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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면담2회-주체 남한 원조-전향-상세 인터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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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3,641회 작성일 2012-08-04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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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파워인터뷰 게재 일자 : 2012년 08월 03일(金)
김영환 “종북파의 목적? 南을 北에 넘겨주는 것”
북한인권운동가 김영환씨 요즘미투데이공감페이스북트위터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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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장한 표정의 김영환 씨가 지난 1일 저녁 서울 중구 소공로 플라자호텔 앞에서 인터뷰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걸어가고 있다. 신창섭 기자 blue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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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환 씨가 중국에서 수갑을 찬 채 고문받을 당시의 상황을 재연하고 있다. 신창섭 기자
오랫동안 잊었던 김영환(49)이란 이름을 다시 꺼내들고 인터뷰를 하러 갈 때 착잡한 생각이 많았다. 한때 10만 명에 이르렀던 주체사상파(주사파)의 대부이자 ‘남한식’ 주체철학의 창시자, 김영환. 그는 왜 주사파도 국회의원이 되는 지금, 과거 동경했던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서 고문을 받아야 했던 걸까. 강철은 여전히 이렇게 자신을 단련시키려 하는 것일까.

‘대한민국 현대사의 최고 풍운아.’ 기자는 김영환을 기꺼이 이렇게 부르고 싶다. 김일성과 주체사상을 논하고 한국에 주체의 씨를 뿌려놓은 뒤 이제는 주체의 싹을 자르기 위해 열정을 불사르고 있다. 안기부(현 국정원)에서도 받아보지 않았던 전기고문을 중국 땅에서 받았다고 말할 때, 그의 삶은 잠수정을 타고 밀입북했을 때보다 더욱 격랑치고 있는 듯했다.

지난 1일 저녁 서울 중구 소공로 플라자호텔 로비에서 처음 만난 그는 세월의 풍랑을 고스란히 몸에 담은 듯 힘들어 보였다. “주사파를 내가 퍼트렸는데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할 땐, 몰락한 사림(士林)의 지도자 같은 품성이 느껴졌다. 전향의 무게감을 온몸으로 떠받들고 있는 그는 여전히 사회 변혁을 꿈꾸고 있다. 다만 대상이 남쪽이 아닌 북쪽일 뿐이다. 첫 질문은 최근 논란을 빚고 있는 전기고문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됐지만 정작 대화는 주사파 활동시기에 대한 소회와 미래 포부로 집중됐다. 플라자호텔에서의 만남은 문화일보 회의실로 옮겨져 2시간 이상 계속됐다.

―고문이 논란의 핵심이었는데, 고문 후유증은 아직 있나.

“주관적으로 느끼기에는 고문 후유증이라고 특별히 느낄 만한 것은 없다.”

―21세기에 남의 나라에서 고문받는 심정은 어땠나.

“제가 중국의 국가안전부에 처음 검거됐을 때 중국이 고문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각오는 하고 있었다. 그러나 외국인 신분이고 많이 알려지기도 해서 심한 고문을 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26년 전 안기부에 검거당했을 때 고문을 많이 당했지만 전기고문까지는 당하지 않았다. 전기고문까지 하는 것을 보고는 대단히 놀랐고, 도대체 나한테 알아낼 만한 중요한 것도 특별히 없는데 왜 이렇게까지 하나 하는 묘한 생각도 많이 들었다.”

―왜 고문을 받았다고 보나.

“여전히 그 부분이 아직도 미스터리다. 한국의 국정원이나 외교통상부에서도 굉장히 미스터리라고 한다. 단둥(丹東)이 아무래도 변경지역이다 보니까 세상물정에 어둡고 그래서 그런 짓을 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더라. 그래도 제 사건이 베이징(北京)에도 보고가 되고 일정기간이 지난 다음에 본격적인 고문이 들어간 것인데 독자적으로 결정해서 고문했을까 하는 생각도 있다.”

―북한 내 활동망이 일부 고문과정에서 부분적으로 노출됐나.

“글쎄. 그때 저한테 주로 요구했던 것은 묵비권을 철회하라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조사해서 얻어낸 부분에 대해 인정을 하고 사인을 해서 도장을 찍으라고 했다. 저한테 국가안전 위해 혐의를 두 가지 두고 있었는데, 하나는 중국인을 이용해서 북한을 대상으로 조직활동을 한다는 점이다. 중국인이라는 것은 중국 조선족과 북한 화교를 포함한다. 그들을 끌어들여 같이 조직활동을 했고 이것이 국가안전을 위해했다는 것이다. 또 중국 땅에서 북한 대상으로 정보활동을 하는 것도 역시 간첩죄에 해당한다. 이 두 가지를 인정하고,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서류에 서명하고 지장을 찍으라는 것이었다.”

―북한 내 조직 네트워크 파악이 아니라 인정을 요구하는 게 주 목적이었나.

“조직 네트워크 파악에 주안점을 두고 있었지만 제가 고문당하기 시작할 때는 이미 검거된 지 13일째 되는 날이다. 전기고문은 18일, 19일째였다. 그전까지 사전에 전화감청, 인터넷 감청, 미행 등을 통해 상당히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같이 잡힌 나머지 세 사람의 진술을 통해서도 상당히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저에게 조직망 관련돼서 구체적으로 묻지는 않았다. 사전에 감청, 미행을 통해 얻은 정보, 세 사람을 취조해 얻은 정보를 저에게 확인하는 수준이었다.”

―중국 정부가 고문 발설 금지를 요청했나.

“국가안전부에서 이야기한 것이 결국 중국 정부가 이야기한 것이다. 국가안전부는 중국 정부를 대표하는 것인데 단둥시 국가안전부 국장이 몇번 찾아와서 고문 사실에 대해 한국 가서 이야기하지 말아 달라고 장시간에 걸쳐 설득 및 협박을 했다.”

―김일성 생일 선물로 북송 협박을 받았다는데… 북송 되면 어떻게 된다고 생각했나.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극심한 고문과 생명의 위협까지 포함한 엄청난 재난이 있었을 것이다.”

―그걸 알고 중국이 협박했나.

“그렇다. 제가 묵비권 행사하니까 그런 협박을 포함해서 다양한 협박을 했다.”

―국가인권위원회에 외교부 조사를 요청했다는데 뭐가 문제인가.

“저희를 구출하기 위해서 어떤 협상을 벌였는지 제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니까 아직은 말하기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다만 제가 구속돼서 29일째 되던 날 영사와 접견했는데, 일반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구금한 지 10일 이내에 중요한 고문이 이뤄지고 상당히 복잡하고 저처럼 중요한 사건의 경우에도 구금된 지 20일 이내에 고문이 이뤄진다. 인권 침해적 요소를 막는 게 영사접견의 목적이라면 10일 이내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15일 이내에 접견을 했어야 했다. 그렇게 했다면 저에 대한 고문도 아예 없거나 상당 부분 줄일 수 있었을 텐데. 29일째 되던 날 접견하게 된 원인이 대단히 의문스럽다. 영사 이야기로는 중국 국가안전부가 거부해서 접견할 수 없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영사접견권이라는 게 일방의 일방적 거부만으로 전혀 할 수 없는 것인지, 국제적 관례나 한중 간 협약상 그런 것인지, 그렇다면 영사접견권 취지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니까… 그걸 외교부로부터 분명한 설명을 듣고 싶고. 중국이 접견권을 허용할 수 없다고 하면 중국 정부에 그에 대한 명확한 해명을, 우리가 요구하기 이전에, 한국 외교부가 공개적으로 그 부분에 대해 해명을 요구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중국의 고문기술은 어느 수준으로 평가할 수 있겠나.

“전기고문만을 놓고 볼 때 한국에서 과거에 전기고문했을 때는 특정부위에 전선을 연결해서 고문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그 부위에 집중적으로 상처가 남게 되고 고문 흔적 같은 것도 그것 때문에 오래 남게 된다. 반면 이 사람들은 주로 전기봉을 이용해서 하니까 상처가 한 군데 크게 생기는 게 아니라 수백 군데에 조그마한 상처가 난다. 가슴에 하면 점점으로 생겨난다. 화상 개수를 다 세어보지 않았지만 어림잡아서 500개. 그런 작은 상처가 온몸에 생기는 것이다. 시간이 좀 흐르면 자연스럽게 없어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가 되는 것이니까. 그런 측면에서 보면 과거보다 상당히 고문기술이 발전한 케이스로 봐야 한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과거 주사파 활동으로 옮겨갔다. 김영환은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 주사파의 대부라는 이미지를 지울 수 없다.

―학생운동권에서 방북은 처음한 것인가.

“학생운동권에서 비밀리에 간 것은 지금까지 밝혀진 것으로만 따지면 처음이다.”

―김일성 면담도 처음인가.

“그렇다.”

―밀입북한 사람의 수는 어느 정도로 추산되는지 말해 줄 수 있나.

“지하조직망을 통한 밀입북은, 추정은 어렵지만 적어도 7~8명, 많으면 20명 정도일 것이다. 김정일 때도 조금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석기(통합진보당 국회의원)도 북한에 갔나.

“아니다. 못 갔다.”

―주체사상 자체는 여전히 신봉하는 편인가.

“신봉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것이고, 주체철학은 이데올로기로 발전 못 했다. 이데올로기는 정치철학이 있어야 하는데, 주체철학은 이론적 뼈대만 있고 전략전술도 없는 것이어서 이데올로기로서 형태가 없기 때문에 신봉이라는 표현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신봉은 이데올로기로서 정체가 형성돼 있거나 그런 것이어야 하는데 주체철학은 그런 게 필요하지 않다. 그건 이해가 필요한 것이지, 신봉할 만한 것은 아직 없는 것이다.”

―과거에 가진 신념, 확신 중에 지금 남아있는 게 있나.

“전통적 의미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자로서 요소는 전혀 없다. 저한테는 물론 약자에 대한 강한 애정이라든지 불의에 대한 분노라든지 강한 정의감이라든지, 사회적 연대에 대한 추구라든지 그런 것은 굉장히 강하다. 그런 게 있으니까 북한 인권운동을 하는 것이고. 그러나 그런 것은 인류보편적인 것이고 과거 사회주의자적·공산주의적 요소, 이데올로기적인 그런 것에서는 해방됐다. 주체철학은 이데올로기적 요소와는 전혀 상관이 없고 근본적인 철학이론으로서만 있는 것이다.”

―김정은 체제는 어떻게 보나. 김정은의 스위스 유학이 통치에 영향을 줄까.

“김정은은 사회화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스위스에서 보낸 것이기 때문에 김정은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그 시기가 굉장히 영향을 많이 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영향을 주겠지만 사람의 구체적 정책결정, 노선결정은 다양한 요소가 작용한다. 자신의 정권 유지에 기여하느냐 안 하느냐에 대한 냉정한 판단이 결정적 요소가 될 것으로 본다. 감성적·정서적으로는 개혁개방을 추구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정권을 위협한다는 현실적 판단이 들면 개혁개방을 포기하거나 제스처에 불과한 개혁개방에 그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북한 체제의 향후 전망을 어떻게 보나.

“북한 체제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특별한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점점 감당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개혁개방을 추진하든 아니든 점점 어려운 처지로 갈 것으로 보인다. 개혁개방을 안 하면 동력이 없고, 하면 그에 따른 부작용을 감당할 수 없고. 어느 방향으로 가든 어렵지 않나 싶다.”

―요즘 주사파는 어떤 정신상태를 갖고 있다고 보나.

“저도 1997년 결별한 이후에 15년간 그쪽 사람들을 만나본 적이 없다. 과거 접촉한 경험을 살려서 유추해 본다면 뭔가 눈을 막고 귀를 막고, 신념을 흔들리게 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차단한 채 옛날 길을 고수하고 있는 게 아닌가 추측한다.”

―젊은 세대의 추가 주사파 유입은 없다고 보는가.

“거의 없다고 본다. 극소수에 불과하고 과거에 했던 사람들이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고 본다.”

―이석기 의원처럼 국회에 들어간 경우도 북한 지령에 의한 것인가.

“가능성은 있지만 그걸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경기동부연합의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수법은 주사파에서 영향받은 것인가.

“주사파와 관계 없다. 그들은 주사파를 받아들이기 전부터 그랬다. 주사파가 처음 생긴 게 1986년. 그 사람들의 본거지가 한국외대 용인 캠퍼스인데, 1986년 이전부터 그쪽 분위기는 그랬다. 주사파라는 게 저로부터 시작됐고 서울대부터 시작한 것이어서 애초에 주사파라는 것은 경기동부적인 요소와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다. 약간은 이론 추구형이고, 약간은 점잖고 이상주의적인 성격이 원래 주사파 성격에 훨씬 더 가깝다. 경기동부적인 요소는 주사파적 입장에서 보면 이단적이었지만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입장에서는 한편으로는 신기하고 한편으로는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는데, 저게 혁명에서 요긴하게 쓰여지지 않을까 해서 그런 부분을 존중해줬다. 그 사람들이 민혁당 중앙의 결정을 잘 따르고 했기 때문에 그 당시에 그 부분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화염병 쓰지 말라고 하니까 화염병 쓰지 않는 등 민혁당 노선을 잘 따랐다. 그러나 합리적인 지도부가 완전히 없어지니까 지금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경기동부든 주사파든 모두 당신으로부터 비롯됐다. 이석기 의원을 보면 해주고 싶은 말이 없나.

“어떻든, 저는 앞장서서 이끌었던 사람의 입장에서 새로운 노선으로 설득하지 못하고 헤어져서 다른 길을 걷는 것에 대해 책임감을 많이 느끼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나이도 많고 새로운 길을 걷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인생이란 그런 것이 아니고, 가장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오히려 가장 빠른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이라도 좀 진실을 용기 있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자세를 갖고 진지하고 인류사적인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려고 하는 자세를 가지고, 한국의 문제나 남북 간 문제, 북한 문제나 인류의 문제를 좀 진지하게 고민해 봤으면 좋겠다.”

―이석기 의원은 회사를 운영하던데, 돈 버는 방식과 주사파와는 무슨 관계가 있나.

“아무 관련이 없지만 지하당 활동이나 이런 활동을 하려면 자금이 필요하다. 합법적 활동도 그렇지만 지하당 활동도 자금이 필요한데 자금조달에 있어서는 기본적으로 민혁당에서는 합법적 절차를 중요시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향으로 볼 때 합법, 불법, 비합법 등 모든 방식을 동원해서 활동자금을 충당할 가능성은 대단히 높다고 보고 있다. 과거 활동 당시 돈이 없으면, 예를 들어 전세 3000만 원짜리 살고 있는데 돈이 필요하면 2500만 원을 당에 납부하고 500만 원 월세방으로 옮기라고 하는 식으로 돈을 충당한 사례가 있었다. 누가 특별히 항의를 한다든지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이 그 사람들의 장점이다. 그런 것이 관행으로 돼 있고, 선·후배 사이, 동료 사이에 가족을 초월하는 끈끈한 관계가 일시적인 장점으로 보이지만 항상 부패 원인이 된다든지 인권침해 등 여러 위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지금 1000여 명의 주사파가 남아있다고 하면 어디에 있다고 봐야 하나. 다 경기동부에 있나.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경기동부가 워낙 조직력이 탄탄해서 언론에 부각될 뿐이지, 경기동부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른 계열 사람들도 좀 있다고 봐야지.”

―종북파의 궁극적 목적은 여전히 남한을 북한에 넘겨주는 것인가.

“거칠게 표현하면 그렇다. 남한에 용공적인 정부를 수립하고, 더 나아가서 북한 주도의 통일을 이끄는 것이다.”

―전향한 주사파들을 모아서 사회봉사 활동할 생각은.

“제가 아는 주사파 중에서 밀접하게 의사소통 잘 되는 사람들은 잘 조직화돼 있고, 북한 민주화와 관련된 일에 직·간접적으로 종사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사회봉사이다. 또 생각이 바뀌었지만 우리와 의사소통 잘 안 되는, 과거 주사파로부터 벗어났지만 기존의 약간은 좌파적인 생각 때문에 제가 걷고 있는 길에 대해 정서적으로 잘 다가서지 못하는 분들은 제가 주도해서 뭘 조직화하기엔 쉽지 않은 일이다. 사회봉사 조직을 만들 수 있다면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하지만 제가 주도할 수 있는 부분은 제가 하고, 나머지 부분은 저 이외 다른 사람들이 앞장서는 게 보다 많은 사람들을 모아 조직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북한 기득권층에서 연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보나.

“그렇다. 그런 여지가 반드시 있다고 본다. 우리와 생각이 비슷할 수도 있지만, 우리와 많이 다르더라도 김정은 체제에서 비판적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얼마든지 연대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기득권층일수록 더 감시를 철저히 하기 때문에 겁이 나서 잘 하지 못하는 게 문제다. 우리는 얼마든지 연대할 자세가 돼 있다.”

―2008년 정계입문을 거절한 이유는.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과 저하고는 북한인권 운동에서 차지하는 지위 등이 상당히 다르다. 저는 상징적, 지도적 지위에 있기 때문에 제가 그런 방향으로 가게 되면 북한 인권운동 전체의 순수성이 의심받을 수 있는 게 있고, 제가 해온 역할이 국회의원이 돼서 할 역할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현재 하는 것에 집중할 생각이다.”

―앞으로도 정치할 생각이 없겠다.

“그렇다. 북한이 상당 부분 중요한 변화를 할 수 있기 전까지는 북한 인권운동을 할 것이고, 북한이 상당히 의미있는 변화를 하려고 하면 그때도 역시 북한 주민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한다.”

―역대 정부의 대북정책을 평가한다면.

“햇볕정책의 경우 부정적 요소는 많지만 그 자체의 긍정적 요소도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햇볕정책을 하면서 북한 민주화를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하고, 또 정부 주도 노력뿐 아니라 민간단체 활동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데서도 더 적극적으로 하는 두 개의 트랙으로 갔어야 하는데, 그때는 한 트랙만 가고 북한 민주화에 대한 인적 배치나 지원은 오히려 후퇴하거나 진전하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둘다 굉장히 소극적이다. 북한 문제에 대해 굉장히 관심이 적고 소극적이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상당히 실망스럽다. 북한 문제에 있어서는 두 부분이 다 적극적으로 가야 한다. 북한을 교류의 장으로 끌어들이고, 또 한편으로 다양한 형태의 북한 민주화 운동을 추구하고 지원하는, 둘다 적극적으로 하는 방향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가 만나본 뒤 굉장히 늙어보인다고 하더라. 건강은 괜찮나.

“괜찮은 것 같은데 모르겠다. 종합검진을 받아봐야 한다고 하던데, 그래서 받아볼까 한다. 저는 지난해까지는 나이에 비해 젊어보인다는 말을 들었는데, 최근에는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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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김일성 두 번 만났지만 주체사상 모르더라”
김영환이 본 김일성·황장엽 요즘미투데이공감페이스북트위터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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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환 씨는 지난 1일 서울 중구 충정로 1가 문화일보 편집국 회의실에서 인터뷰하는 동안 손 제스처를 써가며 과거 활동을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신창섭 기자 bluesky@munhwa.com
김영환과 김일성, 황장엽은 주체사상의 3대 거두로 평가될 수 있다. 김일성이 북한식 주체사상을 입안했다면, 황장엽은 주체철학을 정립했다. 김영환은 남한에 주체사상을 도입한 인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사에서 이 세 사람의 관계는 애증의 삼각 곡선을 그리고 있다.

김영환은 김일성과 황장엽을 모두 만났다. 그는 김일성을 1991년 북한에서 두 번 만났고, 망명한 황장엽을 한국에서 만났다.

김영환은 김일성이 주체철학을 모르고 있다고 평가한 반면, 황장엽을 주체철학의 창시자로 인정하고 있다. 김일성에 실망해 전향을 했고, 황장엽과 동병상련의 느낌을 주고받게 된다. 김영환이 김일성을 두 번이나 만나고도 실망한 이유는 이렇다.

“주체사상이라고 하면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한 가지가 김일성이 만든 민족공산주의. 그것은 독창적 내용은 아니고 스탈린주의를 ‘민족주의 말, 자주, 자위’로 살짝 코팅해 놓은 것이다. 두 번째가 황장엽 선생이 만든 주체철학. 이게 주체사상의 핵심적 알맹이다. 또 하나가 북한 선전부 사람들이 만든 수령론이 있는데, 수령론은 알맹이가 있는 게 아니라 무조건 충성하라는 것이다. 그건 아무런 내용이 없다. 수령론은 김정일이 처음 만들었다는 설도 있고 김일성 동생 김영주가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김일성의 민족공산주의라는 것도 독창적 내용이 전혀 없다. 이 두 가지는 존중할 내용이 없는 것이고 핵심은 주체철학이다. 황 선생이 말한 그 주체철학 말이다. 주체사상을 이야기하려면 주체철학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김일성은 자기가 만든 민족공산주의만 계속 이야기하더라. 나는 철학적 이야기를 하고 싶어 그런 식으로 유도하는데, 화제 유도가 안 됐다. 계속 얘기하다 보니 김일성은 주체철학에 관심도 없었다.”

김일성은 김영환을 끔찍이 사랑한 것으로 보인다. 김영환은 1991년 조모 씨와 함께 북한에 밀입북하는데, 김일성은 조 씨를 제쳐놓고 김영환만 만났다.

“학생운동권에서 김일성을 만난 사람 수는 소수다. 아마 저 이외에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김일성 접견은 웬만해선 허용 안 한다. 전 특수한 케이스다. 저와 함께 밀입북한 조 씨의 경우도 김일성을 못 만났다. 그는 평양에 있었고 저 혼자 묘향산에 가서 김일성을 만났다.”

왜 그랬을까. 김영환의 대답은 간단하다. “김일성이 만나고 싶어한 게 저였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김일성이 사랑했던 김영환은 만남 이후 결별을 선언했다. 김영환은 김일성을 통해 주체철학이 환상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 같은 김영환의 감정은 황장엽만이 이해할 수 있다. “나중에 황 선생에게 김일성이 주체철학을 잘 모르더라고 하니까 황 선생이 짧은 시간에 어떻게 그걸 파악했냐고 하더라”. 한반도의 주체사상 붐은 이렇게 막을 내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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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파워인터뷰 게재 일자 : 2012년 08월 03일(金)
김영환의 이념적 성향은… 한국적 관점선 우파, 한반도 관점선 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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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9)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의 이념이 궁금해졌다. 그는 여전히 주사파 지도자로서의 책임감을 무겁게 느끼며 혁명적 에너지를 강조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 인권에 집착하는 우파적 시각도 동시에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의 이념성향을 20세기 개념으로 재단할 수 없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우파로 분류하겠지만 자신의 혁명적 에너지와 정서는 우파에서 나오기 어려운 것이라고 자평했다. 기자는 김영환이 중도좌파적 시각을 갖고 있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한국적 관점에서 우파일 수 있지만, 한반도적 관점에서는 변혁을 꿈꾸는 좌파일 수 있다. 전기고문을 받으면서까지 추구하는 변혁의 열정을 우파로 치부하기엔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는 중도좌파라는 네이밍에 그다지 거부감을 보이지는 않았다. 대북 정책에 있어서도 햇볕정책과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동시에 비판했다. 그러면서 이명박 정부의 정책이 더 문제라고 꼬집었다.

그럼에도 김영환이 전향하면서 벌인 좌파와의 일전은 그를 우파로 자리매김시켰다. 이에 대해선 우선 부인부터 비판적이었다고 회고했다. 운동권에서 만난 부인은 김영환의 전향을 좋지 않게 여겼다. 그는 “최근 중국에서 고문을 받고 처절하게 활동하는 것을 보고서야 아내가 비로소 이해를 해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간의 마음고생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석기 의원과 경기동부연합을 비판할 때 보여주는 그의 직설적 어법은 세월의 고통을 농축한 내공의 산물로 보였다. 적어도 이석기 의원보다는 더 치열하게 세상을 살아왔음을 자부하며 스스로 위로하는 말이기도 하다. 문뜩 “모순이 있는 곳에 운동이 있다”는 마오쩌둥(毛澤東)의 말이 생각났다. 김영환은 한반도에서 가장 큰 모순인 북한 체제 변혁을 위해 몸을 던졌다. 그런 측면에서 그는 여전히 변혁가요 혁명가이다.

▲1963년 경북 안동 생 ▲서울대 공법학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조국통일위원회 위원 ▲범민족대회 추진본부 실무위원 ▲북한 노동당원 ▲반제청년동맹 중앙위원 ▲‘푸른사람들’ 2대 회장 ▲시대정신 편집위원 ▲북한 민주화 네트워크 연구위원 ▲데일리엔케이 논설위원



인터뷰 = 천영식 차장(정치부) kkach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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