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진보는 죽었는가?-- 타살인가 자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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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903회 작성일 2012-08-21 16:40본문
기사입력 2012-08-21 오전 10:11:06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 위기 이후 전 세계는 '진보의 시대'가 되었다. 1990년대 이후 '죽은 개' 취급을 당했던 카를 마르크스와 <자본>이 각광을 받고, 세계 곳곳에서 좌파 정당이 기지개를 켠다. 워런 버핏, 빌 게이츠 같은 자본가가 나서서 '자본주의 위기'를 얘기하고, 한 때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이 결합된 유토피아를 얘기했던 이들도 다시 '복지'와 '노동'을 입에 올린다.
이렇게 '진보의 시대'로 이행 중인 세계와 한국은 정반대다. 최근 통합진보당 사태는 그 단적인 예다. 지금 한국에서 '진보'는 조롱과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진보'가 사라진 공백을 '이명박 대통령을 반대하며' '박정희의 딸만은 대통령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이들이 메우고 있다. 2002년 '무상 의료' '부유세' 등을 내세우며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당시 노무현, 이회창 후보와 공개 토론을 벌였던 장면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왜 이 지경이 되었는가? 하지만 이 질문에는 모두가 침묵한다. 과거 진보 정당에 몸 담았던 이들마저 한 때는 '보수 야당'이라고 딱지 붙였던 민주통합당을 기웃거리는 상황에서 '진보'의 대변인을 찾는 것은 어불성설인가? 이런 상황에서 진보를 위한 최후 변론에 나선 이가 있다. 바로 진보신당 홍세화 대표다.
민주화 15년간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으로 활동해온 홍세화 대표는 최근 나온 <지금 여기의 진보>(이음 펴냄)에 실린 '파국과 절멸, 그 너머를 위한 노트 : 다시 진보 정치는 가능할 것인가'에서 이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을 자처했다. 모두가 '진보'를 외면하는 이때에 '진보' 정당의 깃발을 부여잡고 있는 그의 말에 경청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보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프레시안>은 이음 출판사의 동의를 얻어서 그의 글을 두 차례에 걸쳐서 나눠 싣는다. <편집자>
파국과 절멸, 그 너머를 위한 노트: 다시, '진보 정치'는 가능할 것인가
"'정신'의 진정한 속성은 물화物化에 대한 부정이다." (테오도어 아도르노)
소소한 이야기로부터
총선이 끝나고 석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내가 속한 진보신당(지금은 '창당준비위원회'라는 말이 뒤에 덧붙여졌지만)은 여의도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다. 지난해 11월 당 대표가 된 뒤 선거 전 어느 시점엔가 '탈(脫)여의도'의 가능성을 타진해본 적이 있지만, 내부의 반대 의견이 적지 않았다. 어쨌거나 총선에서 '1.13퍼센트'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 정당 등록이 취소되고 국고 보조금도 끊긴 마당에, 여의도에 남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어려운 일이 되었다(내가 탈여의도 실험을 통해 어떤 정당의 상(像)을 그렸는지에 대해선 이 지면에서 생략하겠다).
내가 글머리에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이사 과정에서 겪었던 에피소드를 언급하고 싶어서이다. 여의도 당사를 비워줘야 할 기일은 다가오는데, 새로 옮길 곳을 찾기가 힘들었다. 결국 한 달 보름이 걸려서야 겨우 계약할 수 있었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당 이름을 말하는 순간 건물주가 바로 고개를 가로젓는 일이 허다했고, 심지어 계약을 하고 나서 취소당한 경우도 있었다.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경선 부정선거 사태 이후 벌어진 풍경이었다. '우리(진보신당)는 그 당(통합진보당)이 아니'라거나, 구차함을 무릅쓰고 '우리는 당이 아니라 준비하는 단체'라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당사를 구하느라 애쓰는 당직자의 하소연을 듣다가 문득 예수의 말이 생각났고, 쓴웃음이 났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했던가.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당분간(?) 한국 사회에선 '진보'라는 이름을 달고선 '머리 둘 곳조차' 구하게 어렵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진보가 처한 곤경을 이런 에피소드 수준의 현상만으로 다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글의 동기나 목적은 진보(또는 좌파) 앞에 깊고도 넓게 가로놓인 곤경의 강을 어떻게 건널 것인가를 궁리하는 데 있지 않다. 나는 오늘날 이른바 통합진보당 사태로 말미암은 '진보의 위기'가 특정 정당의 위기가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진행되어온 파국의 결과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뒤집어 말한다면, 진보 정치(내가 몸담고 있는 진보신당까지 포함하여)는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사회에 닥쳐온 파국을 온전히 읽어내지도 못했고, 거기에 대응하는 실천들을 제대로 조직하지도 못한 결과 파국의 거센 파고 앞에 난파선이 되어 곤두박질치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러면 진보라는 깃발을 단 배들이 심해 아래로 사라지고 난 다음 세상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이 물음에 답하기 전에 우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진보의 죽음'이 정설처럼 유포되는 지금 이 시점에서야말로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우리가 한때나마 희망을 걸기도 했던 진보의 육신을 흔들어 물어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진보라고 명명해왔던 것일까? 진보는 어떤 사람들의 어떤 생각을, 그리고 어떤 정치적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었을까? 우선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너희가 아직 '진보'를 믿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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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한국 사회에서 '진보'라는 말이 처한 상황처럼 굴곡 많고 복잡한 경우도 없을 것이다. 진보는 오랜 시간 금기어였고 지금도 여전히 불온한 것으로 취급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제는 근사함의 표상처럼 선호되기도 하는 양가적인 이미지를 지니게 되었다. 더구나 진보라는 말을 별다른 두려운 감정 없이 입에 올릴 수 있게 된 어느 시점부터는 참으로 다기한 용도로 다양한 입장에 적용되는, 심지어는 자신이 진보라고 하면 그렇게 되어버리는, 말하자면 아무나 가져다 붙일 수 있는 말이 되어버림으로써 마침내 그 실체가 공허한 개념이 되어버렸다. 오랜 습속을 버리지 못하고 진보가 무슨 범죄라도 되는 양 걸핏하면 옆구리를 찔러보는 거대 언론 자본도 '수구적 진보'니 '진보적 보수'니 하는 말장난을 간혹 즐기는 지경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특히 정치 공간에서, 진보라는 이름에 대한 과도하리만치 강한 집착이 존재하는 건 왜일까? 통합진보당이 만들어지기 전 국민참여당의 유시민과 민주노동당의 이정희, 이 두 사람이 만나 이야기한 것을 묶은 책 제목이 <미래의 진보>(민중의소리 펴냄)였다. 그리고 진보신당을 탈당한 사람들까지 합쳐 당을 만들 때, 이들은 진보신당이란 이름의 정당이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진보라는 이름을 고집했고 통합진보당의 약칭을 진보당이라 해달라고 언론에 요청까지 했다. 기본적인 '상거래상의 도덕'조차 무시하는 몰염치를 무릅쓰고서라도, 또 진보신당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진보라는 깃발을 움켜쥐고자 했던 까닭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본디 '진보(progress)' 혹은 '진보적(progressive)'이란 말은 서구에서 자본주의적 근대와 함께 출현하고 그 의미가 분명해진 개념(내지 이념)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이전에도 과학은 있었으되, 근대의 합리주의에 기반을 두고 진행된 과학의 비약적 발전이 다시 자본주의적 생산력을 급속히 발전시켜 왔다는 사실은 굳이 긴 설명을 보태지 않아도 되겠다. 과학의 발전으로 자연에 대한 지배력이 강화되면서 인류의 미래는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확신이 진보에 대한 신앙으로 굳어져왔을 터이다.
이와는 다른 의미(혹은 차원)를 지닌 진보가 있었다. 그것은 사회적 진보, 혹은 역사적 진보에 해당하는 것이다. 생산력의 증대에 따른 자본주의의 발전이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프롤레타리아트(노동자 계급, 또는 생산 수단을 갖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무산자(無産者) 계급'을 의미하는)에 대한 착취를 통해 이윤을 추구함으로써 유지된다고 하는 이 근본적인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지향을 갖는 것이었다. 20세기를 '혁명의 세기'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이러한 사회적 진보 이념이 여러 나라에서 혁명을 통해 실현되고 한 사회의 지배적 이념이 되기도 했던 역사적 사실을 두고 일컫는 말일 것이다.
근대 자본주의의 등장 이후 이러한 의미들을 지닌 20세기 진보의 이념은 일찌감치 '내적 파탄'을 노정해왔다. 우선 근대 사회의 핵심적인 가치인 '자유'의 경우에도, 봉건적 굴레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인간' 역시 그 자유조차도 자연적 필연성 안에서만 발휘될 수 있을 뿐이라는 과학적 계몽주의의 설법에 따라 결국은 '도구적 인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쓴 <계몽의 변증법>(1944년)에서, 그리고 <부정변증법>(1966년)에서 이미 '진보의 부정적 대가'에 대해 서술한 바 있다.
자유로운 인간의 의지가 전제되어야 근대 시민 사회의 윤리는 작동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적 맹신주의는 자연적 필연성을 앞세워 인간의 자유 의지에 족쇄를 채운 것이다. 인간은 필연성과 어떤 목적에 자신의 자유를 반납해야 한다. 자유를 몰수당하거나 스스로 포기한 인간에게 도덕적 책임 추궁이 가능할까? 20세기 초를 경과하면서 독일인들은 히틀러가 제시한 국가사회주의의 청사진 앞에 자신들의 이성과 자유를 그런 식으로 반납했고, 파시즘의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사회적 진보의 경우는 어땠을까? 인간 사회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지평을 연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업적이었다.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을 규명해내고 이에 입각하여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은 과학적 사회주의 이념의 운명은 그렇다면 어찌 되었던 걸까? 생산 수단의 국유화를 통해 부르주아 계급에 의한 프롤레타리아트 착취라는 생산관계의 모순을 철폐하면 억압 없는 인류의 미래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던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실험은, 알다시피 20세기가 끝나기도 전에 초라한 몰락으로 막을 내렸다.
자본주의의 반대쪽에서 진행되었던 '국가 주도의 사회주의 경제'라는 수십 년간의 실험이 만들어낸 사회가, 마르크스가 꿈꾼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라 또 다른 전체주의 사회에 불과하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여기서 언급할 여유가 없다. 어찌 되었든 오늘날 중국처럼 공산주의를 내걸고 있는 국가조차 경제에서는 자본주의 국가와 다름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프랜시스 후쿠야마 같은 이는 "역사(진보)는 끝났다!"고 호들갑스런 선언을 했고, 이 말은 한동안 꽤나 그럴듯한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요약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결국 근대와 함께 출현한 진보라는 이념은 인간의 자유든 평등이든 그것들을 실현하는 데 모두 실패했다고. 과학의 진보가 여전히 인간에게 행복과 안락을 보장하는 첨단의 유토피아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나,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한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은 불가능한 이상으로 판명되었을지 몰라도, 사회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진보의 이념은 지금도 유효하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건 자유다. 오늘날 세계를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자본주의가 파국의 징후를 드러내기 전까지는 그러한 이야기들이 설득력 있게 들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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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벌써 17년 전인 1995년 겨울의 기억이다. 여전히 기약 없는 망명객으로 파리에 머물 때였다. '불만의 겨울'이라 불리던 그해, 우파 정권의 '연금 개혁'에 반대하는 공공 부문 노동자들의 총파업으로 지하철 등 대중교통 수단은 모두 멈추었고 파리의 거리는 온갖 자동차들과 사람들로 북적댔다. 나는 몇 날이고 행진하는 사람들을 따라 한참을 걷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이 파업을 두고 프랑스는 물론이고 서유럽 좌파 진영이 한동안 자신들을 짓누르던 우울과 냉소를 딛고 거리에 나섰다는 의미에서 반(反)신자유주의 투쟁의 전환점이라 말하기도 했지만, 사람들을 움직인 것이 새로운 내일에 대한 낙관인지 오늘의 삶이 주는 불만(내지 불안)인지는 분별되지 않았다. 아마 후자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가 몰아붙이는 변화의 파고(공공 부문의 사기업화—한국에서 '민영화'라고 부르는—와 해고, 복지 축소 등으로 나타나는)는 높았고, 사람들의 저항은 일종의 공포에 대한 반작용과 같은 것이었다.
하나의 체제, 혹은 하나의 제도는 그것이 안고 있는 근원적인 모순과 내적 갈등을 지양(止揚)하려는 대립 항을 상실하게 되었을 때, 내부의 모순이 급속히 강화되거나 하나의 방향성만을 추구함으로써 병리적인 현상이 극대화되어 파국으로 나아가게 된다. '자본주의의 모순은 결코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극복되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도 바로 그런 것이다. 후쿠야마의 믿음에 의하면, 자본주의와 적대하는 다른 대립 항이 없다면 마땅히 자본주의에는 파국 같은 것이 없어야 하며 대신 인류가 물질적 행복이나마 맘껏 누릴 수 있는 유토피아를 가져다주어야 하는데, 우리에게 다가온 것은 전혀 다른 현실이었다.
1996년에 프랑스에서 처음 발간된 책 <경제적 공포>(김주경 옮김, 동문선 펴냄, 1997년)의 저자 비비안느 포레스테는 자본주의 문명 안에서 대단히 충격적인 격변이 이미 일어났고, 또 그것이 급속히 사회를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우리가 지금 목격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최소한의 노동의 권리가 보장되고 성실히 노동의 의무를 다하면 삶을 영위해갈 수 있다고 말해주던 그런 과거의 자본주의가 아니다. 과거의 자본주의에서 '고용'은 자본이 지니는 일종의 사회적 의무 같은 것이었는데, 오늘의 자본주의에선 어떤 정부도 자본에게 그러한 의무를 지도록 강제하지 않는(못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자본주의에선 '착취당할 기회'도 얻지 못한 사람들이 거리에 넘쳐난다.
그런데 그녀에 따르면, 노동이 소멸되고 수많은 인간들이 잉여적 존재로 전락해 가는(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아직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는다. 서유럽의 좌파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이미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처방책'들을 제시"하거나 "지금은 하나의 신화가 되어버린 것들을 아직도 붙들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성장과 고용의 신화'이다. 자본의 무한한 자유만이 보장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그것은 이미 자본의 공세로 인해 산산조각이 났는데, 다시 말해 더 이상 자본주의의 프로그램 안에는 일자리 창출 같은 것은 입력되어 있지 않은데, 그들 좌파 정당들은 실현될 수 없는 약속을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열심히 부러워해온 유럽의 '복지 국가'는 지속적인 '성장과 고용'이 가능할 때 기능할 수 있는, 더 나아가 기본적으로 정부나 관련 기구들이 복지를 시행하는 데 있어 필요한 비용을 투여해야 하는 '관리 사회형 복지'이다. 고용을 거추장스러운 장애물로 간주하는 자본의 요구에 따라 지금까지 유지되어온 복지 제도를 철회하는 데 있어 우파 정권과 좌파 정권의 차이는 생각하는 것만큼 크지 않다. 속도의 차이만 있을 뿐.
나는 전혀 다른 성격으로 '진화'한 자본주의가 유럽 사회가 오랜 노력으로 이룩해온 사회적 진보—노동권에 대한 존중과 '보편적 복지'를 내용으로 한—의 성과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바로 그 현실 속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머지않은 미래에 더 큰 경제적 파국이 다가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도리는 없었다. 사회적 진보에 대한 미련을 던져버릴 수 없는, 제3세계로부터의 망명객이 지닌 귀향의 꿈 때문이었을까? 파리의 거리에서 발 딛고 서 있던, 한 세계가 거대한 지각 변동을 통해 다른 세계로 급속히 바뀌어간다는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나는 그 뒤 1996년 말에 시작된 노동법 개악에 반대하는 한국 노동자들의 총파업 소식을 들었다.
그것은 한국 자본주의의 거대한 전환을 예고하는 징후였다. 1997년 말 한국은 초유의 외환 위기로 1차 파국을 맞이했고, IMF(국제통화기금) 관리 체제가 들어서자 노동에 대한 자본의 전면적인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20세기 말 세계사적 전환기에 한국 사회가 경험한 패러독스는 이 파국이 민주화 과정과 서로 맞물리면서 동시대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 20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나는 마침내 귀국할 수 있었다. 그것이 뒤늦게나마 찾아온 민주화 덕택임은 분명하지만, 이 '지체된 민주주의'가 경제 위기에 대응한 방식은 다름 아닌 '위기에서 파국으로' 가는 길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지난 10년 동안 경험하고 톡톡히 실감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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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절의 처음 이야기로 다시 되돌아가 보자. 뒤늦게 시작된 한국의 민주화 과정은 그 자체로 역사의 진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국에서 민주주의와 진보를 성급히 일치시켜 말하기에는 현실에서의 어긋남의 폭이 너무 넓고 비어 있는 자리 또한 많다. 우리가 경험하는 민주주의가 사회적 진보가 아니라 정치적 자유화로 제한된 데에는 진보의 이념이 너무 오래 억압당함으로써 부재했던 탓이 크다.
평등에의 지향이 거세된 채 자유의 파토스에만 의지해서 추진되는 민주화가 자본주의 세계화 과정에서 강화되는 자본의 압도적인 힘을 제어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난망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자유화에 한정된 민주주의는 자본이 노동을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법과 제도로 허용하는 도구로 기능했다. 자유라는 반쪽 가치로만 존재하는 민주주의의 불구성은 다시 모처럼 찾아온 사회적 진보의 계기를 무산시키고 거꾸로 자본의 자유만 확대시켜준 것이다.
한국의 정치적 자유화 과정에서 진보는 여전히 위험의 경계로서의 의미만 지니는 것이었다. 독재 체제 아래 특권적 이해를 추구해온 기득권 세력은 시민적 자유의 확대를 의미하는 기본적인 절차적 민주주의의 적용에 대해서조차 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그것을 위험한 진보라고 공격하기 일쑤였다. 그러한 공격에 대해 자유주의 정치 세력은 '민주 대 반민주'라는 대치 구도로 자신들을 방어하려 했다. 바로 여기서 자유화를 의미하는 '개혁'과 사회적 진보는 혼돈되며, 자본과 노동의 대립과 긴장은 시야에서 벗어난 채 '실체 없는 논쟁'만 지속된다. 나는 이 대목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작성한 <공산당 선언>(1848년)의 유명한 첫 단락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을 잠시 인용해 보자.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옛 유럽의 모든 세력들, 즉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Metternich)와 기조(Guizot), 프랑스 급진파와 독일의 경찰이 이 유령을 사냥하기 위해 신성동맹을 맺었다.
정권을 잡고 있는 적들에게서 공산주의적이라고 비난받지 않을 반(反)정부당이 어디 있겠으며, 더 진보적인 반정부당과 반동적인 적에게 거꾸로 공산주의라는 낙인을 찍으며 비난하지 않을 반정부당이 어디 있겠는가? (<공산당 선언>(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강유원 옮김, 이론과실천 펴냄, 2008년)
진보라는 유령은 오래도록 분단된 한반도의 남쪽을 배회해왔다. 반공 규율 체제인 군사 독재 정권은 걸핏하면 반정부 세력에게 공산주의라는 낙인을 찍어 탄압하고 학살을 일삼았다.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의 '민주화 10년' 동안에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자유주의 정치 세력에게 정권을 빼앗긴 보수(극우를 포함한) 기득권 세력들은 얼마간의 시민적 자유의 확대도 인내하지 못하고 실제로는 자유주의를 신봉할 뿐인 정권의 정책을 '진보적(좌파적)'이라고 공격했다.
여기까지는 <공산당 선언>과 비슷하게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부터는 사정이 달라진다. <공산당 선언>은 다음 단락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의 두 가지를 의미한다. 공산주의는 이미 유럽의 모든 세력에 의해 하나의 세력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라고. 이 점이 다른 것이다. 마르크스가 유령이라고 명명한 공산주의는 정치적 실체를 인정받았지만, 한국에서 진보는 실체가 없는 '유령'으로 그저 떠돌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분단과 내전으로 이어진 비극적인 역사적 경험이 한국 사회에 오랜 '진보의 공백'을 가져오고 그로 인해 얼마나 긴 시간 동안 가혹한 정치 체제가 유지되어왔는지는 여기서 구구히 되새기지 않겠다. '진보당' 당수 조봉암의 죽음이 말해주듯 진보, 해방, 인민, 혁명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은 반공 규율 사회가 지속되는 동안 곧 죽음과 동의어였다. 적어도 그것은 박정희의 유신 체제가 막을 내리는 1970년대 말까지는 그랬다.
그 시대에 20대의 시간을 통과했던 나는 그 얼어붙은 '겨울 공화국'에서 불온한 '해방'의 꿈을 꾸었다('남조선민족해방전선'이라는 비합법 조직의 조직원이 된 것이다). 그것은 너무 위험한 꿈이었다. 그 조직에서 내가 만난 어떤 이는 사형을 당했고, 살아남은 친구들은 다친 몸으로 오랜 시간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다. 고문과 감옥행, 죽음으로부터 벗어난 나는 파리의 이방인으로 긴 세월을 보내야 했고.
나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안다. 그래서 이른바 '민주화 10년'이 열어놓은 자유의 공간이 지니는 가치를 폄하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다. 지금과 같은 수준의 정치적 자유라도 보장되어 있었다면, 그때 나의 동료들은 그처럼 가혹한 운명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었을 터이므로(이렇게 말하면 실례가 되겠지만,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핵 자위권이라 생각하는 국회의원도 있는 현실에 비하면 그것은 얼마나 터무니없는 대가였던가).
박정희의 죽음 이후로도 길게 이어진 군사 독재는 1987년의 6월 항쟁으로 인해 마감되었다. 1980년 5월의 광주 항쟁을 짓밟고 전두환 군사 독재가 들어선 이후 10년 동안은 한국에서 민주주의 운동이 정치적 자유의 요구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진보의 내용을 갖추어가던 시기였다. 우리가 흔히 '1987년 체제'라 부르는 지점에 와서 이 민주주의 운동은 두 가지의 갈림길에 도달하게 된다. 그 중 하나가 정치적 자유화를 추구하는 자유주의의 길이라면, 다른 하나는 노동권의 확장을 기반으로 사회적 평등의 가치를 추구하는 진보주의의 길이었다.
1987년의 6월 항쟁을 '성공한 항쟁'으로 규정하는 자유주의 정치 세력의 집권은 그해 곧바로 이어졌던 7, 8, 9월 노동자 항쟁에 대한 기억을 애써 지우고 싶어 한다. 자유주의 정치 세력의 분열로 집권에 성공한 노태우의 정권은 논외로 하더라도, '3당 통합'이라는 보수주의와의 정치적 타협으로 등장한 김영삼 정권의 시기에는 자유주의 정치 세력이 굳이 노동 사회를 포섭하려는 적극적인 공세를 시도하려 하지 않았다. 한국 자본주의가 근본적인 축적 위기를 맞이하기 전까지는 노동에 대한 자본의 공격도 전면화되지 않았으므로.
1997년의 1차 파국으로 IMF 체제가 강제되고 그와 함께 김대중 정권이 등장했을 때, 자본의 축적 위기를 맞아 한국의 자유주의 정치 세력은 스스로 표방한 '노동 친화적'이라는 수사가 무색하리만치 '친자본적'이고 앞서의 정권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자본의 자유를 확대하는 방식을, 거기서 더 나아가 자본과 함께 노동 사회에 대한 전면적인 공세에 나서는 길을 선택했다. IMF의 구조 조정안이 목표로 삼은 '노동 시장의 유연화'는 일차적으로는 1996~1997년의 총파업에 대한 자본의 전면적인 반격이었고, 자본에게 해고의 자유를 포함하는 무한한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한국 사회를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질서로 변모시켜가게 된다. 나는 이 맥락에서 '인권 변호사' 출신으로 대통령 취임(2003년)을 앞둔 노무현 당선자가 자신의 청와대 입성을 전후해 이어지던 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해 했던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지금과 같이 민주화된 시대에 노동자들의 분신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투쟁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이 된 노무현의 이 말은 한국 사회에서 자유주의와 진보주의를 분별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1998년 IMF 구조 조정기 벽두에 발생한 현대자동차 파업에 정부 측 대표로 가서, 노동조합 지도부를 설득하여 식당 노동자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정리 해고를 실현시켰던 당사자이다. 그런 그가 말하는 '민주화된 시대'란 자본의 공세에 대한 노동의 저항을 민주주의로부터 배제시키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었다.
반공 규율 사회에 뿌리내린 보수주의(극우를 포함한)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감당하며 권위주의 질서에 맞서 개혁을 수행하는 자유주의는 진보주의와 친화적일 수 있었지만, 노동에 대한 유연화 공세를 방임하거나 앞장서 촉진하는 한 자유주의는 사회적 진보를 굴절시키고 파괴하는 자본의 든든한 동맹자였다. 자유주의 정치 체제가 수행한 이 이중적 역할이 바로 진보에 대한 인식의 오류(착종 현상이라 말할 수도 있는)를 발생시킨 것이다.
반공 보수주의가 진보를 압살하여 진보의 부재를 강요했다면, 이른바 '개혁 자유주의'는 정치적 자유화의 경계 안으로 진보를 포섭하거나 자본의 공세로 배제되는 노동의 하위 부문을 민주주의 바깥으로 내던져버린다. 그들이 열어놓은 정치적 자유의 공간은 물론 노동에 기반을 둔 진보 정치가 제도 정치 안으로 진입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입구'이다. 그러나 진보가 이 좁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그 문은 닫혀버린다. 노동으로 되돌아갈 '출구'가 차단된 현실, 이것이 다음 절에서 이야기할 노동의 정치 세력화, 즉 진보 정치의 조건이 되었다.
자, 여기 자유를 향한 좁은 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뒤편에선 자본의 대대적인 공세가 진행되면서 노동은 여러 층위로 조각나고 빠르게 수직적인 통합 체계가 만들어진다. 노동의 이러한 분화와 동질성의 파괴는 노동의 단결된 힘을 근저로부터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는다. 한국 사회보다 오랜 역사를 지닌 서구 자본주의에서도 역시 그간 자본주의 모순의 체제 내적인 해결책이 되어온 복지 체제마저 무너지고 노동 사회의 붕괴가 심화되고 있는데, 충분히 정치적으로 조직화할 시간을 얻지 못한 한국의 노동 세력에게 정치적 반격의 조건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자유주의 정치 체제가 마련해준 정치의 공간으로 들어서는 것, 그나마 그것이 자본의 공격으로부터 노동의 권리와 노동의 가치를 지켜내는 유일한 길이었을 것이다.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열 석의 국회의원을 의회로 진출시켰다. 이것은 신자유주의 질서로 급속히 변화해가는 한국 사회의 가파른 양극화가 진보 정당에 대한 기대를 넓히게 된 현실의 반영일 것이다. 그러나 대의제 민주주의 안으로의 진보 정치의 성공적 진입은 양날의 칼이 된다. '의회 속의 진보 정치'는 파괴되거나 소멸해가는 노동에 대해, 그리고 민주주의 바깥으로 쫓겨나는 버려진 노동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이제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질서 안에서 자유주의와 경쟁(?)하게 된 진보주의가 어떤 과정을 밟아갔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헤겔의 유명한 역사적 경구를 전유하여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그 다음에는 희극으로!"
슬라보이 지젝은 이 말을 제목으로 삼은 자신의 책(<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김성호 옮김, 창비 펴냄))에 다음과 같은 마르쿠제의 말을 덧붙였다.
"희극으로 반복되는 것이 원래 비극보다 훨씬 더 끔찍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한국에서 진보는 두 번 반복되었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그 다음에는 희극으로!"라고. 그런데 여기에서도 희극으로 반복될 때 비극보다 더 끔찍할 수 있다는 마르쿠제의 말을 절대 빠트려서는 안 된다.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 하려 한다. (계속)
진보의 죽음, 타살인가 자살인가
이렇게 '진보의 시대'로 이행 중인 세계와 한국은 정반대다. 최근 통합진보당 사태는 그 단적인 예다. 지금 한국에서 '진보'는 조롱과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진보'가 사라진 공백을 '이명박 대통령을 반대하며' '박정희의 딸만은 대통령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이들이 메우고 있다. 2002년 '무상 의료' '부유세' 등을 내세우며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당시 노무현, 이회창 후보와 공개 토론을 벌였던 장면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왜 이 지경이 되었는가? 하지만 이 질문에는 모두가 침묵한다. 과거 진보 정당에 몸 담았던 이들마저 한 때는 '보수 야당'이라고 딱지 붙였던 민주통합당을 기웃거리는 상황에서 '진보'의 대변인을 찾는 것은 어불성설인가? 이런 상황에서 진보를 위한 최후 변론에 나선 이가 있다. 바로 진보신당 홍세화 대표다.
민주화 15년간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으로 활동해온 홍세화 대표는 최근 나온 <지금 여기의 진보>(이음 펴냄)에 실린 '파국과 절멸, 그 너머를 위한 노트 : 다시 진보 정치는 가능할 것인가'에서 이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을 자처했다. 모두가 '진보'를 외면하는 이때에 '진보' 정당의 깃발을 부여잡고 있는 그의 말에 경청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보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프레시안>은 이음 출판사의 동의를 얻어서 그의 글을 두 차례에 걸쳐서 나눠 싣는다. <편집자>
▲ 홍세화 진보신당 대표. ⓒ프레시안(최형락) |
파국과 절멸, 그 너머를 위한 노트: 다시, '진보 정치'는 가능할 것인가
"'정신'의 진정한 속성은 물화物化에 대한 부정이다." (테오도어 아도르노)
소소한 이야기로부터
총선이 끝나고 석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내가 속한 진보신당(지금은 '창당준비위원회'라는 말이 뒤에 덧붙여졌지만)은 여의도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다. 지난해 11월 당 대표가 된 뒤 선거 전 어느 시점엔가 '탈(脫)여의도'의 가능성을 타진해본 적이 있지만, 내부의 반대 의견이 적지 않았다. 어쨌거나 총선에서 '1.13퍼센트'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 정당 등록이 취소되고 국고 보조금도 끊긴 마당에, 여의도에 남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어려운 일이 되었다(내가 탈여의도 실험을 통해 어떤 정당의 상(像)을 그렸는지에 대해선 이 지면에서 생략하겠다).
내가 글머리에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이사 과정에서 겪었던 에피소드를 언급하고 싶어서이다. 여의도 당사를 비워줘야 할 기일은 다가오는데, 새로 옮길 곳을 찾기가 힘들었다. 결국 한 달 보름이 걸려서야 겨우 계약할 수 있었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당 이름을 말하는 순간 건물주가 바로 고개를 가로젓는 일이 허다했고, 심지어 계약을 하고 나서 취소당한 경우도 있었다.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경선 부정선거 사태 이후 벌어진 풍경이었다. '우리(진보신당)는 그 당(통합진보당)이 아니'라거나, 구차함을 무릅쓰고 '우리는 당이 아니라 준비하는 단체'라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당사를 구하느라 애쓰는 당직자의 하소연을 듣다가 문득 예수의 말이 생각났고, 쓴웃음이 났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했던가.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당분간(?) 한국 사회에선 '진보'라는 이름을 달고선 '머리 둘 곳조차' 구하게 어렵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진보가 처한 곤경을 이런 에피소드 수준의 현상만으로 다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글의 동기나 목적은 진보(또는 좌파) 앞에 깊고도 넓게 가로놓인 곤경의 강을 어떻게 건널 것인가를 궁리하는 데 있지 않다. 나는 오늘날 이른바 통합진보당 사태로 말미암은 '진보의 위기'가 특정 정당의 위기가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진행되어온 파국의 결과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뒤집어 말한다면, 진보 정치(내가 몸담고 있는 진보신당까지 포함하여)는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사회에 닥쳐온 파국을 온전히 읽어내지도 못했고, 거기에 대응하는 실천들을 제대로 조직하지도 못한 결과 파국의 거센 파고 앞에 난파선이 되어 곤두박질치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러면 진보라는 깃발을 단 배들이 심해 아래로 사라지고 난 다음 세상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이 물음에 답하기 전에 우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진보의 죽음'이 정설처럼 유포되는 지금 이 시점에서야말로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우리가 한때나마 희망을 걸기도 했던 진보의 육신을 흔들어 물어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진보라고 명명해왔던 것일까? 진보는 어떤 사람들의 어떤 생각을, 그리고 어떤 정치적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었을까? 우선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너희가 아직 '진보'를 믿느냐
1
생각해 보면 한국 사회에서 '진보'라는 말이 처한 상황처럼 굴곡 많고 복잡한 경우도 없을 것이다. 진보는 오랜 시간 금기어였고 지금도 여전히 불온한 것으로 취급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제는 근사함의 표상처럼 선호되기도 하는 양가적인 이미지를 지니게 되었다. 더구나 진보라는 말을 별다른 두려운 감정 없이 입에 올릴 수 있게 된 어느 시점부터는 참으로 다기한 용도로 다양한 입장에 적용되는, 심지어는 자신이 진보라고 하면 그렇게 되어버리는, 말하자면 아무나 가져다 붙일 수 있는 말이 되어버림으로써 마침내 그 실체가 공허한 개념이 되어버렸다. 오랜 습속을 버리지 못하고 진보가 무슨 범죄라도 되는 양 걸핏하면 옆구리를 찔러보는 거대 언론 자본도 '수구적 진보'니 '진보적 보수'니 하는 말장난을 간혹 즐기는 지경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특히 정치 공간에서, 진보라는 이름에 대한 과도하리만치 강한 집착이 존재하는 건 왜일까? 통합진보당이 만들어지기 전 국민참여당의 유시민과 민주노동당의 이정희, 이 두 사람이 만나 이야기한 것을 묶은 책 제목이 <미래의 진보>(민중의소리 펴냄)였다. 그리고 진보신당을 탈당한 사람들까지 합쳐 당을 만들 때, 이들은 진보신당이란 이름의 정당이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진보라는 이름을 고집했고 통합진보당의 약칭을 진보당이라 해달라고 언론에 요청까지 했다. 기본적인 '상거래상의 도덕'조차 무시하는 몰염치를 무릅쓰고서라도, 또 진보신당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진보라는 깃발을 움켜쥐고자 했던 까닭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본디 '진보(progress)' 혹은 '진보적(progressive)'이란 말은 서구에서 자본주의적 근대와 함께 출현하고 그 의미가 분명해진 개념(내지 이념)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이전에도 과학은 있었으되, 근대의 합리주의에 기반을 두고 진행된 과학의 비약적 발전이 다시 자본주의적 생산력을 급속히 발전시켜 왔다는 사실은 굳이 긴 설명을 보태지 않아도 되겠다. 과학의 발전으로 자연에 대한 지배력이 강화되면서 인류의 미래는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확신이 진보에 대한 신앙으로 굳어져왔을 터이다.
이와는 다른 의미(혹은 차원)를 지닌 진보가 있었다. 그것은 사회적 진보, 혹은 역사적 진보에 해당하는 것이다. 생산력의 증대에 따른 자본주의의 발전이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프롤레타리아트(노동자 계급, 또는 생산 수단을 갖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무산자(無産者) 계급'을 의미하는)에 대한 착취를 통해 이윤을 추구함으로써 유지된다고 하는 이 근본적인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지향을 갖는 것이었다. 20세기를 '혁명의 세기'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이러한 사회적 진보 이념이 여러 나라에서 혁명을 통해 실현되고 한 사회의 지배적 이념이 되기도 했던 역사적 사실을 두고 일컫는 말일 것이다.
근대 자본주의의 등장 이후 이러한 의미들을 지닌 20세기 진보의 이념은 일찌감치 '내적 파탄'을 노정해왔다. 우선 근대 사회의 핵심적인 가치인 '자유'의 경우에도, 봉건적 굴레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인간' 역시 그 자유조차도 자연적 필연성 안에서만 발휘될 수 있을 뿐이라는 과학적 계몽주의의 설법에 따라 결국은 '도구적 인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쓴 <계몽의 변증법>(1944년)에서, 그리고 <부정변증법>(1966년)에서 이미 '진보의 부정적 대가'에 대해 서술한 바 있다.
자유로운 인간의 의지가 전제되어야 근대 시민 사회의 윤리는 작동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적 맹신주의는 자연적 필연성을 앞세워 인간의 자유 의지에 족쇄를 채운 것이다. 인간은 필연성과 어떤 목적에 자신의 자유를 반납해야 한다. 자유를 몰수당하거나 스스로 포기한 인간에게 도덕적 책임 추궁이 가능할까? 20세기 초를 경과하면서 독일인들은 히틀러가 제시한 국가사회주의의 청사진 앞에 자신들의 이성과 자유를 그런 식으로 반납했고, 파시즘의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사회적 진보의 경우는 어땠을까? 인간 사회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지평을 연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업적이었다.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을 규명해내고 이에 입각하여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은 과학적 사회주의 이념의 운명은 그렇다면 어찌 되었던 걸까? 생산 수단의 국유화를 통해 부르주아 계급에 의한 프롤레타리아트 착취라는 생산관계의 모순을 철폐하면 억압 없는 인류의 미래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던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실험은, 알다시피 20세기가 끝나기도 전에 초라한 몰락으로 막을 내렸다.
자본주의의 반대쪽에서 진행되었던 '국가 주도의 사회주의 경제'라는 수십 년간의 실험이 만들어낸 사회가, 마르크스가 꿈꾼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라 또 다른 전체주의 사회에 불과하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여기서 언급할 여유가 없다. 어찌 되었든 오늘날 중국처럼 공산주의를 내걸고 있는 국가조차 경제에서는 자본주의 국가와 다름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프랜시스 후쿠야마 같은 이는 "역사(진보)는 끝났다!"고 호들갑스런 선언을 했고, 이 말은 한동안 꽤나 그럴듯한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요약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결국 근대와 함께 출현한 진보라는 이념은 인간의 자유든 평등이든 그것들을 실현하는 데 모두 실패했다고. 과학의 진보가 여전히 인간에게 행복과 안락을 보장하는 첨단의 유토피아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나,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한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은 불가능한 이상으로 판명되었을지 몰라도, 사회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진보의 이념은 지금도 유효하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건 자유다. 오늘날 세계를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자본주의가 파국의 징후를 드러내기 전까지는 그러한 이야기들이 설득력 있게 들리기도 했다.
2
지금으로부터 벌써 17년 전인 1995년 겨울의 기억이다. 여전히 기약 없는 망명객으로 파리에 머물 때였다. '불만의 겨울'이라 불리던 그해, 우파 정권의 '연금 개혁'에 반대하는 공공 부문 노동자들의 총파업으로 지하철 등 대중교통 수단은 모두 멈추었고 파리의 거리는 온갖 자동차들과 사람들로 북적댔다. 나는 몇 날이고 행진하는 사람들을 따라 한참을 걷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이 파업을 두고 프랑스는 물론이고 서유럽 좌파 진영이 한동안 자신들을 짓누르던 우울과 냉소를 딛고 거리에 나섰다는 의미에서 반(反)신자유주의 투쟁의 전환점이라 말하기도 했지만, 사람들을 움직인 것이 새로운 내일에 대한 낙관인지 오늘의 삶이 주는 불만(내지 불안)인지는 분별되지 않았다. 아마 후자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가 몰아붙이는 변화의 파고(공공 부문의 사기업화—한국에서 '민영화'라고 부르는—와 해고, 복지 축소 등으로 나타나는)는 높았고, 사람들의 저항은 일종의 공포에 대한 반작용과 같은 것이었다.
하나의 체제, 혹은 하나의 제도는 그것이 안고 있는 근원적인 모순과 내적 갈등을 지양(止揚)하려는 대립 항을 상실하게 되었을 때, 내부의 모순이 급속히 강화되거나 하나의 방향성만을 추구함으로써 병리적인 현상이 극대화되어 파국으로 나아가게 된다. '자본주의의 모순은 결코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극복되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도 바로 그런 것이다. 후쿠야마의 믿음에 의하면, 자본주의와 적대하는 다른 대립 항이 없다면 마땅히 자본주의에는 파국 같은 것이 없어야 하며 대신 인류가 물질적 행복이나마 맘껏 누릴 수 있는 유토피아를 가져다주어야 하는데, 우리에게 다가온 것은 전혀 다른 현실이었다.
1996년에 프랑스에서 처음 발간된 책 <경제적 공포>(김주경 옮김, 동문선 펴냄, 1997년)의 저자 비비안느 포레스테는 자본주의 문명 안에서 대단히 충격적인 격변이 이미 일어났고, 또 그것이 급속히 사회를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우리가 지금 목격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최소한의 노동의 권리가 보장되고 성실히 노동의 의무를 다하면 삶을 영위해갈 수 있다고 말해주던 그런 과거의 자본주의가 아니다. 과거의 자본주의에서 '고용'은 자본이 지니는 일종의 사회적 의무 같은 것이었는데, 오늘의 자본주의에선 어떤 정부도 자본에게 그러한 의무를 지도록 강제하지 않는(못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자본주의에선 '착취당할 기회'도 얻지 못한 사람들이 거리에 넘쳐난다.
그런데 그녀에 따르면, 노동이 소멸되고 수많은 인간들이 잉여적 존재로 전락해 가는(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아직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는다. 서유럽의 좌파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이미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처방책'들을 제시"하거나 "지금은 하나의 신화가 되어버린 것들을 아직도 붙들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성장과 고용의 신화'이다. 자본의 무한한 자유만이 보장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그것은 이미 자본의 공세로 인해 산산조각이 났는데, 다시 말해 더 이상 자본주의의 프로그램 안에는 일자리 창출 같은 것은 입력되어 있지 않은데, 그들 좌파 정당들은 실현될 수 없는 약속을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열심히 부러워해온 유럽의 '복지 국가'는 지속적인 '성장과 고용'이 가능할 때 기능할 수 있는, 더 나아가 기본적으로 정부나 관련 기구들이 복지를 시행하는 데 있어 필요한 비용을 투여해야 하는 '관리 사회형 복지'이다. 고용을 거추장스러운 장애물로 간주하는 자본의 요구에 따라 지금까지 유지되어온 복지 제도를 철회하는 데 있어 우파 정권과 좌파 정권의 차이는 생각하는 것만큼 크지 않다. 속도의 차이만 있을 뿐.
나는 전혀 다른 성격으로 '진화'한 자본주의가 유럽 사회가 오랜 노력으로 이룩해온 사회적 진보—노동권에 대한 존중과 '보편적 복지'를 내용으로 한—의 성과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바로 그 현실 속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머지않은 미래에 더 큰 경제적 파국이 다가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도리는 없었다. 사회적 진보에 대한 미련을 던져버릴 수 없는, 제3세계로부터의 망명객이 지닌 귀향의 꿈 때문이었을까? 파리의 거리에서 발 딛고 서 있던, 한 세계가 거대한 지각 변동을 통해 다른 세계로 급속히 바뀌어간다는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나는 그 뒤 1996년 말에 시작된 노동법 개악에 반대하는 한국 노동자들의 총파업 소식을 들었다.
그것은 한국 자본주의의 거대한 전환을 예고하는 징후였다. 1997년 말 한국은 초유의 외환 위기로 1차 파국을 맞이했고, IMF(국제통화기금) 관리 체제가 들어서자 노동에 대한 자본의 전면적인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20세기 말 세계사적 전환기에 한국 사회가 경험한 패러독스는 이 파국이 민주화 과정과 서로 맞물리면서 동시대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 20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나는 마침내 귀국할 수 있었다. 그것이 뒤늦게나마 찾아온 민주화 덕택임은 분명하지만, 이 '지체된 민주주의'가 경제 위기에 대응한 방식은 다름 아닌 '위기에서 파국으로' 가는 길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지난 10년 동안 경험하고 톡톡히 실감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니었던가.
3
▲ <지금 여기의 진보>(이음 펴냄). ⓒ이음 |
평등에의 지향이 거세된 채 자유의 파토스에만 의지해서 추진되는 민주화가 자본주의 세계화 과정에서 강화되는 자본의 압도적인 힘을 제어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난망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자유화에 한정된 민주주의는 자본이 노동을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법과 제도로 허용하는 도구로 기능했다. 자유라는 반쪽 가치로만 존재하는 민주주의의 불구성은 다시 모처럼 찾아온 사회적 진보의 계기를 무산시키고 거꾸로 자본의 자유만 확대시켜준 것이다.
한국의 정치적 자유화 과정에서 진보는 여전히 위험의 경계로서의 의미만 지니는 것이었다. 독재 체제 아래 특권적 이해를 추구해온 기득권 세력은 시민적 자유의 확대를 의미하는 기본적인 절차적 민주주의의 적용에 대해서조차 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그것을 위험한 진보라고 공격하기 일쑤였다. 그러한 공격에 대해 자유주의 정치 세력은 '민주 대 반민주'라는 대치 구도로 자신들을 방어하려 했다. 바로 여기서 자유화를 의미하는 '개혁'과 사회적 진보는 혼돈되며, 자본과 노동의 대립과 긴장은 시야에서 벗어난 채 '실체 없는 논쟁'만 지속된다. 나는 이 대목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작성한 <공산당 선언>(1848년)의 유명한 첫 단락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을 잠시 인용해 보자.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옛 유럽의 모든 세력들, 즉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Metternich)와 기조(Guizot), 프랑스 급진파와 독일의 경찰이 이 유령을 사냥하기 위해 신성동맹을 맺었다.
정권을 잡고 있는 적들에게서 공산주의적이라고 비난받지 않을 반(反)정부당이 어디 있겠으며, 더 진보적인 반정부당과 반동적인 적에게 거꾸로 공산주의라는 낙인을 찍으며 비난하지 않을 반정부당이 어디 있겠는가? (<공산당 선언>(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강유원 옮김, 이론과실천 펴냄, 2008년)
진보라는 유령은 오래도록 분단된 한반도의 남쪽을 배회해왔다. 반공 규율 체제인 군사 독재 정권은 걸핏하면 반정부 세력에게 공산주의라는 낙인을 찍어 탄압하고 학살을 일삼았다.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의 '민주화 10년' 동안에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자유주의 정치 세력에게 정권을 빼앗긴 보수(극우를 포함한) 기득권 세력들은 얼마간의 시민적 자유의 확대도 인내하지 못하고 실제로는 자유주의를 신봉할 뿐인 정권의 정책을 '진보적(좌파적)'이라고 공격했다.
여기까지는 <공산당 선언>과 비슷하게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부터는 사정이 달라진다. <공산당 선언>은 다음 단락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의 두 가지를 의미한다. 공산주의는 이미 유럽의 모든 세력에 의해 하나의 세력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라고. 이 점이 다른 것이다. 마르크스가 유령이라고 명명한 공산주의는 정치적 실체를 인정받았지만, 한국에서 진보는 실체가 없는 '유령'으로 그저 떠돌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분단과 내전으로 이어진 비극적인 역사적 경험이 한국 사회에 오랜 '진보의 공백'을 가져오고 그로 인해 얼마나 긴 시간 동안 가혹한 정치 체제가 유지되어왔는지는 여기서 구구히 되새기지 않겠다. '진보당' 당수 조봉암의 죽음이 말해주듯 진보, 해방, 인민, 혁명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은 반공 규율 사회가 지속되는 동안 곧 죽음과 동의어였다. 적어도 그것은 박정희의 유신 체제가 막을 내리는 1970년대 말까지는 그랬다.
그 시대에 20대의 시간을 통과했던 나는 그 얼어붙은 '겨울 공화국'에서 불온한 '해방'의 꿈을 꾸었다('남조선민족해방전선'이라는 비합법 조직의 조직원이 된 것이다). 그것은 너무 위험한 꿈이었다. 그 조직에서 내가 만난 어떤 이는 사형을 당했고, 살아남은 친구들은 다친 몸으로 오랜 시간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다. 고문과 감옥행, 죽음으로부터 벗어난 나는 파리의 이방인으로 긴 세월을 보내야 했고.
나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안다. 그래서 이른바 '민주화 10년'이 열어놓은 자유의 공간이 지니는 가치를 폄하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다. 지금과 같은 수준의 정치적 자유라도 보장되어 있었다면, 그때 나의 동료들은 그처럼 가혹한 운명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었을 터이므로(이렇게 말하면 실례가 되겠지만,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핵 자위권이라 생각하는 국회의원도 있는 현실에 비하면 그것은 얼마나 터무니없는 대가였던가).
박정희의 죽음 이후로도 길게 이어진 군사 독재는 1987년의 6월 항쟁으로 인해 마감되었다. 1980년 5월의 광주 항쟁을 짓밟고 전두환 군사 독재가 들어선 이후 10년 동안은 한국에서 민주주의 운동이 정치적 자유의 요구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진보의 내용을 갖추어가던 시기였다. 우리가 흔히 '1987년 체제'라 부르는 지점에 와서 이 민주주의 운동은 두 가지의 갈림길에 도달하게 된다. 그 중 하나가 정치적 자유화를 추구하는 자유주의의 길이라면, 다른 하나는 노동권의 확장을 기반으로 사회적 평등의 가치를 추구하는 진보주의의 길이었다.
1987년의 6월 항쟁을 '성공한 항쟁'으로 규정하는 자유주의 정치 세력의 집권은 그해 곧바로 이어졌던 7, 8, 9월 노동자 항쟁에 대한 기억을 애써 지우고 싶어 한다. 자유주의 정치 세력의 분열로 집권에 성공한 노태우의 정권은 논외로 하더라도, '3당 통합'이라는 보수주의와의 정치적 타협으로 등장한 김영삼 정권의 시기에는 자유주의 정치 세력이 굳이 노동 사회를 포섭하려는 적극적인 공세를 시도하려 하지 않았다. 한국 자본주의가 근본적인 축적 위기를 맞이하기 전까지는 노동에 대한 자본의 공격도 전면화되지 않았으므로.
1997년의 1차 파국으로 IMF 체제가 강제되고 그와 함께 김대중 정권이 등장했을 때, 자본의 축적 위기를 맞아 한국의 자유주의 정치 세력은 스스로 표방한 '노동 친화적'이라는 수사가 무색하리만치 '친자본적'이고 앞서의 정권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자본의 자유를 확대하는 방식을, 거기서 더 나아가 자본과 함께 노동 사회에 대한 전면적인 공세에 나서는 길을 선택했다. IMF의 구조 조정안이 목표로 삼은 '노동 시장의 유연화'는 일차적으로는 1996~1997년의 총파업에 대한 자본의 전면적인 반격이었고, 자본에게 해고의 자유를 포함하는 무한한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한국 사회를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질서로 변모시켜가게 된다. 나는 이 맥락에서 '인권 변호사' 출신으로 대통령 취임(2003년)을 앞둔 노무현 당선자가 자신의 청와대 입성을 전후해 이어지던 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해 했던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지금과 같이 민주화된 시대에 노동자들의 분신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투쟁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이 된 노무현의 이 말은 한국 사회에서 자유주의와 진보주의를 분별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1998년 IMF 구조 조정기 벽두에 발생한 현대자동차 파업에 정부 측 대표로 가서, 노동조합 지도부를 설득하여 식당 노동자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정리 해고를 실현시켰던 당사자이다. 그런 그가 말하는 '민주화된 시대'란 자본의 공세에 대한 노동의 저항을 민주주의로부터 배제시키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었다.
반공 규율 사회에 뿌리내린 보수주의(극우를 포함한)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감당하며 권위주의 질서에 맞서 개혁을 수행하는 자유주의는 진보주의와 친화적일 수 있었지만, 노동에 대한 유연화 공세를 방임하거나 앞장서 촉진하는 한 자유주의는 사회적 진보를 굴절시키고 파괴하는 자본의 든든한 동맹자였다. 자유주의 정치 체제가 수행한 이 이중적 역할이 바로 진보에 대한 인식의 오류(착종 현상이라 말할 수도 있는)를 발생시킨 것이다.
반공 보수주의가 진보를 압살하여 진보의 부재를 강요했다면, 이른바 '개혁 자유주의'는 정치적 자유화의 경계 안으로 진보를 포섭하거나 자본의 공세로 배제되는 노동의 하위 부문을 민주주의 바깥으로 내던져버린다. 그들이 열어놓은 정치적 자유의 공간은 물론 노동에 기반을 둔 진보 정치가 제도 정치 안으로 진입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입구'이다. 그러나 진보가 이 좁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그 문은 닫혀버린다. 노동으로 되돌아갈 '출구'가 차단된 현실, 이것이 다음 절에서 이야기할 노동의 정치 세력화, 즉 진보 정치의 조건이 되었다.
자, 여기 자유를 향한 좁은 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뒤편에선 자본의 대대적인 공세가 진행되면서 노동은 여러 층위로 조각나고 빠르게 수직적인 통합 체계가 만들어진다. 노동의 이러한 분화와 동질성의 파괴는 노동의 단결된 힘을 근저로부터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는다. 한국 사회보다 오랜 역사를 지닌 서구 자본주의에서도 역시 그간 자본주의 모순의 체제 내적인 해결책이 되어온 복지 체제마저 무너지고 노동 사회의 붕괴가 심화되고 있는데, 충분히 정치적으로 조직화할 시간을 얻지 못한 한국의 노동 세력에게 정치적 반격의 조건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자유주의 정치 체제가 마련해준 정치의 공간으로 들어서는 것, 그나마 그것이 자본의 공격으로부터 노동의 권리와 노동의 가치를 지켜내는 유일한 길이었을 것이다.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열 석의 국회의원을 의회로 진출시켰다. 이것은 신자유주의 질서로 급속히 변화해가는 한국 사회의 가파른 양극화가 진보 정당에 대한 기대를 넓히게 된 현실의 반영일 것이다. 그러나 대의제 민주주의 안으로의 진보 정치의 성공적 진입은 양날의 칼이 된다. '의회 속의 진보 정치'는 파괴되거나 소멸해가는 노동에 대해, 그리고 민주주의 바깥으로 쫓겨나는 버려진 노동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이제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질서 안에서 자유주의와 경쟁(?)하게 된 진보주의가 어떤 과정을 밟아갔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헤겔의 유명한 역사적 경구를 전유하여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그 다음에는 희극으로!"
슬라보이 지젝은 이 말을 제목으로 삼은 자신의 책(<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김성호 옮김, 창비 펴냄))에 다음과 같은 마르쿠제의 말을 덧붙였다.
"희극으로 반복되는 것이 원래 비극보다 훨씬 더 끔찍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한국에서 진보는 두 번 반복되었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그 다음에는 희극으로!"라고. 그런데 여기에서도 희극으로 반복될 때 비극보다 더 끔찍할 수 있다는 마르쿠제의 말을 절대 빠트려서는 안 된다.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 하려 한다. (계속)
진보의 죽음, 타살인가 자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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