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 언론인 |
이 글 제목을 마땅찮게 여기는 독자가 있을 수 있겠다. 생년으로 보나 대통령 재임 기간으로 보나 대한민국 사회에 끼친 영향(그것이 설령 매우 부정적인 영향일지라도)으로 보나, 박정희를 김대중 앞에 내세우는 것이 자연스레 느껴질 테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김대중을 앞세움으로써, 내가 극보수진영이 아니라 리버럴진영의 일원이라는 점을 또렷이 하고 싶었다. 그것은 이 글이 편파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그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오는 12월에 치를 제18대 대통령선거는, 김대중과 박정희가 맞붙었던 1971년 제7대 대선의 리턴매치다. ‘재림 박정희’라 할 박근혜가 보수파의 확정적 후보로 떠올랐는데도, 리버럴진영의 사표로 김대중이 거론되지 않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박정희는 생전에 정적을 여럿 만들었지만, 그 최고의 정적은 김대중이었다. 그가 ‘유신’이라는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정상적 대선제도를 없애버린 것도 김대중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번 선거에서 리버럴진영의 대표로 누가 나서든, 그는 김대중의 아바타일 수밖에 없다. 당위로도 그렇고 현실로도 그렇다. 그 상대가 박정희의 아바타이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대한민국 대선 역사상 정책을 앞세운 첫 후보였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보장안, 노동자-자본가 공동위원회 구성, 비정치적 남북교류, 향토예비군 폐지 등이 대표적 예다. 박정희 캠프는 이에 맞서, 어이없게도, 대한민국 대선 역사상 처음으로 지역주의의 방아쇠를 당겼다.
이승만 정권 때는 물론이고, 5·16 군사반란 이후 박정희가 윤보선과 맞붙은 두 번의 대선에서도 지역주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박정희의 좌익 경력을 윤보선 캠프가 집요하게 물고늘어졌던 1963년 제5대 대선에서, 박정희는 사실상 호남 유권자들의 압도적 지지로 신승했다.
그러나 1971년 대선에서 공화당 의장 이효상이 들고나온 ‘신라 임금론’은 그 뒤 지금까지 한국 정치를 옥죄고 있는 정치적 지역주의의(특히 영호남 지역주의의) 시발점이 되었다. 다시 말해 1971년 선거는 대한민국의 첫 지역주의 대선이었다.
오는 12월 대선에서 리버럴진영은 41년 전 대선 때와 견줘 사정이 나을까 못할까? 판단하기 쉽지 않다. 유리한 조건이 있는 건 확실하다.
71년 대선에서 저질러졌을 개연성이 큰 부정선거의 가능성이 이번에는 없다는 점이다. 박정희는 그때 절체절명의 처지였고, 그가 설령 노골적 부정선거를 저지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김대중의 승리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에 그 선거에서 김대중의 승리가 또렷했다면, 박정희는 친위쿠데타를 한 해 앞당겼을 수도 있다. 그것은 그 대선 뒤 박정희가 김대중을 해외에서 납치하고 살해를 꾀하고 결국 투옥했던 사실로 미뤄 짐작하면, 쉬이 상상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서 그런 부정이 저질러질 가능성은 없다. 투표에서 이기고 선거에서 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리한 조건이 많다. 71년 선거에서 박정희에게 우호적 중립을 지켰던 주류매체들이 지금 박근혜와는 아예 한 몸이 되었다. 또 당시엔 군사반란이 일어난 지 10년밖에 안 된 터라 박정희족이 그리 많지 않았으나, 그 뒤 93년 김영삼이 집권할 때까지 이어진 군사정권 시절에 박정희족은 엄청나게 몸을 불려, 이제 한국 사회의 강고한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다.
심지어 한때의 김영삼 지지자 대부분이 박정희족의 하부를 구성하고 있는 형편이다. 게다가 그동안 지역주의는 한국 정치의 제1상수가 될 만큼 악화했다.
리버럴진영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이번 12월 대선의 본질이라 여기는 것은 민주화세력과 소위 산업화세력의 대결도 아니고, 호남(플러스 알파)과 영남의 대결도 아니고, 중하층계급과 상층계급의 대결도 아니다.
이번 선거의 본질은 공화파와 왕당파의 대결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헌정수호세력과 헌정파괴세력의 대결이다.
그것이 이번 선거 과정에서 김대중의 아바타가 이끄는 러버럴진영이 견지해야 할 프레임이다.
12월 대선에서 수치스러운 왕정복고가 이뤄지지 않도록, 헌정파괴세력이 집권하는 일이 없도록, 외치고 또 외치자. 헌-정-수-호!
고종석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