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8.03 18:41 수정 : 2012.08.03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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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인도네시아 독립 영웅이 된 조선인 군무원 양칠성씨. 1949년 8월10일 네덜란드군 손에 총살당하기 직전의 모습이다. 가운데는 1975년 11월17일 서부 자바의 가룻 독립영웅묘지에 이장되고 있는 양칠성씨와 일본인 2명의 유골함. 오른쪽은 히라하라 모리쓰네라는 일본명을 지닌 조선인 전범 사형수. 어깨 쪽에 ‘조민산’이라는 본명이 영문으로 표기돼 있다. 역사비평사 제공 |
일제 침략전쟁에 동원됐지만
낯선 인도네시아서 항일운동
불귀의 객으로 낯선 땅 떠도는
잊혀진 조선 청년들의 삶 복원
조선인 전범 연구 우쓰미 저서
불법사찰 피해 김종익씨 번역
적도에 묻히다
우쓰미 아이코·무라이 요시노리 지음, 김종익 옮김/역사비평사·1만6000원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일제 패전 뒤 군국주의 에이(A)급 전범들보다 더 가혹한 처벌을 받은 조선인 ‘비·시(B·C)급 전범’ 등에 관한 연구로 우리에게 알려진 일본 역사연구자 우쓰미 아이코의 얘기를 들으면 그걸 새삼 실감하게 된다. 우리에게 끝나지 않은 전쟁은 한국전쟁만이 아니다.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전쟁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일제 때 조선인 군무원들의 강요당한 삶의 부조리를 추적한 우쓰미의 르포 <적도에 묻히다>(원제 ‘적도하의 조선인 반란’)도 그 점을 일깨운다.
1980년 7월에 초판을 찍은 이 책은 <적도에 지다-적도하의 조선인 반란>(1982, 국문), <적도하에서 한국인의 항일투쟁>(1986, 대왕사)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도 두 차례 소개됐다. 그러나 모두 저자의 동의 없이 이뤄진 ‘해적판’이었다. 이번에 처음으로 정식계약을 통해 30여 년 만에 출간되는 한국어판에는 지은이 서문과 부록으로 새로운 사실들을 보태고 정리한 ‘추기’가 새로 붙었으며, 본문 내용 중에서도 30여 년 세월을 거치면서 잘못된 사실로 확인된 부분은 바로잡았다.
이 책이 한국에 대중적으로 알려진 데는 야나가와 시치세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의 영웅이 된 조선인 군무원 출신 양칠성씨와 일제 말기 현지에서 결성된 항일비밀결사체 고려독립청년당과 ‘반란사건’ 등 그 책만이 담고 있는 잊혀진 얘기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한국인 대다수는 이 책이 나오기 전에는 그들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 2000년부터 올해 3·1절까지 고려독립청년당 당원 12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될 수 있었던 건 이 책 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번역본에는 전북 완주군 출신의 양씨(인도네시아 이름 코마르딘) 외에 경남 함양군 출신으로 아카키라는 일본명으로 남은 우종수씨, 전남 화순군 출신의 마쓰모토(이길동), 경남 창원군 출신의 시로야마(이종렬, 인도네시아 이름은 수바르조) 등 함께 게릴라활동을 하다 스러져 간 조선인 군무원들 신원이 좀더 분명하게 실려 있다. 이들 외에 ‘미귀국자’로 남은 본명 미확인의 조선인 게릴라 부대 활동가 몇 사람들도 추가됐다.
양씨 등은 일본 패전 직후 옛 식민지 인도네시아(네덜란드령 인도)를 되찾겠다고 연합군 이름으로 다시 밀고들어온 네덜란드군에 맞서 인도네시아 독립군 팡에란 파팍 부대 휘하의 일본인·조선인 유격부대원으로 활동하다 붙잡혀 1949년 8월 공개처형당했다. 1975년 11월 인도네시아 정부는 희생자 3명의 주검을 발굴해 인도네시아 독립영웅 묘지에 재매장하는 행사를 성대하게 베풀었다. 책은 그 장면부터 시작한다. 당시 행사계획을 통보받은 일본 당국은 2명의 일본인 희생자 유족들에겐 그 사실을 알렸으나 양씨에 대해선 모르쇠로 일관해 그의 유골은 인수할 사람조차 없었다.
그때 군무원 출신자들로부터 들은 “(그들이) 독립(운동)을 한 적도 있어”라는 한마디는 우쓰미가 인도네시아와 일본, 한국을 오가며 일제 말기 남방지역 파견 조선인 군무원들의 항일 비밀결사체 고려독립청년당과 그들이 일으킨 반란사건을 끈질기게 추적하게 만든 단서가 됐다. 그것이 이 책에서 또 하나의 축을 이룬다.
일본 정부 자료에 따르면, 일본 패전 당시 조선인 군무원 수는 육군 7만424명, 해군 8만4483명으로 모두 15만4907명에 달했다. 이들 중 3223명이 연합군 포로 감시를 위해 모집됐고 나중에 그들 중 상당수가 일본, 네덜란드에 맞서 싸웠다. 군무원은 일본 군대에 고용된 말단 실무담당 민간인 노무자였다. 가혹한 노동조건에 ‘조센징’으로서의 차별과 모멸을 감수해야 했던 그들은 일본 패전 뒤 연합국으로부터도 같은 수모를 당했다. 전범재판에서 120명이 기소돼 111명이 유죄판결을 받았고 그들 중 69명은 영화 <콰이강의 다리>로도 잘 알려진 타이-미얀마 철도건설 등에 동원된 연합군 포로 수용소 관리자들이었다. 그 69명 가운데 조선인 군무원이 33명(48%)이나 됐다. 패전 뒤 A급 전범으로 교수형을 당한 일본인은 도조 히데키 등 7명이었으나 B·C급 전범으로 몰린 조선인들 중 23명이 교수형이나 총살형에 처해졌다. 23명 중 군인은 세 명뿐이었다. 주범들보다 종범들이 더 가혹한 처벌을 받은 것이다.
포로감시 군무원들은 종전 뒤 모조리 수감당해 전범 취급을 받다가 1947년 1월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일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뒤 도쿄 스가모 형무소로 이감돼 계속 옥살이를 했다. 공식기록만으로도 15만여명의 군무원들 외에 20만9279명에 달했던 징병 조선인들, 72만4787명에 달했던 징용 조선인들과 성노예로 끌려간 조선 사람들 다수는 불귀의 객이 됐다. 유골로도 이들은 아직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적도에 묻히다>도 진실의 극히 일부일 뿐인 것이다. 상당수는 유족들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 도쿄 야스쿠니 신사에 위패가 안치돼 있다. 지은이는 일본 정부뿐만 아니라 대다수 국민들이 그런 사실에 눈을 감고 있다며 일본의 무책임과 전후 일본 민주주의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통박한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본의 전후처리를 지지하고 허구의 강화조약으로 일본을 전쟁범죄 책임에서 해방시켜준 나라가 미국이다. ‘독도분쟁’도 거기서 비롯됐다. 최근 논란을 빚은, 미국이 체결을 압박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소동도 청산되지 못한 그 전쟁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 책을 옮긴이는 그런 외부세력에 호응하는 우리 내부의 불의한 권력을 비판한다.
“내게 이 책의 번역은, 정치권력에 의해 부정당한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서글픈 증표이기도 했다. 불의한 정치권력이 장악한 국가를 상대로 개인이 보편 세계의 가치를 주장하는 일은 삶의 부조리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허망의 반복이었다.”
옮긴이는 자신의 블로그에 비비케이, 미국산 쇠고기 협상 등을 비판한 글을 올렸다가 회사 대표자리서 쫓겨나고 소유 주식마저 강제처분해야 했던 ‘민간인 사찰’ 사건 피해자 김종익씨, 바로 그 사람이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