찌기 거의 점령
했으리라 봅니다.
***최근 한국의 여자 프로 골퍼들이 합심하여 일본의 프로여자골프계를
석권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 서봉수가 그의 일본 복귀를 늦추게 하는 선전끝에
조훈현을 아주 다행히도 한국에 머물러 있게 하였고
결국에는 천재 조훈현 덕분에- 한국 바둑은-당시 일본에 아주
무시당한 적이 많았는 데 -1989년 응씨배 세계대회에서의
조훈현 우승이후에는
한국을 다시 보게되었다고 하며
한국을 다시 보게되었다고 하며
나아가 그 이후 한국을 오랜동안 무시하던 일본 바둑은
아시아에서 점점 3류국가로 전락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최근 20여년간 일본 바둑이 자국내 국제 타이틀인 후지쓰배 말고
다른 세계 주요 타이틀 전선에서 초반 대거 미끄러지는 대형사고를
수십차례 당하여 얼굴을 못들 정도이고 적지않은 일본 바둑의 시니어
클래스들이 자탄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서봉수는
순수 국산 즉 일본 유학을 하지 않은 토종 프로바둑기사로서는
최초의 정상급 인물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조남철,김인,조훈현 및
국수전을 한두 차례 차지한 바 있던 윤기현 및 하찬석 국수도
일본 유학파였기에
국내에서의 토종 된장 바둑 서봉수 9단의 인기는 한시대를 조훈현과 함께
풍미하기도 하였습니다.
1972년 부터 혜성같이 등장한 서봉수 9단은
2단 시절 이미 최고 수준의 名人전에서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1974년 부터는 공군 복무를 위해 귀국한 조훈현과 함께
한국 바둑의 명승부 연출의 80년대를 장식하게 됩니다
서봉수는
특히 명인전에서 천하의 조훈현을 여러 번 물리쳐 명인전의 사니이
또는 서名人이라고 수십년간 호칭한 바가 있습니다.
2단 시절 이미 최고 수준의 名人전에서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1974년 부터는 공군 복무를 위해 귀국한 조훈현과 함께
한국 바둑의 명승부 연출의 80년대를 장식하게 됩니다
서봉수는
특히 명인전에서 천하의 조훈현을 여러 번 물리쳐 명인전의 사니이
또는 서名人이라고 수십년간 호칭한 바가 있습니다.
서봉수는 이미 10여년 전에 한국 최초의 1000승을
차지한 바 있을 정도로
대국의 수가 상대적으로 가장 많았으며
최근에는 서능욱 9단이 1,000승의 위업을 달성하여
최근에는 서능욱 9단이 1,000승의 위업을 달성하여
본인이 감격에 겨워할 정도 였다고 합니다.
서봉수9단은 특히 정치계 경제계 및 사회 고위층 인사와의 지도대국에서도 일체 조금도 여유를 주지 않는 등 그 악명(?)을 드높인 바가 있어서
약 12년 전에는 바둑 T.V. 케이블 채널에서
서봉수 2점 접바둑 코너를 준비하여
서봉수와 2점 접바둑으로 만일 이기면?
서봉수 2점 접바둑 코너를 준비하여
서봉수와 2점 접바둑으로 만일 이기면?
아마 6단의 정식 면장을 한국기원에서 준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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