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소니 이후의 최고의 주먹 방동규!-그는 경복궁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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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4,388회 작성일 2012-08-13 18:10본문
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주먹’, 경복궁의 밤을 지키다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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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박 자박 자박…. 지난 6일 새벽 1시20분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경복궁을 걷는 발자국 소리는 결코 작지 않았다. 쓰레기통에 코박고 있던 들고양이가 후다닥 도망을 쳤다. 찌륵찌륵, 맴맴맴맴…. 자지러지는 풀벌레 소리는 어딜 가도 잦아들지 않는다.
손전등 하나 들고 순찰에 나선 지 20분째. 방동규씨(77)의 셔츠는 땀에 흠뻑 젖었다. 건춘문(동문)에서 시작해 근정전-경회루-일주문을 살피고, 영추문(서문)과 근정문-유화문-흥예문-덕양문을 거쳐 광화문(남문)을 찍고, 다시 용성문과 주차장까지 돌면 40분이 걸린다. 그가 밤마다 네번씩 도는 길은 13만평에 달하는 경복궁의 절반, 남쪽이다. 궁내 북쪽은 청와대와 가까워 경찰이 지킨다.
오후 7·9시에 이어 새벽 1시 세번째 순찰에 나선 그와 동행했다. 옷이 젖어 불편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는 “새벽 4시 마지막 순찰을 돌 때까지 옷은 사이사이 선풍기 바람에 말려서 입는다”며 웃었다.
방씨는 ‘배추’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젊은 시절 웬만한 사내들은 한주먹에 때려눕힐 정도로 싸움을 잘해 ‘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주먹’으로 명성을 떨쳤다. 한번에 17명과 맞싸운 전설이 있고, 이정재도 스페인 조폭 두목도 손잡자고 했다고 한다.
그는 백기완(현 통일문제연구소장), 황석영(소설가)과 더불어 저잣거리에서 ‘조선의 3대 구라’로 불릴 만큼 입심도 최고였다. 사상범으로 몰려 모진 고문을 받고 해외 유랑과 사업, 농촌운동에 나섰던 인생도 유달리 파란과 굴곡이 많았다.
한때의 ‘주먹’이 경복궁과 연을 맺은 것은 2005년. 그는 유홍준 당시 문화재청장의 도움으로 경복궁 관람안내 지도위원으로 특채됐다. ‘몸짱 할아버지’로 관람객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스스로 경복궁을 떠났던 그는 지난해 초 야간경비 일을 맡아 돌아왔다. 77세에 왕궁 지킴이가 된 그는 “80세에 보디빌딩 대회에 도전하겠다”는 꿈을 하루하루 키우고 있었다.
방동규씨가 지난 6일 밤 손전등과 경비봉을 들고 경복궁을 순찰하다가 광화문 앞에서 카메라를 보며 웃고 있다. 젊은 시절 ‘시라소니 다음의 주먹’으로 불리던 그는 77세에 왕궁의 밤을 지키고 있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 백기완·이호철 등 재야와 친분 관계로
대공분실서 이근안에 모진 고문 당해
1년 뒤 길에서 이근안 만나 술대접
▲ 재야운동하는 사람들 안 만났으면
조폭 두목 됐거나 못된 짓해서 치부
말년에 고단하게 살지만 후회는 안해
- 2008년 초에 경복궁에서 갑자기 사라졌다가 3년 만에 다시 나타나셨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요.
“당시 내 임무는 아무 데서나 소변을 보고 흡연하는 관람객들의 불량행위를 잡고 때론 궁궐 가이드도 하는 것이었어요. 왕년의 주먹에게는 안성맞춤의 일이었죠(웃음). 하루종일 경내를 돌아다니다 보니 양말 한켤레가 하루에 구멍 날 정도로 노동량이 만만치 않았어요. 하지만 유홍준의 백으로 들어온 거잖아요. 정권이 바뀌고 유홍준도 없는 마당에 붙어 있기 싫었어요. 그렇게 몇년 쉬다가 먹고살려고 이곳 관리소장에게 일거리를 부탁했죠. 소장이 경로사상이 대단해 비정규직 중에는 나처럼 일흔살 넘은 사람이 서너명 돼요. 고마운 일이죠.”
- 유홍준 전 청장과는 어떻게 알게 됐나요.
“감방 동기예요. 1974년 긴급조치 2호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 독방에 갇혀 있을 때였죠. 당시 교도소에는 백기완, 장준하, 임헌영, 이호철 등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감된 사상범들이 차고넘쳤어요. 당시 우리는 위·아래, 옆방과의 통방(감방 간 대화)을 하며 무료함을 달래곤 했죠. 그런 어느 날 오른쪽 옆방에서 누군가 벽을 두드리며 ‘방배추 선생이 오셨다는데 옆방에 계시느냐’는 거예요. 친구들과 함께 달려온(끌려온) 대학생 유홍준이었어요. 당시만 해도 그를 몰랐는데 그는 나를 알았던 모양이에요. 형무소 동기니까 나중에 사회에 나온 뒤에 술도 같이 먹고 하면서 형·아우로 지냈죠. 그런 그가 문화재 일을 하는 관리가 되면서 경복궁에 제 일자리를 만들어준 거예요.”
그가 긴급조치 2호 위반으로 구속된 것은 1973년 강원도 신철원의 고산지대에 수확농산물의 공동생산·공동분배를 기치로 한 노느메기밭을 만들었다가 벌어진 일이다. 외딴곳에서 ‘수상한’ 농사를 짓고 반체제 거물급 인사들도 자주 드나들자 수사기관이 그를 김일성과 무전교신을 하는 거물 간첩으로 몰아붙인 결과였다. 다행히 언론인 선우휘의 도움으로 혐의를 벗어 6개월 만에 출소했다.
- 야간경비가 체력적으로 힘들진 않은가요.
“내 체력으론 견딜 만한데 나보다 약골은 힘들 거예요. 또 겁 많은 사람은 못할 일이죠. 캄캄한 밤, 불빛을 비춘 알록달록한 단청이나 세찬 바람에 문풍지가 부르르 떨면서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나면 오싹한 느낌이 들거든요. 만장도 멀리서 보면 꼭 나무에 흰옷 입은 사람이 매달려 있는 것 같아요. 들고양이가 휙 지나갈 때도 깜짝 놀라기 십상이고요. 사람들은 무섭지 않으냐고 하는데, 가난한 사람은 무서운 게 없는 법이에요. 이 세상에 가장 무서운 게 가난이거든요. 무서움을 탄다는 건 아직은 살 만하다는 거예요.”
그는 말을 돌리지 않았다. “노동운동하는 사람은 육체노동의 신성함을 운운할지 몰라도 실제 몸을 써서 먹고사는 노동자는 괴롭고 힘들게 마련”이라고 했다. 월급 120만원을 받는 궁궐 지킴이는 “힘들어도 보람있는 일” 식의 상투적인 말은 하지 않았다. 하루 일하고 하루 쉬는 그는 쉬는 날 오후에 아내와 못에 칼브럭을 끼우는 부업을 한다고 했다. 못 하나에 3원을 받는 일이다. 인생의 좌우명을 소개했다.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않는다)”이었다.
고교 졸업식 무렵 친구들과 함께. 배추(맨왼쪽)라는 별명으로 한창 쇠주먹을 자랑하던 시기다.
그는 일제 때 승용차와 별장을 소유한 개성 부잣집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수성가해 거상이 된 할아버지가 일군 막대한 재산은 6·25전쟁 중 아버지가 믿고 재산을 맡긴 친척의 사기로 모두 날리고 말았다. ‘소문난 악동에 괴짜’였던 방씨는 경신중고에 다니던 1949년부터 주먹으로 이름을 날렸다.
개성 유치원 시절부터 닦아온 권투, 유도, 검도 솜씨에 전국소년체육대회에 단골로 출전했을 만큼 무골이었다. 배추라는 별명은 전쟁 직후 붙었다. 피란 시절 가족의 생계를 위해 순천과 부산을 오가며 장사를 했던 그가 보성중고에 복교했을 때 모습이 꼭 배추장수처럼 보였기 때문이다.(그는 경신중고와 보성중고를 퇴학당하고 송도중고를 졸업했다.) ‘쇠주먹’이라는 소문은 서울을 넘어 전국에 퍼졌다. 가짜배추가 여기저기서 출몰했을 정도다.
그는 “주먹을 아무 데서나 사용하진 않았다”며 “힘자랑을 하려고 찾아와 덤비는 사람들이 많아 어쩔 수 없이 맞상대했고 못된 짓하는 놈들을 저지하느라 싸운 게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1954년 청년 백기완을 만나 사회개혁운동에 눈을 뜬 그는 서른이 되던 해 돌연 파독 광부로 떠났다.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3년의 광부생활, 4년간의 파리 유랑을 거쳐 귀국한 뒤에는 서울 명동에서 재계 부인들과 유명 연예인들이 단골로 드나들던 고급 양장점 ‘살롱드방’을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 마흔에 늦깎이 결혼하고 강원도에서 농촌운동의 꿈을 키우다 구속됐다. 1979년부터 2년간 중동에서 일한 그는 1986년 ‘말’지 사건으로 또 한번 구속됐다. 당시 ‘말’지의 보도지침을 세상에 공개해 수배 중이던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사무국장 김태홍이 피신할 때 보디가드 역할을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만나 보름간 지독한 고문에 시달린 것도 이때다. 고문후유증으로 세상을 뜬 김근태 전 민주당 상임고문이 이근안에게 고문당하며 수시로 들은 말이 “너도 배추처럼 맞아볼래?”였을 정도였다.
- 누구에게나 고문은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던데요.
“몇년 전 몸을 주제로 한 방송사 프로그램에서 내 뇌파를 촬영한 적이 있어요. 파독 광부 시절 목숨을 잃을 뻔한 낙반사고를 회상할 때에도 멀쩡히 움직이는 특정부위 뇌파가 유독 이근안에게 고문당한 이야기만 하면 미동도 하지 않는 기이한 현상이 발견됐죠.
의사 말이, 그 부분만 그런 걸 보면 치매와는 관계가 없대요. 너무 괴로워 의식적으로 자꾸 잊으려다 보니 그때를 떠올릴 때마다 특정부분이 마비되는 것 같다더군요. 그래서인지 기억은 있는데 괴롭지는 않아요. 고문을 당하고 1년쯤 지난 후 광화문 거리를 걷다가 이근안 일행과 우연히 마주치기도 했어요.”
-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날 보더니 슬금슬금 피하더라고요. 되레 불쌍하게 여겨졌어요. 이리로 오라고 불러서 소주와 고기를 사줬죠. 술값이 모자라 집사람에게 전화 걸어 옆집에서 돈을 빌려오게 했더니, 나중에 집사람이 ‘당신 또라이 아니냐’고 하더군요.
내 생각은 달라요. 국가가 있는 한에는 어느 나라, 어느 시절이나 국가에 맹종하는 권력기관이 있게 마련이죠. 그렇기에 개인을 원수로 취급하는 건 적에 대한 범주를 너무 축소하고 오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지금도 이근안이 밉지 않아요. 이근안이 없었으면 또 다른 이근안이 있었을 테니까요.”
그 역시 고문후유증으로 일년에 두세번쯤 송곳으로 몸 여기저기를 막 찌르는 것 같은 극렬한 통증을 앓아 한두달씩 병원에 다닌다고 했다. 의학적으론 설명할 수 없는 증상이라고 한다. 그에게 유달리 기행이 많았던 인생에서 아쉬운 게 있느냐고 물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큰 후회는 부모님께 효도 못한 것이고, 조금 더 큰 의미의 후회는 결혼한 거예요. 가정을 안 가졌다면 내가 이 사회를 위해 좀 더 큰일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거든요. 결혼해서 가정을 돌보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그래도 나를 만나 고생만 한 집사람에겐 고맙고 미안해요. 돈 못 번다고 앙앙대기는커녕 되레 사내로 태어났으면 인류와 세계평화를 위해 큰일을 해야 한다고 늘 말해준 사람이거든요.”
실제로 그는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도 여러번 있었다고 했다. 패션 1번지 명동을 틀어쥔 ‘살롱드방’이 그랬고, 1991년 방수포 제조사인 서해화성 CEO로 취임하고 1994년에 직원 3000여명을 둔 중국공장 대표이사로 활동했을 때도 눈먼돈은 많았다. ‘
말’지 사건 직후 큰 집과 자동차를 주고 모든 생활을 보장해준다며 전두환을 곁에서 모시라는 은밀한 제안도 받았다. 그는 “듣고 싶지 않아 어떤 일인지 묻지도 않았지만 그 밑에서 똘마니 노릇을 하란 게 아니었겠느냐”고 했다.
박정희·노태우 쪽에서도 정확히 재야는 아니면서도 재야의 친구라는 묘한 위치에 있는 그를 돈으로 유혹하려고 했다. 정기적으로 재야의 동태를 제보하면 경제적 보상을 해주겠다는 얘기였다. 그는 불같이 화내며 단칼에 잘랐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가 지키고 도우려 했던 지식인들에 대한 생각에도 변화는 있는 듯했다.
“처음엔 좌파 지식인들이 순수했어요. 그러나 정당정치와 자본주의 사회가 구체화하면서 상당수가 아주 영악해지고 사람 위에 군림하려고도 하더군요. 저는 그것이 언짢았어요. 그러다 보니 이제는 아는 사람일 뿐 옛날처럼 정을 두기가 어려운 사람이 많아요.”
남은 인생에 그가 하고 싶은 일은 두가지다. 나이 팔십이 되는 해에 보디빌딩 대회에 다시 한번 도전하는 것과 ‘국민을 간섭하고 구속하는 게 국가’라고 말하는 책(가제 <2112년>)을 펴내는 일이다. 그는 3년 전에도 보디빌딩 대회 장년부에 출전해 6등을 했다. 지금도 하루 1시간씩 경복궁 근처 헬스클럽에서 운동한다. 몸이 튼튼하지 않으면 정신도 건강하기 어렵다고 믿기 때문이다. 책에는 고문하고 삶의 자유를 빼앗았던 국가에 대한 어두운 기억을 담을 예정이다.
“재야운동하는 사람들 안 만났으면 조폭 두목이 됐거나 못된 짓해서 빌딩 몇채쯤 갖고 있을 수도 있겠죠. 셋방살이 전전하며 집사람 고생시키지도 않고….”
말년에도 고단한 비정규직으로 살고 있는 그는 “후회는 안한다”며 “지금껏 그랬듯이 남은 인생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겠다”고 말했다. 한바퀴 순찰을 마치면서 방씨가 소매를 걷어 올렸다. “아직 쓸 만하죠?” 알통 자랑이었다. 바쁘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면서 80 목전에 근육에도 조바심을 내는 기인(奇人). “풍류와 낭만이 사라졌다”고 아쉬워하는 ‘협객 방배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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