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길윤형 지음/서해문집·1만5000원 |
[토요판]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바다에 가면 물에 잠긴 시체가 되고/ 산에 가면 풀에 묻힌 시체가 되더라도/ 대군주님의 곁에서 죽겠습니다/ 아무것도 돌보지 않고.”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4년 10월, 일본 군부는 군가 ‘우미유카바’와 알코올 없는 물 한잔에 취해 폭탄을 싣고 적 함대에 돌진하는 가미카제특별공격대를 편성한다. 세키 유키오 대위가 이끄는 자살특공대는 항공모함 두 척을 무력화하고, 경순양함 한 척을 침몰시켰다. 5대의 비행기가 거둔 전과는 일본 해군의 양대 축인 구리다 함대가 거둔 전과를 능가했다.
그게 문제였다. 일본 군부는 젊은이들을 고성능 폭탄을 탑재한 낡은 전투기에 실어 전선으로 내몰았다. 가장 많은 특공대원이 출격한 곳은 일본 규슈의 지란 비행장이다. 이곳이 치열한 공방이 벌어진 오키나와와 가장 가까운 비행장이었기 때문이다. 자살특공대 사망자는 1036명. 이 가운데 17명이 조선인이었다.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사망한 17명을 포함해 태평양전쟁 중 자폭비행으로 숨져간 조선인 젊은이 19명에 얽힌 이야기다. 일본에선 ‘가미카제’ 자체가 신화화되어 실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한국에선 조선인 가미카제가 친일파로 간주돼 뒷전으로 밀려났던 인물들이다. 덕지덕지 친일파 딱지를 떼니, 대학 등록금이 없어서, 단지 비행기가 좋아서, 제복이 멋있어 보여서 조종사가 되어, 남들의 전쟁에 휩쓸려 사라져간 ‘아무개 집 아들들’이다.
지은이 <한겨레> 길윤형 기자는 2010년 ‘경술국치 100년 새로운 100년’ 기획취재에 참여해 ‘가미카제로 사라진 조선 청년들’ 부분을 맡아 취재했다. 일본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문> 기사와 가해자 쪽인 일본인들의 저서들. 여기에서 ‘군국주의 영웅’이란 시각을 걷어내고, 한국 유가족의 증언과 생존자 회고록 여기저기에 흩어진 단편들을 모아 조선인 가미카제의 얼개를 짜맞췄다. 그래서 빛을 본 이야기가 이제 책 한 권 분량으로 독자들과 만나게 됐다.
박동훈(위), 한정실(아래) |
1933년에 마련된 소비 제도는 15~17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3년 반 정도 전문교육을 마친 뒤 조종, 통신, 정비 등 각 분야 오장(하사)으로 임관하는 제도였다. 특조는 대학 또는 전문학교 출신들에게 1년 반 정도 조종기술을 가르쳐 조장(상사) 계급장을 달아주는 속성 조종사양성 프로그램으로, 전쟁 막바지인 1943년 시행되었다.
이 제도는 식민지 조선의 청소년들에게는 인생역전의 기회였다. 실업난이 극심했던 당시 시험에 붙으면 월급을 받아가며 조종술을 배울 수 있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2500명을 모집한 특조 1기 경쟁률은 6 대 1이었다. 조선인 최초의 가미카제 특공대였던 인재웅은 재수 끝에 합격했다. 마을에서 합격자가 나오면 소를 잡았다.
왼쪽부터 탁경현, 노용우, 김상필 |
비행기나 제복이 좋아서 입대
남의 전쟁서 희생된 조선인들
유족증언 등 통해 사연 읽어내
책은 그들이 ‘눈앞에 임박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황군의 전사들’과, ‘그저 비행기를 좋아하던 10대 소년이나 일본의 지긋지긋한 차별에 괴로워하던 20대 엘리트들’ 중간쯤에서 명분도 실리도 없이 헛된 죽음을 맞았다면서, 한국 사회는 꽃다운 나이에 회색의 공간으로 사라진 이 젊은이들의 사연에 귀를 기울여볼 준비가 되어 있을까라고 반문한다.
지은이의 문제의식은 조선인 조종사들의 운명이 “깻잎 한장 정도의 두께로 갈렸다”는 사실에 있다. 운이 나쁜 이들은 죽어서 ‘친일파’가 됐지만 살아서 돌아온 이들은 대한민국 공군으로 변신해 ‘한국전쟁의 영웅’, 또는 ‘한국 항공산업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해방은 이들에게 기존 세상이 끝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의 계기가 됐다. 전투기 조종이 특수한 전문분야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래서일까. 가미카제의 유산은 ‘군인정신’으로 이어진다. ‘이달의 전쟁영웅’과 ‘이달의 호국영웅’으로 선정된 공군 소속 군인 가운데 10명이 한국전쟁 당시 적의 공격으로 비행기가 추락할 때 낙하산으로 탈출하는 대신 자살공격을 택했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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