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지면에 중국을 주제로 두 차례 독후감을 썼다(제238·244호). 마지막으로 가슴에 남은 말을 쏟기 위해 숨을 고르는 사이, 착잡하고 황당한 일이 연이어 벌어졌다.



착잡한 일이란, 중국의 만리장성 연장
사업과 ‘아리랑’ 파문이다. 1987년 중국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을 때 6300㎞였던 장성은 고무줄처럼 늘어나 2만1196㎞가 되었다.




이런 역사 조작은 유구한 중국 측의 사료를 모두 종잇조각으로 바꾸면서, 뒤집을 수 없는 고고학적 증거와 직면하게 된다. 중국이 야금야금 만리장성으로 편입시킨 요동 지역의 장성이 고구려가 쌓은 천리장성이라는 점은, 성벽의 기단(基壇)이 고구려 것이라는 사실로 이미 확인된 바 있다.





아리랑에 대해서는 좀 다른 말을 하고 싶다. 아리랑은 여말선초(麗末鮮初)에 강원도 정선 지역에서 유래했다. 이 노래는 멜로디보다 사설이 중심인 까닭에, 일제강점기에 일본·만주·러시아·미국 등지로 흩어진 조선인들이 자신의 신세타령을 담기 좋았다.





아리랑의 귀속처는 더 따질 게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중국이 조선족의 아리랑을 자국의 무형
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하려는 이유는, 중국의 소수민족 보호 정책 때문이다. 중국의 산아제한 정책은 악명 높지만, 한족(漢族) 부부가 한 명밖에 낳지 못하는 아이를 소수민족은 두 명까지 낳을 수 있다.




이런 배려는 55개 소수민족을 다독이며 살아야 하는 중국 정부의 고심에서 나온 것으로, 소수민족 문화를 보호하는 것도 그런 노력 가운데 하나다.


   
ⓒ이지영 그림




오랫동안 같은 문명권이면서 밀접한 교류를 했던 한국과 중국은 워낙 많은 문화·문물의 기원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두 나라의 가교 구실을 해야 할 전문가·지식인의 책무는 막중하다. 나는 한국의 아리랑 전문가들이 중국의 사정을 몰랐다고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 것을 다 빼앗기게 되었다’느니, ‘정부의 지원이 부족했다’느니 하면서, 대중의 민족혼에 불을 지른다. 마치 우리가 아리랑을 한 번씩 부를 때마다, 중국에 저작권료를 지불해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오페라·재즈·피자·스시·요구르트의 기원이 뭐 중요한가? 모두가 아끼고 발전시킨 사람의 공유물이다.






민족주의를 부추겨 전문가나 지식인이 얻고자 하는 것은, 연구비·행사(축제)비·재단 설립비용의 갹출이다. 아리랑 파문의 반대 경우인 단오제 시비를 보면, 그런 구조는 중국도 다르지 않다. 강릉 단오제는 2005년 한국이 먼저 유네스코에 등록했고, 중국은 자신의 문화유산이 탈취당했다며 분노했다.





하지만 굴원을 추념하는 중국의 단오제와 대관령 산신(국사성황신)을 모시는 강릉 단오제의 기원이나 내용은 매우 다르다. 중국의 단오 전문가들이 나라의 ‘삥’을 뜯고자 적극적으로 진실을 알리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지금 중국에서 동북
공정을 주도하는 몇몇 역사학자는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면서, 실은 양국 간에 분쟁의 씨앗을 뿌린 대가로 제 배를 불리는 모리배다.

연이어 벌어진 황당한 일은, 6월26일 국무회의에서 밀실 처리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이다. 다행히도 이 협정은
국민 여론의 질타로 체결이 무산되었지만,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서는 새삼 경멸이 솟아났다. 지난 4월20일, 대통령은 통일정책 특강에서 “이제 통미봉남(通美封南)의 시대는 가고 통중봉북(通中封北)의 시대가 되었다”라고 선언했지만, 아무런 정책도 청사진도 없는 식언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 청사진도 없는 ‘통중봉북’ 선언

조영남의 <용과 춤을 추자>(민음사 펴냄, 2012년)는 올해의 필독서다. 이 책은 한국인이 중국에 관해 가장 궁금해하는 쟁점을 심도 있으면서도 구체적으로 정리해놓았다. 특히 지은이는 우리
사회에서는 중국에 대한 ‘잘못된 상식’이 마치 진실인 것처럼 통용되고 있다면서, “이런 잘못된 상식은 ‘우리의 사고’가 아니라 ‘남의 사고’에서 온 경우가 많다”라고 경고한다. 예컨대, 이명박 정권이 대책 없이 벌여놓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이야말로, ‘남의 사고’를 우리 것으로 삼은 대표적인 패착이다.




이 책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이 국무회의를 통과하기 꼭 한 달 전에 발행되었지만, 그와 유사한 한·일 간 군사협정을 미리 예견하면서, 중국과의 관계를 저울질한 대목이 눈길을 잡아끈다.



지은이는 중국의 강대국 부상을 견제하고자 하는
미국의 중국 포위 정책과 거기에 적극 동조하는 일본에 한국이 들러리서는 것은, 중국 무역으로 이득을 얻고 있는 한국 경제는 물론이고 통일을 위해서는 반드시 중국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 우리나라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한·미 동맹을 어떻게 유지해야 할지에 대한 귀중한 조언을, 두 대목으로 기술하고 있다. 


   
<용과 춤을 추자>조영남 지음민음사 펴냄
“중국이 한·미 동맹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북한의 위협이 존재하고, 동아시아 지역 질서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한국이 한·미 동맹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중국도 잘 알고 있다.




중국이 우려하는 것은 한·미 동맹이 미·일 동맹처럼 성격과 역할이 변화되어 한국이 미국 주도의 반중국 안보 연합에 참여하는 것이다.” “한·미 동맹의 범위는 한반도가 중심이라는 점, 즉 대북 억제가 목표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한·미 동맹은 중국 봉쇄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또한 한국의 군사적 역할 확대는 평시와 전시 모두에서 한반도와 관련된 군사 행위에서만 한국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특히 중국을 대상으로 하는 미국과 일본의 군사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한국은 이를
기초로 중국을 설득할 수 있다.”





보수·우익은 늘 북한 지도자를 ‘사이코(전쟁광)’로 몰아세우지만 그것은 ‘안보 장사’를 위해서다. 전쟁은 자국의 역량과 주변국의 지원이 합해지지 않고서는 벌어지지 않는다. 어떤 독재자든, 혼자 욱해서 일으키는 전쟁은 없다.



김일성은 한국전쟁 직전에 스탈린과 모택동을 한 번 이상 직접 만나서, 승리를 장담하고 지원을 요청했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협정으로 북한의 전쟁 도발을 더 잘 억제할 수 있다지만, 오히려 이 협정은 북한에게 유리한 셈법을 안겨준다.






한·미, 미·일 군사 동맹에 이어, 한·일 군사동맹까지 맺으며 중국을 압박할 때, 있을 것이라고 가정되는 북한의 남침 야욕은 중국의 위기의식으로부터 필요한 지지 자원을 끌어낸다. 중국을 자극하는 것은 북한에게 비빌 언덕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 정권은 북한이 반길 일만 골라서 한다. 쉬었다가, 못다 한 종결편을 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