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강철서신> 저자 김영환씨, 허현준 청와대 국민소통비서관실 선임행정관.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커버스토리
박찬수의 NL 현대사 (1) 연재를 시작하며
반미 선봉 섰던 ‘주사파’ 청와대 행정관
애국보수의 ‘지휘자’로 돌아서기까지
박찬수의 NL 현대사 (1) 연재를 시작하며
반미 선봉 섰던 ‘주사파’ 청와대 행정관
애국보수의 ‘지휘자’로 돌아서기까지
최근 대한민국어버이연합 파문의 중심에 선 허현준 청와대 국민소통비서관실 선임행정관은 ‘전향 주사파’다. 1990년대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했던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전북위원회 산하에서 일하다 <강철서신> 저자 김영환씨를 따라 북한민주화운동으로 180도 노선 전환을 했다. 반면 ‘변하지 않았다’는 의심만으로 철퇴를 맞는 이들도 있다. 2014년 12월 통합진보당은 ‘북한을 추종해 민주적 질서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유례없는 정당 해산을 당했다. 꼭 30년 전인 1986년 봄 ‘우리는 간첩 박헌영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도발적인 팸플릿에서 발화한 ‘엔엘(NL·민족해방) 사조’는 대학과 사회운동권,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젊은이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엔엘 운동에 대한 객관적 평가나 성찰이 이뤄진 적은 거의 없다. ‘북한’과 ‘주체사상’이란 민감한 단어가 진보 진영 내부에서도 공개적인 토론을 피하게 했다. 그런 점에서 엔엘과 주사파 논란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전향 주사파’가 극우단체와 재벌단체의 결합에 연루됐다는 최근 의혹은 엔엘과 주사파 논란의 진폭과 파장이 얼마나 크고 광범위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016년 4월에 30년 전의 엔엘 운동을 되돌아본다.
5공의 강압 통치가 극에 달했던 1986년 3월, 휴학하고 공장 취업을 준비하던 김지연(서울대 약대 83학번)씨는 서클 ‘고전연구회’ 선배인 김영환(서울대 법대 82학번)씨로부터 팸플릿(문건) 하나를 타이핑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타자기가 귀했고 타자를 칠 수 있는 학생도 드물던 시절이었다. 건네진 문건의 이름은 ‘한 노동운동가가 청년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 김씨는 전동타자기로 문건을 타이핑한 뒤 김영환씨에게 줬다. “운동론이나 혁명론을 다룬 다른 팸플릿과 달리, 케이비에스(KBS) 시청료 거부 투쟁을 지지하고 주체사상을 언급한 게 새로웠다”고 김지연씨는 기억했다.
김영환씨는 이 팸플릿을 딱 한 부 복사한 뒤 다시 7부로 재복사하고 원본과 1차 복사본은 폐기했다.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나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한 나름의 보안 조처였다. 7부는 서울대 각 단과대학의 학과 사무실에 몰래 뿌려졌다. 팸플릿의 맨 끝엔 작성자의 이름이 ‘강철’로 표시되어 있었다.
“지금 이 순간도 이 땅의 자주화와 민주화를 위해 분투하고 계신 청년학생 동지 여러분!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전국적으로 민주주의적 개헌을 위한 천만 명 서명운동이 높은 열기로 진행되고 있으며, KBS 시청료 납부 거부 운동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확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민중들의 투쟁은 양키 침략자들과 그의 충실한 개 전두환 독재자 일당의 파쇼적 폭압에 대한 그리고 기만과 착취와 부패에 대한 세찬 항거의 표현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운동이 비록 그 수준이 낮다 하더라도, 민중의 이익과 입장에 근거한 민중의 산발적 투쟁에 무관심하여 남의 일처럼 생각해선 안 됩니다. 역사의 주인은 민중입니다. (…) 지금 청년학생들에게 부과된 가장 크고도 중요한 임무는 주체사상을 학습하고 이해하여 이를 지도적 지침으로 삼으며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굳게 뭉치는 일입니다. 이렇게 되어야만이 비로소 청년학생운동이 종파주의를 비롯한 제반 편향에 쉽게 빠지지 않을 강한 기반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며, 적의 어떠한 분열 와해 파괴 공작도 진정한 단결을 유지하며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이 만들어질 것입니다.”(‘한 노동운동가가 청년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
김영환 “주체사상을 지도적 지침으로”
팸플릿에 언급된 ‘주체사상’이 북한 주체사상을 뜻한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은 처음엔 거의 없었다. 1980년대 학생운동권을 뒤흔들고 이후 30년간 숱한 논쟁과 갈등을 불러온 ‘엔엘(NL·National Liberation, 민족해방) 노선’, 좀더 좁혀서 얘기하면 남한의 자생적인 ‘주사파’(주체사상파)는 이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 두 달 남짓한 기간 동안 강철 명의의 팸플릿이 잇따라 서울대에 배포됐다. 파장은 즉각적이고 광범위했다. 문건은 수천, 수만 부로 복사에 재복사를 거듭하며 순식간에 서울 시내 다른 대학과 전국의 대학·노동현장·재야운동권으로 퍼져나갔다. 해방 이후 이처럼 단기간에 운동권을 사로잡은 문건은 전무후무했다. 나중에 이 문건들은 몰래 책으로 만들어져 출간됐고, ‘강철서신’이란 제목이 붙었다. ‘강철’은 안기부와 치안본부가 쫓는 1급 추적 대상에 올랐다.
강철서신을 쓴 김영환씨는 이렇게 회상했다. “팸플릿이 일단 배포되면 큰 반향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설령 반향이 없더라도 공안당국이 집요하게 추적할 거라는 건 분명했다. 매회 북한을 암시하는 언급이 조금씩 들어 있었으니까. 그래서 보안에 무척 신경 썼다. 원본과 첫 복사본을 폐기하고, 팸플릿 제작·배포에 관여한 사람도 두 명의 후배로 한정했다. 그 외엔 누구에게도 이 팸플릿을 얘기하지 않았다. 나와 함께 구국학생연맹을 만든 정대화(서울대 법대 82학번)가 한번은 ‘요즘 대학가에 널리 읽히는 팸플릿이니 읽어보라’고 강철서신을 건네준 적이 있다. 그걸 보고 ‘아 반향이 있구나’란 생각을 했다.” 김영환씨는 나중에 붙잡혀 안기부 조사를 받을 때 “운동권뿐 아니라 안기부와 치안본부, 공안연구소 등 모든 공안기관과 연구원들이 강철 문건을 한 부씩은 갖고 있다. 줄잡아 10만 부는 복사가 되어 유통됐을 것이다”란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학생운동권에 특히 충격을 준 건 두 번째 문건 ‘우리는 간첩 박헌영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였다. 문건을 타이핑했던 김지연씨는 원고를 받았을 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써도 되나”라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났다고 했다. 일제 강점기 줄곧 국내에 머물며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불씨를 살렸고 해방 이후엔 남로당(남조선노동당) 당수를 지낸 박헌영. 그를 ‘미국의 스파이’로 규정하는 강철서신 내용은, 한국전쟁 무렵 박헌영을 간첩 혐의로 처형했던 북한 정권 주장과 거의 흡사했다.
“박헌영은 1925년 조선공산당과 공산청년동맹의 일부 조직이 파괴되었을 때 이 전조직에 관해 일본 관헌에 고발하고 이 공로로 일찍 석방될 수 있었다. 이때부터 확고한 정치적 신념과 혁명적 양심을 상실했고 1939년 10월 시아이시(CIC: CIA의 전신)로부터 미국을 위해 복무하라는 권유를 받고 승낙했다. (…) (월북 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박헌영은 무장폭동 지휘부를 결성하고 자기 세력을 확대하다 미군이 평양 방면으로 진공해오면 무장부대들을 평양 주변에 결집시켜 동원할 계획을 갖고 준비하다 (내란 모의가) 발각됐다. (…) ‘박헌영이 정말 간첩이었느냐’라는 질문에 나는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지만, 다시 한번 부탁하고 싶은 것은 그 질문보다 ‘박헌영은 왜 간첩이 되었는가’ ‘우리는 이 역사적 사실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질문에 진지함과 관심을 모아달라는 것이다. (…) 혁명운동은 지식과 재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신념과 의리로 하는 것이다. 박헌영은 높은 지식과 재능을 갖춘 사람이었지만 혁명적 신념과 의리가 없었다.”(‘우리는 간첩 박헌영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비로소 팸플릿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뚜렷해졌다. 해방 이후 오랫동안 금기로 여겨진 ‘북한’이란 벽을 뛰어넘으려 하고 있었다. 민주화 이후 먼 훗날의 과제로 여겼던 반제국주의 투쟁과 통일운동을 지금 당장 전면에 내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반제국주의는 ‘반미’라는 훨씬 구체적인 형태로 가시화했다. 이전 학생운동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조류의 출현이었다.
어버이연합 ‘시위 발주’와
보수단체 ‘지시·지휘’ 의혹
청와대 행정관의 사상적 기원
한국 사회에 큰 영향 끼친 NL과
격동의 시대 건넌 사람들 이야기
재복사본 7부 서울대 배포하며
운동권 뒤흔든 NL 주사파 태동
대학·노동계·재야로 급속 확산
안기부의 1급 추적 대상 올라
‘강철서신’의 또 다른 저자 ‘박무산’
독재의 횡포가 너무 살벌해 작은 회의나 고민조차 사치로 여겨지던 시절, 강철서신은 다양한 방식으로 학생들의 삶을 바꿨다. 익명을 요청한 한 인사(서울대 사회대 83학번)는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운동에 기여할 수 있다’는 구절이었다. 나중에 보니 북한 김일성 주석의 말을 인용한 것이더라. 그 무렵 운동을 계속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 구절을 읽고 내가 비록 능력은 없어도 변화와 변혁에 도움을 줄 수는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게 지금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는 1989년 군에서 제대한 뒤 곧바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1986년 봄 ‘강철서신’이란 이름으로 배포된 6종의 팸플릿 저자가 모두 ‘강철’은 아니다. ‘한 노동운동가가 청년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 Ⅰ·Ⅱ’와 ‘우리는 간첩 박헌영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이어 노동자 조직 건설에 관한 세 개의 팸플릿은 하나로 묶여 나왔다. ‘선진적 노동자의 임무’ ‘노동자 조직 건설과 운영에 관한 4가지 원칙’ ‘지금 당장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그것인데, 이 중 ‘선진적 노동자의 임무’라는 팸플릿의 저자는 ‘박무산’으로 표기돼 있었다. ‘강철’과 ‘박무산’은 모두 가명이다. 경찰 추적을 피하기 위해 팸플릿이나 유인물에 가명을 쓰는 건 당시 흔했다. 김영환씨는 6개의 강철서신 중 왜 유독 ‘선진적 노동자의 임무’에만 ‘강철’ 대신에 ‘박무산’이란 가명을 썼을까. 사실 이 팸플릿의 저자는 따로 있었다. 팸플릿 내용이 좋아 강철 시리즈에 삽입했지만, 자신이 쓴 게 아니었기에 필자를 ‘박무산’으로 표기했던 것이다. ‘선진적 노동자의 임무’를 쓴 이는 당시 서울 구로공단 삼립식품에 다니던 고졸 출신의 진짜 노동자 심진구(1960년생)씨였다. 심씨는 1985년 무렵 김영환씨를 만나 김씨가 ‘북한’을 접하는 데 영향을 준 걸로 알려져 있다. 심씨는 자신의 글이 강철서신에 포함됐다는 이유로 안기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평생 그 후유증에 시달렸다.
벌써 30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엔엘의 등장과 확산을 어떻게 볼지는 여전히 뜨거운 논란거리다. 2013년 이석기 통합진보당(통진당) 의원을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하고 이듬해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에 유례없는 정당해산 결정을 내린 건 이 논란이 매우 정치적이고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준다. 헌재 재판에 김영환씨는 정부 쪽 증인으로 출석했다. 김씨는 “통진당 주요 인사들이 (1992년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결성됐던) 민혁당 당원이거나 산하 조직원이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그의 증언은 수만명의 당원을 가진 통합진보당이 과거 민혁당을 계승한 ‘이적단체’라는 헌법재판소의 논리적 비약을 메우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주사파를 법적으로 다루는 건 오히려 역효과를 부른다고 주장했던 김씨는 정부 쪽 증인으로 나선 이유를 <중앙일보>인터뷰(2014년 12월20일치)에서 이렇게 밝혔다. “통진당은 이미 극단적 종북 성향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확실히 고립됐다. 그렇다면 이런 정당은 사법적으로 해산하는 게 맞다고 생각을 바꿨다.” 그의 증언은 진보 진영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통합진보당에 대한 그의 시각은 차치하고라도, 30년 전 박헌영 팸플릿에서 그렇게 강조했던 ‘의리’라는 측면에서 그랬다. 통진당을 변론한 이재화 변호사는 트위터에서 “보수건 진보건 인간은 최소한의 예의가 있어야 한다”고 썼다.
30년 만에 만난 80년대 운동권 두 리더
김씨는 헌법재판소 증언을 마치고 하와이로 가서 대학 선배인 백태웅 하와이대 법대 교수(서울대 총학생회장(학도호국단장)과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중앙위원장을 지냈다)를 만났다. 백씨는 강철서신 등장 이후 운동권에서 엔엘과 주사파 영향력이 급증하던 시절, ‘이정로’라는 필명으로 주체사상을 정면 비판하는 글을 쓴 장본인이다. ‘주체사상, 조선노동당,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한 우리의 태도’라는 문건이었다. “현재 북한의 ‘김일성 절대화’의 문제점은 심각한 지경이다. 당과 수령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강조하는 북한의 선전, 선동 활동은 사회를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요소가 전면적으로 침투하기 시작할 때 어이없는 허약성을 불러올 수 있다. (…) 일부 주사파 세력은 남한 혁명을 조선노동당 내지는 한국민족민주전선이 대신 지도해줄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다. 그것이 전적으로 환상이라고 아무리 말해줘도 그들은 들으려 하질 않는다.”(‘주체사상, 조선노동당,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한 우리의 태도’)
1980년대 운동권에서 가장 대척점에 섰던 두 사람은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 다시 만나, 하와이 해변에서 함께 수영을 하며 얘기를 나눴다. 백씨는 왜 헌재 증언에 나갔냐고 후배인 김씨를 나무랐다고 한다.
김영환씨는 “나도 증언을 후회한다는 그런 비슷한 얘기를 했던 것 같다. (내 속엔) 후회하는 측면과 잘했다는 측면이 항상 공존하는 거니까…”라고 말했다.
엔엘 주사파를 상징하는 말처럼 되어 버린 ‘종북’이란 단어를 처음 쓴 건 2001년 사회당이었다. 사회당은 민주노동당의 통합 제의에 “민중의 요구보다 조선노동당의 외교정책을 우위에 놓는 ‘종북세력’과는 당을 함께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2007년 대선 패배 이후 민주노동당 내 엔엘과 피디(PD·People’s Democracy, 흔히 평등파라 부른다)의 노선투쟁 과정에서, 피디 계열인 조승수 당시 진보정치연구소장은 “종북주의와 이에 바탕한 패권주의가 당내 다수파가 됐다”고 엔엘 주사파를 공개 비난했다. 조승수 소장은 “종북주의에 기반한 다수파(엔엘)는 당비 대납과 집단 주소 이전, 심지어 부모·친척·미성년자까지 입당시켜 지역위원회를 장악하고 지금은 중앙위원회와 대의원까지 주요 의결기구를 장악했다. 국민들은 민주노동당의 정체성-북한과의 관계와 태도-에 의구심을 보내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때부터 ‘종북’은 대중적 용어로 확산됐다. 그의 주장은 예언과도 같았다. 5년 뒤인 2012년 4월 비례대표 후보를 뽑는 경선에 대리투표와 공개투표 등 대규모 부정이 있었다는 ‘부정경선 사건’으로 통합진보당은 만신창이가 됐다.
1945년 해방 시기부터 민주화 운동사를 정리해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80년대 중반 이후 엔엘 운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데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엔엘과 주사파 운동을 민주화운동 범주에 포함할지에 대해 우리 사회의 컨센서스가 이뤄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료는 비교적 폭넓게 수집하지만 그중 상당 부분은 비공개로 분류하고 있다. 홍계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장은 “관련 법과 시행령에서 민주화운동 범주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따라 사료를 수집하고 정리해서 서비스한다. 1960~70년대까지는 (민주화운동 범주를 정하는 게) 어렵지 않지만 80년대 중반 이후엔 엔엘과 주사파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게 아무래도 사료 수집과 공개에 영향을 끼친다”고 말했다. 이유야 어떻든 지난 30년간 한국 사회운동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엔엘 운동의 공과가 객관적으로 평가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반제국주의를 반미로 구체화한
전혀 다른 학생운동 흐름 출현
김영환이 강철서신에 포함시킨
노동 문건 실제 저자 심진구
안기부 끌려가 혹독한 고문 당해
통진당 해산 때 정부 쪽에서
헌재 논리 지원한 주사파 대부
전북총련 의장 출신 허현준
“민혁당 전북위 전향 때 합류”
NL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평가
1986년 돌연 등장한 엔엘 사조는 우리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 대중노선을 분명히 함으로써 학생운동권의 엘리트적·전위적 운동 방식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1987년 6월항쟁 과정에서 학생운동이 일반 시민의 민주화 열기와 성공적으로 결합할 수 있었던 데엔 엔엘의 대중노선 역할이 컸다는 평가가 있다. 1988년 결성됐던 ‘반미청년회’ 의장을 지낸 조혁(고려대 인문대 82학번)씨는 이렇게 말했다. “엔엘이나 주사파가 세력이 커서 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게 아니라, 정치력이 있고 유연했기에 1987년 민주화 시기를 주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다시 엔엘의 확산에 기여했다. 지금이야 (운동권 출신이) 정치권에 많이 진출해 있으니까 쉬워 보이지만, 80년대 중반만 해도 (개량주의적인) 야당과 함께 투쟁하자고 하면 내부에서 격렬한 비판을 받곤 했다. ‘직선 개헌 쟁취’란 전국민적 구호를 내거는 것도 대중추수주의란 비판을 받을 때였다.” 운동권에서 외면했던 ‘수준 낮은’ 케이비에스 시청료 거부 투쟁을 높이 평가한 강철서신은 그런 단적인 예일 것이다.
반론도 있다. 서울대 법대 학생회장을 지낸 임성택(82학번)씨는 “엔엘의 대중노선이 새롭다고 보지 않는다. 1980년 무림-학림 논쟁 때부터 대중노선은 학생운동의 한 흐름으로 죽 이어져 왔고 언제나 대중노선이 다수파였다. 엔엘은 학생운동의 분열을 극복했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그 이후 엔엘과 피디로 운동의 분열이 훨씬 심해지고 고착화했다. 엔엘 전체에서 주사파의 영향력도 과장돼 있다. 중요한 역할은 했지만 엔엘의 압도적 다수는 주사가 아닌 ‘비주사’였다”고 말했다.
제대로 조명받지는 않았지만, 엔엘 운동의 유산 가운데 가장 논쟁적인 부분 중 하나는 서클 해체다. 1986년 새롭게 나타난 엔엘 계열은 학생운동의 근거지 노릇을 하던 학내 서클을 해산하고 새로운 활동가조직을 건설함으로써 운동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틀어쥘 수 있었다. 학생 활동가들의 재생산 기지였던 서클의 해체는 이후 학생운동의 급속한 몰락을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진경(서울대 사회학과 82학번, 19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을 정리한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사사방) 저자)씨는 “학생운동뿐만이 아니다. 학생운동이 전체 사회운동의 풀(저수지)이었는데 그 풀이 말라버렸다. 학생운동이 몰락하면서 전체 사회운동도 쇠퇴했다. 서클이 이어졌다면 지금 운동권의 상황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엔엘 운동의 부침이 훨씬 극적인 건, 남한에 엔엘을 확산시킨 ‘강철’ 김영환씨와 민혁당 핵심 상당수가 1990년대 중반부터 북한정권 타도와 북한민중 해방을 외치는 노선으로 180도 변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의 변신은 70년대 일단의 미국 민주당 저명인사들이 네오콘(Neo-Conservative, 신보수주의자)으로 전향한 걸 연상케 한다. 김영환씨는 1995년 월간 <말> 4월호에 실린 ‘반미, 북한 그리고 90년대에 대한 나의 생각’이란 제목의 인터뷰 기사에서 전향을 공식화했다. 지하 전위당인 민혁당 중앙위원장으로 있을 때였다. 민혁당은 산하에 경기남부위원회와 영남위원회, 전북위원회 등 3개의 지역조직을 두고 있었다. 이 중 김영환씨가 관할한 전북위원회 다수가 김씨를 따라 전향했다. 재야단체 연합체인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조국통일위원회에서 활동하던 홍진표(서울대 정치학과 83학번)씨 등 3명도 김씨의 설득으로 노선을 바꿨다. 홍진표씨는 “통일운동 과정에서 북한정권의 교조적 태도에 실망해 유학을 떠나려던 참에 김영환씨가 북한민주화운동을 제안했다. 북한 실상을 알게 된 만큼 거절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 무렵 전향한 인사 중엔 최근 어버이연합 파문에 연루된 허현준 청와대 국민소통비서관실 선임행정관도 있다. 1994년 전북대 총학생회장과 전북총련 의장을 지낸 허 행정관은 민혁당 정식 당원은 아니었지만 전북위원회 산하에서 일을 했다. 김영환씨는 “허현준씨를 개인적으로 잘 안다. 북한민주화운동을 처음 시작할 때 합류한 건 아니었고, 나중에 전북위원회가 집단적으로 사상 전향을 하면서 산하에 있던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합류했는데 그때 허씨도 같이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북한민주화운동으로 노선 전환한 사람들도 다양하게 갈라진다. 정치하고 싶은 사람은 정치하는 거고…, 개인적인 선택일 뿐이다”라고 덧붙였다.
주사파의 집단 전향과 허현준
백태웅씨는 허현준씨 사건을 보면서 “안타깝다”고 말했다. “1980년대 주사파 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다른 운동을 한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사상적 좌표를 모색하는 그런 과정에 있었으리라 본다. 이념에 의해 운동을 한 거라기보다는 사회운동 속에서 전망을 찾기 위해 이것저것 섭렵하는 과정이었다. (이념은 바뀔 수 있지만) 중요한 건 초심이다. 사회적 약자를 돕고 사회 변화를 위해 헌신하려던 초심을 잃지 않는다면 (허현준씨처럼) 극도로 정치화하는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주사파’나 ‘전향 주사파’가 엔엘의 큰 줄기는 아니다. 사상으로서 ‘주체사상’을 따랐다기보다는 민족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엔엘 지향을 가졌던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있다. 김영환씨나 홍진표씨 같은 이들은 어떤 생각으로 북한 조선노동당 또는 노동당을 추종하는 전위당(민혁당)에 가입했고, 또 왜 갑작스레 정반대로 방향을 튼 것일까. 김영환씨와 함께 남한 엔엘 운동의 정립에 중요한 구실을 했던 하영옥(서울대 법대 82학번)씨는 그때 ‘전향’을 거부하고 험난한 길을 걸었다. 안락하지 못한 삶을 살기는 한기홍(연세대 심리학과 82학번)씨를 비롯해 북한민주화운동에 뛰어든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김영환씨에게 처음 ‘북한’을 접하게 했던 노동자 심진구씨는 이젠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격동의 시대에 좋든 싫든 엔엘의 세례를 받았던 ‘80년대 학번’들은 그때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이 시리즈는 1980~90년대 엔엘 운동의 이야기이며, 그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박찬수 논설위원 pcs@hani.co.kr
▶ 박찬수 <한겨레> 논설위원. 1989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 청와대 출입기자와 워싱턴 특파원, 정치부장, 편집국장을 지냈다. 저서로 청와대와 백악관의 권력작동 방식을 비교한 <청와대 vs 백악관>(2009년)이 있다. 82학번으로 5공 시절 군에 강제징집됐다 돌아와보니 대학가가 온통 엔엘(NL) 열풍에 휩싸였던 기억을 갖고 있다. 사회부 신참기자 시절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를 취재하며 무엇이 수많은 학생들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의문을 가진 게 20여년이 지나 이 시리즈를 쓰는 계기가 됐다. 격주로 연재한다.
※‘박찬수의 NL 현대사’는 격주로 연재됩니다.
1986년 3월 쓰인 팸플릿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씨.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전동타자기로 타이핑돼 전국의 대학과 노동 현장으로 퍼져나간 강철서신 문건. <한겨레> 자료사진
보수단체 ‘지시·지휘’ 의혹
청와대 행정관의 사상적 기원
한국 사회에 큰 영향 끼친 NL과
격동의 시대 건넌 사람들 이야기
1986년 3월 필명 ‘강철’ 김영환
재복사본 7부 서울대 배포하며
운동권 뒤흔든 NL 주사파 태동
대학·노동계·재야로 급속 확산
안기부의 1급 추적 대상 올라
1986년 4월28일 서울대생 김세진(자연대 총학생회장)·이재호(전방입소 훈련 전면거부 및 한반도 미제 군사기지화 결사저지를 위한 특별위원회 공동부위원장)씨가 서울 신림동 사거리에서 시위를 벌이다 분신했다. 5월30일 서울대에서 열린 장례식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1986년은 학생운동 노선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과 대립이 본격 시작된 시기다. 정부가 자민투(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와 민민투(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 조직으로부터 압수했다고 발표한 유인물들. 연합뉴스
전혀 다른 학생운동 흐름 출현
김영환이 강철서신에 포함시킨
노동 문건 실제 저자 심진구
안기부 끌려가 혹독한 고문 당해
1990년대 중반 180도 변신 뒤
통진당 해산 때 정부 쪽에서
헌재 논리 지원한 주사파 대부
전북총련 의장 출신 허현준
“민혁당 전북위 전향 때 합류”
2005년 11월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뉴라이트전국연합 창립대회에서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반갑게 악수하고 있다.<한겨레> 자료사진
박찬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