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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번 決勝-14번 모두 敗한-불운한 승부사는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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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565회 작성일 2011-11-18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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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오랜만입니다 게재 일자 : 2011년 11월 18일(金)
“軍시절 ‘빠따’무서워 速棋… ‘미친놈’욕먹어도 기느니 할복자살”
速棋와 싸움바둑의 대가 서능욱 9단 요즘미투데이공감페이스북트위터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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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능욱 9단의 바둑을 팬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순조로운 행마를 마다하고 싸움판으로 뛰어들어 관전자들이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호전성에 있다. 16일 한국기원에서 서 9단을 만났을 때도 급한 성격을 제어하기 위해 대국 중에 손에 쥐는 염주를 오른쪽 손목에 차고 있었다. 임정현기자 theos@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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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팬 중에는 서능욱(53) 9단을 좋아하는 이들이 많다. 첫째는 그의 시원시원한 속기(速棋)와 ‘치고 박는’ 싸움바둑 스타일 때문일 것이다. 특히 그의 ‘초속기’는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는 실제 성격도 급하면서 시원시원해 바둑 행사마다 불려 다닐 정도로 여기저기 인기가 높다. 다 그렇진 않아도 바둑기사들은 좀 ‘쪼잔한’(?) 편이다.

서 9단을 결승 무대에서 본 지는…, 가물가물하게 오래된 것 같다. 조훈현-서봉수의 10년 독재 아성을 무너뜨릴 ‘도전 5강’ 중 한 명으로 기계(棋界)의 기대를 모았지만 ‘전설적인’ 14차례 결승 무대의 전패 기록을 갖고 있다. ‘준우승의 사나이’로 불렸고, 그가 한 차례도 우승을 못한 것이 ‘바국계의 불가사의’로 지금도 회자된다. 보통 최고 프로기사들은 가장 많이 차지했던 타이틀을 따 예컨대 조훈현을 ‘조 국수’, 서봉수를 ‘서 명인’ 등으로 부르지만 서능욱은 여전히 ‘서 9단’이다. 무관(無冠)이니까.


서 9단은 여전히 대국에 참여하며, 바둑 포털인 ‘타이젬’ 이사로 활동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 나이의 프로기사 가운데 가장 분주한 인물로 보면 된다. 16일 서울 성동구 홍익동 한국기원에서 서 9단을 만났다. 이날 인터뷰에서 그가 ‘속기파’가 된 주요한 원인(?)이 처음 밝혀졌고, 거의 입에 대지 않던 술을 지천명(知天命)부터 시작하게 된 사연도 들을 수 있었다.

-원래 부평이 고향이죠?

“지금은 인천이죠. 여섯 살 때부터 아버지 어깨너머로 바둑을 배웠어요. 아버지는 10급 정도 두셨죠. 바로 동네 바둑을 평정하고 기원으로 진출했어요. 첫 스승은 작고하신 이일선 3단이었어요. 6학년 때 인천 송도에 놀러 온 프로기사 고재희 7단에게 테스트를 받았어요. 이후 ‘한국기원에 원생으로 들어오라’고 해 서울로 올라와 큰물에서 놀게 됐죠. 그 덕분에 바둑이 늘었어요.”

중학교는 서울 배문중에 바둑 장학생으로 가게 됐다. 당시 바둑부가 있던 학교는 배문중과 남산중 두 곳이었다. 바둑 명문이 된 휘문중에는 나중에 바둑부가 생겼다. 그런데 일이 꼬였다.

“박정희 대통령 아들인 박지만씨가 배문중에 들어왔어요. 저하고는 같은 58년 개띠죠. 그러자 갑자기 면학 분위기를 조성한다고 바둑부를 없앴어요. 그래서 남산중으로 가게 됐는데 중학교 2학년인 1972년 프로에 입단해 학교 바둑부와는 인연이 없었어요.”

58년 개띠들은 대개 박지만씨 때문에 학제가 바뀌면서 삶의 궤적이 변했다는 ‘근거가 약한’ 피해 의식이 있는데, 서 9단도 거기에 속했다.

-처음 바둑을 배울 때도 속기 스타일이었나요? 아마도 부친께서 바둑을 가르친 게 아들의 급한 성격을 고쳐 보려 하신 게 아닐지요.

“그때는 좀 빠른 편이긴 해도 나중처럼은 안 빨랐는데…, 군 생활을 하면서 굳어졌어요.”

군대 생활을 하면서 바둑이 속기파로 됐다니?

“제가 인천에서 ‘야간 방위’를 했어요. 오후 6시까지 귀대해야 업무를 시작하죠. 늦으면 ‘빠따’가 무서웠어요. 당시 프로기사로 서울 종로구 관철동 한국기원에서 대국을 하고 서둘러 인천까지 가야 했어요. 시간이 촉박하니까 속기로 두지 않을 수 없었어요. ‘빠따’를 피하려면….”

지난해 한 바둑 평론가는 “(서능욱이) 바둑이 고통스러우니까 속기로 둔 것”이라는 나름 멋진 분석을 했는데, 천하의 속기파 서 9단을 ‘야간 방위’가 만들었다니…, 좀 우습게 됐다.

“제 성격이 원래 급해요. 속기가 제 체질이랑 맞아요. 그런데 승부사는 속기가 안 맞아요. 물고 늘어지는 기사가 장수를 하죠.”

지금은 은퇴했지만 서 9단의 선배인 김희중 9단도 속기에 능했다. ‘김-서’ 두 속기파가 만난다면?

“어느 해 동양증권배 8강전에서 만났어요. 오전 10시에 시작했는데 40분 만에 끝났죠. 바둑 기자가 11시쯤에 취재를 왔는데 보지도 못하고 돌아갔어요.”

그는 자신의 매니저로 활동했던 부인(현인숙씨)의 권유로 염주를 들고 대국에 임하기도 했다. 염주를 돌리면서 급한 마음을 가라앉히라는 거였다. 계속 준우승에 머물자 나온 고육지책이라고 할까? 당시 신문 기사도 ‘서능욱, 속기 스타일 바뀔까?라며 궁금해 했다.

“그해 대왕전 때로 기억하는데, 대국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염주 알을 너무 빨리 돌려 염주가 풀어지면서 바둑판 위에 쏟아져 버렸어요. 급한 성격을 고쳐 볼까, 단전호흡도 하고 온갖 시도를 했는데 천성이 바뀌어야지 뭘 배운다고 고쳐지는 게 아니더군요.”

그는 1979년 제4기 최강자전에서 준우승을 한 뒤 1994년 천원전 준우승까지 결승 대국에서 총 14차례 무릎을 꿇었다. 결승에서 조훈현에 12차례, 이창호에 2차례 패했다. 조훈현-서봉수-이창호라는 강호들과 전성기를 함께하면서 서 9단은 좀 불운한 기사에 속한다는 얘기를 듣기도 한다.

“제 운명이 그거밖에 안 되는거죠. 그 사람들이 아니었어도 준우승만 했을 거예요. 아쉬워서 하는 얘기일 뿐이고…. 조 국수는 워낙 잘 뒀고, 창호도 내가 쫓아갈 만하면 더 앞서 가 있더군요. 고물버스로 세단 쫓아가는 거랑 마찬가지였어요.”

-가장 아쉬웠던 결승 대국이 있다면.

“전남일보 왕좌전이었든데 결승에서 조 국수랑 붙었어요. 흑을 잡고 괜찮게 진행됐는데 역시 성질 급한 게 문제였어요. 딱 뒀는데 안 되는 수에 뒀죠. 본능적으로 돌을 놨다 뗐어요. 조 국수도 가만히 있었고 그때는 입회인도 없었어요. 하지만 10분간 장고하다가 그 자리에 돌을 놓고 일어섰죠.”

-준우승만 해서 아쉬움이 많을 테고, 우승해 보겠다는 욕심은 여전하신 거 아닌가요?

“아쉽죠. 어떤 때는 우승만 한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술을 안 마셨는데 쉰 살이 되고 나서부터 술을 먹기 시작했어요. 승부를 포기했다는 거죠. 올라오는 젊은 애들이 나보다 잘 두고 세니까, 이제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고 그때부터 편하게 두자, 그러면서 술을 자주 마셨죠. 욕심을 거두니 편해진 거죠.”

-그전에는 술을 안 했나요.

“거의 입에 안 댔어요. 우승을 위해 나름대로 쉰까지 자기 관리를 철저히 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주변에선 제가 술을 못하는 줄 알았어요.”

-요즘은 얼마나 자주, 누구하고 술을 드십니까?

“거의 매일 마신다고 보면 돼요. 사람마다 평생 마실 주량이 있다잖아요. 지금까지 안 마셨으니 그것까지 마실 요량인가 봐요. 프로기사는 쩨쩨하고 계산적이고 ‘빈티’가 나서 같이 안 마셔요. 사실 ‘이긴 자’들이 술을 샀어야 했는데, 조 국수는 술을 못하고, 서 명인은 ‘짜서’ 술을 안 사고, 나머지는 돈이 없어서… 맨날 사 줄 수도 없고. 그러다가 바둑 동네의 술 문화가 사라졌어요. 요즘 젊은 기사들은 세대 차가 너무 나서 같이 못 마시고.”

한국기원이 관철동에 있던 소위 ‘관철동 시대’에는 바둑계의 술 문화가 거방졌다.

“김인이나 김희중 선배가 우승하거나 좋은 성적을 내면 한 30명씩 미아리로 몰려가서 술을 먹었어요. 우승 상금은 거의 집으로 못 가져갔죠. 조훈현·서봉수 시대부터 그런 문화는 없어졌어요. 그러니 누가 우승을 해도 박수를 치러 가는 동료 기사들이 별로 없어요.”

서 9단의 기풍(碁風)을 말할 때 바로 관철동 시대의 ‘낭만사조적’ 기풍을 지닌 기사로 평가한다. 싸움바둑이다.

“그래요. 저는 싸움을 안 하면 둔 거 같지 않죠. 패를 끝까지 몰고 가며 싸우죠. 집만 짓고 그러는 건 체질이 아니고 굴복을 못해요. 참으면 이겨요. 밑으로 기면 돼요. 요즘 젊은 애들은 그걸 잘하죠. 이기는 수단만 있으면 모양을 안 따지잖아요. 그런데 저는 지더라도 나가서 붙어서 져요. 기어서 이길 바에는 할복자살하죠. 승부사는 이기는 게 목적인데, 저는 승부사 기질이 아니에요. 끝나면 미친놈 소리를 듣곤 했죠. 이길 수 있는 바둑을 지니까. 이길 수 있는 바둑을 지면 운이 멀어져요. 우승 맛을 봐야 하는데.”

화제를 돌려 봤다.

-내기바둑도 하십니까?

“내기바둑도 종종 두지만 저하고 두자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두자고 하면 받아 줄 텐데. 보통 아마 상급들이 많이 도전해요. 9점 깔고 내가 왜 지냐, 하는 거죠. 보통 술 내기 하면 3판 두면 두 판 이기고 한 판은 져요. 일부러 지는 건 아니고.”

-명사들하고도 종종 두나요?

“가장 재미없는 게 명사들하고 두는 거예요. ‘접대’바둑이잖아요. 대마를 잡을 수도 없고 상대의 기분이 좋게 유도해야 하고.”

바둑에는 격언이 많다. 바둑을 인생에 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둑 10계명도 있다. 그중에 신물경속(愼勿輕速)은 ‘서두르지 말고 신중하게 두라’는 것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바둑 격언 가운데 마음에 새겨 두는 게 있느냐고 물었다.

“(한참을 생각한 뒤) 그런 쪽은 잘 모르겠고, 사람들은 욕심을 버리라 하는데 나는 욕심을 채우라고 합니다. 욕심을 채운 놈이 버릴 줄도 알아요. 처음부터 마음을 비워라 하는 건 아니라고 봐요. 저는 하늘까지 채우라고 합니다. 서울대 갈 정도로 열심히 해야 어디든 가지요.”

-평생 바둑을 해 왔는데 인생과 바둑을 정리해 본다면 어떨까요.

“바둑이 보이면 세상이 보일 것 같아요. 어느 분야건 한 분야를 뚫으면 도가 통하잖아요. 문제는 아직 바둑이 잘 안 보인다는 거죠. 보일 듯 말 듯하면서 안 보여요. 오묘한 게 세상과 같아요. 그래서 바둑을 인생에 비유하나 봅니다.”

인터뷰 = 엄주엽 부장대우(체육부) ejyeob@munhwa.com
 
 
 
 
 
게재 일자 : 2011년 11월 18일(金)
서능욱 9단은… 남산中 2학년 때 전승입단… 1만승 목표로 두는 인터넷 바둑 9500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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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초반 한 기전에서 맞붙은 서능욱(오른쪽)과 서봉수.
1958년 5월5일 인천에서 태어났다. 1972년 14세에 입단했다. 장학생으로 입학한 남산중 2학년 때 백성호(현 9단)와 함께 전승입단을 했다. 역대 전승입단자는 5명 정도에 불과하다. 속기파였고 싸움바둑에 능해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감각적 천재형’이란 평가를 받았다. 젊은 축에서는 이세돌 9단이 비슷한 평가를 받는다.

조훈현-서봉수 시대에 그 뒤를 이을 ‘도전 5강’으로 평가받으며 기대를 모았다.

“‘도전 5강’ 중에 강훈 9단(은퇴)만 박카스배에서 한 번 우승했으니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어요. 그 뒤로는 유창혁과 이창호가 나타나 우리가 설 땅이 없어졌죠.”

1990년 입신(入神)의 경지인 9단 승단을 했다. 통산전적은 980승 5무 688패(승률 58.61%)다. 통산 최다승 역대 5위, 통산 최다대국 역대 5위다. 최근 2년간 전적은 33승 29패로 5할 아래를 유지하고 있다. 결승에 14번 올라 모두 준우승에 머물면서 조금만 더 침착했더라도 훨씬 성적이 좋으리라는 주위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서 9단의 별명은 ‘손오공’.

“김수영 9단이 한국기원 원생 사범하실 때 지어 주셨어요. 큰 재주는 없고 잔재주에 능하다고 해서. 그때부터도 바둑이 번쩍번쩍 날아다녀 선배들이 ‘이놈 봐라’ 할 정도로 신출귀몰했죠.”

가깝게 지내는 사람은 기사 중에는 많지 않다.

“기사들은 또래하고는 안 친해져요. 라이벌이니까. 겉으로는 친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안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우리 때도 연구회를 만들었는데, 조훈현 국수 같은 고수들은 잘 안 가르쳐 줘요. 부메랑이 돼 돌아오니까. 승부의 세계인 거죠. 사실 고수가 가르쳐 주면 금방 늘거든요. 그런데 이창호 때부터는 같이 연구하면서 후배들에게 잘 가르쳐 주더군요. 한국 바둑이 버티는 힘이에요.”

요즘은 인터넷 바둑에 빠져 있다. 무려 1만5000판을 둬 9500승을 했다. 1만승을 목표로 하고 있다. 1만승 하면 바둑이 보이지 않을까 해서. 보통 인터넷에서 20분 정도면 한 판을 둔다. 한때 서 9단의 매니저였던 부인이 나중에 사업적으로 성공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 바둑을 인연으로 만났으며 ‘장가 잘 갔다’는 소리를 듣는다.

엄주엽기자 ejyeob@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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