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배우 30여명이 친목을 다지는 ‘신우회’
모임에 간 적이 있다.
황정순, 최은희, 이민아, 전계현, 신영균, 이대근, 김혜정, 태현실
등이 모이는 자리였다.
이해룡 한국배우협회 부이사장이 한번 와보라고 초대를
해준 덕분에 원로 배우들이 담소를 나누는 장면을 지켜볼 수 있었다.
여러 원로 중에서도 최지희(71)씨의 표정이 유독 환했다.
오래전에 은퇴한 배우인데도 자주 본 얼굴처럼 친근했다.
연방 웃는 얼굴이라서 더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 부이사장은 “최씨가 밝은 성격으로 원로 배우들과 잘 지낸다”며
“참 많은 일을 겪은 사람이기 때문에 인터뷰를 하면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인터뷰=장재선 차장(문화일보 문화부)
지난 2011년12월13일 최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에서 우러나온 내공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그에게 만나자고 청한 것은,
‘2011 여성영화인축제’ 측이
최씨를 올해의 여성영화인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였다.
그가 30년째 다닌다는 서울 용산구 남산체육관의 휴게실에서 만났을 때,
몸살 뒤끝이라면서도 특유의 활기찬 표정을 지었다.
―얼마 전에 김지미씨를 만났는데 미색(美色)이 여전하시더군요.
선생님도 같은 느낌을 주네요.
“김지미와 동갑 친구지요.
1957년 같은 해에 데뷔한 인연도 있고요
(김지미씨는 만 17세의 나이에 ‘황혼열차’로,
-이 황혼열차에서- 국민배우 안성기는 5살로 영화에 데뷔한다-
한준구 글)
최씨도 같은해 57년 ‘아름다운 악녀’로 데뷔했다).
지미와 같이 다니면 젊어 보인다고들 하더군요.”
―올해의 여성영화인상을 받게 됐는데, 공로상이란 게 묘한 감회를 줄 듯싶습니다.
“그동안 공로상을 많이 받았어요.
한국영화인협회,
한국영화배우협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
등 영화 관련 단체로부터는 거의 받았어요. 왜 나에게 상을 줄까,
스스로에게 물어봤어요.
여러가지 힘든 일이 있었음에도 열심히 살고, 영화계 선배를 사랑하고 존경해 온 뜻을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늘 진실되게 말하고 행동해 온 것을 여러분이 인정해
주는 것이지요.
저는 어떤 상황에서도 진심은 통한다는 믿음으로 살아왔어요.
동료들이 ‘義理의 최지희’라고 불러주는 게 자랑스럽습니다.”
-한국영화인원로회 이사장을 맡고 계시더군요.
원로 영화인들이 서로 얼굴을 보고 살자는 소박한 뜻에서였지요.
저는 창립 때부터 참여하다가
8년 전부터 이사장을 맡고 있지요.
영화계 선배님 중에 어렵게 사시는 분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봉사 정신이 발휘된 듯합니다.
원로 배우뿐만 아니라
감독, 촬영, 조명을 하신 분들 120여명이 회원이에요.
영화 발전을 위한 세미나도 하고, 단체로 여행도 가고….”
―원로배우들 모임에서 보니
황정순, 태현실씨랑 특별히 친해 보이더군요.
황 선생님은 편찮으시다고 하던데….
“황 선생님과는 자주 전화하며 안부를 주고받아요.
황정순-과거 김희갑선생과 공연 가장 많이하신 원로 배우-
연세(86)가 많은 탓에 정신이 오락가락하셔서 안타깝지요.
말씀한 것처럼 저 최지희는 태현실과도 친하게 지내지요.
30여년 전에 남정임이 제안해서
동료 배우들끼리 만나는 모임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남정임이 세상을 떠나버린 후에 흐지부지됐어요.
그것을 제가 나서서 다시 모이자고 했어요.
엄앵란, 이빈화 등도 함께 했어요. 골프도 하고, 여행도 가고….”
―최근에 신성일씨 회고록이 화제가 됐습니다.
최선생님과 친했던 이민자씨가 자신을 성적으로 유혹했다는
대목도 있던데….
신성일씨는 까마득한 후배였어요.
과연 그랬겠냐 싶어요. 저는 믿을 수가 없어요.
김지미도 그 이야기를 듣고 노발대발하더군요.
설령 그런 일이 있더라도 커버해 줘야지, 그렇게 까발리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며.
저와 이민자 언니는 스토리가 많아요.
‘애모’에서 제가 동생 역할을 한 이후로 친하게 지냈지요.
제가 일본에서 사업을 할 때,
언니가 남의 가게에서 가오(얼굴) 마담하고 있더군요.
제 가게를 언니에게 주고, 제가 한 달 동안 일을 도와주기도 했어요.”
―어린 시절에 가난했다고 들었습니다.
부산여고를 중퇴했다는 기록이 있더군요.
돈이 없어서 다닐 수가 없었어요.
누가 궁금해하면,
지금껏 ‘거기에 대해 묻지 마세요’라고 답해 왔습니다.
아픈 데를 건드리고 싶지 않으니까.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이 처연해 보였다.
어린 시절 가난이 남긴 상처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저는 밥을 먹여준다고 해서 배우가 됐어요.
배우가 뭐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시작했어요.
제 本名이 김경자인데,
제가 신세를 졌던 영화 제작자 최남용씨의 성을 따서
이름을 최지희(崔智姬)로 했어요.
영화하며 이름이 알려지면 (고향의) 어머니가 찾으러 올까봐
이름을 바꿔버린 것이지요.
그때는 배고픈 것을 면하는 게 최고였어요.
그런데 그렇게 케케묵은 옛이야기는 해서 뭐합니까.
현재와 미래 이야기가 중요한 것 아녜요?”
―맞는 말씀이지만, 오랜만에 선생님을 뵙는 독자들은
옛 영화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싶어할 것입니다.
데뷔작(‘아름다운 악녀’)에서
상대역이었던 배우 조항씨는 현재 활동 중인 조형기씨의 아버지라고
하던데요.
“그래요. 조형기씨 아버지예요.
(그때를 회상하는 듯 얼굴빛이 도로 밝아졌다.)
화신백화점, 파고다공원, 청계천, 명동에서 찍었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제가 추위에 떨고 있으니, 이강천 감독이 위스키 티를 줬어요.
술인 줄 모르고 마시다가 취해 버렸어요.
영화 막판에 주인공 은미가 비틀거리는 대목이 있는데,
연기가 아니라 실제 취해서 그렇게 한 것이지요.”
―인기가 한창 오르던 1961년에 미국 유학을 가신 이유는.
“공부가 부족하다고 느꼈으니까.
집 한 채 살 돈이 있었는데, 집을 살까, 공부를 할까 망설이다가
그렇게 했어요
(그는 워싱턴에서 어학연수를 하며 영어를 배웠고,
1년 후에 영화로 복귀했을 때,
그 공부가 밑거름이 돼서 전성기를 맞았지요.”
―유학을 주선해 준 이가 첫사랑이라고 하던데요.
“아, 여기서 첫사랑 이야기를 하라고요?
누구라고 하면 다 알 만한 사람인데,
1958년에 처음 만났는데,
그 사람 추천으로 유학을 갔지요.
저는 당시 집안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소녀 가장’이었기 때문에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그때 헤어진 후에도
가끔 만나며 서로 잘했니, 못했니 다투곤 했어요.
15년 전만 해도 첫사랑이니까 같이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부딪쳐 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지금은 만나면 할 이야기가 없어요.”
―저는 그 첫사랑이
‘코리아 게이트’의 주인공인 박동선씨라고 알고 있는데요.
“이름 밝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첫사랑이란 게 과연 뭐냐 싶어요.
좋은 이미지로 남기를 바라는 소망밖에 없어요.”
(최씨는 1985년에 박동선씨의 사업체인
‘한남체인’을 인수함으로써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그와 관련 최씨는 “박씨에게 돈을 받을 게 있어서”라고 했다.
인터뷰 중간에는
“내가 죽어라고 열심히 산 것에는
박동선에 대한 복수심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했다.
박씨와의 관계에서 애증이 교차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배우로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1966년에 갑자기 결혼을 하셨습니다.
“집을 3~4채 갖고 있을 때여서 이만하면 먹고 살겠다 싶어서 결혼을 했어요.
그런데 (재일교포 사업가인) 남자 뒤를 대주다가
하루아침에 집도 절도 없어져 버렸어요.
남자를 성공시키고 싶어서 여기저기 로비도 하고 그랬는데
결국 안 되더군요.
생활고 때문에 이혼했는데,
남편이 다시 호적에 올려서 9년간을 다시 결혼한 상태로 있었어요.
한 남자와 두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한 것이지요.”
그는 이혼 후 ‘지희네 집’이라는 카페를 열어서
장사를 했다.
그는 나중에 일본 도쿄 유흥가에 진출해 이른바
‘한국 타운’을 만드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1979년 김형욱 실종 연루설이 있었지요?
“나와 관련이 없다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알아요.
(그에 대한 잡지의 보도가 있을 때) 선거가 있었어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씹어서 박근혜 의원에게 타격을 주려고
누가 일을 꾸미다가 저까지 끌어들인 것이지요.
제가 당사자들을 고소했는데,
뒤에 돈을 받고 취하해 줬어요.(웃음)”
유력 정치인과 유명 연예인이 가깝게 지냈던
1970년대 시대상의 후유증이 그에게도 미쳤다고나 할까.
―1988년 코미디언 쟈니 윤씨와 ‘서울 프리올림픽 쇼’를 제작했다면서요.
“쟈니 윤이 어느 증권펀드에 투자하래서 그렇게 했더니
그 돈으로 제 허락 없이 영화를 만들었더군요.
그 돈을 반까이(만회)하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프리올림픽 쇼를 생각한 것이지요.
그때 KBS 간부들에게 신용을 얻었지요.
제가 세계적인 방송 흐름에 맞춰 토크쇼를 만들라고
KBS측을 설득해서 ‘쟈니윤 쇼’가 나오게 되지요.”
(최씨에 따르면 미국에서 알게 된 쟈니 윤과는 결혼을 전제로
사귀었으나
중간에 돈이 개입되면서 사이가 삐걱거리게 됐다.
최씨는 씁쓸하게 웃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상하게 남자만 만나면 손해가 나.
운명적인지 모르지.”)
인연이 된 남자들에게 돈을 대며
뒷바라지를 하지만,
그만한 보답을 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녀는 친구인 김지미씨와 닮은꼴이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온 분인데, 주변 사람들에겐
‘구름을 잡으려 헛되게 애쓰며 살았다”고 하신다면서요.
허무가 밴 이야기인데요.
“맞아요. 그게 인생이에요.
우리 집에 한 여자가 나체로 구름 속에서 낮잠을 자는 그림이 있는데,
그 여자가 꼭 저 같아요.
요즘은 죽을 때 어떻게 죽어야 할까를 생각해요.
아무도 모르게 깔끔하게
죽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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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희는… 관능적 이미지로 1950~60년대 톱스타 군림… 스크린 떠난 뒤 사업가 활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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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지희씨는 1988년 ‘서울 프리올림픽 쇼’로 인연을 맺은 미국 코미디언 보브 호프(왼쪽)와 친하게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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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희씨가 만 17세에 출연한 영화 ‘아름다운 악녀’는 이후 그의 애칭으로 불렸다.
“제가 맡은 주인공 은미의 성격이
독특했어요.
첫 장면을 쓰리(소매치기)하면서 시작하잖아요.
튀는 의상을 구입하기가 어려워서
동대문 고물상에서 찾았어요.
당시로서는 드물었던 끈 달린 핸드백을 들고 명동을 걸어가면
카메라가 궁둥이가 흔들리는 모습을 찍었지요.”
그는 도발적이고 관능적인 이미지로
1950~1960년대 젊은 여성들의 욕망을 대변한 스타였다.
‘자매의 화원’(1959)에서
언니(최은희)의 연인을 가로채는 역할을 맡았던 그에게 매스컴은
‘야성적인 체취를 발산하는 女배우’
‘원시林에서 빠져나온 듯한
황홀감을 안겨주는여배우’
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성난 능금’(1963)
‘말띠 여대생’(1964)
‘연애졸업반’(1964)
등을 통해
그는 기존 관습에 짓눌리지 않고 자기 삶에 능동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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