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5大 强國-- 韓國의 런던 올림픽 성과는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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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2,286회 작성일 2012-08-14 21:01본문
[런던 올림픽]
‘헝그리 정신’ 체급경기 벗어나
펜싱·체조 메달밭 확대
[중앙일보] 입력 2012.08.13
‘스포츠 5대 강국’된 한국, 런던 올림픽 성과는?
올림픽 데뷔 무대였던 1948년 런던 대회에서
한국은 역도의 김성집, 복싱의 한수안 등 동메달리스트 두 명을
배출했다.
식민지 시절 스포츠를 위안이자 자부심으로 삼았던 국민은
이 결과를 참패로 인식했다.
하지만 세계의 벽은 너무 높았고, 한국 스포츠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8강에 오르는 쾌거를 이뤘던 남자농구가 대회 전 “외국 장신 선수에게 이길 수 없으니 출전을 포기하라”는 압력을 받은 건 한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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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년 멜버른 올림픽까지 한국은 도합 6개의 메달을 땄다. 모두 역도와 복싱에서만 메달이 나왔다. 두 종목에선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한국 선수가 두각을 나타냈다. ‘체급 경기’라는 메리트도 있었다.
제 3, 4공화국 체육 정책의 특징은 관 주도였다. 정치인이 경기단체장을 맡았고, 학교 교육에서 체육이 강조됐다. 224명의 선수를 파견하고도 은메달 2개·동메달 1개에 그친 64년의 ‘도쿄 쇼크’ 뒤에는 태릉선수촌이 건설됐다.
임 교수는 “적절한 시스템이 갖춰진다면 한국 선수는 어떤 종목에서든 경쟁할 수 있다는 게 입증됐다”고 말한다. 지금까지의 원동력은 선수 및 지도자의 엄청난 노력, 국가와 기업의 지원이다.
한국은 역도의 김성집, 복싱의 한수안 등 동메달리스트 두 명을
배출했다.
식민지 시절 스포츠를 위안이자 자부심으로 삼았던 국민은
이 결과를 참패로 인식했다.
하지만 세계의 벽은 너무 높았고, 한국 스포츠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8강에 오르는 쾌거를 이뤘던 남자농구가 대회 전 “외국 장신 선수에게 이길 수 없으니 출전을 포기하라”는 압력을 받은 건 한 예다.
56년 멜버른 올림픽까지 한국은 도합 6개의 메달을 땄다. 모두 역도와 복싱에서만 메달이 나왔다. 두 종목에선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한국 선수가 두각을 나타냈다. ‘체급 경기’라는 메리트도 있었다.
대한체육회 부회장을 역임한 임번장(71) 건국대 석좌교수는 “체급 경기는 신체적 핸디캡이 상대적으로 적고, 헝그리 정신이 중요하다. 그래서 개발도상국가 선수도 경쟁할 수 있는 종목”이라고 평했다. 한국 경제의 초기 수출 상품이 저임금·저부가가치의 가발·섬유·합판 등에 집중됐던 것과 유사하다.
체급 경기의 우위는 계속 이어졌다. 64년 도쿄 올림픽에선 레슬링과 정식 종목으로 처음 채택된 유도에서 첫 메달이 나왔다. 두 종목 모두 체급 경기다. 76년 몬트리올에서 양정모가 한국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따낸 종목도 레슬링이었다. 이 대회에서 여자배구가 딴 동메달이 당시까지 유일한 ‘비체급 경기 메달’이었다.
1948년 대한민국 첫 메달 1948년 런던 올림픽 역도 75kg급 경기에서 대한민국 첫 올림픽 메달리스트인 김성집 선수가 바벨을 들어올리고 있다. 그는 합계 380kg을 들어올려 동메달을 땄다. [연합뉴스]
제5공화국이 들어선 뒤에는 관민 합작의 형태가 됐다. 81년 서독 바덴바덴에서 서울올림픽 유치가 확정된 뒤 정부는 체육부를 신설했고, 대기업에 아마추어 협회 지원을 맡겼다. 지원의 제 1기준은 ‘메달 가능성’이었다.
투자는 성과를 냈다. 84년 LA 올림픽에서 한국은 종합 순위 10위(금6·은6·동7)에 오르며 국제 스포츠의 강호로 자리 잡았다. 이후 세 차례 올림픽에서 ‘첫 메달’이 나온 종목은 양궁·핸드볼·농구(1984), 탁구·하키·사격·체조(1988), 배드민턴·육상(1992)이었다.
이 가운데 양궁과 핸드볼은 72년에 정식 종목으로 재진입했고, 탁구와 배드민턴은 88년과 92년 처음으로 채택됐다. 모두 신규 진입 장벽이 낮은 틈새 시장이었다.
그리고 변화가 일어났다. 2000년 시드니 대회에서 펜싱의 김영호(금)와 이상기(동)는 메달리스트가 되며 2012년 런던의 영광을 예고했다. 2008년 박태환이 ‘절대 불가능’이라는 편견을 깨고 수영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따냈다.
2012년 양학선이 정복한 체조는 올림픽 원년(1896년) 채택됐던 유서 깊은 종목이다. 송민석 대한올림피언협회 사무국장은 “모든 메달이 값지지만 전통이 오래된 종목의 메달리스트가 좀 더 존경을 받는 게 국제 체육계 정서”라고 말한다.
원년 9종목 가운데 한국은 7개 종목(레슬링·육상·사격·역도·펜싱·수영·체조)에서 올림픽 정상을 밟았다. 이 가운데 6개 종목은 92년 이후, 3개 종목은 2000년 이후 첫 금메달이 나왔다.
서범석(50) 대한펜싱협회 기술이사는 펜싱의 활약에 대해 “협회 지원 아래 9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국제대회에 참가하며 세계 펜싱을 알아나갔다. 플뢰레를 기본 종목으로 삼는 일본식 훈련 시스템에서 벗어났고,
스피드와 빠른 스텝에 기반한 한국식 펜싱의 개념도 잡아나갔다”고 말했다.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과감하고 합리적인 지원, ‘한국식 모델’의 개발이 한국 스포츠가 전통의 강자들이 버티는 종목에서도 이길 수 있는 이유다.
임 교수는 “적절한 시스템이 갖춰진다면 한국 선수는 어떤 종목에서든 경쟁할 수 있다는 게 입증됐다”고 말한다. 지금까지의 원동력은 선수 및 지도자의 엄청난 노력, 국가와 기업의 지원이다.
임 교수는 또 다른 ‘힘의 원천’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지금 국민들은 올림픽 결과 못지않게 과정을 중시한다. 스포츠를 알기 때문이다. 국민 40%가 생활체육을 경험했다는 통계가 있다”며 “생활체육과 엘리트 스포츠가 유기적으로 결합할 때 한국은 진정한 스포츠 강국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앙일보 최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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