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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장이 고종석--최근 인터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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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988회 작성일 2012-11-17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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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11.16 20:19수정 : 2012.11.17 14:56

″나랑 동갑인 친구가 마포 신민당사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가슴이 찢어지더라고. 이런, 운동권 코스프레하는 게 창피하네. 어색하다니까!″ 지난달 24일 저녁 서울 강남구 일원동 자신의 작업실에서 만난 고씨는 자유로워 보였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김두식의 고백
‘절필 선언’ 고종석 작가

‘글, 말, 술, 동무.’ 1990년대 후반부터 고종석 선생의 글을 열심히 읽어온 저에게 각인된 그의 이미지입니다. 대학 졸업 후 83년 <코리아 타임스>에서 시작한 영자신문 기자생활, 88년 <한겨레> 창간 참여, 93년 소설가 데뷔, 94년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언어학과 석박사 과정 유학, 99년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언론계에 복귀한 이후 일간지 한 면을 통째로 채웠던 굵직굵직한 시리즈들, 그리고 최근 트위터(@kohjongsok)에 보이는 위트 넘치는 단문들에 이르기까지, 글과 말을 빼놓은 고종석의 삶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강금실, 김정환, 김진석, 조선희, 차병직, 황인숙 등 그의 글에 가끔 등장하는 밤샘 술 동무들도 따지고 보면 모두 글을 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가 절필이라니, 고종석다운 수준 높은 유머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한국의 대표적 글쟁이가 글을 접는 우리 시대는 과연 뭔가?’ 싶어 마음 한편이 쓰렸습니다. 그의 속마음을 듣고자 서울 강남구 일원동에 있는 그의 작업실(그의 표현대로라면 이제는 ‘노는 공간’)을 찾았습니다.

굉장한 책도둑이었던 법대생 시절

-오늘은 하루 종일 뭘 하셨어요?

“트위터에 들어가 놀다가, 인터뷰에 실을 사진 찾아보고, 뭐 그냥 아무 일도 안 했어요. 이렇게 김 교수님 기다렸죠. 김 교수님은 이런 일 아니더라도 한번 보고 싶었지만, 알아보니 술을 안 드신다고 해서 실망을 했는데, 어쨌든 나중에 술은 꺼낼 거예요.”

-(작업실에 쌓인 책을 보고) 책은 인터넷과 오프라인 중 주로 어디서 구입하시나요?

“최근에 책을 산 기억이 거의 없어요. 몇몇 출판사에서 제가 소화하기 벅찰 정도로 많은 책을 보내주거든요. 제가 소설 읽기를 싫어하는데 왜 이렇게 소설을 많이 보내주는지 모르겠어요.”

-소설가인데, 소설 읽기를 싫어하신다고요?

“시집, 에세이, 사회과학 책들은 보내주면 꼬박꼬박 읽는데 소설은 안 읽어요. <한겨레> 때 문학담당기자를 2년 했는데, 그때도 소설은 의무감으로 읽었어요. 애거사 크리스티, 에릭 시걸, 존 그리셤, 파스칼 키냐르 같은 이들의 소설은 좋아해요.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은 말들이 너무 예뻐서 문지(문학과지성사)에 가서 불어 원본을 구해 다시 읽었어요. 그런데 <토지>나 <태백산맥> 같은 책은 감당을 못하겠어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잘 읽히는 걸 보면 꼭 길이 문제는 아닌 것 같고. <토지>는 에릭 시걸 소설이나 다를 바 없는 대중소설인데 재미가 없고, <태백산맥>은 1부에서 좌우 중립적인 김범우가 주인공이었는데 87년 6월 혁명 이후 작가가 왼쪽으로 확 돌아가지고 자기가 만든 캐릭터를 거의 인격 살해했죠. <한강>, <아리랑>은 안 읽었는데, 듣기로는 민족주의 과잉이었다고.”

-한국 사회에서 에릭 시걸이나 존 그리셤을 좋아한다고 하면 좀 없어 보이지 않나요?

“저는 에릭 시걸을 좋아하는 데 자부심이 있어요. 존 그리셤 ‘빠’라고도 할 수 있고요. 나오면 바로 읽느라 대부분 영어나 불어로 읽었어요. 저는 박범신 선생 같은 경우에도 요즘 책보다 과거 절필 전에 쓴 <풀잎처럼 눕다> 같은 책이 훨씬 재밌었거든요. 깡패 나오고 섹스 묘사도 노골적이고.(웃음) 제가 미드(미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거랑 같은 맥락이죠.”

-얼마 전 교육방송에서 <해피 패밀리> 전체가 낭독되었는데, 아직 출간은 안 되었지요?

“네. <해피 패밀리>는 작년에 쓴 건데, 절필한 다음에 책이 나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겠네요. 출판사에서는 출간에 우선순위를 매겨서 잘 안 팔리는 작가들 책은 1년씩 묵히고 그러거든요. 제 책은 가수 이아립씨가 낭독했고, 한번은 이아립, 시와씨와 무대에도 함께 섰어요. 그런 유명인사인 줄 몰랐는데 나중에 젊은 친구들 통해 들으니 이 두 분이 홍대 앞에서는 거의 여신 수준이더라고.(웃음)”

-가끔은 직접 사보고 싶은 책도 있지 않나요?

“서점 나가는 게 귀찮아서요. ‘귀차니즘’이라고 하죠. 집에서 서점까지 한번에 가는 버스도 없고, 걷는 것도 귀찮고,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건 엄두가 안 나고. 사실 제가 대학생 때는 굉장한 책 도둑이었어요.”

-책 도둑이요?

“지금은 없어졌지만 광화문에 외국 서적만 팔던 범한서적이 있었어요. 거기서 촘스키의 <통사구조론>과 <데카르트 언어학> 불어판을 샀는데 학생이 값을 치르기에는 너무 비싼 거예요. 너무 비싸서 제가 봉 노릇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감시도 헐렁하고, 겨울이라 옷도 두꺼워 책을 훔칠 조건이 됐어요. 프로이트의 <문명과 불만>이 처음 훔친 책인데, 마침 주머니에 넣기 알맞아서 들고 왔죠. 그다음부터 범한서적에 있는 책은 제 집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어요. 그냥 ‘옮겨’ 오면 되니까요. 나중에는 종로서적에도 진출했죠. 거긴 지키는 사람이 많았지만, 6~7개월 하니까 거기 있는 책도 이젠 다 내 방에 있는 책 같았어요. 영어판 마르쿠제 전집은 가방 하나에 들어가지를 않아서 두 번에 나눠서 집으로 옮겼죠.”

-이거 신문에 써도 되나요?

“(연재물 제목이) 고백이라면서요? 심지어 그렇게 훔쳐서 선물도 했어요. ‘저자를 대신하여. 고종석’이라고 서명까지 해서요. 열댓 권은 성균관대 법대 도서관에 기증도 했어요. 외서에 값을 너무 많이 붙여서 ‘내가 착취당하고 있는 거다’ 싶어 응징하는 기분으로 했던 거고, 죄의식도 없었어요. 중1 때부터 종로서적에 드나들면서 책을 엄청 샀으니 별로 미안하지도 않았죠.”

-그게 언제까지 계속됐나요?

“지금 모시는 분(아내)과 연애할 때라 광화문에서 약속을 했는데, 시간이 남아 종로서적에 들어갔어요. 그냥 나오자니 할 일을 못한 것 같아서 눈에 띄는 대로 고등학생을 위한 독일어 숙어집 한 권을 들고 나오는데 누가 손을 딱 잡더라고요. 40대로 보이는, 간부 같은 직원이었어요. 책장 뒤의 작은 방으로 끌려갔죠. 그 양반에게 지금 김 교수에게 당하듯 심문을 당했어요. 신분증을 보고 (법대생인 걸 알고는) ‘무슨 죄 같으냐?’고 묻기에 ‘단순절도죄 같다’고 하니까 그 양반이 웃으면서 ‘이왕 주머니에 넣은 책이니 그거나 사가라’며 풀어줬어요. 그 양반이 은인이죠, 내 도벽을 완전히 없애줬으니까. 훔친 책들은 대학원 다닐 때 우리 집에 불이 나서 한 권도 못 건졌어요. 그다음부터는 정말 읽고 싶은 책만 샀어요.”

-그 뒤에도 종로서적은 계속 갔나요?

“갔죠, 왜 안 가요? 종로서적 문 닫을 때까지 계속 갔어요.”

원칙에 관한 생각은 다 말했어요
한 예로 보안법은 왜 나쁜가
사건에 따라 글은 달리 쓴대도
결국 하는 얘긴 같거든요다만 ‘이 말은 꼭 하고 죽겠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면 다시 쓰겠죠

누가 손을 딱 잡더라고요
책장 뒤 작은 방으로 끌려갔죠
풀어준 그 양반이 은인이에요
내 도벽을 완전히 없애줬으니까
훔친 책들은 다 불에 타버렸지만

전라도 출신의 엘리트주의자를 경멸함

고종석은 까다로운 것 같으면서도 전혀 까다롭지 않은 인터뷰 대상이었습니다. 제가 미리 준비한 ‘호구조사’성 질문에 대해서는 “국정원에서 나온 것 같다”며 예의 그 귀차니즘의 성의 없는 답변을 날렸지만, 자기 내면을 드러내는 데는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형식적인 것, 비본질적인 것을 태생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직업적 글쓰기’를 접기로 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결정적인 건 그냥 귀차니즘이에요. 생각해 보니 1983년 신문사에 들어간 이후 원고지 한두 매라도 글을 안 쓴 날이 거의 없더라고요. 초창기 기사들은 다 허공으로 날아간 글들인데 그런 것까지 포함해서 25살 이후 내가 글을 안 쓰고 하루를 보낸 게 며칠이나 될까? 그게 다 하루살이 글들이거든요. 이것저것 핑계를 댔지만 어쨌든 글쓰기 싫은 게 가장 큰 이유였어요.”

-<한겨레>에 마지막 칼럼이 나가고, 여러 매체에 선생님의 절필을 아쉬워하는 글이 줄을 이었는데요.

“그래서 고맙더라고요.(웃음) 원칙에 관한 한, 내 생각을 다 말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국가보안법 왜 없애야 하는지 제가 이미 다 얘기했잖아요. 보안법 사건이 또 터지면 주인공이 달라지니 다른 글을 쓸 수 있겠지만, 결국 제가 하는 얘기는 똑같거든요. 다시 글 쓸 일은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직업적 글쓰기를 그만둔다고 했지, 글쓰기 자체를 안 한다고는 안 했으니, 그야말로 돈 때문이 아니라 ‘이 말은 꼭 하고 죽어야겠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면, 그때는 쓰겠죠.”

-절필하면서 “생계무책”이라고 적으셨던데, 2005년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그만두고, 2009년까지 객원 논설위원으로 글을 쓴 다음에는 어디에서도 월급을 받은 일이 없죠?

“제가 뒷생각을 안 해요. 2005년에 사표를 던지니까 장명수 사장이 ‘야, 너 미쳤냐? 왜 나가냐?’며 말리는데, 사실 그때는 출근하기가 너무 귀찮더라고요. 논설위원이 널널해도 매일 출근은 해야 하니까요. 술 마시는 게 굉장히 불편했어요. <한겨레> 때도 출근하기는 힘들었지만 그때는 젊었으니까 새벽까지 마시고 출근하면 됐죠. 나이 들면서는 새벽까지 마시고 출근하면 이건 뭐…(웃음). 사표 내니까 장 사장이 ‘그럼 그냥 집에서 한 달에 한두 번 칼럼을 쓰고 시리즈를 맡으라’고 해서 객원 논설위원이 됐죠. 객원이라지만 4대 보험도 되고 한국일보사 직원명부에도 남아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사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부도덕한 월급쟁이였던 거죠. 생계무책이 된 건 2009년부터 3년쯤 됐어요.”

-글을 안 쓰면 수입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 아닌가요?

“그래서 요새 어떻게 먹고살지 궁리를 하고 있죠. 98년 프랑스에서 막 돌아왔을 때도 생계무책이어서 고등학생들 대상으로 과외를 할 생각을 했는데, 애 엄마가 하도 화를 내서 못했어요. 말리지만 않으면 지금도 그런 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아니라면 사람들 모아놓고 글쓰기 교실을 하거나, 대학에서 안 가르치는 불어나 영어 원서들의 강독 모임을 해볼까 생각중인데, 잘될지는 모르겠어요.”

-고 선생님 글을 읽다 보면, 전라도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굉장히 중요한데, 서울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전라도 사람이 아니지 않나요?

“대답을 알면서 물어보시는 것 같아서 좀 그런데. (한참 생각한 후) 부모님 두 분이 다 전라도 사람이지만 어려서는 제가 전라도 사람이라는 의식이 없었어요. 80년 광주 이후 ‘전라도 사람은 차별받는 사람이구나, 대한민국 공동체 안에서 일종의 소수자 집단이구나’ 느꼈고, 그 순간, 전라도 사람이 된 거예요. 내가 전라도 사람이란 걸 의식하면서 소수자라고 느꼈고 다른 모든 범주의 소수자 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제가 가장 경멸하는 사람들이 전라도 출신의 엘리트주의자들이에요. 전라도 출신이면서 학벌주의자인 사람들. 제가 ‘전주고 이야기’라는 글에도 썼는데, 사람이 상처를 받았을 때 두 부류로 나눠져요. 한쪽은 그 상처의 기억으로 다른 사람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다른 쪽은 그 상처를 보상받기 위해 다른 사람의 상처를 후벼 파죠. 제가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 편에 서게 된 거예요. 통합진보당 사건 때 트위터에서 제가 이정희 전 의원을 비판하고 나서 계속 뭔가가 걸렸어요. 제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말하자면 다수의 편에 서서 소수에게 돌을 던지고 있었던 거예요. 몇 번 하다가 말았죠.”

고종석 인생 타임라인 (※클릭하면 이미지가 커집니다.)

-살면서 가장 따뜻했던 순간은 언제입니까?

“92년부터 93년까지 9개월 동안 프랑스 파리에서 ‘유럽의 기자들’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석했을 때예요. 그때 <한겨레> 김선주 문화부장이 ‘프랑스 대사관에서 공문이 왔다, 불어 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 지원해 보라’고 해서 지원했는데, 저한테 정말 행운이었죠. 되돌아보면서 그 시절이 행복했지 하는 게 아니라, 당시 그 순간순간이 행복했어요. 절반은 세미나를 듣고 절반은 취재해서 잡지를 만드는 건데, 그게 아주 생동감이 있었어요. 그때를 빼고는 지금이 제일 행복해요. 주량이 줄어 24시간을 못 마시는 건 아쉽고.”

양주병의 목을 붙잡고 새벽 3시에야…

-연수 전에 공식 경력으로는 불어를 배운 적이 없는데, 어떻게 불어를 하셨어요?

“불어와 독어를 처음 접한 게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예요. 처음에는 외국어 배우는 걸 두려워했는데 영어를 공부하다 보니 재미있더라고요. 그래서 1학년 겨울방학 때 불어, 독어 교습서를 사서 독학을 했어요. 독어는 중간에 때려치웠는데, 불어는 알리앙스 프랑세즈도 다니고. 그러면서 스페인어도 같이 배워서 영어, 불어, 스페인어는 말은 잘 못해도 그냥 읽고 쓸 수는 있어요.”

-프랑스 연수 이야기를 쓰신 게 93년 첫 장편 <기자들>이죠?

“귀국해보니 신문사에 원고지가 없어졌더라고요. 타자를 배워야 해서 일주일 동안 연습 삼아 쓴 게 <기자들>이에요.”

-93년에 발표한 첫 단편 ‘제망매’와 96년에 발표한 ‘서유기’는 각각 동인문학상 후보가 되었죠. 2003년 ‘엘리야의 제야’로 다시 동인문학상 후보가 됐을 때는 거부를 하셨고요. 소설가로 굉장한 자질을 타고난 것 아닌가요?

“제가 외국어 공부도 시간이 남아서 한 게 아니라, 수학을 포기하고 했던 거예요. 본고사 시절이라 수학이 40점 미만으로 과락을 맞으면 대학엘 갈 수가 없었는데도 그랬어요. ‘모 아니면 도다!’ 그래서 인생이 꼬였죠. 연수 끝나고 1년 후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으로 유학 갔을 때도 데으아(DEA·예비박사과정) 논문이 뜻밖에 엑설런트를 받았어요. ‘나, 할 수 있나 보다!’ 했다가 박사 논문 쓸 때 주제를 너무 크게 잡아서 망했죠. 소설도 그래요, ‘재능이 있나 보다!’ 근데 없는 거예요. 그래서 망했어요.”

고종석 작가
-망했다니요? 기존의 소설 틀과 달라서 많이 팔리지 않았을 뿐, 새로운 시대를 열어온 것 아닌가요? 최근의 장편 <독고 준>도 신선한 시도였고요.

“저도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웃음)”

밤 9시에 인터뷰가 끝나자, 그는 미리 예고한 대로 술을 꺼내 왔습니다. 중국집에 주문한 탕수육과 양장피가 안주였습니다. “돈을 많이 못 버니까, 한번씩은 이렇게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서 술을 마신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강재훈 선임기자가 그와 대작을 해준 덕분에 흥겨운 술자리가 이어졌습니다. 한국의 손꼽히는 소설가, 정치인, 기자, 교수들에 대한 그의 한 줄 품평이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누구는 학자이기는 하되 글쟁이는 못 돼. 누구는 글쟁이야, 난놈이지.” 새벽 3시, 제가 “무조건 집에 가야 한다”며 세 번째 양주병의 목을 붙잡고서야 술자리는 겨우 끝이 났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내내 “김두식은 진지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완전히 얄개네, 얄개” 하는 그의 유쾌한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습니다. 그러나 진짜 얄개는 제가 아니라, 샹송을 들으며 “아, 이건 모국어네”라고 미소 짓는 고종석이었습니다. “모 아니면 도”라고 믿는, 살짝 어두운, 그러나 귀여운 슈퍼 울트라 얄개.

“글을 쓰는 게 더이상 가치 있는 노동인지 모르겠다”는 고종석의 절필이 얼마나 이어질지 모르지만, 그가 글쓰기를 접은 동안, 그의 말을 이끌어낼 강연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형식적인 강연은 그가 싫어할 테니, 질문과 답변이 이어지는 지식의 향연이면 더 좋겠죠. 술 한잔이 곁들여진다면, 그와 청중은 곧 동무가 될 겁니다.

녹취·진행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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