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전 어느 대법원장의 최후와 박시환 대법관(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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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3,137회 작성일 2012-04-16 10:33본문
[동아일보]
유태흥(兪泰興) 전 대법원장과 박시환(朴時煥) 변호사.
두 사람은 사법부의 상반된 두 모습을 상징한다. 유 전 대법원장은 5공 군사정권 당시 사법부의 수장으로 판사들에게 ‘투철한 국가관에 의한 판결’을 강조했다. 그의 대법원장 재임 시절은 ‘사법부의 암흑기’로 불린다. 박 변호사는 판사 초임 시절부터 그런 국가관을 거부하며 인권을 앞세우는 판결로 맞서 왔다.
두 사람은 1985년 ‘법원 인사파동’의 주역으로 악연을 맺었다. 그해 6월 인천지법 판사였던 박 변호사가 불법시위 혐의로 즉심에 넘겨진 대학생들에게 무죄를 선고하자 유 대법원장은 9월 1일 정기인사에서 박 판사를 춘천지법 영월지원으로 ‘유배’를 보냈다.
당시 서태영(徐泰榮·변호사) 서울민사지법 판사는 다음 날 발행된 ‘법률신문’에 이 인사를 비판하는 ‘인사유감’이라는 글을 실었고, 유 대법원장은 서 판사마저 울산지원으로 좌천시켰다.
이 파동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유 대법원장 자신이었다. 그는 대한변호사협회로부터 사퇴 권고를 받았고,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국회 탄핵소추의 대상이 되는 불명예를 기록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19일.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유 전 대법원장의 장례식장에서였다. 유 전 대법원장은 이틀 전인 17일 한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박 변호사는 영정 앞에 잠시 서 있다가 무릎을 꿇고 묵념을 올렸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고, 그는 한참동안 그렇게 있었다.
1986년 대법원장 직에서 퇴임한 이후 유 전 대법원장의 인생은 바뀌었다. 그는 세상과 단절하며 여생을 보냈다. 변호사로 등록은 했지만 사건은 단 한 건도 맡지 않았고 사회적 발언이나 활동도 하지 않았다. 딸도 먼저 세상을 떠났다.
말년에는 경제적 어려움도 심했다. 대법원에서 역대 대법원장에 대한 예우 차원으로 명절에 과일 한 상자를 보냈을 때 그는 “과일 대신 현금을 주면 좋겠다”고 했다고 한다.
86세의 나이에 한강에 투신한 것에 대해서도 그를 잘 아는 원로 변호사는 “삶의 고통과 고뇌 때문에 그렇게 세상과 절연(絶緣)한 것 같다”고 말했다.
박 변호사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그는 시국 공안사건에서 단골로 무죄 판결을 내렸고 1990년대 소장 판사들의 사법개혁 파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2003년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로 다시 법원의 개혁을 요구하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생각에 법원을 떠났다.
장례식장을 나서는 박 변호사에게 눈물의 이유와 의미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는 “고인에게 어쩐지 미안하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비판은 발전을 위해 불가피하지만 그 비판의 칼날이 제도와 사회가 아니라 개인에게 향해지면서 그 개인이 상처를 많이 입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날 유 전 대법원장과 박 변호사의 ‘20년 만의 화해’를 지켜보면서 언젠가 보았던 금언(金言)이 떠올랐다. ‘저주와 비난보다 연민이 더 많은 죄악을 치유한다’는….
이수형 사회부 차장 sooh@donga.com
유태흥(兪泰興) 전 대법원장과 박시환(朴時煥) 변호사.
두 사람은 사법부의 상반된 두 모습을 상징한다. 유 전 대법원장은 5공 군사정권 당시 사법부의 수장으로 판사들에게 ‘투철한 국가관에 의한 판결’을 강조했다. 그의 대법원장 재임 시절은 ‘사법부의 암흑기’로 불린다. 박 변호사는 판사 초임 시절부터 그런 국가관을 거부하며 인권을 앞세우는 판결로 맞서 왔다.
두 사람은 1985년 ‘법원 인사파동’의 주역으로 악연을 맺었다. 그해 6월 인천지법 판사였던 박 변호사가 불법시위 혐의로 즉심에 넘겨진 대학생들에게 무죄를 선고하자 유 대법원장은 9월 1일 정기인사에서 박 판사를 춘천지법 영월지원으로 ‘유배’를 보냈다.
당시 서태영(徐泰榮·변호사) 서울민사지법 판사는 다음 날 발행된 ‘법률신문’에 이 인사를 비판하는 ‘인사유감’이라는 글을 실었고, 유 대법원장은 서 판사마저 울산지원으로 좌천시켰다.
이 파동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유 대법원장 자신이었다. 그는 대한변호사협회로부터 사퇴 권고를 받았고,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국회 탄핵소추의 대상이 되는 불명예를 기록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19일.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유 전 대법원장의 장례식장에서였다. 유 전 대법원장은 이틀 전인 17일 한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박 변호사는 영정 앞에 잠시 서 있다가 무릎을 꿇고 묵념을 올렸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고, 그는 한참동안 그렇게 있었다.
1986년 대법원장 직에서 퇴임한 이후 유 전 대법원장의 인생은 바뀌었다. 그는 세상과 단절하며 여생을 보냈다. 변호사로 등록은 했지만 사건은 단 한 건도 맡지 않았고 사회적 발언이나 활동도 하지 않았다. 딸도 먼저 세상을 떠났다.
말년에는 경제적 어려움도 심했다. 대법원에서 역대 대법원장에 대한 예우 차원으로 명절에 과일 한 상자를 보냈을 때 그는 “과일 대신 현금을 주면 좋겠다”고 했다고 한다.
86세의 나이에 한강에 투신한 것에 대해서도 그를 잘 아는 원로 변호사는 “삶의 고통과 고뇌 때문에 그렇게 세상과 절연(絶緣)한 것 같다”고 말했다.
박 변호사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그는 시국 공안사건에서 단골로 무죄 판결을 내렸고 1990년대 소장 판사들의 사법개혁 파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2003년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로 다시 법원의 개혁을 요구하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생각에 법원을 떠났다.
장례식장을 나서는 박 변호사에게 눈물의 이유와 의미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는 “고인에게 어쩐지 미안하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비판은 발전을 위해 불가피하지만 그 비판의 칼날이 제도와 사회가 아니라 개인에게 향해지면서 그 개인이 상처를 많이 입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날 유 전 대법원장과 박 변호사의 ‘20년 만의 화해’를 지켜보면서 언젠가 보았던 금언(金言)이 떠올랐다. ‘저주와 비난보다 연민이 더 많은 죄악을 치유한다’는….
이수형 사회부 차장 sooh@donga.com
2005년1월22일 작성 동아일보 보도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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