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미술 애호가 소네는
‘좋은 불상을 외진 곳에 놔두기 아깝다’는 명분으로 석굴을 뜯어 서울로 옮기기로 결심한다.
소네는 경북 관찰사에게 필요 예산을 보고하라고 지시한다.
동해안 감포로 옮겨 배에 싣고 인천으로 나른 뒤 서울로 가져갈 요량이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그의 방문 뒤
석굴 본존불 뒤쪽 대리석 소탑과 감실 불상 2구가 홀연히 사라졌다.
일제 강점기 日本人들의 석굴암 관련 저술에서는
한결같이 소네를 유물을 훔친 장본인으로 기술했다.
지금도 유물의 행방은 모른다.
소네는 1849년 한반도와 마주보는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났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래 정권을 50여년간 독차지한 ‘일본판 티케이’
(대구 경북의 약자 영어 T.K) 지역 출신으로,
프랑스에 유학해 외교관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동향 선배 이토 히로부미의 총애 속에
주프랑스 대사, 내각 대신 등을 두루 맡았고,
이토 피살후 2대 통감에 취임한다.
소네는 조선을 7~8년간 보호국으로 유지한 뒤 합병하자고 주장해
친일파 단체 일진회의 즉각 합병론과 대립했다.
이런 정치적 암투 와중에 病을 얻어 1910년 5월 통감에서 물러났고,
한일병합 직후인 9월 숨졌다.
더불어 석굴암 이전도 흐지부지되었으니,
조선병합을 둘러싼 권력 다툼이 비극을 막은 격이다.
103년 전 오늘(6월14일)은 소네가 조선 통감에 임명된 날이다.
그의 취임과 함께 이 땅 문화유산들의 암흑기는 시작되었다.
석굴암을 불구로 만든 일본의 전직 외교관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한겨레 신문 고정 칼럼 유레카의 내용으로
노형석 기자의 2012.6.14일 기고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