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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85--504--1676--319--이 수퍼 스타는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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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3,189회 작성일 2011-12-30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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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통산 안타-3085안타-일본프로야구 최다 안타!
 
그리고, 통산 홈런-504홈런 및 1676타점을 기록하였고
 
생애 통산 타율 3할1푼7리  도루는 319개 기록한
 
일본 프로야구의 살아있는 재일동포 전설 장훈 선수!
 
그의 제 3탄 풀 스토리를 감상해 보시길 강추해 봅니다.
 
 
 
 
박동희 칼럼

[박동희의 야구탐사] 청년(靑年) 장훈 이야기 [3편]

기사입력 2011-12-27 16:44 |최종수정 2011-12-27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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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입단 초기의 장훈(사진=장훈)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한 지 30년이다. 야구의 미래뿐만 아니라 나라의 앞날도 알 수 없던 1982년. 한국 야구관계자들은 프로야구 출범을 위해 모든 걸 바쳤다. 하지만, 경험은 일천했고, ‘프로’의 ‘프’자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이때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이가 있었다. 바로 장훈(일본명 : 하리모토 이사오)이다. 일본 프로야구의 영웅이자, 재일교포들의 희망이었던 장훈은 아무 조건 없이 고국의 프로야구 출범을 도왔다. 일본 열도에 흩어져 활동하던 재일교포 출신 프로 선수들을 찾아가 고국 무대에서 뛸 것을 일일이 권유했던 이도 장훈이었다.
한 시즌 총관중 700만 명 돌파를 바라보는 지금. 그러나 장훈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져 가고 있다. 한국 프로야구가 장훈을 대하는 자세도 바뀌었다. 올 초 열린 프로야구 30주년 기념식에 장훈은 초대받지 못했다.
<스포츠춘추>가 ‘잊혀진 영웅’ 장훈을 찾았다. 인간 장훈의 이야기를 직접 듣기 위해서였다. <스포츠춘추>는 일본 도쿄에서 장훈을 만나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그의 생애와 비하인드 스토리를 취재했다. <스포츠춘추>의 ‘청년 장훈 이야기’는 5부작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2편]에 이어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장훈은 히로시마에서 알아주는 야구 유망주가 됐다. 그러나 장훈은 만족하지 않았다. 혹독한 훈련을 이어갔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장훈은 과거의 훈련을 회상할 때면 인상을 찌푸린다. 아직도 몸이 그때의 고통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택시 기사였던 형님에게 헌 타이어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네. 혼자 연습하는 덴 헌 타이어를 배트로 치는 게 제격이었거든. 집 근처에 나무 말뚝을 세우고 거기다 낡은 타이어를 달았네. 그리고 몇 시간이고 타이어를 치면서 스윙연습을 했어. 얼마나 스윙을 했는지 손바닥에서 피가 나더군. 그럴 때면 손바닥에 붕대를 ‘칭칭’ 감고, 또 스윙했어. 붕대에 피가 고여 끈적이면 이번엔 자전거 튜브를 손바닥에 감았네. 그리고 다시 스윙연습에 몰두했지.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은 행동처럼 보이지만…당시 난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지고 싶지 않았어. 자신을 이겨야 다른 이도 이길 수 있으니까.”
혹독한 훈련의 대가는 달콤했다. 어느덧 그의 타구는 교사(校舍) 옥상에 설치된 그물망마저 넘기며 철로에 떨어졌다. 자칫 철로에 공이 끼면 열차가 탈선할 수 있기에 야구부 감독은 장훈이 타격연습을 할 때면 야구부원들을 철로로 보내 공을 줍도록 했다.
장훈의 맹활약으로 단바라 중학교는 점점 강팀이 돼 갔다. 그리고 장훈 역시 명문 야구고 입학을 눈앞에 두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야구부원들이 운동장을 함께 쓰던 축구부원들과 승강이를 벌였다. 서로 “연습 중에 공이 넘어오는 바람에 훈련에 집중할 수 없다”고 항의 한 게 원인이었다.
야구부 리더였던 장훈은 축구부 주장과 말로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축구부 주장은 장훈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조센징 주제에 어디 감히. 입 다물고 꺼져라! 조센징”이라고 소리쳤다. 그것은 ‘꽁꽁’ 봉인했던 판도라의 상처를 연 것과 같은 대실수였다. 장훈은 갑자기 몸이 정전된 것처럼 가만히 있다가 손에 들고 있던 배트를 힘껏 쥐었다.
“팍!”
“으악!”
그것으로 끝이었다. 장훈의 배트에 머릴 강타당한 축구부 주장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데굴데굴 굴렀다. 장훈은 머릴 쥐고 고통스러워하는 축구부 주장을 일으키고서 차가운 목소리로 한마디만 했다.
“이 대목에서 조센징이 왜 나오나.”
그리고 점잖게 조언했다.
“제군은 말이 너무 많아.”
중학교 시절 장훈은 야구도 잘했지만, 싸움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담바라 중학교를 넘어 히로시마 전체 중학교에서 가장 유명한 싸움꾼이었다.
“글쎄. 싸움에서 진 적은 없는 것 같네. 그런 기억은 나지 않아.”
그렇다고 그가 영화에서나 볼 법한 전설의 협객은 아니었다.
“대 여섯명이 덤벼들면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지. 실제로 대 여섯 명과 싸우다가 녹다운이 된 적도 있네(웃음). 하지만, 서너 명 정도는 거뜬했어. 필살기가 뭐였냐고? 조선인의 필살기가 뭐였겠나. (이마를 만지며) 이 단단한 이마 아니겠어. 그래 박치기가 내 최고의 필살기였다네(웃음).”
하지만, 장훈에겐 원칙이 있었다. 누구와 아무 때나 주먹질을 하는 건 아니었다. 상대가 ‘조센징’ ‘김치’라고 놀리거나 ‘마늘 냄새가 난다’ 같은 말로 한국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거나 가족을 들먹거릴 때만 주먹을 썼다. 그라운드에서도 상대가 페어플레이에 벗어난 행동을 할 땐 어김없이 응징에 나섰다. 좋은 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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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고되게 당했던 노무라 가쓰야. 지난해 초 노무라를 인터뷰했을 때 그는 장훈을 가리켜 "내가 아는 최고의 열혈남아"라고 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1960년대 노무라 가쓰야는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슈퍼스타였다. 1961, 1963, 1965, 1966년 퍼시픽리그 MVP에 뽑혔고, 1961년부터 1968년까지 8년 연속 퍼시픽리그 홈런왕에 올랐다. 1965년 타율, 홈런, 타점 3관왕에 등극할 만큼 타격에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하지만, 그가 더 뛰어났던 건 수비수로서의 포수였다. 노무라는 단순히 투수의 공을 포구하는데 그치지 않고, 전혀 예상치 못한 공배합과 타자 성향을 정확히 꿰뚫은 심리전으로 경기 전체를 리드했다. 특히나 그는 이른바 ‘속삭임 전술’에 능했다. 타석의 타자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 집중력을 떨어트리고, 혼잣말로 상대를 속이는 노무라의 ‘속삭임 전술’에 타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신인들과 베테랑이 주요 희생자였다. 노무라는 타석에 신인 타자가 들어서면 “나도 너처럼 신인일 때가 있었다. 신인은 어떻게 스타트를 끊느냐가 중요하다. 네게 가운데 속구를 줄 테니 맘껏 쳐라. 그리고 앞으로 잘해보라”라고 격려했다.
신인 가운데 일부는 노무라의 그 말에 감동해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막상 투수가 던지는 공은 변화구. ‘혹시나’하는 마음에 가운데 속구를 기다리지만, 변화구로 삼구삼진을 당한 뒤에야 이것이 노무라의 ‘속삭임 전술’임을 알게 됐다.
베테랑에겐 자존심을 건드리는 전술을 썼다. “아직 배트 들 힘이 남았는지 몰라.” “자, 이번엔 변화구야. 당신 눈이 변화구 궤적을 따라갈 수 있는지 한번 보자고”하는 식이었다. 베테랑들은 노무라의 말에 발끈하기 마련이었고, 자신도 모르게 스윙을 크게 하고 말았다. 결과는 삼진.
그러나 노무라의 전술에 넘어가지 않은 선수가 두 명 있었다. 백인천과 장훈이었다. 같은 한국인이었던 두 선수는 도에이 플라이어스(니혼햄 파이터스의 전신)에서 함께 뛰고 있었다.
노무라는 경험이 적은 백인천이 타석에 서자 신 나게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이즘 되면 백인천이 넘어와야 하는데 이게 웬걸. 백인천은 꿈적도 하지 않고, 투수만 바라보고 있었다. 노무라는 발언의 강도를 높였다. 하지만, 백인천은 요지부동이었다. 노무라는 백인천의 인내에 감탄했다. 더그아웃에 돌아와서 ‘저런 훌륭한 선수가 있다니 놀라울 뿐이야’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니었다. 알고 보니 백인천은 집중력을 높이려고 솜으로 귀를 틀어막은 채 타석에 들어선 것이었다. 당연히 노무라의 말이 들릴 리 없었다.
그렇다면 장훈은 어째서 전술이 통하지 않은 것일까. 노무라도 시도를 했었다. 다혈질의 장훈이 내 말에 흥분해 제대로 타격하지 못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래서 장훈의 타석 때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장훈은 노무라의 전술이 정도를 벗어났다고 판단했다. 야구를 ‘신사들이 펼치는 정직한 사투(死鬪)’라고 생각했던 장훈은  반격에 나섰다.
변화구가 들어올 때 일부러 헛스윙을 크게 해 배트로 노무라의 헬멧 뒤쪽을 가격한 것이다. 노무라는 맥없이 ‘푹’하고 쓰러졌고, 이후 다시는 장훈에게 ‘속삭임 전술’을 쓰지 않았다.
갈 곳 없는 단바라의 외로운 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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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시절의 장훈. 또래와 비교해 체구가 컸다.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장훈은 고교를 선택해야 했다. 원체 유망주였기에 그를 마다할 학교는 없었다. 당시 히로시마 지역에서 야구로 유명한 학교는 히로시마상고와 고료고였다. 장훈은 내심 히로시마상고 진학을 원했다. 현립 고교라, 학비가 싸고 야구부 전력이 뛰어난 게 매력이었다. 히로시마상고 야구부도 장훈을 원했다.
“하루는 히로시마상고에서 ‘연습을 오라’고 하더군. 찾아갔더니 나 말고도 30명 정도가 와 있었어. 그래, 일종의 테스트를 받으러 온 거였어. 연습을 끝내고 보니까 평가서의 내 이름 옆에 동그라미가 표시돼 있었어. 합격했다 싶었지. 꿈에 그리던 고시엔대회 출전이 현실이 되나 싶어 몹시 기뻤다네.”
그랬다. 중학생 장훈의 꿈은 고시엔대회(전일본고교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해 자신의 실력을 일본 전역에 자랑하는 것이었다. 어디 장훈만 그랬겠는가. 지금도 그렇지만, 모든 일본 야구소년의 꿈은 4천개 교가 참가하는 고시엔대회의 예선을 통과하고서 본선에 진출해 오사카의 고시엔구장을 밟는 것이다.
야구선수로 대성해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과 어머니에게 큰집을 선물하는 것이 유이한 삶의 목표였던 장훈에게 고시엔대회는 더 의미가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고시엔대회에서 맹활약해 프로 스카우트들에게 눈도장을 찍지 않으면 안 됐다. 히로시마상고는 그 꿈을 이루는데 최적의 학교였다.
그때 생각지도 못한 암초가 등장했다. 히로시마상고 교장이 장훈의 입학을 불허한 것이다.
“처음엔 나도 의아했네. 내 입학을 불허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거든. 알고 보니까 내가 만날 싸움만 한다고 교장 선생님이 입학을 불허한 것이었네. (곰곰이 생각하다가) 하지만, 난 절대 매일 싸움만 하러 다닌 깡패가 아니었어. 그보단 야구에 목숨을 걸던 소년이었지. 그래도 변명은 하지 않았네. 축구부와의 일 때문에 악평을 듣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아쉽지만, 히로시마상고와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네.”
다음으로 찾아간 학교는 고료고였다. 당시 고료고는 시립이기에 누구나 응시만 하면 들어갈 수 있는 학교였다. 고료고 입장에서 장훈은 ‘제 발로 굴러 온 복덩이’였다. 하지만, 이번엔 면접이 문제였다.
“원래 히로시마상고로 진학하려 했다는데, 어째서 우리 학교에 응시했나.” 면접관이 물었다.
장훈은 정직하게 대답했다.
“저도 히로시마상고에 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입학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래 고료고 관계자가 '네가 응시만 하면 뽑아주겠다'고 하기에 어쩔 수 없이 고료고를 선택했습니다.”
면접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도 그럴 게 다른 이유도 아니고 ‘히로시마상고가 받아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고료고를 선택하게 됐다니’. 면접관의 입에서 당장 ‘불합격’이 튀어나왔다.
“우리 학교도 너 같은 녀석은 필요 없다. 당장 나가!”
장훈은 자신의 답변이 어째서 불합격 사유인지 따져 물었다. “정직한 건 죄가 아니지 않습니까”하고도 항변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장훈은 허탈하게 면접장을 나와야 했다.
“참 곤란한 시절이었어. 나를 받아주는 학교가 없었으니까. 그래도 고교엔 진학해야 했지. 그때 암시장 옆에 ‘마쓰모토상고’라고 있었네. 히로시마의 최고 불량 청소년들이 가는 학교였는데, 형님이 그 학교 선생님과 잘 아는 사이였어. 그 학교는 나를 받아주겠다고 하더군.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 그런 학교에서라도 야구는 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 학교도 나에 대한 편견이 있었어. ‘일단 야간반에서 공부를 하고, 1학기 동안 말썽을 피우지 않으면 2학기부터 주간반에 편입시켜주겠다’고 했다네.”
장훈은 최고 불량학생들이 모이는 마쓰모토상고조차 경계할 만큼 히로시마에서 소문난 ‘악동’으로 둔갑해 있었다. 그가 어째서 싸움을 했고, 공 대신 축구부 주장의 머리를 타격했는지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저 ‘다혈질 조센징’ 장훈의 악담이 눈덩이처럼 쌓여 있을 뿐이었다.
장훈은 낮에는 학교 식당에서 소바와 우동을 만드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리고 밤이면 수업을 들었다. 야구부 훈련에도 충실히 참가했지만, 동기부여 자체가 불가능했다. 야구부의 실력은 형편없었고, 부원들에게 열정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고시엔대회 예선 1회전에서 떨어져도 누구도 슬퍼하지 않았다.
학교도 야구부를 제대로 지원하지 않았다. 운동장은 항상 돌무덤처럼 거칠었고, 그물망도 시원찮아 장훈이 힘껏 스윙했다가는 학교 유리창이 깨지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학교 측은 “고시엔대회 본선에 오르지 않아도 좋으니 학교 기물만은 파손하지 마라”며 연습을 중단시켰다. 고시엔대회 본선 진출을 향한 장훈의 열망은 조금씩 식어갔다.
“세상엔 기쁨도, 사랑도, 빛도, 확실성도, 평화도, 고통을 피할 방법도 없다”고 노래한 19세기 영국 시인 매튜 아널드를 떠올리게 만큼 암울한 시간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자신이 설정한 인생 항로에서 이탈한 장훈은 방황하기 시작했다. 주말이면 히로시마 시내에 나갔고, 학교를 그만둔 또래들과 밤거리를 활보했다. 히로시마 야쿠자는 그런 장훈을 영입 0순위로 지목했다. 장훈도 ‘재일 한국인이 할 수 있는 건 야쿠자밖에 없나’하는 절망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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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됐을 때 많은 이가 숨졌다. 히로시마가 거주했거나 강제징용으로 어쩔 수 없이 끌려왔던 2만 명 이상(공식집계만)의 한국인이 숨졌다. 사진은 원폭으로 파괴가 된 히로시마 외곽에 설치된 한국인과 중국인들의 임시 거주촌이다. 비바람 하나 막기 힘든 이 움막에서 장훈을 비롯한 재일 한국인들은 전쟁의 후폭풍을 견뎌야 했다

그즈음 장훈은 이발소에 갔다가 우연히 잡지에서 두 학교의 이름을 발견한다. 교토해양고와 나니와상고였다.
“머리를 깎으려고 순서를 기다리다 무료해서 잡지를 펼쳤네. 거기 보니까 교토해양고와 나니와상고가 고교야구계의 강팀으로 나와 있더군. 이발소에서 나와 마쓰모토상고 친구들과 머릴 맞댔어. ‘여기선 희망이 없다. 우리 교토해양고나 나니와상고로 전학을 가자’고 의기투합했어. 금방이라도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 같은 기분이 느껴졌다네.”
장훈은 고민 끝에 형에게 “교토해양고에 가고 싶다”는 뜻을 전달했다. 형은 잠자코 동생의 이야기를 들었다. 동생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 아까워하지 않던 형은 조용히 동생을 타일렀다.
“훈아, 네 생각은 잘 들었다. 하지만, 집안형편상 네가 교토에서 학업을 이어가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장훈은 포기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학비만 지원해주면 어떻게든 스스로의 힘으로 버티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형의 대답은 똑같았다.
이때 장훈은 태어나 처음으로 어린아이처럼 행동했다. 악을 쓰고, 고함을 치며 자신의 요구사항을 들어줄 때까지 길바닥에 드러누워 몸부림치는 꼬마처럼 장훈도 형에게 떼를 썼다.
“형은 어느 정도 설득을 할 수 있었어. 하지만, 문제는 어머니였네. 어머니는 내심 내가 고교를 졸업하고서 형을 도와 집안을 살리기 바라셨네. ‘넌 몸이 크니까 덤프트럭 기사가 돼 형을 도우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어. 어떻게 어머니를 설득해야 하나 고민했지.”
고민은 쉽게 해결됐다. 교토해양고로부터 “전학기간이 이미 끝났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장훈은 또 한 번 좌절했다. 그러나 불운은 그에겐 적이 아니라 불편한 친구와도 같았다.
“오른손의 화상과 원자폭탄이 떨어진 와중에도 두 번이나 살아난 나였네. 내게 좌절이란 없었어. 형에게 ‘마지막으로 나니와상고로 전학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읍소했네.”
형은 고민 끝에 마쓰모토상고 야구부 감독을 찾아갔다. 얼마나 동생이 야구에 재능이 뛰어난지 알고 싶었다. 감독의 첫마디는 이랬다.
“동생은 정말 훌륭한 선수가 될 재목입니다.”
형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혹시나 재능이 뛰어나지 않다’는 말을 들을까 두려웠던 까닭이다. 하지만, 감독은 다음 말에 힘을 줬다.
“단, 동생의 의식이 완전히 탈바꿈해야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히로시마에 있다간 야쿠자밖에 될 수 없어요.”
형은 어머니에게 야구부 감독의 말을 전하며 “훈이를 나니와상고가 있는 오사카로 보내는 게 좋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이번엔 어머니가 아들의 실력이 궁금했다. 어머니는 “다시 감독을 찾아가 훈이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물어보라”고 했다.
감독의 답변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리모토 이사오(장훈의 일본명)는 대단한 선수가 될 겁니다. 그러니 히로시마보다 오사카로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형과 어머니는 결국 장훈의 바람을 들어주기로 했다. 아들이 야쿠자로 크느니 실패한 야구선수가 되는 게 낫다고 판단한 어머니는 장훈을 불러 “용기를 잃지 말고, 네가 좋아하는 야구에 정진하라”며 용기를 복돋아 줬다.
형도 동생의 손을 잡고 용기를 불어넣었다.
“훈아, 형이 3년 동안 고생할 테니까 너도 열심히 운동해라. 형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네 학비를 챙길 테니까 절대 걱정하지 말고.”
장훈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생각해보게. 요즘 그런 형제가 어딨겠나. 얼마나 고마운 일이야. 자기 인생을 희생하면서 누가 동생을 위해 사느냔 말이지. 난 결심했네. ‘어머니와 형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고 말이야. 반드시 야구선수로 대성해 가족에게 진 빚을 수백 배로 갚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네.”
고시엔구장을 밟고 싶던 야구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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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와상고 1학년 때 교내 웅변대회서 상을 받은 장훈이 상장과 트로피를 들고 있다(사진=장훈)

어머니와 형이 나니와상고행(行)을 동의해줬다지만, 거기서 일이 다 끝난 건 아니었다. 정작 나니와상고는 ‘장훈’이란 유망주가 세상에 있는지도 몰랐다. 장훈과 형 세열은 무작정 오사카행 기차를 탔다. 직접 나니와상고 야구부에 찾아가 전학을 읍소할 참이었다.
두 이는 물어물어 나니와상고를 찾았고, 이윽고 교문 앞에 도착했다. 장훈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곳이 오사카에서 소문난 강팀 나니와상고란 말인가’하는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당장이라도 고시엔대회 본선에 진출할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장훈과 형은 야구부 감독인 나카지마 하루오를 만났다. 나카지마 감독은 전해(1955년) 봄 고시엔대회에서 나니와상고를 우승으로 이끈 명장이었다. 눈이 높아도 한참 높았다. 웬만한 야구 유망주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장훈은 내심 그게 걱정이었다. 무작정 나니와상고를 찾아가겠다고 했을 때 주변에선 “나카지마 감독이 차갑게 대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아니나다를까.
나카지마 감독은 장훈을 보자마자 “돌아가라”고 했다. “‘고시엔대회 본선에 나가고 싶다’는 열망을 가진 일본 전역의 유망주들이 우리 학교에 찾아오고 있네. 하지만, 다들 테스트에서 떨어져 울면서 집에 돌아가게 마련이야. 미안하네만, 그런 얼굴 또 보고 싶지 않으니 이만 돌아가게.”
나카지마 감독은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장훈을 돌려보내려 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장훈이 아니었다.
“좋습니다. 감독님. 제가 연습하는 것만 지켜봐 주십시오. 그래도 아니다 싶으시면 제가 깨끗이 물러나겠습니다.”
나카지마 감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훈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나니와상고 선수들과 어울려 10분 정도 훈련을 함께 했다. 나카지마 감독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일본의 침략전쟁 당시 군에 강제징집됐다가 소련군에 잡혀 시베리아 포로수용소에서 오랫동안 고생했던 나카지마 감독은 장훈의 실력과 정신력을 높이 샀다.
나카지마 감독은 장훈을 불러 “야구부에 넣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장훈은 뛸 듯이 기뻤다. 단, 조건이 있었다.
“전입시험에 합격해야만, 우리 학교에 다닐 수 있네. 학교의 규칙이니까 자네도 수긍하기 바라네.”
장훈은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마쓰모토상고 입학 후, 공부를 멀리한 그였다. 그런 그가 시험을 치러야 한다니.
“걱정하지 말게. 시험지에 자네 이름만 똑바로 쓰게. 그러면 30점은 기본으로 줄 테니까 말이야.”
나카지마 감독은 장훈의 어깨를 ‘툭’ 치며 행운을 빌었다.
“감독님 말씀대로 내 이름 석자를 똑바로 썼다네. 다행히 시험문제는 어렵지 않았어. 형식적인 질문들이었지. 난생처음 어머니와 형을 조르면서까지 그토록 오고 싶던 나니와상고에 입학하게 됐다니, 정말 믿어지지가 않더군.”
여름부터 나니와상고 유니폼을 입은 장훈은 첫 연습타격 때 학교 담장을 넘기는 대형 장외홈런을 기록했다. 장훈 전까지 나니와상고에서 대형 장외홈런을 때린 선수는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뛰던 사카자키 가즈히코 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훈의 홈런은 사카자키보다 비거리가 긴 초대형 홈런이었다.
담바로 중학교 때처럼 나니와상고는 어쩔 수 없이 외야 담장의 그물망을 10m이상 높여야만 했다.
[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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