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사가 반야월(94)이 매일 출근하다시피하는 서울 중구 초동에 위치한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다. 이 건물 4층엔 반야월의 제안으로 지난 2007년 5월 창립된 ‘가요사랑 뿌리회’ 사무실이 있다. 인터뷰를 위해 4층까지 ‘헉헉’거리며 걸어올라가니, 반야월이 의자에 꼿꼿이 앉아 헐떡거리는 이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젊은 사람이 그렇게 힘이 없어서야. 쯔쯧….” 이 정정한 노인에게 주눅이 든 건 이뿐만이 아니었다. 반갑다는 가벼운 인사로 악수를 주고받았는데, 그의 손아귀 힘이 어찌나 센지 하마터면 ‘악’ 하고 겁먹는 소리를 낼 뻔했다. 독수리처럼 매서운 눈매를 자랑하는 그는 호통(?)을 치고 기력을 자랑하면서도 호탕한 웃음을 시종 잃지 않았다.그가 앉은 의자 옆에는 지팡이 하나가 놓여있었다. 그는 매일 아침 이 지팡이를 도움삼아 4층까지 씩씩하게 걸어 올라온다. 겉으로 보기에는
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다만 노화에 따른 청력 손실이 있어 인터뷰 질문 때마다 셋째딸 박희라(58)씨가 기자의 질문을 받아 다시 묻는 형식이 반복됐다.
그와 인터뷰한 날은 마침 김정일의 사망 소식이 막 알려진 19일 오후 2시였다. “사망 소식을 들었느냐”고 묻자, 그는 “통일이 언제 될까” 하고 되물었다. “우리는 평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에요. 세상이 화평해야 국민이 잘 살 수 있는 거예요. 일제강점기
공연을 계속 다니면서 북한의 최고무대인 금천대좌(金千代座·1940년 국민좌(國民座)로 개칭)에도 섰는데, 통일이 되면 다시 한번 서야 하지 않겠어요? 거기서 ‘노래하자 꽃서울/춤추는 꽃서울…’(‘꽃마차’) 한 소절 뽑아야지. ‘불효자는 웁니다’도 불러야지. 내가 노래 한번 하면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계속 부를 수 있어. 내 노래 엄청 많으니까. 남인수, 백년설 등 예전 1류 가수들하고 함께 노래했지만, ‘진방남’ 따라올 가수 별로 없다고. 하하하하.”
가수 진방남, 작사가 반야월로 살아온 음악인생이 올해로 72년째다. 1940년 가수로 데뷔해 지금까지 5000여곡의
가사를 쓴 국내 최다 작사가로 이름을 날린 그는 지금도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며 ‘오늘’을 얘기한다. 문학 작품에 버금가는 옹골진 가사를 세상에 내놓은 까닭에 제법 진지하고 내면적인 모습만 비출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 만나보니 그는 재미있고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요즘 건강은 어떠십니까.
“정신이 건강하니 육체도 자연스레 건강해져요. 사랑하는 후배들도 많으니까, 정서적으로 도움이 많이 되지. 예전에는 술을 ‘억수로’ 많이 퍼마셨지만, 지금은 전혀 못 마셔요. 술 한방울도 못 대지. 그러니 건강하지 않을 턱이 있겠어. 지금은 술 먹으면 사약 먹는 것 같아. 예전에는 술에 취하면 집에 가지도 못했어. 으하하하.”
―장수의 비결이 있나요.
“첫째가 마음을 어질게 써야 해요. 언제든 화내지 말고, 화나는 일이 있어도 새기고 참아야 되죠. 편안하게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또 선배를 존중하고 후배를 사랑해야 해요. 조상도 잘 섬기고. 이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분들을 지극 정성으로 섬겨야 해요. 인간을 인간답게 사랑해야 한다는 얘기지. 밥도 적게 먹어야 해. 오늘도 다른 사람 밥
반도 못 먹었어요. 소식한다고 말라 죽는 거 아니야.”
요구르트를 마실 때도 두 번 정도 나눠 마시는 일반인에 비해, 그는 20번 정도 나눠 마신다고 했다. 소식에는 엄격한 규칙을 들이대는 그도 그러나 작품 구상에선 장수의 기본 요건들을 깰 때가 많다. “작품 구상하면 잠을 못 잘 때가 많아요. 그게 흔한 일은 아니지만, 일단 작품을 구상하면 끝날 때까지 잠을 못 자요. 만들어놓고 10번 들여다보면 10번 고칠 때가 많으니까. 어느 창작자도 ‘완성’이란 말을 쓸 수 없어요. 그렇게 말하면 그건 바보야.”
―반야월로 많이 알고 있지만 예명이 7, 8개나 되는데요.
“그렇지. 본명이 박창오이고 가수로 활동할 땐 진방남, 작사가로 활동할 땐 반야월을 주로 썼어요. 작사가 펜네임(필명)은 박남포, 추미림, 백구몽, 남궁려, 고향초, 옥단춘 등 7, 8개 됐어. 노래가 많을수록 펜네임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어. 노래를 분산시켜야 했지. 반야월로 작사를 워낙 많이 하니까, 시기와 질투도 받고 독식하는 느낌이 들잖아. 일종의 작전이라고 볼 수 있지, 하하. 예전에는 작품 하나 만들면 레코드 회사에서 꼬박꼬박 작품료가 나왔지. 하지만 지금은 돈 안 받고 후배들에게 곡을 줘. 어려운 후배들이 많으니까요.”
―작사가 마치 시 같아서
대중음악에 쓰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작품은 거짓말이 없고, 거짓말을 해서도 안 돼요. 순정과 참된 것, 평화와 발전의 기치가 모두 포함돼야 가사의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있는 거예요. ‘절대로’ 정직하게 만들어야 하죠. ‘유정천리’ ‘꽃마차’ 등 모든 노래들에 진실이 담겨있잖아. ‘아빠의 청춘’도 마찬가지고. ‘산장의 여인’도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녹여낸 작품인데, 내가 사실 권혜경보다 노래 테크닉이 더 좋아. ‘이 산, 장에…’ 하는 대목에서 내가 노래를 싹 들었다 놔버리니까 얼마나 리듬감이 좋아. 얘기가 삼천포로 빠졌네.”
인터뷰 자리에 동석한 김주명 가요사연구가는 반야월의 ‘산유화’가 김소월의 ‘산유화’보다 좋다는 얘기도 나온다고 그의 시적 감각을 높이 평가했다. 반야월의 가사에는 ‘창작’이라고 볼 만한 단어들이 종종 발견된다. ‘울고넘는 박달재’에서 ‘물항라’라는 단어는 사전에 없는 말. 항라는 흔히 옷감을 일컫는데, 반야월이 물색깔이 나는 옷감이란 의미로 직접 만들었다. ‘꽃마차’에 나오는 알곰삼삼이라는 단어는 사전에 있지만, 반야월을 통해 보편적으로 쓰이게 된 경우다.
―요즘 노래들은 가사가 잘 읽히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우리가 노래할 때는
서정과 진실, 기쁨과 슬픔을 모두 담아냈는데, 지금 노래는 듣는 노래가 아니에요. 노래할 때 별 ‘지랄’을 다 떨잖아. 여자는 무조건 의상에 집착하면서 보는 노래로 완전히 전락했지. 우리는 기쁨은 기쁜 대로, 슬픔은 슬픈 대로, 진실을 밝히는 노래를 부르려고 노력했어요. 그래야 국민도 진실하게 부르는 노래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지금은 그게 없어 안타까워.”
1917년 경상남도 마산에서 태어난 반야월은 고등학교 졸업 후 가세가 기울면서 청주에서 양복집을 하던 숙부를 찾아 양복일을 배웠다. 재단사 보조로 일하면서도 그는 늘 문학 책을 놓지 않았다. 그는 “20대 초반 인천도서관에서 매일 책을 읽었는데, 눈이 침침해지면 인천 바다를 보며 풀곤 했다”고 회고했다. 예술가 소질이 있었던 외가 쪽의 영향을 받은 반야월은 1937년 일본인이 주인인 태평레코드사가 주최한 콩쿠르대회에 나가 전국 1등을 차지하면서 음악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목포의 눈물’ ‘눈물 젖은 두만강’ 등 지금까지 명곡으로 자리잡은 노래의 가사를 써 온 그는 우리의 억압된 정서를 풀어주고 다독이는 첨병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반야월은 강압에 못 이겨 ‘결전 태평양’ 등 일본을 위한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 “빨리 하라고 윽박지르는데, 어떻게 안 만들 수가 있어. 안 하면 목이 달아날 판인데… 잘못하면 가족 모두 탄광으로 끌려갈 수도 있었으니까.”
―콩쿠르 1등, 5000여곡 최다 작사가, 국제저작권협회 골드메달 수상, 현역 최고령 가수 등 음악 활동에선 언제나 1등을 놓치지 않으셨는데요.
“사람이 세상에 나오면 1등이 돼야 해요. 1등 인생이 되려고 노력해야죠. 59점 받으면 안 되고 60점 넘어야 하는 거예요. 내가 50점밖에 안 되는 인생인데, 60점 70점 넘기려고 노력한 거지. 그렇게 벼가 익으면 다시 고개를 숙여야 하고. 내 이름이 그래서 반야월(半夜月·반달)이야. 50점부터 시작해서 차츰 올라간다는 의미로 지은 거지.”
―어릴 땐 어떤 성격이었습니까.
“참 얌전했어요. 부모님이 제가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야, 박창오 너 꼼짝말고 구석에 앉아 있어’ 하면 정말 아무런 대꾸없이 시키는 대로 했죠. 그래서인지 어릴 때부터 잘못할 일은 시작도 안 했어요. 내가 성질이 좀 급하긴 한데, 뒤끝은 없어요.”
반야월은 ‘가요계의
모범생’으로 통한다. 지금도 손수 양말과 손수건을 깨끗이 빨아서 헹군 뒤 정해진 위치에 넌다. 한여름에도
넥타이를 풀지 않고 꼭 매고 다니는 그는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기 위해서 취해야 할 최소한의 태도”라고 강조한다. “내가 이러니까, 너도 이래라는 식은 안 돼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순정으로, 양심으로 보여줘야 하거든. 그래서 후배들에게도 최소한의 모범을 보여 은근히 전파하려고 노력하죠.”
―끊임없는 창작 활동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소재는 얼마든지 있어요. 금광이나 석탄광에 가면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데, 사람들이 그걸 발견못해 파내지 못하는 것뿐이에요. 우리의 작품이라는 것도 발견에서 시작되는 거예요. 실생활에서 경험한 소재, 여행을 통해 얻은 소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얼마 전에도 오이도에 갔다 와서 ‘오이도 사랑’이란 노래를 만들었어요. 어떤
사물도 예사롭게 보지 않는 시각이 중요해요.”
―‘뿌리회’ 등을 통해 선배의 업적을 기리는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