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사격장에서 권총을 거머쥐고 표적을 노력보는 박정희(왼쪽)와 장준하의 모습. 두 사람은 모두 한국 현대사의 격랑속에서 극적인 변신을 했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달랐다. 한국방송 인물현대사 ‘거사의 죽음과 진실’ |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⑬ 장준하 선생 의문사(상)-
장준하의 자신감, 박정희의 콤플렉스
37년 전인 1975년 8월21일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 한홍구는?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장준하 선생의 영결식장 뒤편에 앉아 있었다. 한 번도 직접 얼굴을 본 적이 없던 분, 하긴 그런 장례식 쫓아다니다 청춘이 다 갔는데, 그 시작이었다.
명동성당이 워낙 커서 그런지,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뒷자리는 많이 비어 있었다. 어느 장례식인들 분위기가 무겁지 않으랴마는 장중한 명동성당은 처연한 공기가 낮고 진하게 깔려 있었다. 영결미사가 끝난 뒤 태극기에 덮인 관이 운구되어 성당 마당으로 나왔다.
아들인 듯싶은 내 또래 소년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영정을 모셨다.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백범과 윤봉길이 먼 길 떠나기에 앞서 굳은 입술로 찍은 사진에 나오는 그 태극기였다. 무슨 일이 닥치리라고 예감했던지 장준하는 백범이 물려준 그 태극기를 세상을 뜨기 열흘 전 이화여대 박물관에 맡겼다. 얄궂은 태극기는 박물관에 들어간 지 며칠 안 돼 30년 가까이 자신을 잘 보관해준 주인과 작별하러 세상 밖에 나왔다.
운구 행렬이 성당 마당에 나왔을 때 하얀 모시 두루마기에 하얀 머리에 하얀 수염의 노인 한 분이 앞으로 나왔다. 함석헌 선생님이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함 선생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말씀 끝에 만세 삼창을 제안하셨다. ‘장례식에서 웬 만세 삼창?’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만세, 만세,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지막 만세와 동시에 ‘으흐흑’ 하는 참았던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그렇게 떠나간 장준하 선생의 묘소를 37년 만에 이장하면서 그분의 유골이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지름 6센티미터의 원형 함몰, 숨이 턱 막혔다.
장준하는 한때 극우·친미였다
이승만과 김구가 갈라섰을 땐
명백히 이승만 편을 들었다
그의 진보적 변신은 극적이었다
일군에 들어가 임정청사에 폭탄을?
박정희는 1917년생, 장준하는 1918년생. 숙명의 라이벌이 된 두 사람은 딱 한 살 차이였다. 박정희가 소학교 선생님에서 일본군 장교로, 해방 후 광복군으로, 국군으로, 남로당 프락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피고인으로, 반란군의 수괴로, 독재자로 변검의 한 장면처럼 정신없이 변신을 해왔다면,
장준하도 극우, 반공, 친미에서 한 시대의 가장 진보적인 위치까지 평생을 숨가쁘게 달려왔다. 한 명은 가장 믿었던 부하의 총에 맞아 비명에 갔고, 다른 한 명은 지금도 그 사인을 놓고 논란이 벌어지는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에서 양극단에 섰던 사람, 둘 다 자연사하지 못했다.
학병에 끌려가기 일주일 전, 장준하는 열일곱 어린 신부 김희숙과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는 장준하가 잠시 신안소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있을 때의 제자였다.
사지로 가는 마당에 웬 결혼식이었을까. 일본이 ‘처녀공출’을 해서 일본군 위안부를 전선으로 보내던 시절, 딸 가진 부모들은 처녀공출을 피하기 위해 사지로 가는 사윗감도 마다하지 않고, 조혼을 시켰다. 그게 나라 잃은 젊은이들의 운명이었다.
중국 전선에 투입된 장준하는 1944년 7월 동료 넷과 함께 부대를 탈출하여 천신만고 끝에 안후이(안휘)성 린취안(임천)에 도착했다. 린취안에는 중국 중앙군관학교 분교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한광반, 즉 한국광복군 간부 훈련반이 설치되어 있었다. 한광반에 편성된 젊은이 50여명은 대부분 장준하처럼 목숨을 걸고 일본군에서 탈출한 청년들이었다.
석 달간의 교육을 마친 이들은 제비도 넘기 힘들다는 험준한 파촉령을 넘어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중경)으로 향했다. 6천리 길을 걸어온 수십명의 젊은이가 한꺼번에 당도하니 임시정부의 노인들은 너무나 감격했다. 백범도 떨리는 목소리로 일제의 폭압 밑에서 조선의 젊은이들이 다 일본사람 된 줄 알았는데 이런 일이 다 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답사에 나선 장준하도 본인과 청중이 모두 울음바다가 돼 연설을 마치지 못했다. 이런 감격도 잠시였다. 임시정부는 오랜 파쟁에 빠져 있었는데, 정파별로 젊은이들을 경쟁적으로 초청하다 보니 ‘우리가 환영회 때문에 이곳이 왔나’ 싶을 정도로 환영회는 매일 계속되었다. 격정적인 장준하는 임시정부의 파쟁을 견딜 수 없었다.
임시정부 내무부 주관으로 매달 한 번씩 열리는 강연회에서 단상에 오른 장준하는 이렇게 외쳤다. “가능하다면 이곳을 떠나 다시 일군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이번에 일군에 들어간다면 꼭 일군항공대에 지원하고 싶습니다. 일군항공대에 들어간다면 중경 폭격을 자원, 이 임정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습니다. 왜냐고요? 선생님들은 왜놈들한테 받은 서러움을 다 잊으셨단 말씀입니까? 그 설욕의 뜻이 아직 불타고 있다면 어떻게 임정이 이렇게 네 당, 내 당 하고 겨누고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노투사들에게는 참으로 모욕적인 말일 수 있었지만, 백범은 이들 젊은이들을 품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정보국(OSS)과 손잡고 광복군을 조선 8도마다 한 도에 몇 명씩 미국 비행기로 투입한다는 비밀 군사작전을 준비했다. 이들이 살아서 국내에서 유격전을 전개할 가능성은 솔직히 0퍼센트라고 보는 것이 옳았다.
이 무모한 작전에 나선 것은 머리 나쁜 청년들이 아니었다. 1950년대와 60년대 한국 지성계를 대표하는 잡지 <사상계>를 발간한 장준하,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여 <한국공산주의운동사>를 정리한 김준엽(전 고려대 총장) 같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이 작전에 자원했다.
오매불망 광복의 그날을 기다려온 백범에게 ‘왜적의 항복’이 기쁜 소식이 아니라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실망스러운 일이었던 것은 이들을 투입할 디데이가 8월20일이었기 때문이다. 백범은 동물적 본능으로 우리의 운명이 어찌될지 알았던 것이다.
장준하는 해외에 있던 우리 독립운동가들 중 해방 후 가장 먼저 꿈같이 우리 땅을 밟아 본 사람이었다. 광복군을 국내에 투입할 계획을 세웠던 미국 오에스에스는 ‘군사사절단’이라는 이름 아래 미군 18명과 광복군 4명(이범석, 김준엽, 노능서, 장준하)을 비행기에 태워 서울로 보냈다. 이들은 일본군의 거부로 여의도 비행장에서 8월18일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1945년 8월 광복군 장교 복장을 한 장준하(왼쪽)와 1944년 6월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한 박정희. 한겨레 자료사진. |
백범과 백낙준, 함석헌과의 만남
1945년 11월23일 장준하는 백범을 모시고 귀국하여 경교장에서 백범의 비서로 일했다. 광복군 참모장으로 이승만 정권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범석 장군은 백범의 비서로 있던 장준하를 데려다 자신이 조직한 민족청년단의 중앙훈련소 교무처장으로 삼았다. 민족청년단은 흔히 극우파시스트적인 단체라는 평가를 받는데, 청년 시절의 장준하는 그런 조직 안에서 “이범석이 좌익에 둘러싸여 좌익 세력에 대한 조치를 분명히 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면서 민족청년단을 떠났을 만큼 확실한 극우였다.
경교장 시절 ‘장 목사’라 불리던 장준하는 학병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중단했던 신학 공부나 다시 해볼 생각을 하던 차에 전쟁이 터졌다.
전쟁 중인 1952년 장준하는 <사상계>의 전신인 <사상>을 발간했다. <사상>은 문교부 내의 국민사상연구원에서 발간한 잡지였는데 장준하는 문교부 서기관으로 이 연구원의 사무국장 등 요직을 지냈다. 이때 문교부 장관은 장준하와 친미·반공·기독교에 평안도라는 공통점까지 지닌 백낙준이었다.
<사상>의 또다른 후원자는 미국공보원(USIS)이었다. 장준하는 한때 백범을 지근거리에서 모셨지만, 이승만과 김구가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과 남북협상으로 갈라졌을 때 명백하게 이승만 편에 섰고, 한국전쟁 시기에는 정부기관 국민사상연구원에서 미국의 후원을 받으며 공산주의와의 사상전을 전개했다.
<사상>은 이듬해 장준하가 인수하여 <사상계>로 제호를 바꿔 새롭게 출발했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사상계>의 영향력은 독보적이었다. 서중석이 지적한 것처럼 당시 <사상계>의 위치는 1970년대 <창작과 비평>의 막강한 영향력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창작과 비평>이 민주진영 내의 ‘그들만의 리그’에서 최강자로 군림했다면, <사상계>는 보수, 진보를 떠나서 -1950, 60년대에 그런 구분을 하기도 어색하지만- 한국의 지식인 사회 전체를 지배했다. 장준하가 <사상계>를 통해 발굴한 필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지만, 첫손가락에 꼽아야 할 사람은 단연 함석헌이었다.
함석헌은 <사상계> 1958년 8월호에 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 6·25 싸움이 주는 역사적 교훈’에서 6·25를 남과 북이 각각 미국과 소련의 앞잡이가 되어 벌인 꼭두각시놀음으로 규정했다. 함석헌의 예언자적 목소리와 <사상계>에서만 볼 수 있는 수준 높은 논문들에 독자들은 열띤 반응을 보였다.
4월혁명 전후 <사상계> 전성기의 발행부수는 9만7천부를 기록하며 8만부에 불과하던 <조선일보>를 여유 있게 앞섰다. <사상계>는 자유민주주의적인 입장에서 이승만을 비판하는 데에서는 예리한 필봉을 휘둘렀지만, 정경모가 지적한 것처럼 ‘이승만의 독재는 공격해도 미국 자체의 행패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4월혁명은 한국 사회에서 금기시되어 있던 통일논의의 물꼬를 터놓았다. 자민통 등 학생과 혁신계에 여러 통일단체가 만들어지고 중립화통일 등 다양한 통일 방안이 제시될 때 <사상계>와 장준하는 종종 당혹스러울 정도로 극단적인 반공이데올로기를 펴기도 했다.
<사상계> 1960년 12월호 권두언에서 장준하는 “경륜과 이론을 갖지 못한 학도들은 단편적인 지식과 소박한 애국정열만 가지고 구국을 외친다”며 “국가 형태야 어찌되든지 덮어놓고 통일하고 보자는 일부의 환상적 논리”를 비판하면서 “여하한 형태의 중립주의도 용납될 수 없다”며 강력한 반공 입장을 드러냈다.
그 장준하가 10여년 후 “모든 통일은 선이다”라고 외칠 만큼 변신을 했다. 1948년 백범의 변신 이래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변신이었다.
장준하는 자신이 광복군일때 일본군 장교였던 박정희를
자신이 민족세력의 일원일 때 남로당 프락치였던 박정희를
대통령이자 ‘밀수왕초’ 였던 박정희를 도덕적으로 경멸했다
장준하에게 이력서를 낸 김종필
4월혁명 후 장준하는 장면 정권과 적극 협력하면서 장면 국무총리가 본부장으로 있던 반관반민단체 국토건설본부의 기획부장을 맡았다. 장준하는 사실상 본부장의 대리 역할을 하면서 대학 졸업자 2천명을 ‘국토건설요원’으로 공개채용해서 6개월간 농어촌에서 봉사하는 것을 일종의 수습기간으로 삼은 뒤 중앙관사에 공무원으로 채용한다는 획기적인 계획을 세웠다.
하극상 사건으로 군대에서 쫓겨난 김종필도 이때 장준하에게 이력서를 냈다. 장준하는 후에 농반진반 김종필을 빨리 취직시켰으면 “5·16 군사쿠데타 같은 것은 이 땅에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했다고 한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윤보선이 군사반란이 일어났을 때 “올 것이 왔다”라고 말했는데, 장준하 역시 아주 처음에는 5·16을 꼭 부정적으로 본 것은 아니었다.
<사상계>의 권두언은 거의 대부분 장준하가 썼는데 1961년 6월호의 무기명 권두언 ‘5·16혁명과 민족의 진로’에서는 5·16을 4월혁명의 연장선상에서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으로 높이 평가했다. 장면 정권에 깊숙이 개입한 장준하였지만 극우반공주의자로서 학생과 혁신세력의 통일논의에 대해 가졌던 불안감이 이런 식으로 표출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5·16에 대한 장준하의 이런 유보적 태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5·16 후 사실상 처음 나온 <사상계>에서 장준하는 자신은 권두언을 통해 민주정치로의 복귀를 촉구하면서, 함석헌에게 5·16을 비판하는 글을 청탁했다.
장준하에게 취직자리를 부탁했던 김종필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장에 올라 장준하를 잡아다 놓고 함석헌이 쓴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논설을 트집잡으며, ‘정신분열자 같은 영감쟁이의 이따위 글’을 실은 저의를 따져 물었다.
다른 언론들이 모두 침묵할 때 <사상계>가 군정을 당당하게 비판하자 <사상계>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사상계사는 열심히 잡지를 추가 제작하여 배포했지만, 곧이어 반품이 무더기로 쏟아져 들어왔다.
중앙정보부의 치사한 반품작전이었던 것이다. 지식인 사회에서 갖는 영향력에 비하여 경영 규모가 크지 않았던 <사상계>로서는 회복하기 힘든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호황 속의 적자였다. 여기에 세무사찰이 더해졌다.
장준하는 박정희가 추진하는 한-일 회담과 베트남(월남) 파병을 보면서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의 배후에 일본만이 아니라 미국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사실 이 무렵까지 장준하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거의 동일시했는데, 이제 그는 민족과 국가를 구별해 보는 눈을 갖기 시작했다.
장준하는 월남 파병에 반대했다. 한국군의 추가 파병을 위해 미국 대통령 존슨이 방한할 때 장준하는, 존슨은 “한국 청년의 피가 더 필요해서 오는 것”이라고 강력히 규탄했다.
그러나 큰아들 호권이 군대에 가자 월남에 보냈다. 장준하의 뒤를 이어 문익환이, 문익환의 뒤를 이어 백낙청이 한국의 통일운동에서 상징적인 위치를 이어받았는데, 백낙청은 이때 미국에 유학중인 홍안의 수재 청년이었다.
경기고등학교 재학 시절 유엔총회장에서 열린 세계고교생토론대회에 한국 대표로 나가 이름을 떨친 백낙청은 명문 브라운대학에서 졸업연설을 하여 <동아일보> 사회면 톱에 올랐다.
그런 백낙청이 미국 유학 중 병역의무를 마치겠다고 자원입대했다. 당시 신문은 “백군이 나이어린 13세 때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6·25동란으로 붉은 침략자들에게 강제로 납치당한 비통한 현실이 그에게 그러한 결심을 하게 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라고 썼다.
공동체 내에서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은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 한국의 진보는 원래 진짜보수에서 출발한 진보였다.
박정희와 장준하를 두고 숙명의 라이벌이었다 하지만 둘은 인간적, 도덕적 견지에서 차원이 달랐다. 장준하의 박정희에 대한 남다른 자신감과 박정희의 유난한 콤플렉스를 보면 박정희도 장준하도 그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진짜보수의 눈에 외세의 앞잡이나 하고 기회주의적 변신을 일삼는 자가 예쁘게 보였을 리 없다.
장준하는 자신이 광복군일 때 일본군 장교를 했던 박정희를, 좌우대립이 격심했던 해방공간에서 자신이 민족세력의 일원으로 활동할 때 남로당의 군부 프락치였던 박정희를, 그리고 대통령 자리에 있으면서 삼성재벌의 한국비료 밀수사건에서 ‘밀수왕초’였던 박정희를 도덕적으로 경멸했다. (다음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