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4.27 20:32 수정 : 2012.04.28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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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성(石星): 임진왜란 당시 명의 병부상서 석성. 조선이 원병을 요청하여 명 조정에서 논란이 벌어졌을 때 조선에 군대를 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각에서는 그의 애첩이 조선인 역관 홍순언에게 입었던 은혜를 갚기 위해 석성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설도 있다. 1593 년 벽제전투 이후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일본과의 강화 협상에 집착했고, 협상이 성과 없이 끝나자 탄핵을 받아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립진주박물관>(2010)에서 전재 |
[토요판] 한명기의 -420 즉 420년전의 임진왜란
⑮ 명군 참전의 속내
“과거 조선 전쟁 때 명은 처음부터 천하의 병력을 동원했습니다. 중국의 재력을 고갈시키면서까지 이 구구한 속국을 원조했던 까닭이 무엇이었습니까? 조선을 구원하는 것은 요동을 지키기 위한 것이고, 요동을 구원하는 것은 북경과 그 주변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618년(광해군 9) 명의 신료 이징의(李徵儀)가 신종(神宗) 황제에게 올린 상소의 내용이다. 임진왜란 당시 명이 병력을 보내 조선을 도왔던 이유가 요동과 북경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조선이 일본군에게 떨어지면 압록강 너머 요동이 위험해지고, 요동이 흔들리면 결국 명의 심장부인 북경 일대가 위협받게 되는 상황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일본군 지휘부는 조선 침략에 나서면서 ‘길을 빌려 명으로 들어간다’〔假道入明·가도입명〕는 명분을 내세웠는데, 명 또한 북경과 요동의 울타리로서 조선이 갖는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 전쟁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가도입명’이라는 황당한 공갈
1592년 5월3일 일본군은 서울에 입성했다. 가토 기요마사로부터 서울을 점령했다는 보고를 받은 직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군 지휘부에 몇 가지 지시사항을 하달했다. 북으로 파천한 조선 국왕을 찾아내라는 것과 점령지역에 대한 선무 지침이었다. 그 가운데는 ‘병사들의 군율을 세워 난폭한 행동을 금지할 것’, ‘서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거처를 마련할 것’, ‘군량을 마련하고 비축할 것’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서울 점령을 통해 조선을 사실상 제압했다고 보고 조선을 거점으로 삼아 명에 대한 침략에 착수하겠다는 구상을 드러낸 것이다.
5월14일 일본군 지휘부는 종군 승려 천형(天荊)을 시켜 조선 측에 전달할 서신을 작성했다. 자신들은 ‘여전히 조선과 강화를 맺고자 한다’는 것, 과거 ‘명을 치기 위해 길을 빌려달라고 요구했음에도 조선이 받아들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공격을 감행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애초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에게 순순히 길을 빌려주었더라면 조선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을 것’이라며 ‘조선 국왕이 속히 돌아와 명과 일본 사이의 강화를 주선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면서 ‘거부할 경우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협박도 빼놓지 않았다.
참으로 황당하고 기만적인 공갈이었다. <천자문>에 보면 ‘가도멸괵’(假道滅)이란 구절이 나온다. ‘길을 빌려 괵나라를 멸망시키다’라는 뜻이다.
본래 <춘추좌씨전>과 <사기>에 있는 이 구절에 얽힌 고사는 대략 다음과 같다. 진(晉)의 헌공(獻公)이 괵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진과 괵 사이에 끼여 있는 우(虞)나라에 길을 빌려달라고 요청한다.
허락 여부를 망설이던 우공(虞公)은 진으로부터 말과 보화 등을 통행료로 받고 진의 병력이 자국 땅을 통과하도록 허락한다. 우의 대부 궁지기(宮之奇)는 우와 괵의 관계를 ‘입술’〔脣〕과 ‘이’〔齒〕와 같다고 비유한 뒤 ‘진에게 길을 빌려주면 반드시 우를 공격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우공은 듣지 않았다. 괵을 멸망시킨 진이 귀환하는 길에 우까지 공략하여 멸망시키자 궁지기는 우공에게 통탄한다. “대왕께서는 보화를 탐하시다가 나라를 멸망시켰다”고.
<천자문>이 일본에 전래된 것은 1000년이 훨씬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초학자 대부분이 이 책을 습자(習字)의 교본으로 삼았던 것을 고려하면 일본인들 또한 ‘가도멸괵’의 고사를 모를 리 없을 것이고, ‘가도입명’이라는 명분이 얼마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조선에 대해 계속 그것을 되뇌었던 것은 침략을 호도하려는 기만책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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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만력제(神宗 萬曆帝, 1563~1620): 임진왜란이 벌어질 당시 명의 황제. 이름은 주익균(朱翊鈞). 1572년 즉위한 직후 재상 장거정(張居正)을 신임하여 사회경제적으로 중흥의 치적을 남겼다. 1592년 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했을 때,
분분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는 결단을 내렸다. 이 때문에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그를 가리켜 ‘고려 황제’로, 그가 조선에 베푼 은혜를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 부르며 숭앙하는 기운이 높아졌다.
이후 정무를 팽개치고 자신의 개인 금고를 채우는 데 몰두하여 명의 멸망을 재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만력제>(1993, 인민출판사)에서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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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서울을 거점으로
명나라 침략 의욕을 드러내자
명은 요동과 북경을 지키기 위해
조선을 돕기로 결정했다
명군 3천명이 압록강을 건넜으나
조총 앞에 힘없이 궤멸했다
이에 놀란 명은 병력을 충원
왜군을 조선에 묶고자 고민했다
원병 요청했으나, 명은 조선을 의심하다
조선은 일본 측의 요구를 일축했다. 평양까지 파천했던 선조는 한응인 등을 보내 임진강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하지만 5월 말에 벌어진 전투에서 임진강 방어선은 뚫리고 만다. 강을 건너 선제적으로 일본군을 공격하려다가 복병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이 임진강을 건너 추격해 오자 조선의 위기의식은 고조되었다. 이항복 등은 명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요청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반론이 만만치 않았다. 우선 명이 군대를 파견할지 확신할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또 일각에서는 명군이 들어와도 별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비관론이 대두했다. 당시 명이 조선에 즉시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요동과 광녕(廣寧) 등지의 병사들이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이들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성격이 거칠고 난폭한데다 민폐를 마구 자행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전라도 일부를 제외한 남쪽 지방 대부분이 함몰된 상태에서 오랑캐와 다름없는 요동병들이 평안도에 들어와 민폐를 자행하면 나라가 완전히 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하지만 일본군이 대동강을 건너 평양을 위협하자 분위기는 다시 변했다. 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 몰린 상황에서 다른 것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명에 원병을 요청해야 한다는 주장이 다시 힘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조정은 논란 끝에 정곤수(鄭崑壽)를 먼저 보내고 곧이어 이덕형도 청원사(請援使)로 임명하여 요동으로 파견한다.
조선은 왜란 발생 이전부터 일본의 동향을 명 조정에 보고했다. 이미 1592년 3월 일본이 ‘명을 치는 데 길잡이가 되어 앞장서라’〔征明嚮導〕고 협박했다는 사실을 통고한 바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5월10일 명 조정에 전해졌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은 직후 명은 우선 자국의 방어태세부터 점검했다. 5월10일 명 병부는 요동과 산동 등 일본군의 침략이 우려되는 지역의 방어태세를 강화하자고 촉구했고, 이어 계요총독(遼總督) 건달(蹇達)의 주청에 따라 북경과 가까운 천진의 방어를 강화하는 조처를 취했다.
그런데 평양이 함락되고 선조가 의주까지 내몰려 원병을 요청했음에도 명은 쉽사리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그것은 명의 내부 사정과 조선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었다. 당시 명은 내부적으로 반란을 진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1592년 2월 영하(寧夏)에서 몽골 귀화인 발배(拜) 등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명에서는 또한 ‘조선이 일본군을 끌어들여 요동을 넘보려 한다’는 풍문이 돌고 있었다. 일찍이 1577년 무렵 베트남 연해에서 무역에 종사하던 중국인 주균왕(朱均旺)이란 인물이 일본으로 잡혀간 일이 있다.
그는 당시 사쓰마(薩摩)의 시마즈씨(島津氏) 밑에서 의업에 종사하던 허의후(許儀後)에게 구출되었다. 이후 허의후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을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주균왕을 통해 명에 알리려고 시도한다. 주균왕은 1592년 1월 중국 상선을 타고 복건에 상륙하여 복건순무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그 가운데는 ‘1590년 조선이 나귀를 바치기 위해 입공하여 일본의 앞잡이가 되었다’, ‘1591년 조선 사신이 다시 와서 빨리 명을 공격하라고 채근했다’는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허위보고와 맞물려 명에서는 ‘조선이 일본군의 앞잡이가 되고 가짜 조선 왕이 요동으로 향하고 있다’는 등의 소문이 힘을 얻고 있었다.
명은 또한 서울이 너무 쉽게 함락되었던 사실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었던 터라 선조의 파천 사실과 원조 요청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급기야 명의 병부상서 석성(石星)은 1592년 6월 요동도사(遼東都司)에 지시하여 조선에 정탐꾼을 들여보낸다. 최세신(崔世臣)과 임세록(林世祿)이 그들이었다.
두 사람은 일본군의 실정을 살피는 한편, 조선의 보고 내용이 사실인지를 검증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명 조정은 이어 과거 조선에 왔던 적이 있는 송국신(宋國臣)이란 인물을 들여보내 선조의 얼굴을 직접 확인하는 작업까지 벌인다. 그가 대동했던 화가는 선조의 화상을 몰래 그려 명으로 가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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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의 모습. 조승훈이 이끄는 명군은 1592년 7월 평양성을 공격했다가 참패했다. 이후 명은 대규모 병력동원에 나서는 한편 일본군을 묶어놓기 위해 부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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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조승훈의 오만함과 병사들의 약탈
우여곡절 끝에 조선에 대한 의심이 풀리자 명의 요동도사는 조선에 병력을 들여보낸다. 청원사로 요동에 갔던 이덕형은 안무사 학걸(杰)의 관아에 나아가 통곡하며 병력 출동을 간청했다. 6월 중순부터 7월10일까지 사유(史儒), 조승훈(祖承訓) 등이 거느리는 명군 3500여명이 압록강을 건너왔다.
명군 가운데 조승훈 휘하의 병력은 기강이 엉망이었다. 민가에 난입하여 약탈을 마구 자행했다. ‘의주 주민들이 모두 산으로 피신하여 경내가 텅 비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애초 조선 신료들이 제기했던 요동병의 작폐에 대한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명군의 전력은 일본군을 제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우선 2만 가까운 일본군을 상대하기에는 병력이 턱없이 적었다. 또 대부분 기병으로 구성되어 조총에 맞설 만한 화기도 제대로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럼에도 조승훈은 일본군을 얕보았다. 몽골족과의 전투 경험이 전부였던 그는 가산에 도착해서는 ‘왜적이 아직도 물러가지 않은 것은 하늘이 나의 성공을 도우려는 것’이라며 기염을 토하기까지 했다.
7월17일 명군은 순안에서 출발하여 평양성을 공격했다. 조선군 3천명도 조승훈을 따랐다. 명군이 칠성문(七星門)으로 돌격하자 일본군은 일제히 조총을 발사하여 반격했다. 때마침 많은 비가 내려 진창이 되자 명군 기마대는 제대로 힘을 쓰지도 못한 채 궤멸되었다. 사유를 비롯한 장수들이 총에 맞아 전사하자 조승훈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도주했다.
조승훈의 패전 소식이 알려지자 명 조정은 경악했다. 일본군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일본군이 의주를 지나 압록강을 건너 명 본토로 진입할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되었다. 명은 다시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는 한편, 일본군을 묶어두기 위한 방책을 고민하게 된다. 임진왜란이 조일전쟁을 넘어 동아시아 삼국의 전면전으로 비화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