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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영조大王: 역사 알기 및 그의 장수 비결은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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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3,823회 작성일 2012-01-12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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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영조대왕의 장수비결, 바른 식습관-활발한 성생활

기사입력 2012-01-11
 
 

 


 
임진년 흑룡(黑龍)의 해가 밝았다.
 
예로부터 龍은 ‘임금’을 상징했는데,
궁중에는 왕자 생산을 위한 특별한 性문화가 존재했다.
 
 
왕과 왕비가 침전으로 사용한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의 ‘대조’는?
 
 
큰 공덕’을 일컫는다.
 
 
왕자 생산이 임금의 가장 큰 의무이자
공덕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왕과 왕비가 한건물에 거처했지만,
 
합궁은 길일을 골라 상궁이 정했다.
 
공식적으로는 1주일에 이틀 정도였지만
금슬이 좋을 경우나 그렇고
 
대부분은 가뭄에 콩 나듯이 합궁을 했다.
 
 
왕비와의 정략결혼 탓에 왕의 시선은?
 
후궁들에게 쏠린 적이 많았다.

합궁일이 정해지면 상궁들이 침전에 금침을 두 벌 나란히 깔았다.
 
왕과 왕비가 침전에 들면 촛불을 끄고 물러 나왔지만,
 
옆방에서 귀를 곤두세우고 살폈다.
 
만에 하나 발생할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왕은 무치(無恥)라고는 하나 민망했을 것이다.
 
그래서 왕은 대부분 총애하는 후궁의 처소로 자주 행차를 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밤을 보냈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 왕조는?
 
왕의 性문화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지만,
 
 
 
중국의 문헌에는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궁중 법도인 예제(禮制)에 의해
비빈의 수뿐만 아니라,
지위에 따라 황제와 방에 머물 수 있는 시간까지도 정해져 있었다.
 
황제를 모시는 여인의 수가 많아
동침 순서를 관리하는 ‘여사’라는 관직까지 있었다.

여사는 황제가 여인과 침실에 들 때마다
 
대가 붉어 ‘동관’이라고 불린 붓으로 이를 기록했다.
 
특히 황제가 사정하는 시간을 정확하게 기록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중국은 잉태될 당시의 사주로 운명을 점쳤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가장 長壽한 왕은?
 
 83세에 승하한 영조다.
 
왕들의 평균 수명인 43세의 두 배에 달할 정도로 오래 살았으며,
 
재위기간(왕으로의 통치 기간만 무려 52년)도 반세기가 넘는다.
 
 
영조가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로는?
 
 
바른 식습관과 활발한 성생활을 꼽을 수 있는데,
 
조선 전기의 학자였던 홍유손의 장수법을 실천했다.
 
 
99세까지 장수한 홍유손은?
 
76세에 결혼해 아들을 낳은 인물이다.
 
 
영조는 홍유손의 장수법을 좇아
 
小食을 하는 한편
식사시간을 반드시 지켰고,
잡곡밥과 같은 거친 식사를 즐겼다.
 
또한 60대 중반의 일반인이면 거의 죽을 나이에
10대의 정순왕후를 맞아들여 말년까지 부부생활을 가졌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영조가 장수했기 때문에 오래도록 성생활을 즐겼다고 볼 수 있는데,
 
성과 건강의 상관관계는 매우 밀접하다.
 
 
性생활은?
 
 
아드레날린 호르몬 분비를 증가시켜
호흡과 맥박을 빠르게 하여 심장과 폐를 좋게 하고,
콜레스테롤 수치도 낮춰준다.
 
또한 전립샘(전립선)을 보호하며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주고,
 
성욕을 촉진하는 옥시토신 농도를 증가시켜
부부관계를 보다 더 원활하게 만들어준다.

건강과 장수를 원한다면?
지속적으로 부부생활을 갖는 것이 바람직한데,
 
精力을 유지하는 비법은?
 
ㄱ.체력에 맞는 꾸준한 운동과
 
ㄴ.바른 식습관,
 
ㄷ.긍정적인 사고방식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댄디즘’을 실천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외모와 복장에 신경을 써 멋을 부리고
젊은이들과 어울리면?
 
삶의 활력도 생기고 정신 건강도 유지할 수 있다.

*** 2012년 1월10일-동아-김재영 퍼스트비뇨기과 원장
 
 
 
 
 
 
 
 
 
영조의 장수비결, 바른 식습관-활발한 성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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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흑룡(黑龍)의 해가 밝았다. 예로부터 용은 ‘임금’을 상징했는데, 궁중에는 왕자 생산을 위한 특별한 성문화가 존재했다. 왕과 왕비가 침전으로 사용한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의 ‘대조’는 ‘큰 공덕’을 일컫는다. 왕자 생산이 임금의 가장 큰 의무이자 공덕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왕과 왕비가 한건물에 거처했지만, 합궁은 길일을 골라 상궁이 정했다. 공식적으로는 1주일에 이틀 정도였지만 금슬이 좋을 경우나 그렇고 대부분은 가뭄에 콩 나듯이 합궁을 했다. 왕비와의 정략결혼 탓에 왕의 눈은 후궁들에게 쏠린 적이 많았다.

합궁일이 정해지면 상궁들이 침전에 금침을 두 벌 나란히 깔았다. 왕과 왕비가 침전에 들면 촛불을 끄고 물러 나왔지만, 옆방에서 귀를 곤두세우고 살폈다. 만에 하나 발생할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왕은 무치(無恥)라고는 하나 민망했을 것이다. 그래서 왕은 대부분 총애하는 후궁의 처소로 자주 행차를 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밤을 보냈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우리나라는 왕의 성문화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지만, 중국의 문헌에는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궁중 법도인 예제(禮制)에 의해 비빈의 수뿐만 아니라, 지위에 따라 황제와 방에 머물 수 있는 시간까지도 정해져 있었다. 황제를 모시는 여인의 수가 많아 동침 순서를 관리하는 ‘여사’라는 관직까지 있었다.

여사는 황제가 여인과 침실에 들 때마다 대가 붉어 ‘동관’이라고 불린 붓으로 이를 기록했다. 특히 황제가 사정하는 시간을 정확하게 기록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중국은 잉태될 당시의 사주로 운명을 점쳤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가장 장수한 왕은 83세에 승하한 영조다. 왕들의 평균 수명인 43세의 두 배에 달할 정도로 오래 살았으며, 재위기간도 반세기가 넘는다. 영조가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로 바른 식습관과 활발한 성생활을 꼽을 수 있는데, 조선 전기의 학자였던 홍유손의 장수법을 실천했다. 99세까지 장수한 홍유손은 76세에 결혼해 아들을 낳은 인물이다.
영조는 홍유손의 장수법을 좇아 소식을 하는 한편 식사시간을 반드시 지켰고, 잡곡밥과 같은 거친 식사를 즐겼다. 또한 60대 중반에 10대의 정순왕후를 맞아들여 말년까지 부부생활을 가졌다.

김재영 퍼스트비뇨기과 원장

역설적으로 말하면 영조가 장수했기 때문에 오래도록 성생활을 즐겼다고 볼 수 있는데, 성과 건강의 상관관계는 매우 밀접하다. 성생활은 아드레날린 호르몬 분비를 증가시켜 호흡과 맥박을 빠르게 하여 심장과 폐를 좋게 하고, 콜레스테롤 수치도 낮춰준다. 또한 전립샘(전립선)을 보호하며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주고, 성욕을 촉진하는 옥시토신 농도를 증가시켜 부부관계를 보다 더 원활하게 만들어준다.

건강과 장수를 원한다면 지속적으로 부부생활을 갖는 것이 바람직한데, 정력을 유지하는 비법은 체력에 맞는 꾸준한 운동과 바른 식습관, 그리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댄디즘’을 실천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외모와 복장에 신경을 써 멋을 부리고 젊은이들과 어울리면 삶의 활력도 생기고 정신 건강도 유지할 수 있다.

김재영 퍼스트비뇨기과 원장
 
 
***************
 
 
 
 

조선 21대 왕 영조(英祖, 1694~1776)

 

 

조선왕조 역대 임금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 왕이다.

 

1724년부터 1776년까지 52년간 왕위를 지켰던 그는

 

손자 정조와 함께 18세기 조선을 중흥기로 이끌었다.

 

그 자신 콤플렉스와 개인사적 불행을 안고 있었으면서도

 

그는 탕평책을 통해 과열된 붕당 간의 경쟁을 완화했으며

 

이전의 그 어느 왕보다도 민생을 위한 정치를 펴나가

 

조선 시대 몇 안 되는 聖君 중 하나로

 

오늘날까지도 평가받고 있다.

 
 
개인적 콤플렉스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즉위하다
 

17.jpg

18세기 초 조선의 중앙 정치 무대는

 

지난 세기 동안 누적된 붕당 간의 대립이 극에 달해 있었다.

 

과열된 붕당 간의 경쟁은 정치적 생명뿐만 아니라

 

진짜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진검승부가 되었고

 

각 붕당은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숙종년간 남인서인의 대결구도는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몰락한 이후,

 

서인 내부에서 남인에 대한 처벌 문제로

 

다시 노론소론으로 분열되었다.

 

그리고 이들 소론과 노론의 대립은

 

숙종의 뒤를 이을 다음 왕과 관련하여 또다시 피바람을 예고하고 있었다.

 

자기 당의 이익을 위해서는

 

왕위마저도 쥐락펴락하고자 하는 신하들의 등쌀에

 

연잉군(훗날 영조)과 그의 배다른 형 왕세자(훗날 경종)

 

 

서로 다른 당을 등에 업고 왕위를 둘러싼 경쟁을 하여야만 했다.

 

 

왕세자는 그의 어머니 장희빈과 운명을 같이 했던 남인에게

 

동정적이었던 소론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연잉군은 남인에 대해 강경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했던

 

노론이 밀었다.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지지하는 신하들의 당색에 의해

 

정치적 색깔을 정해야만 했던 숙종의 두 아들은 불행한 이복형제였다.

 

 

왕세자는 아버지 숙종의 변덕스런 사랑으로 궁녀에서 왕비로 다시 희빈으로, 끝내는 사약으로 생을 마감한 장희빈의 아들이라는 부담감이 있었고

 

연잉군은 비록 세력이 큰 노론의 지지를 받았지만,

 

그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천인인 무수리 출신이라는 출생의 콤플렉스를

 

안고 있었다.

 

 

 

왕세자의 어머니 장희빈을 제거한 노론

 

보복이 두려워 왕세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보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다만, 왕세자가 14세 때 어머니 장희빈의 죽음을 목도한 충격으로 심신이 허약해진 것을 노려

 

숙종으로부터 왕세자의 뒤를 연잉군이 잇도록 하라는 명을 이끌어냈다.

 

아무리 몸이 허약하다고 하나 아직 젊은 나이였던 경종에게

 

후사가 태어날 것을 바라지 않고

 

신하들이 선동하여 왕위를 동생에게 물려주게 한 것은 왕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행위였고,

 

한편으론 목숨을 건 모험이기도 하였다.

 

왕세제(다음 왕 자리를 이을 왕의 동생) 자리를 확보해 준 노론과 한배를 탄 연잉군에게도 이것은 운명을 건 승부수였다.

 

이대로 허약한 경종이 요절하여 자신이 왕위를 넘겨받거나, 혹시라도 후사를 본 경종의 손에 역적으로 몰려 죽거나의 기로에 선 것이다.


img01.jpg

연잉군 시절의 영조. 20세때의 모습이다.
<출처 : wikipedia.org>

 

비록 심신이 허약하고, 드센 노론 세력에 위축된 경종이었지만

 

그도 왕은 왕이었다.

 

경종은 왕좌에 있었던 4년 동안,

 

소론과 손을 잡고 왕권에 도전하는 노론과 왕세제를 견제하였다.

 

경종 1년, 몇 차례 잡음 끝에

 

마침내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케 하여

 

다음을 도모할 기회를 얻은 노론은 더 나아가

 

허약한 경종을 압박, 왕세제의 대리청정으로

정권획득에 쐐기를 박으려 하였다.

 

그러나 현왕을 무시하는 이러한 성급하고 무리한 시도는

 

결국 경종을 분노하게 하였고

 

경종과 소론의 반격으로 노론은 4 대신(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이 유배를 가는 신축옥사

 

(1721)를 겪는다.

 

이듬해 임인년에는 노론이 경종을 시해하려 하였다는 소론 측의 공격으로 4대신과 60여 명의 노론이 처형을 당하고 170여 명이 유배를 갔다.

 

이 임인옥사(1722)의 옥안에 왕세제 또한 경종시해 모의에 참가한 것으로 나와 그의 목숨도 앞날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의 도움으로 왕세제는

 

가까스로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의 앞날은 불투명하기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왕세제의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으로

 

그의 이복 형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후사 없이 요절하고 만다.

 

경종의 죽음으로 오랜 세월 왕권을 향해 공을 들여온 왕세제는

 

마침내 1724년 조선의 21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가 바로 영조이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긴 이인좌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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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만고 끝에 차지한 왕좌였지만 영조에게 형 경종은 평생 마음의 짐과도 같았다. 더욱이 경종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영조의 즉위로 권력에서 소외되기 시작한 소론 측에서부터 서서히 일어나면서 사태는 점점 심각해졌다.

 

일부에서는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을 뿐만 아니라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는 소문까지 퍼졌다. 영조의 어머니가 엄격하게 제대로 뽑힌 궁녀 출신이 아닌 근본을 알 수 없는 천한 무수리 신분인데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노론을 후원세력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데서 영조의 아비가 노론의 세력가 중 하나일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가뜩이나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출생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영조에게는 참으로 참담한 소문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1728년 소론 중 과격론자였던 이인좌

 

정희량, 이유익, 심유현, 박필현 등 일부 소론 세력과

 

갑술환국 이후 정계에서 밀려난 남인들과 공모하여

 

 

밀풍군 탄(소현세자의 증손)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인좌의 난은 무신년이 일어나 무신난이라고도 하는데

 

그 규모가 삼남을 아울렀으며

 

난에 참가한 사람도 2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난이 진압된 후 잡혀온 이인좌는 국

 

문하는 영조 앞에서 그를 결코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영조가 숙종의 자식도 아니라고 주장하다가 이틀 만에 참살되었다.

 

이인좌의 난은 영조에게 크나큰 상처를 안겼고

 

이 상처는 평생을 따라다녔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훗날 자신의 자식까지 죽이는 비극을 낳는 결과를 낳았다.

 
 

탕탕평평의 탕평책을 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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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의 도움으로 왕좌를 차지했지만, 붕당 간의 피비린내나는 정쟁의 폐해를 온몸으로 겪었던 영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붕당의 갈등을 완화, 해소해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바로 탕평책이다.

 

영조는 즉위 초기에는 자신의 후원세력인 노론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관계로 경종년간에 일어난 신축, 임인 옥사에서 피해를 입은 노론들을 등용하고 옥사를 일으킨 소론들을 정계에서 내몰았다.

 

img02.jpg

영조 어진, 영조 51세때의 모습이다. <출처 : wikipedia.org>


그러나 곧이어 노론 중에서 소론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이는 과격론자들을 내몰고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정국운영을 해나갈 수 있는 탕평론자들을 등용하기 시작하였다. 탕평이라는 말은 [서경(書經)] ‘홍범조(洪範條)’의 ‘無偏無黨王道蕩蕩 無黨無偏王道平平(무편무당왕도탕탕 무당무편왕도평평 ; 치우치거나 무리지음이 없으면 왕도가 편하다.)이라는 글에서 유래하였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영수를 불러들여 화목을 권하고 호응하지 않는 신하들은 축출하였으며 노론과 소론 중 탕평책을 따르는 자(완론자)들만 등용하였다. 관직도 노론과 소론을 섞어서 배치하였는데 예를 들자면 영의정이 노론이면 좌의정은 무조건 소론 중에서 임명하는, 이른바 쌍거호대(雙擧互對)의 인사정책을 펴나갔다. 이는 이후 어느 정도 탕평책이 안정되자 점차로 당색을 초월해 재능이 있는 자들을 등용하는 유재시용(惟才是用)으로 바뀌어갔다. 또 영조는 일반 유생들의 당론에 대한 상소를 금지 시키고 붕당 갈등의 중심이 된 이조전랑이 가진 삼사(三司: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인사권을 철폐하였으며 자신의 확고한 뜻을 보이기 위해 성균관에 탕평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영조의 이러한 노력으로 중앙정계에는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사색 당파가 고르게 등용되어 정국을 운영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영조의 왕권 자체가 노론의 지지로부터 비롯된 것이었기에 영조로서도 모든 붕당에 공평하게 정국을 운영해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노론의 치우친 영조의 절름발이 탕평책은 영조의 개인적 콤플렉스와 결합하여 결국 또 하나의 비극을 낳고야 말았다. 그것이 바로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만든 사건이다.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이다

17.jpg

아무리 영조가 탕평책을 쓴다 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노론위주로 돌아가는 정치 상황은 중앙 정계에서 소외된 일부 소론 층의 불만을 불식시키지 못했다. 소론에게 경종의 의문의 죽음과 영조의 출생에 대한 괴소문은 언제나 은밀한 가십거리였고 또 이것은 언제든 수면 위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었다. 영조가 즉위하고 20년도 더 지난 1755년 나라의 정치를 비난하는 글이 나주에 붙었다. 이것이 나주 벽서 사건이다. 벽서를 붙인 자는 영조 즉위 초기 소론을 축출할 때 나주로 유배 간 윤지라는 자였는데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영조의 왕세제 때의 일이 다시금 불거져 나왔다. 왕이 된 지 20년이 지나도 잦아들지 않는 자신에 대한 괴소문에 가뜩이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영조는 격노했다. 그리고 영조의 이러한 격노를 이용해 노론은 눈엣가지 같던 소론을 이 기회에 중앙정계에서 완전히 일소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왕세자(사도세자)였다. 당시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하고 있던 세자는 아버지 영조의 분노와 소론을 제거하고자 하는 노론의 의도에 일정 정도 거리를 두고 이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세자가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린 노론은 당황했다. 소론에 대해 어느 정도 동정적인 세자의 태도에 앞날이 불안해진 노론은 세자가 왕위를 이을 경우 자신들에게 혹시나 돌아올지도 모를 불이익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세자의 태도 또한 문제가 있었다. 영조를 싸고도는 노론에 대항해 남인과 소론, 소북 등 중앙정계에서 상대적으로 열세에 있던 세력들이 대리청정을 시작한 세자에게 줄을 섬으로써 아버지 영조와 아들 세자 간에는 묘한 정치적 긴장감이 형성되었다.

 

여기에 세자의 상식을 벗어난 과격한 행동들이 노론에게 꼬투리를 제공하였다. 정성왕후가 죽은 뒤 60대의 영조가 노론 강경노선인 경주 김씨 가문에서 새로 맞아들인 왕비 정순왕후는 세자의 입지를 더욱 불리하게 만들었다. 노론의 사주를 받은 정순왕후는 세자의 실행을 영조에게 과대 포장하여 무고함으로써 아들과 아버지의 사이를 이간질했다. 개인적 콤플렉스 탓인지 원래부터 편애가 심하였던 영조는 세자를 더욱 멀리하게 되었고 세자 또한 궁내에서 칼을 휘둘러 궁녀를 죽이거나 왕궁을 몰래 빠져나가 관서지역을 미행하는 등의 비정상적인 일들을 벌여 갈등의 골을 심화시켰다.

 

그 와중에 노론 측에서는 세자를 폐위하고자 세자의 비행을 알리는 10조 목의 글을 영조에게 올렸다. 세자를 불러들인 영조는 분노 속에서 아들에게 자결을 명하였지만, 세자가 이에 응하지 않자 서인으로 강등시켰다. 그리고 한여름, 뒤주 속에 가두어 8일 만에 굶어 죽게 하였다. 붕당 간의 정쟁이 불러온 왕실의 참혹한 비극이었다.

 

세자가 비참하게 죽은 뒤 영조는 뒤늦게 이를 후회하고 그에게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고 노론들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끝내 왕위를 사도세자의 장자 정조에게 물려줌으로써 아들을 죽인 아버지의 회한을 조금이나마 상쇄시켰다. 사도세자는 그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면서 장헌세자로 추존되었고 1899년 (광무3)에는 장조로 추존되었다.

 

 

18세기 조선의 중흥기를 이끈 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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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조선왕조 임금 중 경연(임금이 신하들과 유교의 경서와 역사를 공부하는 자리)을 가장 부지런히 한 임금이다. 왕이 중심이 되는 탕탕평평의 왕도정치를 펼치려면 임금이 신하들보다 한 수 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영조는 공부와 강론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사치를 경계하였고 민생을 위해 많은 개혁조치를 단행해갔다.

 

균역법을 시행하여 군역에 대신해 바치던 납포의 양을 1필씩 감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켜주었으며, 잔인한 형벌제도를 고치고, 양반들이 사적으로 백성들을 징계하는 것을 금하였다. [속대전]을 편찬하여 [경국대전] 이후 변화한 세상에 발맞추어가지 못하는 법률을 재정비하였으며, 사치·낭비의 폐습을 교정하고, 농본정책을 펴 [농가집성] 등의 책을 널리 보급하는 등 민생안정에 힘을 썼다, 또한 청계천 등에 준천 사업을 벌여 홍수 때 범람을 막아 주거환경을 개선했으며, 신문고를 달고 궁성 밖 출입을 통해 백성들의 사정을 직접 듣고자 하였다. 영조 본인이 학문을 숭상하였기에, 학자들을 우대하고, 새로운 학풍을 진작시켜 이 시기 실학의 기틀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영조의 이러한 학문 우대 정책에 힘입어 인쇄술이 개량되고 많은 책이 간행, 보급되어 학문과 문화의 부흥기를 맞이하였다.

 

영조는 개인사적으로는 콤플렉스와 지독한 불행에 시달린 인물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자신의 고통에 휘둘리지 않고 이를 현명하게 승화시켜 민생을 안정시킨 임금이었다. 영조 대에 마련된 안정을 바탕으로 그의 손자 정조는 더욱 큰 선정을 베풀 수 있게 되었다. 영조와 정조 두 임금의 시대를 보통 조선후기 중흥기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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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미/시나리오 작가, 역사 저술가
글쓴이 김정미씨는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관심이 많다. 역사 속 인물들의 면면에서 영화적 캐릭터를 발견하고 시나리오를 옮기는 작업을 하는 한편 역사관련 글쓰기도 병행하고 있다. [역사를 이끈 아름다운 여인들], [천추태후-잔혹하고 은밀한 왕실 불륜사], [어린이 역사 인물사전] 등의 책을 썼다.
 
발행일  2010.12.10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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