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복잡할 때나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뜨개질을 해요.” 지난 2일 늦은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의원실에서 만난 인재근 의원이 북한 아이들에게 보내는 모자 겸 목도리를 뜨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토요판] 김두식의 고백
인재근 민주통합당 의원
영화 <남영동 1985>가 잘 묘사한 것처럼, 1985년 9월4일부터 26일까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김근태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 전 의장은 이근안을 비롯한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에게 물고문, 전기고문 등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 후 검찰에 송치된 그는 서울지검 5층 승강기 앞에서 스쳐 지나가듯 만난 아내 인재근에게 자신이 겪은 참혹한 고문 내용을 처음 폭로합니다. 김근태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적을 타고 내려온”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 “이해와 사랑을 실은” 인재근의 물기 어린 눈빛은 고문 경찰들에게 짓밟혀 극도로 왜소해진 김근태의 “부피와 무게를 원상태로 되돌려주는 전기 스파크”를 일으켰습니다. 그날부터 법정 안팎에서 전개된 빛나는 투쟁의 절반 이상은 ‘바깥사람’ 인재근의 몫이었습니다. 당시의 인재근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은 종종 “지나치게 신사적인 김근태보다 인재근이 정치에 더 맞는 것 같다”는 안타까움을 토로하곤 했습니다. 의원회관에서 만난 인재근 의원은 그런 전설 속의 투사보다는 편안한 동네 아줌마에 가까운 모습이었습니다.
감독님, 인재순이란 이름은 바꿔주세요!
-국회의원 되고 달라진 게 있나요?
“이거 너무 바쁘구나!(웃음) 어떤 날은 30분 간격으로 여기 왔다 저기 갔다 난리를 쳐야 해요. 옛날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할 때처럼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데, 그 얘기를 다 들어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들어주기만 해도 반은 치유가 되거든요.”
-정치인 아내 역할을 오래 했기 때문에 익숙한 일 아닌가요?
“직접 해보니 다르네요. 예전에는 김근태씨에게 ‘그 사람 상대하지 마라, 이렇게 하면 안 된다, 누구 주례 서줘야 한다, 누구랑 밥 먹어야 하니 시간 내라’ 참견도 하고 시간도 뺏었는데 그게 너무 미안해요. 어머나, 세상에 국회의원 너무 바쁘네.(웃음)”
-박선숙 전 의원을 비롯해서 김근태 의장과 가까웠던 사람 중에 안철수 캠프에 합류한 분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인재근 의원은 9월 초부터 문재인 멘토단장을 맡으셨죠? 마음의 갈등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전혀요.(웃음) 송호창 의원이 탈당한 다음에 사람들이 제 주변에 전화하고 난리가 났대요. 인재근 의원은 어떻게 할 거냐고 걱정도 많이 하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나는 몸무게가 너무 많이 나가서 옮기기가 힘들다!(웃음)”
-가까운 사람들의 움직임에도 흔들리지 않으셨군요?
“저는 개별 의원이 아니라 민평련(민주평화국민연대)이라는 민주화운동 동지들과 같이 움직여야 하는 사람이라서 전혀 흔들림이 없었어요. 비교적 자유로운 사람들이 움직였던 건데, 그들도 하나가 되기 위해서 (안철수 캠프에) 갔던 만큼, 곧 함께 움직일 거예요.”
-김근태 의장은 기자나 전문가의 평가로는 늘 좋은 대통령감으로 뽑혔지만 결과적으로 대중의 지지를 얻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무엇이 약점이었을까요?
“국민경선 제도나 분양원가 공개처럼 대중들이 준비되기 전에 너무 앞서 나간 것이 문제였죠. 어려운 말을 쓰는데다 너무 점잖은 사람이었고요. 저는 반대예요.”
-인 의원님은 예전에 민주화운동 할 때 쌍욕도 꽤 하셨다죠?
“지금도 잘해요.(웃음) 정치하려면 설명조로 이야기하지 않고 선언적으로 쉽게 말할 필요가 있어요. 그래야 사람들 머리에 딱딱 박히죠. 쌍욕이 필요한 건 아니고.(웃음)”
-차분하고 소극적인 주부의 모습으로 그려진 영화 속 우희진씨와는 많이 다른 모습인데요.
“후배가 그러더라고요. 영화에서 딱 한 군데 웃음이 나왔는데, 우희진이 인재근으로 나오는 장면이라고요.(웃음)”
-감독에게 항의하지 않으셨어요?
“시나리오에 제 이름이 ‘인재순’으로 나온 건 항의했어요.(웃음)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세련된 이름인데, 이건 아니다 싶어서 바꿔 달라고 했죠. 그래서 ‘인재은’으로 나오잖아요. 우리 애들이 ‘엄마는 별걸 다 참견한다’고 하는데도, 기어코 바꿨어요.(웃음)”
-<남영동 1985>를 보면서, 김근태와 인재근의 법정투쟁을 그린 영화도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검찰청에서 남편을 다시 만난 순간을 잊지 못하시죠?
“그 사람이 처음 사라졌을 때부터 제가 막 찾아다녔어요. 치안본부에서 구체적으로 어딘지는 얘기 안 해도 ‘경찰이 데리고 있다’까지는 말해줬거든요. 그래서 남영동에 있다고는 어렴풋이 짐작했어요. 잠도 안 재우고 못 살게 굴었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 조직적으로 고문을 할지는 몰랐죠. 9월7일이 공식 구속 일자니까 날짜를 맞춰보면 20일 후인 9월26일이 구속 만기일이었어요. 그래서 며칠 전부터 제가 아침마다 검찰청에 가서 혹시 송치된 사람 명단에 김근태가 있는지를 확인했죠. 26일에 송치자 명단에서 그를 찾았고 521호 김원치 검사가 담당인 걸 알았어요.”
-검사실 호수도 잊지 않으셨네요. 김근태 입장에서는 기적 같은 만남이었지만, 인재근 입장에서는 준비된 만남이었군요?
“미리 가서 계속 확인하고, 521호로 가는 길목을 제가 지키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딱 마주친 거죠. 7~8킬로그램이나 빠져서 아주 초췌했어요. 걸음도 걷지 못해 다리를 질질 끌었고요. 한 사람이 부축해서 끌고 가는데 계단을 내려가지 못할 정도였어요. 거기서 4층 피의자 대기실로 내려가는 동안에 이야기를 나눈 거예요. 계단 내려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서 그사이에 많이 이야기한 거지. 지금같이 막 녹음도 하고 사진도 찍으면 좋지, 그때는 아무것도 없었잖아요. 기억에만 의존해야 했어요. 그 사람과 이야기하는 걸 옆에서 막으면 제가 피의자 대기실의 양쪽 문으로 번갈아 뛰어 들어가면서 이야기를 듣고, 그래서 그 짧은 틈에 양말 벗고 발도 보고 그랬죠. 발뒤꿈치는 아물지 않아 핏자국이 남아 있는데 빨간약도 바르고 하얀 가루도 뿌렸더군요. 발등에는 전기고문으로 까맣게 탄 자국이 있었어요.”
민가협 ‘엄마들’과 ‘아내들’의 신경전
-그걸 보고 바로 싸움을 시작하셨죠?
“그날 모든 민청련 회원들을 우리 집으로 다 끌고 가서 성명서, 머리띠, 플래카드를 만들었어요. 바로 다음날부터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농성을 시작했죠. 외신기자, 정치인들이 찾아왔고, 노동자, 학생, 장기수의 가족들과 유가족들이 모여들었어요. 검찰청으로 가서 다시 면회를 하려고 해도 입구부터 나를 막던 상황이라, 제가 검찰청 계단에 앉아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어요. 반드시 내 손으로 이 일을 끝내겠다고 생각했죠. 그 농성이 85년 12월12일 민가협 결성으로 이어졌어요.”
-간첩이라는 오해 때문에 장기수 가족들과 함께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운동권 안에서도 종교 쪽 분들이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을 차별하는 경향이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처음부터 그분들도 감싸안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분들의 인권을 이야기한다고 내가 간첩이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모든 걸 뛰어넘어서 가족과 인권에만 초점을 맞췄어요. 그중 상당수가 대법원에서 재심으로 무죄를 받았죠.”
-민가협 내부에 불협화음도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학생운동 하는 아들의 직책에 따라 엄마들 직책이 생겨요.(웃음) 엄마들이 아들들을 그만큼 공부시키려면 얼마나 치맛바람이 셌겠어요. 그러다보니 민가협에도 치맛바람이 불고.”
-아내와 엄마의 입장이 또 다르잖아요?
“구속자 엄마들한테 구속자 아내들이 얼마나 구박을 받았는지 몰라요. 안기부 앞에 가서 면회시켜 달라고 막 싸우다가, 우리가 집에서 애들이 기다린다고 먼저 가야 한다고 하면, 엄마들이 ‘자식이 들어가 있으면 저러겠냐? 남편이니 저러지’ 하면서 막 욕을 하셨어요.(웃음) 문익환 목사님께서 방북 후 안기부에서 조사받으실 때 안기부 쪽에서 ‘어느 날 오면 면회시켜 주겠다’고 하기에 박용길 장로님이 ‘약속받았으니 집에 가자’고 하셨는데, 엄마들이 난리가 났어요. ‘아들이라면 그렇게 못할 거다. 우리는 절대 안 간다. 부인들이 문제다’ 하면서요.”
1953년 강화도 앞 교동도에서 태어난 인재근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인천의 부모님과 떨어져 교동도의 조부모님 손에서 성장했습니다. 지금도 꿈에 나올 정도로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명문 중·고교로 진학하려면 초등학교부터 인천에서 다녀야 한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인천으로 와야 했지만, 방학만 되면 무조건 교동도로 달려갔습니다. 멀리 방파제에서 손녀를 기다리던 할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진보적인 집안 분위기 덕분에 일찍이 사회문제에 눈을 뜬 그는 1973년 이화여대 사회학과에 입학하면서 운동권 동아리 ‘새얼’에 참여했고, 대학 4학년을 마치던 즈음에는 부평의 봉제공장에 취업해 노동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가장 바닥에서 시작하겠다는 딸의 결심을 높이 평가하면서 공장 기숙사까지 짐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즈음 김근태를 만났습니다.
“대학 4학년 때 엄마가 ‘점잖은 목소리의 남자가 자꾸 전화해 너를 찾는데 누구냐’고 물어보셨어요. 그때는 몰랐지만, 우리 서클 선배(최영희 전 의원)에게 전화번호를 받은 김근태씨였어요. 그 선배가 전부터 나에게 ‘신랑감 따로 있으니까 연애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결국 통화는 못했고 나중에 그 선배 집에 갔다가 우연히 거기 들른 김근태씨를 처음 만났어요.”
-1985년의 김근태 자술서를 보면 서경석·신혜수 부부가 두 분을 소개한 걸로 나오던데요.
“그런가요? 실제로 소개한 장명국·최영희 부부에게 해가 갈까봐 그랬을 거예요. 85년이면 서경석 목사는 미국 유학 중이었으니, 피해 볼 일 없는 그 부부 이름을 적었겠죠. 고문당한 김근태씨가 배후로 자백한 것도 권호경 목사님, 함세웅 신부님 등 모두 성직자들이잖아요. 성직자는 비교적 안전하리라 생각했던 것과 같은 맥락일 거예요.”
-만난 지 1년이 안 되어 동거를 시작하셨죠? 당시로는 꽤 파격적입니다.
“저도 그 사람도 모두 수배중이었어요. 그는 오랫동안 숨어 있던 집에서 나와야 할 형편이었고요. 수배자끼리 서로 좋아하게 됐으니 자연스럽게 같이 살게 된 거죠. 그때는 운동권 커플 중에 그런 사람이 많아서 어떻게 살림 차리면 되는지 가재도구와 노하우를 모두 전수받았어요.(웃음) 조영래·이옥경 커플은 80년에 결혼할 때 애가 들러리를 서면서 들어갔을걸요? 우리는 애가 4개월 됐을 때 결혼식을 올렸으니 양호한 거죠. 조영래씨가 자전거에 아기 태우고 다니는 걸 김근태씨가 많이 부러워했어요. 장명국·최영희 커플의 아기 돌에 가서는 ‘나도 아들 낳을 거다’라고 큰소리를 쳤다더군요.(웃음)”
조화순 목사가 이끌던 인천 도시산업선교회에서 실무자로 일하던 인재근이 아기를 갖게 되면서 남편 김근태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뒤이어 83년부터 85년까지 김근태는 민청련 의장을 맡아 공개된 민주화운동 청년조직을 이끌며 침체된 운동에 돌파구를 열었습니다.
그의 의지를 꺾기 위해 동원된 것이 남영동 대공분실의 혹독한 고문이었습니다. 85년 민가협을 창립한 인재근은 초대 총무를 맡아 구속자 가족들과 함께 민주화운동의 최전선에 섰습니다. 그러나 95년 김근태가 민주당에 입당해 정치인의 길을 걸으면서, 인재근은 누군가의 아내라는 괄호 속의 인물로 조용히 사라집니다.
남편 김근태 캐리커처인형을 안아주는 인재근 의원. |
노무현은 직설 스타일
그게 굉장히 매력적이었어요
문재인은 착한 남자
강제라도 염색시켜 줄걸
그걸 못해서 아쉬워요
1년 전의 준비없는 이별
지금도 사진 보면 묻고 싶죠
당신 진짜 간 거야?
하느님이 잘해 주셔? 2012년을 점령하라, 그 말을 기억해줘요 “아마 김근태씨가 제일 안타까워했을 거예요. 그래도 국민의 정부로 정권교체가 되면서 제가 수양부모협회 후원회장도 하고, 장애인 인권, 노인 복지 등으로 범위를 넓히면서 인권에 대한 관심의 끈은 놓지 않았어요.” -참여정부 때는 노무현 대통령과의 갈등도 있지 않았나요? “노무현과 김근태 두 분이 이야기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스타일이 정말 달라요. 오랜만에 대통령을 만나서 김근태씨는 외교, 통상, 경제 하나씩 차곡차곡 정리하면서 이야기하고, 우리 노 대통령은 직설적으로 자기 감정 표현을 다 하는데, 너무 놀랍더라고요. 노 대통령의 그런 모습이 제게는 굉장히 매력적이었어요. 친노가 왜 그렇게 설치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더라고요.(웃음)” -문재인 후보는 어떤가요? “너무 착한 사람이에요. 우리 집에서 쓰는 선거 구호가 있어요. ‘착한 남자, 선한 대통령, 기호 2번 문재인!’ 제가 예전에 김근태씨를 억지로 염색을 시켰거든요. 문 후보도 그렇게 했어야 하는데 그걸 못해서 아쉬워요.(웃음)” -김근태 의장의 정치적 유산을 이어받은 인재근이 별개의 정치적 인격체로 독립하는 게 가능할까요? 물론 민주화운동에서 쌓아온 인재근의 자산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만. “저는 김근태의 아내라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김근태가 살아서 못한 것은 제가 계승해서 계속해야죠. 김근태는 묘비에 민주주의자로 남았지만, 저는 인권운동가로 남고 싶어요. 국가보안법 때문에 인권침해를 받고 고문을 받아서 결국 남편이 요절한 거잖아요. 앞으로 더 열심히 정치해서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인권정치인이 될 거예요. 인권을 침해당해 찾아오는 가슴 아픈 분들의 이야기에도 계속 귀를 기울일 거고요.” -인생에서 가장 추웠던 때는 언제인가요? “작년 12월29일 갑자기 위독하다고 가족을 모두 불러 모았을 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나는 이별할 준비가 전혀 안 됐는데. (잠시 침묵) 다음날 새벽에 세상을 떠났죠. 지금도 사진 보면 묻고 싶어요. 당신 진짜 간 거야? 하느님이 잘해 주셔?” -인생에서 가장 따뜻했던 때는? “우리 둘이 처음 만나서 남영동 가기 전까지. 그다음에는 2008년 낙선하고 4년이 좋았어요. 산에 같이 다니면서 내가 드라마 본 것 요약해서 얘기해주면 그렇게 좋아했어요, 직접 보는 것보다 저한테 듣는 게 훨씬 재미있다고.”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정치를 혐오의 대상으로 여기면 안 돼요. 좋은 사람들이 바른 생각을 가지고 정치에 참여해야 정치도 좋게 바뀌어요. 현실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것 못지않게 좋은 지도자를 뽑는 투표가 중요하고요. 김근태의 마지막 말을 기억해줬으면 해요. 2012년을 점령하라, 오로지 참여하는 자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남편의 선거운동을 돕는 중간에도 잠깐 집에 들어와 드라마 <이산>을 봤을 정도로 사극을 즐긴다는 자칭 ‘드라마 여왕’ 인재근 의원은 이제 드라마 축약본을 들어줄 ‘김근태씨’가 없는 걸 몹시 서운해했습니다. 약간의 푼수기에 감춰진 깊은 통찰력과 과단성이 인상적인 정치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몸에 밴 자연스러움이 보기 좋았습니다. 갓 성형수술을 마친 것 같은 인공미의 공주들이 늘어가는 정치판에 그가 따뜻한 새바람을 불어넣기를 기대하며 의원회관을 나섰습니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그리 춥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녹취·진행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