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석영 (황수영) 소설가
- 출생
- 1943년 1월 4일 (만주)
- 학력
- 동국대학교 철학 학사
- 데뷔
- 1962년 사상계 '입석부근' 등단
- 수상
- 2008년 제3회 마크 오브 리스펙트상
- 경력
- 2004.03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
- 관련정보
- 네이버[지식인의 서재] - 소설가 황석영의 서재
- 사이트
- 블로그, 트위터
황석영 "내가 자서전 쓰면 다칠 사람 많아(웃음)…"
"구한말 이야기꾼의 인생에 황구라 파란의 삶 녹인 작품 쓰고 있죠" [100℃ 인터뷰] 등단 50년 '시대의 이야기꾼'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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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 들면 감각이 둔해지지 않느냐는 질문에 황석영은 "나는 팔굽혀펴기 120개씩 한다"고 대답했다. "90세까지 소설을 쓰겠다"는 약속은 아마도 지켜질 듯하다. 류효진기자 jsknigh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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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소설 4월부터 본보 연재 근대 모색하던 19세기 배경, '황석영 아바타' 등장시켜 내가 겪은 20세기 우회적 투영
▲인생 자체가 삼국지 베트남전서 베를린 망명까지 '아시아人' 정체성 깨달아… 나는 보기드문 '복잡한 작가'
▲5년 투옥 후 작품 변화
방북후 베를린서 세계변화 목도, 서구 극복 위해 종래 산문 해체, 西道東器 '동양의 형식' 중시
▲창작열 동력은 '문학주의' 앞으로 20년은 더 쓸 것, 라이벌이자 좋아하는 문인은 '토박이 이야기꾼' 이문구
올해로 문학인생 50년. 1962년 '입석 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한 소설가 황석영의 반세기 삶은 파란만장했다. 자퇴와 가출, 막노동 떠돌이 생활, 베트남전 참전, 방북, 해외체류, 수감생활 등 그의 삶 자체가 한국 현대사의 핍진한 풍경이었으며, 살아있는 문학이었다. 그 여정에서 나온 <객지> <삼포 가는 길> <장길산> <무기의 그늘> <손님> <심청>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등 숱한 문제작은 한국 현대문학의 돌올한 봉우리다.
이 한국문학의 거인에 붙여진, 비판적 리얼리스트나 낭만적 현실주의자, 떠돌이 광대, 영원한 청년작가 같은 수식들이 일견 어울리면서도 어딘지 허전하다. 차라리 '황구라'는 어떤가. 1974년부터 무려 10년간 한국일보에 <장길산>을 연재할 당시 한국일보 기자들이, 끝도 없이 '설'을 풀던 그의 필력에 혀를 내두르며 붙여 준 별명이다. 고희의 나이에도 지칠 줄 모르는 걸출한 입담에다 역사의 현장을 떠도는 유목적 삶을 산 황석영을 이보다 더 적절히 표현할 말이 있을까. '황구라' 황석영은 시대를 껴안은 이야기꾼인 것이다.
등단 50년을 맞은 그가 자전적 요소를 담은 '이야기꾼'에 대한 소설을 들고 독자들을 찾는다. 4월부터 한국일보에 연재하는 장편소설 '여울물 소리'는 구 체제가 무너지고 근대의 문물이 쏟아지던 격변기인 19세기를 배경으로 이야기꾼의 일생을 뒤쫓는 내용. 그의 한국일보 소설 연재는 <장길산> <손님> <심청>에 이어 네 번째다. 지난달 30일 인사동에서 그를 만나 새 연재를 앞둔 심경과 문학인생 50년에 대해 들어봤다. 만남은 밥집에서 술집으로 옮겨 새벽까지 이어졌다. 장장 9시간에 걸쳐 쏟아놓은 질펀한 이야기들을 추려 전한다.
-등단 50년을 맞는 해인지라, 이번 연재 소설은 남다를 것 같네요.
"대개 외국 작가들이 이 나이쯤 되면 자전을 좀 남기는 모양이다. 내 인생 자체가 삼국지라서 굉장히 드라마틱하고 다른 사람 일생 산 것의 열 배는 되지 않을까 싶어요. 한번도 평화로운 일상을 보낸 적이 없으니까. 그런 걸 쓰려고 보니까 요새는 사생활 침해 이런 게 걸려서 주위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쓸 수가 없어요. 가만 생각을 해보니까 한국일보가 지어준 '황구라'라는 별명이 내가 이야기꾼이라는 거잖아. 인생을 회고하면서 이야기꾼에 대해 써 보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시점은 근대의 틀이 형성되는 19세기로 잡았지. 나는 우리 사회가 외양은 포스트모던 시대로 들어온 것 같지만, 사실 내용은 근대를 못 벗어났다고 봐요. 근대의 억압의 잔재, 흔적, 트라우마를 그대로 안고 있다고. 19세기는 동학이 형성되면서 자생적 근대를 모색하던 때죠. 최제우, 최시형이 나오고 전봉준이 나섰다가 작살도 나고 강증산 같은 관념적 사상가가 나오기도 하고. 거기에 황석영 아바타를 보내서 그런 것들을 겪으면서 얘기를 풀면, 내가 겪어 온 20세기를 또 다른 방식으로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자전적인 성격도 있는 듯한데.
"내가 겪은 게 투영되겠지. 우금치에서 동학이 깨질 때 주인공이 빨빨거리고 살아나와서 세월과 부딪쳐가는 데, 광주항쟁 경험이 녹아 드는 식. 그렇게 시대를 비교해가면서 쓰는 거죠".
-직접 자서전을 쓸 계획은 없나요.
"아 없어. 나중에 10년 뒤, 팔십쯤 되면 대화집이나 낼까 해요."
-자서전을 안 쓰는 이유가 있나요.
"농담 삼아 말하는데 내가 입을 열면 다칠 사람 많아요.(웃음) 지금 문학동네 카페와 경향신문에 한국 명단편 100선을 쓰고 있는데, 다루는 사람들이 수십 년 위 선배들이야. 그걸 쓰면서 느낀 건데, 알려진 것 외에 내가 아는 사실이 너무 많아. 나도 깜짝 놀랐어. 근데 동시대를 쓴다고 하면, 야 이건…. 기자들에겐 특종 많이 나올 텐데, 그러다 나 암살당해.(웃음)"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 다양한 면모를 보여줬는데, 스스로를 어떻게 보나요. 리얼리스트, 아니면 모더니스트? 낭만주의자, 또는 공상가?
"그런 거 다죠. 복잡하게 왔다갔다 하는 사람. 오에 겐자부로가 나에 대해 '그는 <객지>나 <무기의 그늘>을 쓰는가 하면, <바리데기>라든가 <오래된 정원> 같은 세계로 갔다가, 종잡을 수가 없다. 그는 아마 내가 보건대 일본에서도 드문 복잡한 작가가 아닌가 싶다'고 했는데, 아주 적절하다고 봐요."
-인생의 여러 경험 중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을 꼽는다면.
"베트남전쟁 참전이지. 여덟살 때 한국전쟁을 겪었는데, 1940년대 생에겐 다들 한국전쟁 경험이 강렬하게 남아 있을 거예요. 나는 20세기에 가장 강렬한 서사를 가진 게 60, 70년대 문학이라고 생각해. 그때 와서야 비로소 개인과 세계, 역사와 개인의 관계가 복합적이고 현대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면서, 세계 현대문학과 비등할 정도의 수준과 깊이를 갖게 되었지. 그게 전쟁체험 때문이 아닌가 해요. 근데 베트남에 가서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이 서로 연결돼 있다는 걸 발견했던 거야. 그게 뭐냐면 자기 자신과 동시에 타자를 발견하게 되고 인식하게 된 거. 특히 미국, 일본에 대해 새삼 알게 되면서 내 정체성을 느꼈지. 분단된 나라의 귀퉁이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아시아 사람이었구나 하는 걸 포괄적으로 발견하게 된 건데,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베를린 망명 시절을 겪으면서 그 인식이 더 깊어진 거지."
-젊었을 때 자살 기도도 했던 걸로 아는데.
"자아에 사로잡혀 있을 때 세 번 했지. 10대 때 두 번, 군대 가기 전에 한 번. 근데 진짜 죽기를 각오했다기보다 어설프게 했으니 아직 살아 있는 거지. 처음에는 동맥을 잘랐는데 피가 나오다 말았어. 두 번짼 약을 먹었는데, 어머니에게 발견됐지. 아, 난 불효자야. 그때는 5일만에 깨어났나 그래. 거의 죽다 살아났어. 세 번째가 술 엄청 먹고 화덕 같은 걸 방에다 들여놓고 문 잠그고 자는데 또 발견되어서 살았지."
-젊은 시절의 그 허무함을 극복하게 한 힘이 뭔가요.
"그게 문학이야. 죽지 말고 살아 남아서 뭘 써야지 이런 거. 감옥에서도 그랬는데, 나가면 꼭 써야지 뭐 이런 거. 전쟁터에 가서도 쏟아지는 포탄 속에서도 과감하게 나갔던 게 '나는 아마 안 죽을 거다. 앞으로 좋은 작품 쓸 텐데 하늘이 날 죽이겠냐'는 믿음이 있었지.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뭘 했을까 생각해보면, 삼류 쓰레기 비슷하게 살면서 사람 구실을 못했을 거예요."
-소설 안 썼으면 연예인이 되지 않았을까요.
"어 그거 맞아. 광대가 됐을 것 같아.(웃음) 요즘 같으면 영화감독을 했겠지."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사셨는데, 한이나 후회, 그런 것이 있나요.
"후회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어. 그래도 오손도손한 가정을 유지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은 들어. 아들 딸이 이제 어른이 돼 '그래도 우린 잘 자랐고 좋았어요' 하지만, 가끔씩 아쉬움 같은 그런 게 보이거든. 그런 부분이 제일 여한이죠. 가정이 희생당한 거."
-방북으로 5년간 감옥에 있다 나온 뒤 작품에 많은 변화가 있었죠. 전반기 문학이 비판적 리얼리즘이 두드러진다면, 수감 생활 후엔 다양한 서사를 실험했는데요.
"방북 후 베를린에 있을 때 세계가 변했지. 베를린 장벽 무너지고 사회주의권 붕괴하는 걸 지척에서 지켜봤잖아. 세계가 변하는 걸 실감하면서 내 산문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문학에서)가장 중요한 게 보편성인데, 서구에서 보편성을 떠받치고 있는 건 그들 식 휴머니즘이야. 예전에 제국주의 시절 세계 어쩌구 한 건 제국주의를 은폐하려는 거였는데, 냉전이 부서진 후 다시 세계화 그러면서 시작하거든. 그때 이런 생각을 했지. 그들 식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세계를 봐야 될 때다. 보편성? 좋다, 우리 나름의 보편성을 생각해보자. 그러면서 제3세계 문학을 새롭게 고찰했지. 특히 나에게 시사점을 준 건 라틴아메리카 문학이야. 스페인 침략으로 제 언어도 다 빼앗겼지만, 그나마 다행인 게 자기네가 원래 갖고 있던 토속적 뿌리를 지닌 채로 서구의 언어를 썼어. 그런 점이 전후 서구문학에 엄청난 충격을 줬지.
19세기 제국주의 들어올 때 동아시아를 보자고. 우린 동도서기(東道西器)를 내세우고 중국은 중체서용(中體西用), 일본은 화혼양재(和魂洋才)를 말하는데, 다 동양의 정신을 지키면서 서구의 기술을 이용하자는 거지. 그런데 동양의 정신이란 게 과연 있냐는 거야. 다 헛소리야, 현실에서 이루어내지 못했으니까. 서구는 그걸 해냈지. 자유 평등 인권이란 거, 피바람 나던 시기를 거치고 혁명도 하면서 구체적으로 이뤄냈지. 그걸 서도(西道)라 한다면 전 세계가 서도화된 거지. 그래서 동도서기를 뒤집어 서도동기(西道東器)를 제안했어요. 서양의 정신을 인정하되 동양의 그릇을 중요시하겠다고. 한때 사인해달라고 하면 '모든 물건은 그것이 담길 것을 그리워한다'고 적었어요. 사람은 몸이 그릇인데, 글 쓰는 것도 대부분 몸이 하는 짓이지. 90%가 앉아서 궁둥이로 쓰는 거야. 형식이 중요하다는 거지. 내가 서구인들이 모르는 형식을 만들어 내면 거기에 다른 것이 담긴다, 그럼 그들이 꼼짝 못 하겠구나 생각했어. 그래서 종래의 산문을 해체하면서 내 산문을 바꿔 나간 것이 후반기 문학이에요."
-칠순의 나이에도 쉬지 않고 소설을 쓰는 그 힘이 놀랍습니다.
"사실 제일 근사한 것은, 망명 중에 베를린에서 쓸쓸히 딱 죽는 거였어. 그런데 살았잖아 또.(웃음) 그러니까 할 일이 많은 거야. 앞으로 한 20년 더 써야 될 거야. 아흔 살까지 쓸 거야. 20년 남았네. 그래서 내가 2년 전부터 운동을 시작했어요. 지금 푸시업을 몇 개 하는 줄 알아? 120개 해.(웃음)"
-부모님이 그렇게 에너지가 넘치셨나요.
"다 일찍 돌아가셨는데 뭘. 에너지의 원천은 문학이 아닌가 싶어. 뭔가 해야지 싶은 거. 이 작품 끝나면 다음에 이거 해야지 하는 게 계속 나를 유지하게 하는 거죠."
-그렇게 끊임없이 글을 쓰게 한 동력이 궁금한데요.
"이건 평론가들한테 발설하면 손해 보는데.(웃음) 70, 80년대에 막 싸우고 그럴 때 나는 겉으로는 문학주의라는 걸 경멸했어. 이 새끼야, 문학밖에 모르면서… 그랬지. 사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문학주의자였어. 그러니까 참 이게 이율배반인데. 문학주의자를 겉으로는 경멸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나는 평생 문학주의였던 거야. 다른 가치를 다 그 아래에다 놨던 거야. 나와 함께했던 여인들이 나더러 '연애할 때도 어디 딴 년이 있는 것 같다'고 했는데, 그 '딴 년'이 바로 문학이었던 거지.(웃음)"
-역사의 현장을 많이 경험했는데, 글을 쓰기 위해 현장에 간 건가요, 아님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글이 나온 것인가요.
"그 두 개가 서로 끌어당기고, 의도치 않게 어떤 상황이 찾아오기도 하고. 팔자지. 정말 팔자야. 아니, 광주항쟁이 터질 줄 알고 미리 광주에 갔겠어? 가 있는데 터진 거지. 베를린 장벽 무너질 줄 알고 베를린에 갔겠어."
-어떤 사람들은 항상 세상의 중심에 서고 싶어하는 욕망을 읽기도 하는데.
"그런 것 없어. 근데 이런 점은 있어.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꼭 내 책임처럼 느껴져. 이게 광대 기질인데, 예컨대 어떤 모임에서 분위기가 착 가라 앉으면 너스레를 떨어서 분위기를 올려야 직성이 풀리는 거야. 누가 이걸 비꼬아서 '메시아 콤플렉스'라고 그러는데, 진짜 이게 광대 기질이 딱 맞을 거야. 김지하나 나나 비슷하게 가지고 있을 거야. 그런 성향이 있어. 그런데 나이 들면서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가만히 있으니까 역시 다 하는 애들이 있더라고. 진중권 같은 애들도 생기고 나꼼수도 생기고. 공지영을 보면 그런 역할을 하더라고."
-라이벌로 여기는 문인은 없나요.
"라이방(라이벌) 얘기하면 우측에는 누구, 좌측에는 누구 그러는데 사실 나는 손해야. 나는 좌우 그런 거 없어. 자유주의자야. '리베랄'이지. 하여튼 갑갑한 것 못 견디고. 조직 싫어하잖아. 김정환이 나를 맹금류라고 하잖아. 맹금류는 조직이 필요 없다고. 혼자 날아다니다가 지상에 먹이가 보이면 쏜살같이 내려와서 채 갖고 혼자 먹어.(웃음) 근데 정말 라이방 꼽으라면 생각나는 이가 있는데 이문구야. 무서운 작가지."
-제일 좋아하는 작가이죠?
"제일 좋아하지. 왜냐면, 나한테 없는 게 있거든. 전세계가 다 마찬가지인데 이야기꾼엔 두 종류가 있어. 토박이 이야기꾼과 외방 이야기꾼. 토박이는 멀리 안가. 그 동네에서 내려오는 시시콜콜한 얘기를 다 꿰차고 있으면서 자기 공동체에 전해주는 거야. 외방 이야기꾼은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얘기를 전해주는 거야. 근데 서구 제국주의가 들어오면서 토박이 이야기꾼들을 죽이고 보편이라는 미명하에 외방 이야기꾼을 확장하는 것, 이게 근대야. 외방 이야기꾼이 더 각광을 받는데, 그 입장에서 보면 늘 그리워하는 것이 고향이고, 경외스러운 것이 토박이 이야기꾼이야. 내가 라이방으로 이문구를 들 때는 토박이 이야기꾼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는 거야. 말하자면 내 후반기 문학은 토박이 이야기꾼에 대한 그리움을 실천하고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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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인터뷰] 황석영 "87년 체제 금가고 개인·일상 부상… 안철수 현상의 본질"
mb 혹평… "문화 장관 절대 안해" 거침없는 구라, 딸이 수차례 막기도 "나꼼수 자제도 필요" 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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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 들면 감각이 둔해지지 않느냐는 질문에 황석영은 "나는 팔굽혀펴기 120개씩 한다"고 대답했다. "90세까지 소설을 쓰겠다"는 약속은 아마도 지켜질 듯하다. 류효진기자 jsknigh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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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식사를 겸한 인터뷰 자리에 동석한 황석영씨의 딸은 몇 차례 황급히 숟가락을 놨다. 그리고 황씨의 입에서 거침없이 튀어나오는 말을 손짓으로 막았다. 그의 오달진 '구라'는 문학과 저잣거리의 저속과 정치판을 주저 않고 무람없이 넘나들었다. 황씨는 한국사회를 지탱하는 이른바 '87년 체제'가 한계에 달했다는 인식에 동의했다. 6월 항쟁의 결과인 87년 체제가 "수구세력과 민주세력의 쇼부"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혁명이 아닌 리모델링에 불과한 체제는 노무현 때 끝장을 냈어야 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민주화 세력이 그걸 못해내 생긴 정치적ㆍ경제적 짐을 지금의 20~40대가 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2013년 체제의 출범을 강조하는 백낙청 교수의 시각에 공감했다. "우리의 87년에서 진보의 가장 큰 반동은 '개인과 일상'이었어. '이 새끼야 단체행동 해' 이거잖아. 근데 유럽에서 지내보니까 10년 전에 거긴 벌써 개인과 일상이 진보의 핵심이야. 펑크족, 게이들이 다 나와서 시위해. 붉은 악마나 촛불시위 보면, 사실 우리도 이미 그렇게 변했어. 담론이 그걸 따라가지 못하는 거지. 안철수 현상의 본질이 그거야. 안철수를 보면 틈이 보이거든. 억압된 구조와 포스트모던한 시민사회의 갭이. 이 사람이 위대한 게 아냐. 어디 가면 줄 서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많이 가졌으면 좀 베풀 줄도 알고. 그런 상식의 상징. 안철수 현상은 바로 그거야."
황씨는 그러나 젊은 세대의 기운이 내용 없이 발랄함으로 탈주하는 경향은 경계했다. 자신이 '나는 꼼수다'에 '구라 방송' 아이디어를 줬다고 말한 그는 '나꼼수'의 한 멤버에 대해 "너무 넘어가더라고. 자제를 못해"라고 쓴소리를 했다. 김영하, 박민규 같은 후배 작가들에 대해서도 "나이가 들면 사검(邪劍) 말고 정검(正劍)에 몰두해야 하는데…" 하고 충고했다. 황씨는 지난해 알타이 연합 발언으로 'mb정권 결탁' 홍역을 치렀다. 하지만 현 정권에 대한 그의 평가는 독할 만큼 박했다. "너무 무식해. 인문적 가슴이 없잖아. 장사꾼이라 그런가…."
정권 바뀌면 문화부 장관 할 거냐는 물음에 그는 딱 잘라 말했다. "절대 안 해. 하려면 벌써 했어. 난 소설 쓸 거야. 할 얘기가 너무 많아."
- 황석영 "내가 자서전 쓰면 다칠 사람 많아(웃음)…"
- 한국일보 생활/문화 24면 2012.02.01 (수) 오후 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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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시아투데이=최재욱 기자] 소설가 황석영을 비롯한 배우 전도연, 방송인 이경규 등이 영화 '범죄와의... 훌륭한 영화였다"고 찬사를 늘어놓았다. 소설가 황석영은 “비장하고 어두운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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