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심 갖고 읽어야함-출판 및 독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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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2,019회 작성일 2012-07-21 10:32본문
기사입력 2012-07-20 오후 6:12:27
2010년 7월 31일 창간호를 낸 '프레시안 books'가 2년 만에 100호를 냅니다. 이번 프레시안 books는 100호 그리고 2주년을 자축하면서 숫자 '100'을 열쇳말로 꾸몄습니다. 또 100호를 내면서 프레시안 books 100년을 상상합니다. 2013년 100주년을 앞둔 일본의 출판사 이와나미쇼텐을 찾아가고, 100년이란 시간을 견딘 서점, 도서관 등을 둘러본 것도 이 때문입니다. 열두 명의 필자는 자신의 추억과 '100'을 엮은 글을 선보입니다. 여러분도 프레시안 books가 펼쳐 나갈 100년을 함께 지켜봐 주세요. <편집자> |
1913년 도쿄 간다 진보초의 헌책방에서 출발, 이듬해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마음>(오유리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을 출간하며 출판업으로 진출한 이와나미쇼텐(이하 '이와나미')은 일본의 지성을 대표하는 굴지의 출판사다. 2012년 현재 직원은 190명을 약간 넘는 수준의 중급 규모이지만 그 이름이 갖는 문화적 무게가 남다르다. 인문학자들은 이곳에서 책을 출간하는 것을 영예로 여기고 독자들은 이와나미를 일본 지성의 아이콘으로 받아들인다.
2013년 창업 100주년을 맞는 이와나미의 본사(도쿄 도 지요다 구 히토쓰바시 소재)를 지난 17일 방문했다. 2003년까지 이와나미 제4대 사장을 맡은 오쓰카 노부카즈(大塚信一)는 저서(<책으로 찾아가는 유토피아>(송태욱 옮김, 한길사 펴냄))와 2007년 방한 당시의 인터뷰 등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재 제5대 사장 야마구치 아키오(山口昭男)는 일본에서의 활발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베일에 싸여 있는 인물이었다.
야마구치 사장은 '프레시안 books' 100호 발행을 맞아 기획한 이와나미 인터뷰에 직접 나서 주었다. 야마구치 사장은 인터뷰 중에 한 대학에서 "이와나미쇼텐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아, 간바쇼텐 말이죠"라는 대답을 들은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간바'란 '이와나미'의 한자 '암파(岩波)'를 훈독이 아닌 음독으로 읽었을 때의 발음이다.
이 에피소드는 지식 사회 속에서 100년에 걸쳐 축적해 온 그 명성에도 불구하고, 현 시대 예비 독자들에겐 이 출판사가 관심 영역 바깥으로 완전히 밀려난 상황을 대변해 준다. 일본이 그러한데 한국은 오죽하겠는가. 야마구치 아키오 사장의 이름은 물론이고, 일본을 대표하는 출판사 이와나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독자도 극소수일 것이다.
하지만 이와나미의 이름을 알든 모르든, 이와나미가 내는 책에 관심이 있든 없든 야마구치 사장이 들려주는 이와나미 100년사와 출판인으로서 보낸 30년의 기억은 경청할 만하다. 그가 말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와나미라는 회사와 책이라는 매체를 떠나, 시대를 강렬하게 의식하며 살아가는 개인의 고백이기 때문이었다. 2년 대 99년, 100호 대 4만 권의 거대한 차이를 넘어, '프레시안 books'는 이와나미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책 동네 사람으로서 얼굴을 맞댔다. (도쿄=안은별 기자)
'장사로 일본을 움직이겠다'던 한 사내
프레시안 : 내년(2013년) 이와나미는 창업 100주년을 맞습니다. 감회가 어떻습니까.
야마구치 : 현재 일본에 있는 3800여 개 출판사 가운데 창업 100년을 넘긴 출판사는 108개나 됩니다. 따라서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본의 출판 문화에 있어서 이와나미는 하나의 전형(典型)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맥락에선 뜻 깊은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형이라는 건, 인간과 사회를 풍요롭게 만드는 문화 개척자로서의 출판의 본디 역할에 충실해 왔다는 의미에서이지요. 다시 말해 '뜻(志)'을 중심으로 한 회사가 100년이나 지속되어 왔다는 건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100년은 그 시간만큼의 전통이라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늘 '동시대'를 짊어지려고 해 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100년 동안 같은 일을 해 왔다기보다, 그 시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 온 것이지요. 100년 전에는 100년 전의, 50년 전에는 50년 전의 과제가 있었고, 현 시대엔 현 시대의 과제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는 것이 이와나미의 출발점이었고, 그 질문의 추구는 2012년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으니까요.
프레시안 : 1913년 고(故) 이와나미 시게오(岩波茂雄)가 도쿄 진보초에서 문을 연 고서점이 이와나미의 출발점입니다. 그는 어떤 뜻을 가지고 이와나미를 창업했던 건가요? 서점으로 시작해 출판사를 창업한 것은 당시 일반적인 일이었습니까?
야마구치 : 아닙니다. 고서점으로 출발했지만 그 기간은 1년 정도로 굉장히 짧았습니다. 창업자 이와나미 시게오는 처음부터 서점을 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도쿄제국대학 철학과를 중퇴하고 교사로 일했던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중에 자신에겐 교사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는 나가노의 시골 마을에 처박혀 농사라도 할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때 그는 겨우 서른둘. 은거할 나이가 아니지요. 그러다 끌리게 된 것이 '장사'였습니다. 당시는 메이지 시대가 막 끝나고 다이쇼 시대로 진입한 지 얼마 안 되는 시기였는데, 일본에선 여전히 사농공상의 신분 질서가 굳게 유지되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는 앞으로 일본을 움직이는 건 상인이 될 거라고 믿고 여러 사람에게 업종에 관련된 상담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우연히 진보초 부근에 매물로 나온 서점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러면 서점을 해 볼까' 하고 창업을 하게 됐다고 합니다.
출판업에 진출하게 된 건 나쓰메 소세키와의 만남이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 <이와나미 시게오 전(傳)>을 쓴 아베 요시시게(安倍能成)라는 인물이 있는데, 게이조 제국대학 교수 등을 거쳐 전후 문부대신을 지내기도 한 철학자·교육자입니다. 시게오는 아베와 친구 사이였고, 나쓰메 소세키는 아베와 사제 관계였습니다. 그러한 연으로 소세키의 <마음>을 출간하게 되었고, 그것이 커다란 히트를 기록하면서 출판사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면서 창업자가 가졌던 뜻이 앞서 말한 것처럼 '지금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을 질문해 나가는 자세였습니다. 창업자는 "생활은 낮게, 생각은 높게"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하는데, 뜻을 갖고 있다면 어떤 생활이든 견딜 수 있다는 의미겠지요. 또 그는 스스로를 '문화의 배달부'라 불렀다고 합니다. 이는 동시대 문화를 대중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겠다는 의미로, 그것이 현재까지도 이와나미의 특성으로 자주 거론되는 '계몽주의적' 자세라고 볼 수 있습니다.
프레시안 : 한국에선 한국 전쟁 이후에야 출판 문화의 토대가 닦일 수 있었습니다. 식민지 시기와 전쟁을 거치다 보니 100년의 역사를 가진 출판사가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전쟁은 문화적 토대의 단절을 의미하는데요. 일본이 태평양 전쟁의 광란에 빠져 있었을 당시 출판업계는 어땠습니까. 그 광풍에서 이와나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야마구치 : 전쟁 중에 군국주의를 비판하거나 이른바 좌익, 반체제계로 분류되는 여러 출판사가 차례로 문을 닫았습니다. 그 가운데 '이와나미뿐'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간신히 살아남았습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처음에는 주오코론샤(中央公論社), 다음에는 가이조(改造)… 이런 식으로 '찍힌' 곳부터 처치를 하다가 딱 이와나미에 손을 뻗치려 하던 시점에 마침 일본이 전쟁에서 졌다는 사실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문화계뿐만이 아니라 정·재계, 군부의 저명인 가운데서도 이와나미의 지지자가 많았습니다. 좌익계는 아니지만 군국주의에는 반대하는, 이른바 '올드 리버럴리스트'라 부를 수 있는 이들 가운데 창업자를 잘 따르는 이들이 많아 이와나미가 문을 닫지 않도록 힘썼던 것이죠. 물론 시게오의 오른팔 격이었던 편집자 고바야시 이사무(小林勇), 그의 친구이자 이와나미의 저자이기도 했던 철학자 미키 기요시(三木清) 등 주변 사람들은 투옥되어 고문을 받기도 했습니다만 '본체'는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시게오 개인의 힘이 컸던 것 같습니다. <이와나미 시게오 전>에는 "그는 사람을 꿰뚫는 날카로운 눈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 그로 인해 그 주변엔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실제로 전쟁이 한창이었던 1942년, 창업 30년이 되는 해를 맞이해 열었던 대회(大會)에도 해군대장, 육군대장, 귀족원 의원을 포함해 무려 500여 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시게오에게 '네트워크'라는 강력한 힘이 있었던 셈이지요.
프레시안 : 존 다우어의 <패배를 껴안고>(최은석 옮김, 민음사 펴냄)에서, 패전 1년 뒤인 1946년 이와나미 본사 앞에 200여 명의 독자들이 노숙을 하면서 줄을 서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봤습니다.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의 전집을 사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전후 폭발하다시피 한 대중의 지적 욕구를 상징하는 한 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전후'라는 시대에 이와나미에 새롭게 요구되었던 과제는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야마구치 : 말씀하신 바로 그 해 4월, 창업자 시게오가 사망합니다. 그의 사망 몇 개월 전인 1946년 1월 이와나미가 잡지 <세카이(世界)>를 창간하는데, 이것이 이와나미의 전후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일본은 왜 전쟁을 일으켰나' 이런 반성의 의미가 큽니다. 전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없애자는 게 아니라 앞으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자는 의지였지요. 시게오를 비롯한 이와나미의 일원들은 그러기 위해선 인민 전체가 뭔가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는 사회 전체가 전쟁을 반성하고 새로운 일본을 만들자는 기세가 불타올랐을 때지요. 특히 전쟁 중에 탄압을 받았던 사람들이 자유로운 언로를 획득하면서 그들이 목표로 하는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윗세대는 거의 추방을 당했기 때문에, 학계건 정·재계건 중심이 된 건 30대 정도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이와나미는 그 새로운 기운의 지적 토대를 조직하는 역할을 했다고 할까요. 특히 학문이 지식인 사이에서 갇혀선 안 되며, 대중에게로 전달해가야만 한다는 목표가 뚜렷했습니다. 줄곧 학문의 최선단을 소개한다는 목표에 충실했지만, 전전(戰前)에는 그것이 대중 수준으로까지 충분히 가지 않았다는 반성이 있었던 것이지요.
▲ 야마구치 아키오 사장. ⓒ岩波書店提供 |
1만 명의 저자와 만나며
▲ <책으로 찾아가는 유토피아>(오쓰카 노부카즈 지음, 송태욱 옮김, 한길사 펴냄). ⓒ한길사 |
야마구치 : 제가 대학에 있던 1970년 전후엔 세계적으로 학생들의 반란이 격심했던 시기입니다. 그러한 시대적 영향을 직격으로 받은 저는 보통 기업에 가서 조직의 톱니바퀴가 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비교적 자유롭게 발언하고 행동할 수 있는 세계는 어디일까 생각해 보니 언론·출판계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와나미에 들어오게 된 것은 전적으로 우연입니다. 아는 선생님이 한 번 이력서를 내 보지 않겠느냐고 추천해서 유일하게 지원한 회사였는데 붙어버렸습니다. 당시 3000명 정도 이 회사에 지원했기 때문에 저는 붙을 거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지요. 제 동기가 저를 포함해 6명 정도이니까요. 지금처럼 취직이 어려운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저는 '떨어져도 대학에 남아 공부를 하거나 욕심을 줄여 어딘가에 들어가면 되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들어오자마자 <세카이> 편집부에 배속되었는데, 그것도 단순히 면접 때 "<세카이>의 어느 기사가 재미있었다"는 식으로 말했기 때문이었지요. 우연의 연속이었던 셈이죠.
프레시안 : 오쓰카 전 사장이 대학에 다닐 당시엔 '이와나미 전서(全書)'가 대학생들의 필독서였다고 하더군요. 이와나미나 <세카이>가 당신의 대학 시절 미친 영향은 어땠나요.
야마구치 : 저보다 한 세대 이전, 즉 오쓰카 전 사장의 대학 시절엔 영향력이 컸겠지만 우리 시대에는 별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학생 운동이 한창이던 당시 이와나미는, 나쁘게 말하면 고급 식당에서 비싼 음식을 먹으면서도 어려운 단어로 정부 비판이나 해댈 것 같은 지식인들의 담론, 무겁고 딱딱하고 뭔가 고여 있는 듯한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보수적'이라기보다 '수구파'라는 이미지였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오히려 입사해 보니 전혀 달랐습니다.
프레시안 : 오쓰카 전 사장의 경우와는 반대네요. 그는 입사하고 나서 1~2년 동안 이와나미의 '일류 의식'이 견디기 어려워 퇴사를 여러 번 고민했다고 썼습니다. 이와나미의 저자는 반드시 일류여야 하고, 그 저자에 대한 대우 역시 최고의 조건이어야 한다는 식의 분위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요.
야마구치 : 제겐 그런 느낌이 전혀 없었습니다. 사실 오쓰카 전 사장이 줄곧 담당했던 학술 분야의 편집부와 제가 들어오자마자 배속되어 23년을 있었던 <세카이> 편집부는 아예 '차원이 다르다'고 해도 좋을 정돕니다. 당시 잡지 <세카이> 편집부는 '베쓰세카이(別世界, 별세계)'라 불렸으니까요. (웃음) 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기 좋을 대로 마음껏 일할 수 있는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회사 전체적으로 '일류 지향'의 분위기가 존재했는지, 그에 대한 비판의식이 있었는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오쓰카가 책에서 묘사한 출판의 세계가 매우 학술적이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였다면, <세카이>에 있었던 저는 그것과 달리 말하자면 저널리스틱한 측면에서 편집 일을 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널리스트로서의 편집자라는 자각을 갖게 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요. 1973년 4월에 입사해 3개월쯤 지난 시점, 그러니까 7월에 김대중 씨 인터뷰에 따라갔습니다. 편집장이 인터뷰를 진행했고 저는 녹음이나 사진 촬영 등을 도왔던 거지요. 그런데 그 인터뷰 기사가 실린 <세카이>가 발매된 당일(8월 8일), 김대중 씨가 도쿄의 한 호텔에서 납치를 당하고 맙니다. 심지어 그가 납치되기 이틀 전, 발매에 앞서 나온 잡지의 견본을 가지고 호텔로 그를 찾아가 직접 만나 전해주기도 했습니다.
프레시안 :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 대단한 경험이네요.
야마구치 : 그렇지요. 다행히도 그는 살해되지 않았지만, 만일 그때 역사가 바뀌었다면 그 사람을 만난 마지막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굉장한 역사적 사건이었고, 저널리스트로서의 자각을 하게 된 경험이었지요.
프레시안 : 저널리스트로서의 편집자란 어떤 건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야마구치 : 기획력의 중요성을 말하는 거지요. 저는 <세카이> 초대 편집장이자 이 잡지의 이념을 세운 요시노 겐자부로(吉野源三郎)로부터 늘 "편집자는 24시간 저널리스트여야 한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물론 직접 취재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떤 문제를 포착할지, 그걸 누구한테 쓰게 하면 가장 좋은 지면을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데 24시간을 보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작은 메모장을 갖고 다니면서 뭔가 기사가 될 만한 게 있다면 무엇이든 적었습니다. 요시노 씨는 심지어 잠이 들 때도 베갯머리에 종이를 두었다고 합니다. 자다가도 뭔가가 생각나면, 컴컴한 가운데서도 메모를 해두었다고 하네요. 아침이 되어 읽어 보면 뭘 쓰려고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중 한 글자라도 읽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연상이 되니까요. 이런 맥락에서 저는 편집자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호기심과 상상력, 기획력 이 세 가지를 꼽습니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이와나미의 편집자로서 가장 고민을 많이 했던, 혹은 기억에 남는 기획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야먀구치 : 1988년부터 1996년까지 <세카이> 편집장을 지냈는데요. 1988년 이후부터 엄청난 시대가 이어졌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쇼와 천황이 죽고, 톈안먼 사태가 발발했고, 소련이 붕괴되었습니다. 그 시점, '우리는 이 시대를 어떻게 생각하고 헤쳐 나가야 하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거와 같은 보수 대 혁신 구도로 세상을 나누어 보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문제였지요.
가령 일본의 비무장 원칙을 명시한 헌법 9조(평화헌법)를 이대로 두어도 되는 것일까, 즉 아무리 지켜야 할 원칙이라고 해도 자위대라는 일본의 군대가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데 헌법 9조가 공존한다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겠지요. 냉전 시대에 유효했던 단순한 구분선을 버리고, 다른 차원에서 세계를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 그것을 가장 고민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기획은 쇼와 천황 사망 당시의 특집입니다. 1989년 1월 7일 쇼와 천황이 사망했는데요. 그날은 잡지 발행일이었으니, 미리 만들어 놓은 걸 낼 수밖에 없었겠지요. 죽음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문제이긴 하나 그 전부터 '쇼와 천황이 슬슬 위험하다'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기는 했습니다. 마침 <세카이>에선 쇼와 시대를 돌아보는 기획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그걸 어느 시점에 내느냐 고민하다 1989년 2월호에 맞춰서 특집을 꾸렸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쇼와 특집이었는데, 발매된 날 천황이 사망했으니 이 역시 굉장한 역사적 우연이라고 할 수밖에요.
프레시안 : 이야기를 듣다 보니 해 오신 일이 제가 '프레시안 books'에서 하는 일과 비슷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기자이지만 반쯤은 편집자로서 '어떤 책의 서평을 누구에게 맡기면 좋을지'를 고민해야 하거든요. 가장 어려운 점은 잘 모르는 분야에서 네트워크를 만들어 나가는 일일 텐데요.
야마구치 : 저자와의 관계 만들기는 제 편집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재미있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경제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그쪽 방면으로는 비교적 쉽게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 시작해 사회학이나 정치학 같은 관련 분야로 인맥을 넓혀 나갔지요. 가장 어려우면서도 재밌었던 것이 작가나 예술 관련 저자와의 관계 만들기였습니다. 관련 책을 내는 출판사에 친구를 만든다든지 해서 하나씩 끈을 이어나갔지요.
30년간 편집자를 하는 동안, 만나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앞뒤 따지지 않고 일단 만나러 갔습니다. 잡담이라도 나누러 가는 것이지요. 어디까지나 추정치이지만, 30년간 1만 명쯤 되는 저자와 만났습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하루에 두 명씩 만난다고 하고 1년을 200일로 센다면, 연간 400명을 만날 수 있죠. 그걸 30년 이어오면 1만 2000명이 됩니다. 그 다음은 호기심입니다. 스포츠·예능이든 학계든, 어떤 길에서 뛰어난 사람이 있다면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득이었습니다. 그렇게 만나고 난 뒤 '이건 재밌는 얘기가 될 것 같다' 혹은 '별로다' 판단하는 기준은 자신의 감이죠. 여기서 요구되는 게 감수성과 상상력입니다.
프레시안 : 그런 의미에서 기획력, 상상력, 호기심을 강조하신 거군요. 그런데 또 한 가지 편집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있다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오쓰카 전 사장의 책에서 "편집자란 대저 가부키의 구로코(黑子·배우 뒤에서 검은 옷을 입고 시중드는 사람) 같은 사람"이라는 표현을 보았는데, 최근 한국에서 한 저자가 편집자의 이름을 표지에 올리고 프로필도 함께 싣는 파격을 보였더니, 많은 출판인들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일화가 떠올랐습니다.
야마구치 :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 대해선 당연히 동의합니다. 낡은 관점일지 모르겠지만 편집자는 산파나 재봉사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없어선 안 될 존재이지만, 눈에 띄어선 안 되는 거지요. 표지에 편집자의 이름을 넣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저자가 후기에 쓰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요. 하지만 편집자들은 대체로 자의식과 자기현시욕이 강한 사람들이긴 합니다. 그래서 일본엔 출판사를 다니다 그만둔 다음 자신이 관계 맺은 저자의 이야기를 고발한 책이 많이 나와 있지요. 그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와나미는 '왼쪽'에 있지 않다!
프레시안 : 한국에서 이와나미는 일본의 아카데미즘, 지식 문화를 대표하는 출판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많은 출판사들이 대중적인 필자의 이름이나 매출 순위로만 기억되는 가운데 이러한 이념·가치 중심의 생명력을 오랫동안 이어올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요.
야마구치 : 독자와 저자로부터의 신뢰가 흔들림 없이 이어져 왔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왜 그랬을까를 생각해 보면 역시 책의 내용은 물론 '질'에 대한 신뢰인 셈이고요. 질은 결국 책의 외관을 포함한 '책 만들기' 과정 전체를 말합니다. 책을 정성스럽게 만든다는 것, 그리고 그에 대한 독자와 저자의 신뢰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아카데미즘' 같은 것보다 우선하는 이와나미의 존재 가치라 할 수 있습니다.
프레시안 : 한편, 이와나미가 너무 권위주의적이라는 비판도 존재합니다. 경제학자 모리시마 미치오(森嶋通夫)는 과거에 '권위주의적인 냄새가 난다'며 "오믈렛·교진(요미우리 자이언츠)·이와나미는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자주 말했다고 하죠. 그 변주로서 "<아사히신문>·이와나미·엔에이치케이(NHK)는 싫다"라는 말도 있었다고 하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야마구치 : 아, 참고로 모리시마 씨는 그렇겐 말했어도 만년에 결국 이와나미에서 저작집을 냈습니다. (웃음) 아무튼 이와나미가 권위주의적이라는 건 본의 아니게 굳어져버린 이미지일 뿐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일종의 '이름표 붙이기'인 셈이죠. 분명 이와나미가 내는 책 중엔 무겁고 딱딱한 이미지의 책이 많긴 하지만 전부 다 그렇지는 않지요. 또 '최선단의 학술 정보를 대중에게 전달한다'는 목표에 있어 당연히 '쉽게' 전달하려고 하지 어렵게 하려고 의도하는 건 아니거든요. 만일 어렵게 전달되었다면 이쪽의 노력 부족이겠지만, 어쨌든 의도 면에선 엘리트주의를 표방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듭니다. 권위주의라는 건 권위를 갖고 내리누르는 것을 말하잖아요. 그런데 '정말 권위 있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지 않나요?
프레시안 : 이와나미의 또 다른 이미지 중 하나는 정치적으로 진보 계열이라는 것입니다. 한국에선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의 보고(寶庫)'라 알려져 있기도 하고요.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야마구치 :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게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 출판사의 정치적 입장이 분명하다거나 좌파 계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기본적으론 리버럴리즘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창업자 이와나미 시게오는 (이와나미 내에서) 리버럴리즘과 내셔널리즘도 양립 불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주 "마르크스의 <자본>과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에도 시대의 존왕파 사상가로 일본 제국주의 팽창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의 전집을 함께 내는 게 뭐가 나쁜가"라는 비유를 썼다고 합니다. 시게오는 심지어 천황 숭배론자였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쇼와 천황에 대해서는 굉장히 비판적이었지만 메이지 천황은 숭배했죠. 그래서 군부와 언쟁을 할 때마다 메이지 천황 이야기를 꺼내며 반론하곤 했습니다. 게다가 중국 침략에 대해서는 반정부 발언을 쏟아냈지만, 대 영·미 전쟁에 대해서는 오히려 지지에 가까운 입장이었습니다.
이와나미는 일반적으로 좌익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사실 그때그때 사회 정세에 따라 좌표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이와나미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 바탕에 있는 도표가 움직인다고 할까요. 그러니 1960년대 미일 안보 조약 반대 투쟁으로 일본 전체가 들끓었을 때는 과격파 학생들로부터 보수적이란 소리를 들었던 거고, 지금처럼 세상이 보수적인 시기에는 이와나미가 하는 일이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반체제적이고 좌익적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지요.
여담이지만 지금은 제가 태어나서 목격한 것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시대가 아닐까 합니다. 반대자가 사라진 시대라고 할까요. 보수파가 집권했던 시기에도 거기에 대항하는 튼튼한 조직이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지금은 대항자로 거론되는 이가 '한층 보수적'인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 시장 같은 사람이니까요. 이렇게 대항하는 세력이 사라진 가운데, 어떻게 하면 시대에 보다 필요한 질문을 던질 수 있을지가 현재를 살아가는 출판인으로서 가장 힘든 문제이기도 합니다.
프레시안 : 현 시점, 이와나미의 가장 큰 도전 과제는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야마구치 : 한마디로 정의하긴 어렵지만, '생각할 기회'를 주는 책을 만드는 작업이 시급합니다. 정보가 넘쳐나는 인터넷 기반 사회에 사람들은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가는 것 같습니다. 뭐든지 검색으로 쉽게 얻을 수는 있지만 그것을 기반으로 미래를 생각하는 단계로는 좀처럼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새로운 시대에 맞는 교양을 익힐 수 있도록 거드는 것이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편집자로 기획을 함에 있어 '지금부터 어떻게 된다'가 아니라 '지금부터 어떻게 할까'를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어떻게 된다'는 그저 예상일뿐이지만, '어떻게 하고 싶은가'는 실천의 문제와 직결되니까요.
프레시안 : 인터넷 사회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만큼 독서 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책이 외면당하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출판인들의 관심사가 '팔리는 책'에 쏠리게 되는 것 같고요. 이와나미도 상업성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텐데 어떻습니까.
야마구치 : 사실 전 21세기 들어 '독서 인구'가 줄어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건 일본의 경우겠지만, 그냥 '인구'가 줄고 있습니다. 그런데 책의 종류와 양은 극단적으로 늘었죠. 2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신간이 매일 쏟아지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한 사람이 읽는 양이 달라지지 않았다고 해도 기업으로서의 출판사는 어려워지는 추세이지요.
다시 말해 사람들이 활자에서 이탈하는 현상이 벌어진다기보다, 책의 종수가 늘었음은 물론 다른 취미나 오락거리도 함께 늘어 평균적으로 책 한 권에 투여되는 시간과 돈이 줄어들었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매력 있는 책의 수도 줄었고요. 그야말로 간단히 찍어낸 듯한 책도 많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같은 맥락에서 전자책 때문에 종이책이 위협받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주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매우 약한 상관관계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보면 지금부터가 '진짜 승부'라는 느낌도 듭니다. 앞서 말한 독자와의 신뢰 관계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하는 거겠죠. 다만 경제적으로 힘들어졌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힘든 게 사실입니다.
프레시안 : 책의 판매량이 떨어졌다고 체감한 건 언제쯤부터입니까?
야마구치 : 일본에 국한된 이야기이지만, 1970년대 중반부터라고 봅니다. 일본에서 최초로 '활자 이탈'이 이야기됐던 게 1974년이었습니다. 석유 파동이 일어난 다음이었지요. 하지만 잡지 판매량은 그 후로도 계속 늘어 출판사만 놓고 보면 1996년까지 성장세를 보이긴 합니다. 대개가 잡지 덕이었지요. 서적 판매량의 정체는 그러니 최근 일이 아닌 셈입니다.
책 출판은 본래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기도 하고요. 이와나미 역시 서적 판매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겁니다. 수익은 미미하지만 '왜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생각하면서 해 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지금도 마찬가지로 뭔가 한 방을 크게 터뜨려 수익을 올려야겠다고 생각하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죠.
100년 후에도 남는 책, 얼마나 멋진가!
프레시안 : 최근 한국엔 이와나미가 '대놓고 연줄 채용을 했다'는 기사가 흘러나왔습니다. 이건 어떻게 된 일이지요?
야마구치 : 그건 첫 보도부터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을 그대로 한 것뿐이니까요. 제가 입사하던 시절에도 일반 공모는 하지 않고 학교 선생의 소개를 통해 이력서를 넣었고요. '저자나 직원의 소개'라는 조건은 어디까지나 신청 시의 조건일 뿐 채용의 판단 기준엔 적용되지 않습니다.
프레시안 : 편집자로서 지녀야 할 덕목으로 언급하신 호기심, 상상력, 기획력과 별개로 '이와나미의 편집자'로서 반드시 지녀야 할 조건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야마구치 : 자유로운 발언과 비판 정신을 기본으로 갖추고 있어 주길 바라지요. 사실 그 다음은 뭘 해도 괜찮다고 봅니다. 다만 제 시대에도 그렇고 지금도 해서는 안 된다고 여겨지는 게 두 가지 있습니다. 전쟁을 긍정하는 책을 만드는 것과 차별을 조장하는 책을 만드는 것입니다. 편집부에는 민족주의자부터 마르크스주의자까지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어우러져 있지만, 이 두 원칙만큼은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 : 현재 일본의 일간지 서평은 책 시장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까. 짧은 역사이지만 '프레시안 books'도 기념일(2주년)을 맞습니다. 격려의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야마구치 : 일본의 일간지는 주로 일요일에 서평을 게재합니다. 그런데 최근 서평의 영향이 매우 약해졌지요. 서평이 실려 그 책의 판매량이 올라가는 일이 없다는 의미인데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서평 자체의 재미가 떨어졌음도 한몫 한다고 봅니다. 서평자들이 자기 세계에 갇혀서 상대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를 잘 전달하지 못한다고 할까요. 대충 내용 소개에서 끝나버리고, 뭔가 확대되는 지점이 없다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아주 가끔 서평에 의해 책이 불티나게 팔리는 경우가 있는데, 어디가 다른가 봤더니 역시 책이 읽고 싶어지는 서평이더군요. 역시 독자들은 무서운 존재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인터넷 매체의 서평 전문 섹션은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긴 서평이 가능하고, 한 권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두 권 이상의 관련 책을 묶어서 소개할 수 있으니까요. 신문의 지면 제한으로는 논의가 확대되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신간만 다루지 말고 구간도 함께 다루어주길 바라고요.
프레시안 :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과 그로 인한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일본 사회에 커다란 질문이 던져졌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후 출판·학술계에 어떤 변화가 있었다고 보십니까.
야마구치 : 변한 건 시대 자체죠. 역사에 대해, 근대화에 대해 다시 물어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근대화로부터 150년, 지구 사회에 있어 과학 기술 문명이란 대체 무엇이었나 하는 질문과 함께 근대 국가란 무엇이었나 하는 질문이 던져졌습니다. 또 공동체에 대해서도 되물어야 하는 시점이고요. 사실 저는 지난해 도호쿠 지방에서 일어난 상황을 지켜보면서 전통적인 유교 공동체의 긍정적인 면을 느꼈습니다. 옆집에 누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살아가는 도회지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공동체의 힘이 재발견되었다고 보거든요.
프레시안 : 마지막으로 어떤 책을 만들고 싶습니까.
야먀구치 : 100년 후에도 남는 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들은 2000년 전 로마의 철학자가 쓴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엔 그 저자가 그보다 400년 전에 소크라테스가 쓴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고 쓰여 있고요. 결국 책 한 권을 통해 2000년, 2400년 전의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는 겁니다. 이건 책 외의 다른 매체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생각해 보면 굉장한 거죠.
지브리 스튜디오의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가 이와나미 소년 문고 가운데 자신이 좋아했던 작품 50편을 골라 리스트로 만들어 준 적이 있는데, 그의 세계를 구축하게 해 준 50권 가운데 대부분이 40년도 넘은 옛날에 나온 작품이었습니다. 결국 좋은 책은 남게 되고, 남아 있는 책이 좋은 책입니다. 그 '남아 있는' 책을 만드는 게 편집인으로서 언제나 꾸는 꿈인 셈이죠.
야마구치 아키오 사장은… 1949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1973년 도쿄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해 이와나미쇼텐에 입사해 잡지 <세카이> 편집부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줄곧 <세카이> 편집부원으로 일했고 1988년 6월부터 1996년 3월까지 편집장을 역임했다. 그 후 편집부장과 편집담당 이사를 거쳐, 2003년에 이와나미쇼텐 대표이사·사장에 취임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일본 출판계 내에서 출판·미디어·저널리즘에 대해 정력적으로 발언을 해오고 있다. |
100년 된 출판사만 있나? 우리가 찾은 또 다른 '100' 이야기들! 1. 한국 출판 100년사 객관식 모의고사 ○…근대 인쇄술을 이용하여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단행본 <충효경집주합벽>을 발간했던 국내 최초의 민간 출판사는? ①서울문화사 ②광인사 ③창비 ④위즈덤하우스 ○…육당 최남선이 창업하였으며 지금까지 국내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출판사는? ①동명사 ②마음산책 ③민음사 ④중앙 M&B ○…근대 출판이 태동하던 시기, 국내 최초의 베스트셀러 소설로 꼽히는 작품은? ①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②조흔파의 <얄개전> ③최인호의 <별들의 고향> ④이광수의 <무정> ○…1988년 납북·월북 작가들의 해금 조치가 내려진 후 처음으로 정식으로 시집이 출간되었으며, 1989년엔 이동원, 박인수 듀엣의 노래 <향수>로도 큰 인기를 모았던 시인의 이름은? ①윤동주 ②서정주 ③백석 ④정지용 ○…다음 중 1970년~1980년대 국내 베스트셀러에 대한 설명 중 틀린 부분이 있는 것은? ①조선작의 <영자의 전성시대>는 단편소설이다. ②김홍신의 <인간시장> 주인공의 원래 이름은 '장총찬'이 아니라 '권총찬'이었다. ③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은 기독교의 '신의 아들'과 전설 속의 '사람의 아들' 사이에서 방황하는 젊은 신학도의 고뇌를 그렸다. ④황석영의 <어둠의 자식들>은 "나는 소설이나 책에 대해서는 좆도 모른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정답) 순서대로 ②, ①, ④, ④, ③ 참고한 책 <우리출판 100년>(이중한·이두영·양문길·양평 지음, 현암사 펴냄) 2. 100년을 이어온 보물창고, 인쇄소 '보진재' 보진재(寶晉齋), 이름만 들어서는 뭘 하는 곳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한의원? 고미술상? 모두 아니다. 이곳은 올해로 창립 100주년을 맞이한 한국 최고(最古)의 인쇄소다. 1912년 창업주 김진환이 처음 이곳을 세운 이래, 그가 흠모하던 북송의 4대 서예가 미불(米芾)의 서재 이름에서 따온 회사명을 고스란히 지켜왔다. 20세기 초 근대적 형태의 책이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조선 인쇄소가 여럿 생겨났으나, 자금과 기술 부족, 일본 회사들의 조직적인 방해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진환 창업주가 보진재를 세우고 예상되는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 있을까. 보진재의 김덕환 총무팀장에 따르면, 창업주 김진환은 "대한제국 학부(현재 교육과학기술부)의 국립교육협회 교관으로 재직하며 당시 교과서 편찬 과업에 종사하던 중, 조선의 국권이 빼앗기는 것을 목격하고 국민의 보편적인 교육에 뛰어들겠다는 일념으로 보진재를 시작했다"고 한다. 창업의 또 다른 이유로는, 미술에 대한 창업주의 열정 때문에 전문적인 미술 인쇄에 대한 열망도 컸다. "창업 초기부터 원색 미술 인쇄에 중점을 둔다는 기술적인 강점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 인쇄소의 견제에도" 버틸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특히 일제 말기인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가 역경을 무릅쓰고 편찬해온 <조선어 사전>의 인쇄를 의뢰받아 진행 중, 일제의 우리 말 말살 기도에 의한 조선어학회사건이 발생하자 보진재가 갖고 있던 모든 컷과 원고와 원판, 교정쇄 등을 감추었다. 그래서 해방 후에 무사히 사전이 발간될 수 있었다." 글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디자인이 아무리 훌륭해도 책이라는 물질적인 형태를 실제로 제작하는 인쇄소의 능력이 떨어진다면 소용없을 것이다. 보진재가 100년이라는 세월 동안 꾸준히 인쇄업 하나만을 지속해올 수 있었던 데에는 인쇄의 최신 기술과 세계적인 트렌드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온 바가 클 것이다. 그에 대해 김덕환 총무팀장은 "보진재가 창업 초 도입한 석판 인쇄술은 지금까지도 인쇄의 주된 공법으로 사용되는 옵셋 인쇄의 초기 형태로서, 목활자와 금속활자에 의한 먹 인쇄의 한계를 뛰어 넘어 칼라 인쇄까지 가능하게 만든 획기적인 기술이었다. 이후 민간 업체 최초로 1924년 옵셋 인쇄기 도입, 1935년 원색 프로세스 인쇄술 도입, 1956년 국내 최초의 사진 원색 분해 시작 등을 시도해왔다"고 했다. 눈 밝고 발 빠른 이들의 노력으로, 지금까지도 인쇄 공정의 디지털화 등에도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출판 인쇄와 상업 인쇄 분야에서만 100년을 종사해온 보진재는, 현재 스마트폰과 e-북의 도전 앞에 종이 책의 달라진 위상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김덕환 총무 팀장은 "종이 책은 발행 부수가 더욱 줄어들고 고급화될 것으로 예상한다"면서 "인쇄기의 디지털화 인쇄 제본의 단일 연결 공정화 등이 앞으로 인쇄업이 가야될 길이 될 것 같다"라며 대처 방안을 밝혔다. 또 다른 100년도 문제없을 것 같다.
3. 책 귀신도 살겠지? 서양의 옛 서점들 이왕이면 다홍치마, 이왕이면 새 서점보다는 오래된 서점. 굳이 고색창연한 옛 서점을 찾아 들어가 구경하다 보면, 온라인 서점에서는 '품절'이라고 떴던 어떤 책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책장 한 군데 꽂혀 있는 걸 찾아낼 수도 있다. 그 즐거움을 아는 이라면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만화 <시오리와 시미코> 시리즈에 등장하는, 헌책방에서 몇 시간이고 서서 책을 읽다가 급기야 쫓겨나는 책 귀신들의 심정을 알고도 남을 터다. 이 자리에서 소개하는 100년 역사를 훌쩍 뛰어넘는 서양의 오래된 서점들 한 귀퉁이에도 그런 귀신들이 살지 모른다. 또 하나의 공통점, 100년을 견디는 공간들은 공통적으로 다른 어느 곳과도 비교하거나 대체할 수 없는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제임스 조이스, 스콧 피츠제럴드, 에즈라 파운드 등의 작가들이 즐겨 찾았던 파리의 영어 서점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조차도 100년 역사에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파리의 또 다른 영어 서점 갈리냐니 서점은 1856년 이래 오랜 시간 동안 파리 중심가 리볼리 거리를 지켜왔다. <적과 흑>의 작가 스탕달부터 패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 배우 이자벨 아자니와 험프리 보가트, 마를레네 디트리히, 뮤지션 믹 재거,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버트런트 러셀 등이 갈리냐니의 단골이었다. 파리에는 또 다른 100년 역사의 오귀스트 블레조 서점도 존재감을 과시한다. 1853년 처음 문을 열었으며, 센 강 우안(右岸)의 고급스럽고 부유한 지역에 위치한 서점이다. 볼테르의 <캉디드> 1759년 초판본을 전시하는 등 프랑스 문학과 화집의 오래된 판본을 전문으로 취급하고 있다. 포르투갈의 아름다운 도시 포르투에는 오로지 1869년 이래 명성을 떨치고 있는 렐루 서점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찾아드는 관광객이 무수히 많다. 1906년 건축가 크란시스쿠 사비에르 에스테베스가 지은 아르데코 풍 석조 건물의 뛰어난 아름다움 때문이다. 이 거대한 서점은 책의 '성전'이라 불릴 만큼 웅장하고 화려한 분위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직원들은 "아름다움만으로는 서점을 오래도록 운영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관건은 고객에게 수준 높은 조언을 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장 안테루 브라가는 "직원이 보다 수준 높은 자질을 갖출 수 있도록 충분한 급여를 지급"하며, 책으로 꽉 들어찬 2층에 비좁게나마 정기적인 미술 전시회도 열고, 탁자 세 개만으로도 에스프레소와 포트와인을 맛볼 수 있는 조그만 카페도 마련하면서 서점에서 문화적 체험을 누리고자 하는 소심한 고객들을 위한 서비스에 정성을 다한다. 독일 북서부의 슈타데 지역에 위치한 샤움부르크 서점은 1840년 8월 21일 개점했다. 젊은 청년이었던 창립자 프리드리히 샤움부르크는 지역 주민들에게 일일이 안내장을 보냈다고 한다. "'학생이 붐비는 고등학교, 각종 세미나, 군사학교'가 있고 '지방 법원과 법무부 사무국, 종교 법원, 그밖에 여러 위원회'가 소재한 도시라면 제대로 된 서점이 하나 있어야 하고, '지극히 상서로운 곳이 문을 엶으로써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게 되었다는 설명"이 적혀 있는 안내장이었다. 오랜 세월 샤움부르크 서점은 상업적으로는 기대할 수 없지만 진열 자체만으로 '우리 서점을 빛내는 책'을 선정하여 고객들에게 소개했으며, 무엇보다 낭독회라는 전통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 "해마다 평균 20회에 걸쳐, 샤움부르크 특선 도서전을 비롯해 요리와 음악 분야까지 확장한 저자 낭독회"가 열린다. 4.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도서관 한국처럼 시간과 역사가 손쉽게 말소되는 공간에서 100년을 지켜온 도서관이 있을까?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찾아보았는데, 놀랍게도 있었다! 일단 부산 광역시립시민도서관을 꼽을 수 있다. 1901년 10월 일본 상인들의 모임이었던 홍도회 부산 지부에서 독서구락부 도서실을 개관한 것이 시초로서, 도서관의 모습을 본격적으로 갖추기 시작한 때는 1919년이다. 건축가 강예린과 이치훈의 도서관 기행문(☞바로 가기)에 따르면, 부산 광역시립시민도서관의 가장 큰 독창성으로 "도서관 초기의 고문헌"의 보존을 꼽을 수 있다. 부산 거주 일본인들이 지었던 도서관답게 조선 총독부의 조선시정관계 자료, 일본과 조선 간의 외교 문서 등 20세기 초의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으며, 동시에 이것을 현재 한글로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해제하는 작업까지 진행 중이라고 한다. 귀한 자료를 손에 닿지 않은 곳에 감춰둔 채 '이런 게 있다더라'라는 풍문에 그치지 않은 채, 현대사의 귀중한 아카이빙 작업까지 앞장서는 모습이 든든할 뿐이다. 한편, 서울 남산 소월길에 위치한 남산도서관도 이제 10년만 더 지나면 '100년의 목록'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아직까지 남산도서관하면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김선아와 현빈이 데이트하던 그 계단길만 떠올리는 분들, 한번 작정하고 남산 도서관에 가보시라. 도서 45만 여 권, 비도서 1만4000여 점, 연속간행물 1100여 종에 고서 및 동양서(구 일본서적 포함) 6만9000여 권에 달하는 놀라운 자료의 양에 입을 딱 벌리게 된다. 남산도서관은 1922년 중구 명동 지역에 '경성부립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개관했다. 남산으로 옮겨온 건 1964년이다. 남산도서관은 올해로 꼭 90년째를 맞이한 관록의 도서관답게, 문화 공간으로서 도서관의 영역이 확장되는 작업에 앞장서고 있다. 독서 치료 프로그램, 독서 치료 담당자 연수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각종 전시회와 독서 모임, 저자 강연회 등을 연중 운행하며 '평생 교육 증진'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10년 뒤 100년을 맞이한 남산도서관이 또 어떤 새로운 모습으로, 동시에 애서가들을 위한 한결같은 보금자리로 남게 될지 기대된다. 5. 100년을 내다보는 100권의 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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