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서울 중구 순화동 염천교 사거리에서 자세를 취한 박노자 교수. 그는 어떠한 사적인 질문도 공적인 답변으로 전환하는 놀라운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토요판] 김두식의 고백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
9월 초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하려고 잠시 귀국한 박노자 교수와 어렵게 약속을 잡고, 그의 글에 단편적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들을 모아 질문지를 준비했지만, 그의 입으로 개인사를 듣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소문대로 그는 어떤 사적인 질문도 공적인 답변으로 전환하는 놀라운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포그롬(유대인 박해)으로 고생한 집안 어른들의 고통스런 삶을 물으면 20세기 초반 유대계 사회주의자들의 역사와 분파에 대한 강의가 이어지는 식이었습니다.
“지식인이 공공이익과 상관없이 개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몸을 파는 어릿광대짓”이라는 게 그의 신념이었습니다. 그래도 대화는 유쾌하고 유익했습니다. 높은 톤의 목소리에 실린 놀랍도록 풍부한 그의 지식 때문이었습니다. 미리 준비한 가벼운 질문들은 아예 써먹을 틈이 없었습니다. 메뉴판의 ‘아메리카노’를 보자마자, 유시민씨에 대한 생각이 줄줄 흘러나왔습니다.
“유시민씨를 좋아하지 않아요.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타협이 있거든요. 어쩔 수 없는 창씨개명까지는 봐줄 수 있지만, 학병 나가라는 강연은 용서할 수 없잖아요. 유시민은 이라크 파병 연장에 찬성함으로써 반민중적 폭력과 연관되어 인간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죠.”
정규직 되려 노르웨이 갔어요
러시아·한국 시간강사들은
아직도 생계가 어려운데
혼자만 잘사는 게 미안하죠 동료들은 4시면 퇴근해요
밤늦게까지 일하는 저에게
동료들은 묻곤 했어요“언제 이혼하냐,
왜 근로기준법을 어기냐”
유시민과 공지영을 보는 시각
-박노자가 좌파라면 유시민은 리버럴일 텐데, 좌파와 리버럴의 본질적인 차이는 뭔가요? “좌파는 원칙상 자본주의를 수용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체제를 지향합니다. 리버럴은 자본주의를 받아들이죠.”
-공지영 선생처럼 노동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도우려는 분들이 있잖아요. 그런 분들까지 차가운 눈으로 바라봐야 하나요?
“공지영 작가는 사회운동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부분이 있고 이는 당연히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문제는 인권, 민주주의 등을 내세워서 자본주의의 본질을 은폐하는 혹세무민의 논리입니다. 리버럴들은 관용, 다양성, 참여정치, 다문화사회 같은 말을 즐겨 씁니다. 다 좋은 말인데 그 안에는 ‘재벌들의 생산수단 사유에 대해서는 건드리지 말라,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도 건드리지 말라’는 생각이 담겨 있어요.
본질을 흐리는 리버럴들의 프로파간다죠. 그런 의미의 혹세무민입니다. 케케묵은 새누리당보다 호소력 있는 리버럴이 더 위험한 거죠.”
-노무현 정부에 대해서도 늘 비판적이었죠?
“노동자 입장에서 보면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가 다를 게 없으니까요. 노 대통령은 노동자에 대한 악질적 탄압, 파병 범죄, 에프티에이(FTA), 평택미군기지 등 많은 문제가 있었죠. 강경진압을 용인하여 두 명의 농민을 죽게 한 건 일종의 간접살인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박노자에게 이번 대선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게 제일 두려운 질문인데요. 이번 대선에 민중 후보가 나타나서 얼마나 선전할 것인지가 저의 관심입니다. 마르크스가 ‘마구간과 같은 부르주아 국회를 우리 연단으로 사용하자’고 말한 것처럼 이 선거에서 말할 기회를 잡는 게 중요합니다. 그 연단에서 ‘재벌 기업이 노동자와 사회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 주주들의 사유권을 몰수해야 한다, 징병제를 모병제로 바꾸어야 한다, 남북 공존을 위해서 군대를 줄여야 한다, 자영업자나 알바들을 보호할 파격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대놓고 얘기해야죠.”
-자칫 보수의 집권 연장을 돕는 결과를 낳지는 않을까요?
“박근혜의 세계관이 극도로 국가주의적이라서 좌파 지식인을 탄압하는 공안 광풍이 걱정되기는 합니다. 박근혜가 되면 안 되죠. 그러나 노동자는 노동자 후보를 지지해야 합니다. 차악보다는 선이 먼저니까요.”
-오슬로대학의 교수생활은 어떻습니까? 연구업적에 쫓기는 삶인가요?
“노르웨이는 위대한 초일류국가 대한민국만큼 선진화가 안 됐잖아요.(웃음)
동료들은 4시면 퇴근해요. 밤늦게까지 일하는 저에게 동료들은 두 가지를 묻곤 했어요. 언제 이혼하냐, 왜 근로기준법을 어기냐?(웃음)
누가 시킨다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처럼, 연구도 직업적인 관심을 가지고 자기가 좋아서 해야죠. 국가나 학교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연구는 성매매와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미국의 권위있는 잡지에 논문이 실리면 몇천만원씩 주기도 한다면서요? 정신분열입니다. 자기 영혼을 그렇게 파는 교수는 성매매보다 백배 천배는 나쁜 짓을 하는 거죠.”
1973년 소련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변전기 설계사인 아버지와 미생물학 교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박노자는
상트페테르부르크대 극동사학과를 졸업하고
1996년 모스크바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의 친가는 제정러시아 시절 박해와 학살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혁명 이후에야 비로소 이주와 고등교육의 기회를 얻어 1930년대 레닌그라드에 정착한 유대인 집안입니다.
우크라이나계로 일찍이 볼셰비키 지지자가 되었던 친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RP) 성향의 외가는
1905년 학살 때 목숨을 걸고 유대인들을 숨겨주기도 했습니다.
민족을 타파하자는 소련 초기의 국제주의에 충실했던 외할아버지는 유대계 외할머니와 결혼해 어머니를 낳았습니다.
모계를 중시하는 유대 전통에 따르자면
어머니도 유대인 아니냐고 묻자, 그는 “반 정도는 그렇죠. 근데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국제주의자다운 태도였습니다. 어린 시절 유대인으로 놀림받은 경험을 물었습니다.
사적인 질문이었지만 답변은 역시 공적인 내용으로 바뀌었습니다.
“소수자들이 어디서나 겪는 일이죠. 민중 속에 널리 퍼진 반유대주의 편견을 사회주의도 완전히 씻어내지는 못했어요. 그래도 공식적 이데올로기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였기 때문에 직접적인 폭력에 많이는 노출되지 않았습니다. 공산주의 사회는 폭력에 민감해요. 조화 속에서 동지애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집단 안에서는 폭력이 일어나지 않도록 청년 공산당조직이 잘 통제했죠.”
샤란스키와 장준하의 비극, 비교가 됩니까
-비밀경찰의 통제 아래 폭력이 일상화된 사회 아니었나요?
“1930년대 스탈린의 숙청 때는 그랬죠. 제가 자랄 때는 전혀 아니죠. 저희 동네 경찰은 무기도 안 가지고 다녔어요. 경찰이 무기를 들고 다닌 것은 망국(그는 소련의 해체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후입니다. 고르바초프 집권 초기에 민주주의를 하겠다고 양심수를 석방했는데 그 수가 200명이었어요. 양심적 병역거부자, 불법출국을 시도한 사람들, 과격 민족주의자를 모두 합쳐도 그 정도였죠.”
-이스라엘로 이주해 장관까지 지낸 나탄 샤란스키 같은 사람의 자서전을 보면 소련을 상당히 끔찍한 사회로 묘사하던데요? 사하로프 박사의 경우도 그렇고요.
“사하로프가 받은 끔찍한 탄압이라고 해봐야 거주지 이전 명령으로 모스크바를 떠나 6년을 지낸 건데, 도시 안에서 돌아다니는 건 자유로웠어요. 과격한 유대민족주의자였던 샤란스키는 13년 형을 받았지만 고문당한 적은 없어요. 장준하나 김남주가 당한 의문사, 고문, 탄압을 생각해 보세요. 비교가 됩니까? 적어도 말기의 소련은 남한의 파쇼정권처럼 고문과 살인으로 지식인 집단을 다스리지는 않았어요.”
-90년대 초반 러시아의 엄청난 경제난 속에서 한-러 통번역, 여행 가이드 등 다양한 일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러시아 보따리장수들을 데리고 하도 많이 다녀서 남대문은 눈 감고 돌아다닐 수도 있어요.(웃음)
명예 박사학위를 받으러 러시아에 온 수많은 총장·교수들의 통역도 맡았죠.
썩어빠진 어느 지방 사학재단 총장이 학술논문 하나 없이 석사논문만을 근거로 명예 박사학위를 받는 것도 봤어요.
저보다는 고려인 통역들이 고생을 많이 했죠.
여자 구해 달라고 하고, 반말하고, 성추행하고, 개돼지 대접을 했거든요. 백인에게는 조심하면서도,
못사는 동족에게는 극단적인 멸시와 차별을 하는 ‘지엔피(GNP) 인종주의’였어요.
고려인 후배 중에는 ‘관광객 안내를 계속하다가는 한국 문화까지 싫어져서 한국학을 그만두게 될 것 같다’고 가이드 노릇을 중단한 친구도 있었죠. 망국 이후의 러시아는 정상적인 사회 작동을 멈춘 상태였고요.”
-망국의 아픔을 실감하셨군요?
“공산정권이 통제를 하기는 했지만, 지식인들 먹여 살리고 지식 인프라를 늘리고 인문학 발전을 위한 기반은 만들었어요. 망국 이후 제일 먼저 무너진 게 도서관이에요. 망국 이전에는 대학 도서관만 가면 언제든지 <뉴욕 타임스>, <워싱턴 타임스>, 외국 과학잡지를 볼 수 있었거든요. 그런 걸 읽지 않으면 서방에 뒤진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망국 이후의 새로운 자본주의 정권은 과학과 인문학에 아무 관심이 없었고, 수많은 과학, 인문학 노동자들이 굶어죽었습니다. 그걸 방치한 정권은 살인자들이었죠.”
-그 시기에 러시아로 유학 온 아내를 만났죠? 양가의 결혼 반대는 없었나요? “옐친의 자유화로 물가가 백배쯤 뛰어버려 장학금으로는 빵 몇 조각도 못 사던 시절이에요. 그때 몇 년은 알바 한 기억밖에 없어요. 음악원에서 통역을 했는데 남한 유학생들이 소련인들을 많이 멸시했죠. 개인 레슨을 받으면서도 ‘저 교수에게는 10불 이상 주지 마라. 버릇 나빠진다’고 가난한 사람을 타자화하고 차별했어요.
아내는 소련 사람을 덜 멸시했죠. 망국 이후 아버지는 실직하고 어머니는 연금생활자였기 때문에 우리 집은 결혼을 반대할 여력도 없었어요. 굶어죽는 게 걱정이었으니까.(웃음)
아내 쪽은 처음에 좀 반대하다가 나중에는 따뜻하게 맞아주셨어요.”
97년부터 3년간 경희대에서 비정규직 교수로 러시아어를 가르친 박노자는 주말이면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한국사를 강의했습니다.
일요일을 같이 보내지 않는다고 아내의 불만이 많았지만, 인도·네팔에서 온 노동자들과 신라 불국토 사상을 함께 토론할 수 있었던 “너무 재미있는” 자원봉사였습니다.
99년에는 로버트 할리, 이한우와 함께 <한겨레>에 ‘서울 돋보기’라는 제목으로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다른 필자들이 한국의 음식과 문화를 다룬 가벼운 글을 주로 쓴 데 반해, 박노자는 처음부터 박정희 독재, 베트남 파병, 양심적 병역거부 등의 무거운 주제를 들고나왔습니다. 논객 박노자의 화려한 등장이었습니다. “한국이 특별히 나쁘다는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라, 인간의 정상적인 삶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었어요.
제가 소련에서 군사교육 시간에 불교경전을 읽다가 쫓겨난 적이 있어요. 당장 군대로 끌려가지는 않고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병역면제를 받았죠.
베트남 파병 글을 쓸 때는 어머니 친구 생각을 했어요. 어머니와 매우 친했던 베트남 유학생이 나중에 호찌민시 대형병원의 원장이 됐는데 80년대까지 소식을 주고받았거든요. 그분이 보내준 노역된 베트남 고전을 읽으면서 자라났기 때문에 베트남 사람을 형제처럼 생각했죠. 양심적 병역거부도, 베트남도, 남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비판적 글을 쓰면서 어려움은 없었나요? “월드컵을 지배층의 속임수라고 <오마이뉴스>에서 비판했을 때는 댓글의 절반쯤이 죽이겠다는 얘기였어요. 한국에서는 밥 먹듯이 하는 말이잖아요.(웃음) 언어폭력이나 잘리는 건 두렵지 않아요. 고문이나 테러 같은 물리적 폭력은 두렵죠.”
제 얘기가 그렇게 근본주의로 들리나요?
-2000년 노르웨이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보다 정규직이 되고 싶었어요.
국민의료보험과 연금이 있는, 소련과 비슷한 사민주의 사회에서 살고 싶기도 했죠.”
-2001년 출간한 <당신들의 대한민국>의 억대 인세를 ‘아시아의 친구’라는 단체에 기부했다고 들었습니다. “인세가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몰라요. 노르웨이에서 받는 월급이 있고, 정규직이니까 먹고사는 데 지장 없잖아요. 이민자 차별에 저항하는 단체와 연대하고 싶었고요. 저작권은 원칙적으로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큰돈을 기부하고 가족들에게 미안하지는 않나요? “아내에게 많이 미안하죠. 그래도 요즘 집안 노동을 많이 해서 죄악을 씻고 있어요.(웃음)
첫째가 2002년생,
둘째가 2011년생인데,
비정규직일 때는 아이 낳을 생각을 못했어요. 언제 쫓겨날지 모르니까요.
비혼과 무자녀가 비정규직의 유일한 무기잖아요. 비정규직 탈출하려면 전력을 다해야 하는데 아기가 있으면 불가능하죠. 비정규직 양산이 인간의 자연스러움을 차단하고 인구 재생산을 막는 겁니다. 둘째가 태어나면서는 제가 육아노동을 열심히 합니다. 그 전에는 아내가 오랫동안 혼자 고생했죠. 저도 죄인이라 말하기 뭣하지만,
지식인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악이
집안일을 안 하고 공부만 하는 거예요.(웃음)”
-한국과 노르웨이를 오가며 많은 글을 쓰고 있는데
그 힘의 원천은 무엇입니까?
“미안함이죠. 제가 망국 후 러시아를 떠나지 않았습니까? 러시아에 남은 동료와 후배들은 시간강사 해도 생계가 되지 않아서 엄청난 고생을 해요. 한국에서 비정규직 생활을 같이 한 분들도 마찬가지고요. 혼자 잘사는 게 미안하죠.”
-한국으로 돌아올 계획은?
“애들 때문에 쉽지 않아요. 노르웨이에서 자란 첫째 아이에게는 한국의 불평등과 인권침해가 매 순간 충격이거든요. 아이는 저에게 한국에서의 활동을 접으라고도 해요.
‘한국 사회의 일상적 보수성을 보면 사회주의로 가기가 불가능하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노르웨이의 적색당 활동이나 열심히 하라’고 하죠.”
-반대편의 이야기도 들을 기회가 있나요?
“한국 올 때마다 택시운전사들과 이야기해요. 일부는 보수적인 분들인데, 제가 한국말을 한다고 신기해하시면 ‘진보신당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살짝살짝 물어보죠. 대부분 당 이름도 몰라요.(웃음)
그래도 노동하는 분들과 얘기하면 늘 좋죠.”
인터뷰를 마치며 박 교수는 걱정스런 얼굴로
“제 얘기가 그렇게 근본주의로 들리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진보신당 사람들은 늘 올바른 이야기를 하지만, 가끔은 현실과 담 쌓고 까대기에만 능숙한 지식인들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인 당인데도 제가 선뜻 표를 주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저의 그런 우려에 박 교수는 “지식인의 삶의 유일한 기준은 죽음에 임박해 자기 인생을 돌아보았을 때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라며
“30년대 말의 조선 지식인들을 생각해 보라”고 했습니다. 뜨끔했습니다.
근본주의적이든 아니든, 사회주의 국가에서 소수자로 태어나 평생 약자에 대한 따뜻한 감수성과 냉철한 이성을 벼려온 박노자의 존재는
‘지엔피 인종주의’에 빠져 외국인과 소수자 차별이 일상화된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점검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입니다.
그의 아들 율희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가 더 오랜 시간 우리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긴 인터뷰였습니다.
녹취·진행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