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남북분단이 39도선에서 되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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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820회 작성일 2012-07-04 04:55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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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의 눈/오코노기 마사오]만약 39도선이 실현됐다면…
- 동아일보 A31면3단 23시간전
- 만약 이 역사의 가정이 실현되었으면 6·25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김일성이라도 39도선 이북의 지역에 기지를 건설하고 대남 해방의 힘을 비축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코노기 마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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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초 한반도가 분할됐다면
- 한겨레21 2010.01.08 (금) 오후 6:07
- [한겨레21] [1910~2010 가상역사 ‘만약에’] 여러 차례 나온 ‘독차지하기... 그리고 야마가타는 그 회담에서 러시아에 “39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마침내 실현된 것이다. 여기에 1897년 수립된 대한제국은 여전히 러시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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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눈/오코노기 마사오]
만약 39도선이 실현됐다면…
기사입력 2012-07-03
오코노기 마사오 규슈대 특임교수 겸 동서대 석좌교수
예를 들면 ‘만약 미국이 1, 2개월 빨리 원자폭탄을 완성했다면’ 하는 역사의 가정이다. 그러면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소련군이 유럽에 배치한 병력을 극동으로 옮길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소련군이 동북아에서 참전하기 전에 일본과의 전쟁이 끝났다면 한반도 분단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다.
실제로 미국 뉴멕시코 주의 사막에서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한 날짜는 포츠담 회담 개최 전날, 즉 1945년 7월 16일이었다.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은 이틀 후인 18일의 일기에 ‘소련이 개입하기 이전에 일본은 손을 들 것이다. 맨해튼(원자폭탄)이 본토 상공에 나타나면 일본은 확실히 항복한다’고 썼다. 그러나 1945년 8월 6일 원자폭탄이 히로시마(廣島)에 투하되자 소련은 참전 계획을 앞당겨 8월 9일에 만주 침공 작전을 개시했다.
미국은 최초의 원자폭탄을 소련이 참전 준비를 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투하한 것으로 알려졌다. 원폭 투하를 1개월 먼저 했으면 트루먼 전 대통령과 제임스 번스 전 국무장관이 기대한 것처럼 일본은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항복했을 것이다.
‘만약 원자폭탄 개발이 1, 2개월 늦어졌다면’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1945년 6월에 작성된 소련군의 기본 작전계획에 따르면 소련군은 만주를 침공한 후 창춘(長春) 지린(吉林)을 점령하고, 제2단계로 9월 초 랴오둥(遼東) 반도의 뤼순(旅順)과 한반도 서울을 향해 진격을 개시할 예정이었다. 미군은 일본 규슈 상륙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는 소련군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포츠담 회담 개최 이후 7월 24일 원폭실험의 성공을 알게 된 스탈린은 서울 진격을 단념했다. 그 후 미소 참모총장 회담에서 암묵적인 양해로 미소의 작전 예정 구역은 한반도의 남부와 북부로 양분됐다.
7월 중순 이후 미국 맥아더 사령부는 ‘블랙리스트’ 작전, 즉 ‘일본의 갑작스러운 붕괴 없는 항복’ 작전에 따라 한반도의 3∼6개 전략지역을 3단계로 점령하고자 했다. 하지만 미군이 점령하기로 한 곳은 서울, 부산, 군산 및 전주 등이고, 북한 지역은 소련군에 맡겼다.
그 시점에 38선에 따른 분할 점령이 합의된 것은 아니었다. 여러 연구에서 지적된 것처럼 일본이 8월 10일 연합군에 항복 의사를 전달한 후부터 일반명령 제1호가 작성됐다. 38선 설정을 포함한 초안은 8월 14일 완성됐고, 다음 날 트루먼 전 대통령의 승인을 얻었다.
여기에서도 역사의 가정 하나가 존재할 수 있다. 일반명령 제1호를 만드는 과정에서 미 해군 가드너 제독은 두 차례에 걸쳐 미소 양국 군의 경계선을 39도선까지 밀어 올리자고 강하게 요구했다. 가드너는 포츠담에서 미소 참모총장 회담에 출석했고, 소련 측의 최소한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39도선이 제안되었다면 스탈린은 받아들였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39도선은 평양과 원산을 연결하고 청진, 함흥 등 부동항을 확보할 수 있는 경계선이기 때문이다. 만약 스탈린이 응하지 않았다면 미 해군과 공병대가 소련군에 앞서 남포와 평양을 점령했을 것이다.
만약 이 역사의 가정이 실현되었으면 6·25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김일성이라도 39도선 이북의 지역에 기지를 건설하고 대남 해방의 힘을 비축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코노기 마사오 규슈대 특임교수 겸 동서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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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38도선 분할 때는 담당자였던 미국의 장교 중에도 “이처럼 하나로 온전히 통일돼 있는 나라를 어떻게 하루아침에 둘로 나눈다는 거지?”라고 의문을 제기한 사람이 있었다는데, 나라를 되찾았다는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그 나라가 두 토막이 났다는 걸 알게 된 당시 우리 국민은 얼마나 황당하고 기가 막혔겠는가.
당 태종, 거란 소손녕, 도요토미도
이른바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충돌 지점”이라는 낡은 지정학적 관점을 들지 않아도, 한반도는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가 뒤바뀔 때마다 민감히 영향을 받았다. 어느 한쪽이 이 요충지를 독차지하기 힘들 바에는 갈라서 나눠갖자는 주장도 여러 차례 나왔다.
일찍이 648년, 당나라 태종은 신라의 김춘추에게 “힘을 합쳐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리고, 고구려 땅은 당이, 백제 땅은 신라가 차지하자”는 제의를 하며 나당동맹을 맺었다. 993년에는 거란의 소손녕이 “고려는 대동강 이남의 신라 영토를 갖고, 그 북쪽은 고구려를 이어받은 우리 거란이 가져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1593년에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에 국서를 보내 “조선 8도 중 남쪽의 4도를 우리 일본이 갖게 해준다면 전쟁을 그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근대화와 제국주의의 회오리가 몰아치던 동아시아의 근대에도 그런 분할안이 등장했다. 먼저 1894년 7월18일에 영국 외무장관이던 존 킴벌리가 당시 한반도 지배권을 두고 다투던 청나라와 일본에 “서울을 경계로 북쪽은 청나라가, 남쪽은 일본이 점령하자”고 제의했다. 영국은 당시 러시아의 남하를 경계하는 한편 청나라 정부가 보장해주던 이권에도 미련이 있었기에, 청나라를 도우려는 쪽이었다. 그렇다고 일본과 정면으로 맞설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조선에서의 충돌을 무마시키려 분할안을 제의했고, 겉보기와는 달리 청나라의 군사력이 종이호랑이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당시 청나라의 실권자 이홍장은 이 제안을 환영했다. 하지만 일본 쪽에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분할안은 무산되고, 청일전쟁을 거쳐 청나라 세력은 한반도에서 퇴장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는 한반도보다 일차적으로 만주에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조-러 동맹’을 맺자는 고종의 제의에 냉담하게 반응했으며, 1896년 5월 니콜라이 2세의 즉위 기념 축하연에 고종이 파견한 특사 민영환은 건성으로 대한 반면, 일본 특사 야마가타 아리토모와는 비밀 회담을 열었다. 그리고 야마가타는 그 회담에서 러시아에 “39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해 나눠갖자”는 제의를 했다. 러시아는 이 제안에 잠시 고심했지만 결국 거절한다. 조선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굳이 일본과 타협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을 것이고, 아직 만주의 지배도 확실히 못했는데 공연히 한반도 북부를 욕심내다가 영국을 비롯한 열강의 견제를 받게 되면 곤란하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강력해진 러시아, 일본에 역제안
이렇게 일단 무산된 러-일 사이의 한반도 분할안은 20세기로 넘어오면서 다시 한번 거론된다. 그리고 이번에는 어느 때보다 분할 성사 가능성이 높았다. 계기는 한반도를 둘러싼 역학관계에서 러시아가 불리해져서가 아니라, 오히려 유리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역으로 영국·미국 등을 긴장시켰다. 특히 중국·인도·중동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전체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입장에 있던 영국은 “특정 국가와 동맹을 맺지 않는다”는 오랜 외교 관행을 깨고 독일에 접근했다. 하지만 독일이 러시아에 대항한 영국과의 동맹에 호응하지 않자, 이번에는 일본에 눈을 돌렸다. 겉으로는 “39도 이북의 한반도를 중립지대로 하며, 대한제국의 독립은 러-일 양국이 보장한다”고 공식 문서에 표현돼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39도선을 경계로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를 분할하자는 이야기였다. 7년 전과는 달리 이 제안에는 양국 모두 신중한 검토를 아끼지 않았다. 두 나라 모두 상대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고, 이 분할안이 무산되면 그 다음은 전쟁뿐이라는 사실이 뻔했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일본이 러시아의 제안에 원칙적으로 찬성하면서 다만 “‘중립지대’의 범위를 만주 남부까지 확대하자”고 역제의한 것이 걸림돌이 되었다. 그렇게 되면 중립지대는 정말 중립지대가 될 판이니 러시아로서는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결국 전쟁인가? 당시 러시아에서는 아무리 영국의 힘을 업었다지만 극동의 작은 섬나라인 일본이 대러시아 제국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평가가 주류였다. 하지만 신중론도 만만치 않았다. 이를 대표하던 러시아 재무장관 세르게이 비테는 사견을 전제로 일본에 “정 그렇다면 전부터 한국이 주장해온 대로 한반도 전체를 중립화하면 어떠냐”며 제의하기까지 한다.
일본이 한반도에서 더 일찍 물러났을 수도
하지만 결국 두 나라 모두에서 강경파의 의견이 득세했다. 러시아는 당시 오랜 전제정에 지친 국민 여론이 날로 악화되고 볼셰비키를 비롯한 반정부 세력의 움직임이 점점 치열해지면서, 뭔가 해외에서 국민의 주의를 끌고 정부 지지도를 높여줄 소재를 찾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계속 조선을 차지하려고 공을 들였지만, 다른 나라들이 끼어드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분할이 합의되었다면 어땠을까?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당시 두 나라에서 국론의 향방이 조금만 옆으로 틀었어도 1903년 이후, 그러니까 1945년보다 40여 년 앞서 이 땅은 두 동강이 날 뻔했다. 실제 그렇게 되었다면 이후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일단 한반도를 차지하고 만주까지 손을 뻗치려던 일본의 야욕은 저지되었을 것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한반도와 만주로 진출하자는 북방공략론과 대만과 동남아시아를 노리자는 남방공략론을 함께 논해왔다. 한반도 남부에서 일단 북방 공략의 길이 막혔다면 남방을 대신 노려야 하는데, 그것은 영국과 미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한다(실제로 1901년에 일본이 대만 건너편인 중국의 아모이를 점령하려 했으나, 영국의 거센 반발에 부딪쳐 실패한 적이 있다). 하지만 비관적인 가설이 더 유력하다. 일본이 1930년대에 미국·영국과 등을 지고 결국 패망에 이른 까닭은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동아시아의 유일한 강대국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1890년대에서 1920년대까지 동아시아에서 중국·러시아·독일, 그리고 영국의 힘이 잇달아 쇠퇴하고, 그 자리를 일본이 메우는 일이 거듭되었다. 그리하여 아시아에서는 적수가 없어진 일본 군국주의의 기관차가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면서, 한때 우방이던 미국과 정면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반도가 1903년 이후 분할되었다면, 러일전쟁도 없었을 것이고 일본이 아시아의 유일 강대국이 되어 미국의 적수로 떠오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1945년 이후 남한의 독재정권이 냉전 전략의 일환으로 미국의 후원을 받았듯, 일본의 한반도 지배체제도 미국의 후원을 받아 더욱 공고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복거일의 역사소설 <비명을 찾아서>에 나오는 것처럼, “미국의 둘도 없는 파트너로 번영을 거듭하는 일본, 그 ‘지방’으로 완전히 귀속된 한반도와 황국신민임을 의심할 줄 모르는 한국인들”이 2010년의 현실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설령 ‘더 낙관적인’ 가설대로 일본이 일찍 패망하거나 군국주의를 버리게 되었다고 해도, 일단 한반도 북부와 남부가 러시아와 일본에 귀속된 이상 한반도의 통일이 순조롭고 평화롭게 이루어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의 뜻과 무관한 분단은 민족사의 비극이며, 그 비극이 더 앞당겨졌다고 할 때 이후의 역사가 행복해졌을 가능성은 많지 않다.
함규진 성균관대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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