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박삼용(44)의 배구는 선이 굵다. 그의 화려했던 현역 생활 뒤에는 남모를 비애가 숨어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어려서는 키가 작아 한동안 배구를 떠나 있었고 팀(고려증권)의 고참으로 화려한 종지부를 찍어야 할 시점에는 외환위기 때문에 자신보다는 후배들의 처지를 걱정해야 했다. 치킨집과 호프집 사장도 해봤다. 일찍 지도자로 나서 30대 중반에 실업팀 감독을 맡았다. 한때 최정상에 있던 팀이었지만 무너지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었다. 몸과 마음을 다 놓아버린 선수들의 정신 자세를 잡으려 계약기간이 한참 남았지만 잔여기간의 연봉을 고사하고 스스로 감독직을 내놓았다. 토속적인 이름에 걸맞은 얼굴을 갖고 있는 박삼용의 배구 인생은 이렇게 고난은 많았지만 구차하지 않았다. 프로배구 2011∼2012시즌 정규리그 우승에 이어 챔피언결정전까지, KGC 인삼공사 여자 프로배구팀을 맡은 지 3시즌 만에 통합우승을 일궈내 박삼용의 선 굵은 배구는 드디어 보상을 받은 것 같다. 지난 12일 대전 신탄진의 인삼공사체육관에서 박삼용 감독을 만났다.친숙한 이름, 삼용(三龍). 셋째 아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들로는 장남. 위에 누님 한 분, 그리고 남동생이 있단다. 동생 이름은 오룡. “아버님이 화투 좀 치셨나 보네?”하는 질문에 껄껄 웃는다. 박 감독은 “이름 덕 좀 봤죠”라고 한다. 한번 들으면 누구나 잊지 않기 때문이다. 성인이 된 후 좀 촌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작명소에 갔었다. “‘최고의 이름이다. 절대 바꾸지 말라’고 합디다.”
부산에서 초등학교부터 고교까지 졸업했지만 부산 사투리는 거의 쓰지 않는다. ‘팔음산 포도’로 유명한 경북 상주시 화동면 보미리에서 출생했지만 세 살 때 서울로 올라와 살다 일곱 살 때 부산으로 와서 그렇단다. 물론 고향 친구들과 만나면 사투리를 사용한다.
육상과 공놀이라면 못하는 게 없었던 그는 초등학교 4년 때 본격적으로 배구를 했다. “원래는 야구를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한 후 학교 말단 직원으로 근무하던 형편 때문에 돈이 많이 드는 야구를 하겠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지요.” 시작부터 포지션은 레프트. 소질이 있었던지 대회에 나갈 때마다 두각을 나타내 3번이나 스카우트 됐다. 금강초교-운봉초교를 거쳐 졸업은 보수초교에서 했다.
그러나 동아중 1년 때 배구를 그만두게 된다. “161㎝이던 키가 거기서 딱 멈췄어요.
공부나 하자고 학교를 집 근처인 거성중으로 옮기고 신나게 놀기만 했지요. 그 덕인지 중3 때 186㎝로 자랐는데 배구를 함께 했던 친구 어머니가 부쩍 큰 것을 보고 배구를 다시 하라고 합디다.
동성고에 진학하기로 했지만 특기자 원서 접수 기간을 놓쳐 동성고에서 배구를 하면서 학원을 다녔지요. 이듬해 부산사대부고로 입학해 두 달 만에 특기생으로 동성고로 전학했습니다.”
박삼용은 고2 때 부상을 당해 8일간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게 보약이 됐다. “병원 밥 세끼, 집에서 보낸 밥 3번, 밤에는 환자들과 야식. 덕분에 체격이 부쩍 좋아져 지금 이 체격(190㎝ 90㎏)이 됐어요.” 고2 때 이경석(현 LIG감독) 이후 8년 만에 동성고를 전국대회에서 우승시킨다. “1985년 대통령배대회 결승에서 성남 송림고와 만나 마지막 세트 6-13으로 뒤지고 있다가 역전시켜 우승했죠. 그 해 전국체전에서는 제천 광산공고에 예선에서 지고 결승에서 다시 만나 3-2로 이겼죠. 광산공고에는 세터 이성희와 레프트 마낙길이 있어 최강이었는데 풀세트까지 간 결승전은 지금도 고교배구 최고 명승부의 하나로 알려져 있죠. 1986년 춘계연맹전에서는 윤종일, 하종화가 있는 진주 동명고를 누르고 우승했어요.”
‘동성고에 산적같이 생겼고 힘이 장사인 레프트가 있다’는 소문이 퍼져 그는
대학팀의 스카우트 표적이 된다.
경기대가 3000만원의 스카우트비를 제시했지만 그는 서울시립대를 선택한다. 당시 시청팀(시립대 선수들은 실업팀 서울시청으로 출전했다)의 송유진 감독이 고교선배인 이유도 있지만 스카우트를 위해 자주 부산에 내려온 신춘삼 코치(현 KEPCO감독)의 인상이 좋아 보여서 반밖에 주지 않는 팀을 골랐다 한다.
박삼용은 실업팀을 갈 때도 돈보다는 사람을 택했다. 사실상 대학팀인 서울시청은 박삼용, 서남원(대한항공 코치), 어창선(도로공사 감독), 이성희, 신만근 등 1, 2학년 멤버들이 좋아 실업 강호 현대차서비스, 고려증권, LG화재(현 LIG손보)를 괴롭히는 다크호스였다.
졸업할 때가 되자 LG가 1억6000만원을 제시했지만 박삼용은 결국 8000만원을 준다는 고려증권에 1991년 3월 입단했다. 호흡을 맞춰 온 1년 선배 이성희가 고려증권에 갔기 때문이다.” 1억6000만원은 당시 큰돈이었지만 이성희 선배와 호흡이 가장 잘 맞았기 때문에 길게 보고 고려증권을 택했죠. 그 덕분에
마인드도 더 좋아졌고 제 이름도 더 높아졌고, 아무튼 조금 손해보고 내린 그때의 결정이 오늘날의 박삼용이 있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LG에는 황현주(현대건설 감독), 최영준이 세터였는데 대표팀에서 해보면 이성희하고 가장 잘 맞았어요.”
박삼용의 배구 인생 주변에는 두 사람이 있다. 바로 이성희와 ‘
명장’ 진준택 감독이다. 1년 선배 이성희와는 지금까지도 실과 바늘 같은 사이이고 고려증권 시절 사령탑이었던 진준택 감독은 박삼용에게 따르고 싶은 지도자상을 깊이
각인시켜준 진정한 스승이었다.
“진 감독은 뚝심 있게 선수들을 믿어주는 감독이셨어요. 그리고 포지션에 꼭 있어야 할 선수를 보는 안목도 있었죠. 현대
건설과의 챔피언결정전 최종 5차전은 ‘진준택 스타일’로 했어요. 우리 팀이 나은 부분은 용병 1명밖에 없었지요. ‘힘들 때 서로가 믿지 못하면 절대 안 된다. 옆 선수가 못해도 표정에 나타내지 말고 다독거려서 해나가자’고 선수들을 독려했어요. 진준택 감독을 닮아 넉넉함을 지닌 지도자가 되고 싶습니다. 지도자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용장, 맹장, 지장, 덕장으로 바뀐다고 하던데 저는 처음부터 덕장이 되고 싶었어요.
대한항공 감독을 맡아 오랜만에 복귀, 고려증권 제자들인 저나 이성희, 홍해천(송림고 감독)에게 코치로 와달라고 부탁하셨는데 다들 현직을 떠날 수 없는 형편이라 도와드리지 못했어요. 계약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떠나신 것이 꼭 내 탓 같아 죄송한 마음이었어요.”
팀의 이성희 수석코치는 대학 1년 선배로 GS칼텍스 감독까지 지냈다. 09∼10 V리그 플레이오프에서 박삼용의 인삼공사에 져 탈락, 감독직을 그만뒀는데
배구연맹(KOVO)
경기위원을 하다, 박삼용의 부탁을 받고 후배 밑에서 수석코치직을 기꺼이 맡았다. 이 코치는 “너니까 맡지”라고 했다고 한다. 박삼용의 품이 그만큼 넉넉하다는 의미로 들렸다.
3년 만에 챔프전에서 두 번이나 우승, 성공한 지도자가 됐지만 박삼용의 지도자로서의 첫발은 대실패였다. 35세 때 LG정유(현 GS칼텍스) 감독을 맡았다. 1991년부터 1995년까지 92연승을 기록했던 정상의 팀이었지만 주전들의 노쇠화로 내리막길을 걸을 때 감독을 맡았다. “내 경험도 부족했지만 포지션에 필요한 선수도 없었어. 게다가 선수들이 의욕도 없었고. 결국 3년간 7승47패를 기록하고 단장에게 ‘제발 감독직을 떠나게 해 달라’고 사정했어요. 선수들에게 자극을 주려면 그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잔여 계약기간의 연봉도 받지 않겠다고 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