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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高 同門 중에서-외국어로 生業 이어가는 동문 필독 요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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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2,226회 작성일 2012-07-26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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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불멸의 성웅 이순신家의 중국어 공부법

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 lkh@kyunghyang.com

 

 

“그대의 중국어(한어·漢語)는 꼭 나하추(納哈出) 같구나!”(명 태조)

명 태조 주원장을 알현한 목은 이색(1328~1396)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황제가 ‘네 중국어 발음을 못알아 듣겠다’면서 면전에서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나하추는 명나라로 항복한 원나라 장수였다. 그랬으니 본토 중국어가 얼마나 서툴렀을까. 천하의 이색이 나하추와 같은 반열이 된 것이다. 이색이 망신 당한 사연인즉은 이렇다.

■이색의 ‘굴욕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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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부터 역관(譯官)들의 외국어 학습용으로 간행한 중국어 학습서였던 <노걸대>. /서울대 규장각 제공

 
이색은 원나라 과거에서 급제한 아버지(이곡) 덕분에 10살 때부터 ‘중국어 교육’을 받았다. 중국 원어민 강사가 이색의 교육을 맡았다. 요즘으로 치면 ‘조기영어교육’이었다. 아버지는 “사나이는 모름지기 황제의 도읍에서 벼슬해야 한다”는 신조를 갖고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미국 유학의 신봉자라고 할까.

그는 20살 때 북경유학을 떠나 국자감 생원에 입학했다. 이후 4년간 원나라 한림원(황제조칙이나 외교문서, 역사편찬 등을 맡던 기관)에서 일했다. 당대 ‘중국어의 종결자’였던 것이다. 그러던 고려 창왕 1년(1388년), 이색은 원나라의 뒤를 이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떠난다. 명나라와 국교를 수립하고, 창왕이 직접 명나라 조정에 입조하겠다는 뜻을 전하기 위한 사절단이었다. 그런데 사건은 이색이 명 태조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색의 명망을 듣고 있었던 명 태조가 조용히 말했다.

“그대는 원나라에서 한림원 학사까지 지냈다지. 그렇다면 응당 한어(중국어)를 알겠지.”

이색이 ‘멈칫’ 하더니 중국어로 말문을 열었다.

“왕(창왕)이 ‘친히 입조’(친조·親朝)하려 합니다.”

그런데 황제는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이색은 어쩔 줄 몰랐다. 외교를 관장하는 명나라 예부가 알아차리고 황제에게 양해를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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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규장각 소장 <노걸대>의 표지

“이색이 오랫동안 입조하지 않아 중국말을 알아듣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폐하!”

자초지종을 들은 황제가 웃으면서 “(그대의 발음이) 어쩐지 나하추 같구나”라며 농으로 받아넘겼다. 그야말로 이색의 ‘굴욕사건’이다. 외국어 조기교육에다 유학도 모자라 현지근무까지 했던 중국어 전문가였는데….

귀국 후에도 대망신을 당한 이색을 둘러싼 참새들의 입방아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색은 공연히 황제 핑계를 댔다.

“‘이걸 묻겠지’ 하고 짐작했는데 황제는 묻지 않았네. 또 황제가 물었던 것은 모두가 내가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었네.”

한마디로 이색은 예상질문과 답변만을 뽑아 달달 외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그만 황제가 예상과 다른 질문을 하자 그만 당황하고 말았던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이색의 ‘실수’를 안주삼아 한껏 놀려댔다.

“그러게, 하긴 큰 성인(이색)의 도량을 우리네 같은 변변치 못한 선비들이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나?”

대학자인 이색의 실수담은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등에 너무도 자세히 기록돼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색이 뭐 그렇게 큰 실수를 한 것일까. 청사에 길이 기록될만큼…. 너무 가혹한 기록인 듯 싶다. 사실 북방(북경)에서 중국어를 배운 이색과 중국 중부 지역인 안후이(安徽省) 출신인 황제가 서로 사투리를 알아듣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은가. 사실 예나 지금이나 외국어 공부는 골치 아픈 과목임에 틀림없다.

■통·번역은 사대(事大)의 필수과목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당해 제대로 된 통역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었으니까. 1597년, 선조임금은 도원수인 권율 장군을 맞아 적의 형세에 관해 논의하면서 땅이 꺼져라 한탄한다.

“정탐의 중요성을 더 말해 무엇하랴. 심지어 중국 장수를 접견할 때에 통역(通譯)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래서 언제나 혼선을 일으키는데 이러고서야 무슨 일을 하겠는가.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다.”

사실 조선은 외국어, 특히 중국어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중국와의 돈독한 사대외교를 위해 통·번역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이 조정의 판단이었다.

“사대(事大)를 하는데 있어 역학(통·번역)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중국 사신을 접대할 때나 우리 사신이 명나라에 갔을 때 통역이 잘못되어 조롱과 비웃음을 받게 됩니다.”(<세종실록>)

사대, 즉 중국을 섬기기 위한 외교라? 하기야 지금도 미국 일변도의 외교가 어쩌고, 사대주의 외교가 어쩌고 하는 논란이 있지 않는가. 당시 역성혁명으로 새왕조를 연 조선으로서는 정치·군사·경제·문화 대국으로 등장한 명나라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수용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조선 초기의 임금들이 외국어 교육에 쏟는 열의는 요즘 강남 아줌마들의 극성에 견줄 만 했다. 우선 외국인 교수들을 대거 영입했다. 예컨대 위구르 출신의 귀화인 설장수를 사역원(번역·통역 및 외국어 교육기관) 제조(원장)로 임용했다. 설장수(楔長壽·1341~1399)는 한어와 몽골어, 조선어 등 3개 국어에 능통했다. 그는 <소학(小學)>을 중국어로 해석한 <직해소학(直解小學)>을 저술했다. 이로써 <노걸대(老乞大)>, <박통사(朴通事)> 등에만 의존하던 중국어 회화교육에 크게 이바지 했다.(<세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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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가 그린 <연행도> 중 제9폭 ‘조공’. 조공을 하러 북경에 간 연행사들과 그 일행이 거리를 지나고 있다. 오른쪽 하단의 인물들이 조선 사신들이다. /숭실대박물관 제공

■‘매질’로 가르친 스파르타식 외국어교육

조정이 택한 가장 효과적인 외국어 교육이 있었다. 바로 요즘의 ‘영어마을식’ 교육이었다. 즉 사역원 내에서 중국말만 쓰게 하고 이를 어기면 처벌하는 교육이었다. 1442년(세종 24년) 사역원 제조인 신개가 읍소한다.

“중국말을 10년이나 배워도 중국현지에 두어 달 다녀온 사람만도 못합니다. 이는 사역원에서는 마지못해 한어(중국말)을 한다해도 평상시에는 늘 우리 말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룻동안 한어는 국어의 1/10도 못합니다.”(<세종실록>

그러면서 신개는 폭탄선언을 한다.

“사역원 내에서 공사를 의논하거나 밥을 먹거나, 잠을 자거나 할 때 무조건 중국어를 쓰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이를 어기는 생도는 그 때마다 매질을 가하도록 하소서. 또한 초범은 부과(附過·잘못한 일을 적어두는 처벌), 재범은 차지(次知·주인을 대신해 처벌받는 하인) 1명…, 5범 이상은 형조에 이첩…. 하도록 하소서.”

요즘의 외국어 교육보다 더 무시무시하다. 외국어를 쓰지 않으면 처벌을 내리고 가차없이 매질을 가했다니….

■‘중국어만 써라!’, 영어마을식 교육

그렇지만 역시 외국어 교육은 힘들었다. 특히 나이가 들어 중국말을 배워야 했던 사대부들은 곤욕을 치렀다.

예컨대 세종 16년(1434), 집현전 부제학 설순이 상소문을 올렸다.

“중국어란 배우기가 매우 힘듭니다. 어려서부터 배워도 어려운데 신석견 등은 나이가 아미 지나고 혀가 굳어서 오랫동안 배운다 해도 힘들 것입니다. ~사람의 소질이란 다른 것인데….”

무슨 일이었을까. 세종은 명나라 학문과 명나라 말을 배운다는 취지 아래 신석견 등 몇몇 사대부들을 중국유학생 후보로 선발한 바 있다. 하지만 중국유학이 여의치 않자 유학 대상자들에게 “일단 사역원에서 가서 중국말을 배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중국유학을 꿈꿨던 이들은 졸지에 국내에서 중국어를 공부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현장학습이 아닌 중국어 교육은 너무 어려웠다. 게다가 어학소질도 없었던 것 같다. 설순은 중국어 공부에 쩔쩔 매는 신석견 등을 안타깝게 어겨 상소를 올린 것이다. 하지만 임금은 허락하지 않았다.

“오경과 사서를 중국말로 읽는다면 국가에 도움이 된다. 지금처럼 순전히 중국말로 공부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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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연행사들이 북경 조양문 입성을 눈앞에 둔 조선사신들의 연행도. /숭실대박물관 제공

 

 

■설움받은 제2외국어

사실 중국어만큼은 아니더라도 인접국 말인 몽골어·왜어·여진어의 통역도 필요했다.

왜학(일본학)의 경우를 보자. 1421년(세종 3년) 예조가 임금에게 주청을 드린다.

“왜학생도(倭學生徒)들은 (졸업 후) 나갈 직업의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모두 기피하는 부야입니다. 왜학(倭學)의 어음(語音)과 글씨 쓰는 것도 중국글과 다르니 만일 힘써 권장하지 아니하면 앞으로 폐절될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어학과 학생들이 졸업 후 진로가 막막하며, 자칫하면 일본어학과 자체가 폐지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하기야 당시 역과 선발인원(19명) 가운데 한학이 절대다수인 13명에 이르렀고, 몽학·왜학·여진학이 각각 2명씩에 불과했으니 그럴 만 했다.

그랬으니 정작 필요한 때에 이들 제2외국어 전공자를 찾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예를 들어 1528년(중종 23년)엔 일본의 사신이 조선을 방문하자 조정은 패닉상태에 빠졌다. 조선내 유일한 일어 전공자인 김석주라는 인물은 죄를 짓고 충청도에서 노역형을 치르고 있었다. 신하들은 일본사신의 방문기간 동안만 김석주를 풀어 통역으로 쓰자는 묘안을 냈다. 임금이 깊은 고민에 빠진다.

“급하니까 죄인까지 발탁해서 써야 하는가. 한번 그러면 죄인(김석주)은 ‘필요할 땐 언제든 국가가 나를 부를 것’이라고 교만한 마음이 생길 것 아닌가.”

하지만 중종은 끝내 복역중인 김석주를 잠시 사면해서 통역으로 쓰고 만다.

제2외국어 전공자들은 부전공으로 한어(중국어)를 배웠다. 예컨대 태종대의 통역 황기는 왜어(일본어) 전공자였지만, 한어까지 배웠다. 성종대의 황중은 여진어 전공자였지만, 한어까지 배워 2개국어에 능통했다.

“황중은 가계가 미천한데다 여진어를 통역하는 조그만 재주로~2품에 이르렀으니….”(<성종실록>)

사헌부가 여진어 통역 출신으로 사역원 제조가 된 황중의 과거를 들추는 대목이다. 여진어 통역이 폄훼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설움을 받은 황중이 중국어를 뼈빠지게 배웠을 것이다.

■이순신 가문의 외국어교육

조선의 통역 가운데 특기할만한 인물이 있으니 바로 이변(李邊·1391~1473)이다. 이변은 이순신 장군의 현조(玄祖·5대조 할아버지)이다. 그런데 그는 조선초기 아주 유명한 사대부 출신 통역이었다. <세종실록>은 그가 얼마나 어학공부에 빠졌고, 또 소질이 있었으며, 조·명 외교에서 얼마나 활약을 했는 지를 알 수 있다. 먼저 1434년(세종 16년)의 기록을 보면 첫번째 문장이 재미있다. “그 사람됨이 둔했고, 서른이 너머 문과에 급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음 이야기를 보면 달라진다. 어학 분야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중국어 마니아’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서른이 넘어 발견한 재능이었던 것이다.

“문과에 급제한 뒤 하여 승문원에 들어가 한어(중국어)를 배웠다. ‘공효(功效·공을 들인 보람)를 반드시 이루고야 말리라’라는 다짐구호를 써붙인 다음 밤을 새워 가며 강독(講讀)했다. 또 한어를 잘한다는 자가 있다는 말만 들으면 반드시 그를 찾아 질문하여 바로잡았다.”

그 뿐이 아니었다. 집안 사람들과 서로 말할 때에도 언제나 한어를 썼다. 친구를 만나도 반드시 먼저 한어로 말을 한 다음에 우리 말로 했다. 덕분에 한어에 능통해졌다. 가히 지독한 어학공부였다. 1429년(세종 11년)의 기록을 더 보자. 예조판서 신상이 임금에게 고했다.

“이변은 문과에 급제했지만 오히려 중국어를 자기의 임무로 생각하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역원의 학생들이 모두 그의 가르침을 받고 싶어 합니다. 마땅히 이변을 통역의 선생(訓導)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변을 ‘어학공부의 모범사례’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또 대쪽같은 성품으로도 유명하다.

“이변의 성질이 굳세고 곧아서 비록 편협한 데가 있지만, 의롭지 않은 일은 털끝만치도 안한다. 사람들이 이를 아름답게 여겼다.”(<세종실록>)

서른이 넘어 과거에 ‘늦깎이 급제’한 뒤에야 중국어에 심취했고, 그야말로 불철주야 공부해서 일가를 이룬 이변. 과연 이순신 장군 가문의 할아버지 다운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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