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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6 군사革命(쿠데타) 과 박정희-장면 정권-내용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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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2,525회 작성일 2011-11-02 0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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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사]한국근현대사 5.16군사 정변과 박정희 정부

femudoputa
2009.06.13 19:43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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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사]한국근현대사 5.16군사 정변과 박정희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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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군사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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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혁명 준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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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혁명의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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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내부에 분 혁명에 대한 강한 열망은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크게 나누어 보면 고등교육에서 온 조국 현대화를 위한 민족주의 정신의 강화, 인사적체와 열악한 복무환경 개선에 대한 욕구, 좌파 통일운동과 사회혼란에 의한 안보 위기의식 등이 혼재되어 있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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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이 미국 군사학교와 일반학교에서 조직 기술 행정 경영 등 지식 학습뿐만 아니라 국제현실을 알게 되면서 너무나 가난하고 낙후된 조국을 발전시켜야 겠다며 스스로 민족주의의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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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국내 사법 행정은 여전히 일제시대에 습득한 일본어와 미군정시대 영어로 된 체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당연히 행정기관은 미약한 생산성과 기술을 발휘하면서 인식과 전망 수준마저 낮아 군대의 질적 성장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기에 군인들의 자신감은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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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예산편성에서 당시 행정부는 부서별로 돈을 나누고 어디에 얼마가 소요된다는 식에 머물고 있었다. 반면에 국방대학원생들은 더 나아가 예산이 투입됐을 때 얼마만큼의 효과가 나올지 예측하고, 피드백을 통해 검증하고 개선하는 기법까지 적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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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미국으로부터의 지식 도입은 한국을 영어 망국병에 들게 했다. 그처럼 가난했던 시절에 일본과는 원수가 되었기에 한국을 도와 준 미국으로부터 뭐라도 하나 더 얻기 위해서는 영어가 필요했다. 당연히 그 당시 국비로 미국유학을 떠났던 수 많은 군인들도 일제식민지 유산을 떨쳐 버리기 위해 받아들인 미국식 기법들을 배우기 위해서는 영어가 필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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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열등감은 나중에 영어 강제교육 실시로 표출된다. 지금은 필요에 따라 영어를 각자가 공부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모두에게 강요하는 영어교육 난민사태는 너무나 과하다. 물론 오로지 취업이 목적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프랑스처럼 모국어를, 우리는 한국어에 충실해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을만큼 대한민국이 발전했다. 한국어를 세계어화 하는데 더 신경써야 할 것이다. 혁명군 중추였던 이석제가 나중에 상당할 정도로 일본식 한자와 미군정 영어로 된 대한민국 행정기록 문자를 한글화 하는데 많은 공헌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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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인해 그 당시 다른 나라들이 군사혁명의 명분으로 민족주의를 내세운데 반해 5.16군사혁명군은 보다 현실적이고 한국의 시대 상황에 맞으면서 한국에 필요했던  '조국 재건론'을 들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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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러한 우수한 능력을 가지고 신민족주의로 변모한 군인들도 낙후된 조국의 경제적 현실 때문에  배고픔에서 벗어 날 수 없었다. 궁핍한 복무현실은 군대의 심각한 문제거리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적지 않은 장교들이 부정부패의 유혹에 빠져 비리를 저지르고 있었다. 뛰어난 군인들의 능력을 활용하기 보다는 아에 감축 정책으로 군인들을 줄이려고 하는 정부가 맘에 들리도 없었다. 이러한 정치환경은 능력상 앞서가던 군인들에게 국가미래를 위해 행정권에 강제적으로라도 참여해야 한다는 의식을 심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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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을 받아도 한 가족의 보름 정도 식량거리 밖에 되지 않았기에 많은 장교들은 숯을 구워 팔기도 했다. 영관급 장교들도 부대 내에서 점심을 굶고 식권을 '불식미 전표'로 바꿔 쌀로 교환해서 신문지에 담아다가 하루하루 식구들을 먹여 살릴 정도였다. 적지 않은 병사들이 휴가를 나가면 배고픈 부대로 복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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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지금은 상황이 바껴서 지방직 공무원 과장급을 비교대상으로 삼는다면 같은 호봉수면 준위가 과장보다 실제 수령액이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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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총장과 중령계급의 나이 차이가 불과 서너살 차이 밖에 나지 않은 상태라서 누적된 진급 적체는 더욱 군인들의 삶을 지속적으로 곤궁하게 만들어 평생직업 군인들마저 굶주리는 현실로 인해 변화를 모색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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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 정신에도 눈을 뜬 군인들은 4.19시민혁명에 동조해서 시위대 진압시에도 사격명령을 어길정도였고, 새로운 시대에 대한 소망이 있었다. 일반인들보다 더 강화된 민족주의 정신은 이내 시민혁명정권의 구태의연함에 실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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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혁명 정권은 불안정했고, 사회는 쉼없는 시위로 인해 혼란은 무정부상태 유형으로까지 치닫고 있었다. 시위대의 구호와 목적은 점점 사회주의화 함으로써 안보위기감는 커져 갔다. 불과 8년전까지만 해도 북한군과 직접 싸워 나라를 수호했던 군인들이 보기에는 통일을 빙자한 좌익들의 사회혼란 조장은 위태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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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사상계 1960년 1월호에 실린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미상원외교분과위원회)이란 보고서는 한국 군인들의 자존심을 짓밟아 버렸다. 이 글을 읽은 군인들은 모두가 분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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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육군은 정부의 주인이 아니라 그 도구에 불과 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자유당 정부, 특히 이승만 대통령의 군부 조종 기술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정적이 될만한 사람은 실각당했고 강력한 독립성을 가진 지휘관은 냉대받았다. 만일 정부가 완전히 실패하게 되면 언젠가 한번은 군부지배가 출현하리라는 것은 확실히 가능한 일이지만 가까운 장래에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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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서울 일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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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혁명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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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박정희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혁명을 꾀하고 있었다. 군부에선 (나중에 통합되기는 하지만) 해병대 자체 혁명모의, 육군사관생도들의 모의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민간인혁명을 꾀하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다른 한편에선 이범석 장군 계열인 민족청년단의 혁명시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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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속에서도 박정희가 중심이 되어 육사 5기생과 육사 8기생이 주축이 된 혁명 추구세력이 가장 두드러졌다. 이들은 여러 번의 기회를 노리면서 하나 둘 혁명작전 뿐만 아니라 국정방향, 공약정책 등을 다듬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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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전에 정군운동을 주장했던 김종필, 오치성, 김형욱, 길재호, 옥창호, 김동환, 정문순, 신윤창, 우형룡 중령은 1960년 9월 10일에 정군운동에서 혁명으로 선회하기로 했다. 이들은 계획전반에 김종필, 정보담당에 김형욱과 정문순, 인사담당에 오치성, 경제담당에 김동환,  사법담당에 길재호, 작전담당에 옥창호 우형룡 신윤창으로 각기 역할을 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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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한신, 박병권, 박정희 가운데 한 명을 지도자로 선정하기로 하고 인물검증에 나섰다. 한신은 초기에 제외됐고, 박병권과 박정희 중에서 1940년대 좌익경력이 문제가 됐지만 가장 깨끗하다고 판단된 박정희를 선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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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군사혁명을 구체적으로 논의한 시기는 1960년 1월으로 포항 해병1사단장 소장 김동하와 혁명군 조직에 있어서 해병과 육군을 분담하는 것으로 결정하면서 확실해 졌다.  이후 정군운동파와 연계되어 김종필을 연락책으로 해서 육본 8기생을 기반으로 박정희가 가르쳤던 5기생들을 핵심참가인원으로 늘려갔다. 6관구사령부 대령 김재춘, 공수여단장 대령 박치옥 등이 참여하면서 조직구성의 안정적인 틀이 잡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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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혁명군 선정에 있어서 치밀함을 보여줬다. 내심 혁명을 결심했을 때부터 준비해 온 탓인지 거의 모든 장교들의 신상명세와 군부내 인맥, 개인의 성향과 역량을 파악하고 있었다. 미리 준비한 인물 정보를 바탕으로 쉽게 대상자를 선정해서 규합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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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타인에게 혁명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쓴 것은 1959년 육본군사참모부장 중장 김웅수에게였다. 이로보아 박정희가 혁명을 생각하게 된 것은 1956년 5월 15일 제3대 정부통령 선거 때 5사단장으로서 겪은 고초 때문으로 보인다. 어쩌면 1952년 5월 육본작전국장 이용문의 이승만 제거 혁명 발언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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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선거를 실시하라는 3군단의 압박에서 예하 5사단장인 박정희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록 참모회의에서 "선거에 관한 한 지금부터 나는 사단장이 아니다"라면서 한 발 빼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부정선거가 5사단에서도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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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가 끝난 후 소대장 1명과 병사 1명이 부정선거를 이유로 월북한다는 편지를 남기고 넘어가 버렸고, 소위 조규동은 출장명령서를 위조해 조선일보를 찾아가 부정선거 양심선언을 해버렸다. 이로인해 박정희는 1956년 7월15일 진해 육군대학교 학생 신분으로 추락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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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박정희의 군 인사기록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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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9.24 - 조선경비사관학교 입학 
1946.12 - 소위 8연대본부 작전참모대리(춘천) 
1947.9.27 - 대위 조선경비사관학교 1중대장(서울)
1948.8.1 - 소령 조선경비사관학교 1중대장, 직위해제(1948.8. 육사생도 사고사 발생), 빨치산 토벌군사령부의 작전과(10월, 전남 광주), 여순반란'병력제공죄'로 파면(1949.4) (토벌사령부 작전참모라는 명칭은 박정희 기자회견 내용 보도한 평화일보 1948.11. 10)
1950.7.14  - 소령복직 육본정보국 전투정보과장(수원)
1950.9.15 - 중령 9사단 초대 참모장(10.25,대전) 
1951.4.15 - 대령 육군정보학교 교장(5.25,대구), 육본 작전교육국 작전차장(12.10,대구), 포병학교 입교(1952.10,전남 광주), 2군단 포병단장(1953.2,전남 광주), 3군단포병단장(5.9,양구)
1953.11.25 - 준장 오클라호마 포트 실 육군포병학교 입교(1954.1), 2군단 포병단장(1954.7,전남 광주), 포병학교장(10.18,전남 광주), 5사단장(1955,양구), 5사단장 해임(1956.7.15), 육군대학 입교(진해)
1958.3 - 소장 7사단장(인제), 1군단사령부 참모장(1958.6.17,원주), 6관구사령관(1959.7.1,서울), 군수기지사령관(1960.1.21,부산), 1관구사령관(7.28,전남 광주), 육본 작전참모부장(9.10,서울), 2군부사령관(12.8,대구)
1961.8.10 - 중장
1961.11.4 - 대장
1963.8.30 - 예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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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성격의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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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학생 혁명은 표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였지만 5.16혁명은 민주당 정권이란 가면을 쓰고 망동하려는 내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뒤엎은 것이다." - 국가와 혁명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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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국은 난마와도 같이 헝크러지고 걷잡을 수 없이 혼란과 무질서만을 노정하고 국민들의 실망만 커가고 있다. ~ 이 정권 하에서 국민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었던 자 또다시 고개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며 세태를 비웃는다.
가도가도 시관이 보이지 않는 정국의 불안정, 국민생활의 궁핍, 도의의 타락, 윤리의 문란 이러한 도정을 줄달음질 친다면 그 다음에 올 것이 무엇일까. 공산당의 독소가 침투되고 잠식하기 쉬운 병약적인 사회 즉 공산당의 밥이 되는 길 밖에 더 있겠는가.
동포여! 겨레여! 과거 우리 조상들이 저지른 과오를 우리 다시 범할 것인가. 진실로 조국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우리 후손을 사랑하거든 우리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사월혁명 정신을 다시 상기하고 젊은 학도들의 조국애의 대정신으로 돌아가자." - 박정희 개인적인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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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를 지도하려고 마음먹은 사람들은 우선 두 가지 문제에 근본적인 대안을 가져야 합니다. 우선 국민들이 배고프지 않게 밥을 먹이고, 그 다음에 나라를 자기네 힘으로 지키게 하는 것이 통치의 근본입 니다." - 이석제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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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5월 27일 발생한 터키의 케말 파샤 군사혁명이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60년 5월27일 터키 군부가 멘데레스 정권을 타도하고 터키 근대화를 목적으로 한 군사혁명을 일으키자 터키국민들이 대대적으로 환영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이집트의 나세르 군사혁명, 미얀마의 네윈 군사혁명 등이었다. 혁명후 정권의 민간이양 공약은 미얀마의 네윈 군사혁명의 영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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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반공을 강조했던 것은 6군단포병대를 비롯해 북한 출신들이 많았으며, 이들은 북한에 대해 극도의 불신감을 갖고 있었다. 또한 4.19정권에서 사회혼란은 좌익의 시위로 극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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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4월 19일 기념일 목표 작전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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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1주년 기념식이 대규모 폭력시위로 확대된다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삼았다. 시위가 확산되어 폭동으로 변하면 장면내각이 군대를 동원할 것을 가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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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명 '비둘기'로 6관구사령부 작전참모 중령 박원빈이 계획을 수립했다. 1단계로 시위가 폭동화 될 시 헌병대 5개 대를 투입한다, 2단계로 서울근교 주둔 30.33사단과 제1201건설공병단을 동원한다, 3단계로 1군 예하 1~3개 사단 및 해병대와 공수단을 충원한다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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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3월 6일부터 11일까지 이 작전계획에 따라 서울 한강변에 지휘소(CP)를 설치하고 훈련을 실시했다. 7일에는 박정희 2군부사령관 자격으로 영등포 6관구 사령부로 시찰을 나와 검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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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혁명 작전전개와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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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참여 인물 (가나다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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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교 250여명, 병사 3,500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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