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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프로야구 초창기의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한 강병철 전 롯데 감독은 “최동원이 현역 은퇴 이후에 지도자의 길을 순탄하게 걸었다면 야구발전에도 기여하고 본인도 더 건강하게 지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24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만난 강 전 감독. 김연수기자 nyskim@munhw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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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시즌 프로야구의 최강자를 가리는 한국시리즈가 삼성 라이온즈와 SK 와이번즈의 대결로 막판 열기를 뿜고 있다. 이 즈음에 롯데 자이언츠의 부산 팬들이 가장 아쉬움이 클 것 같다.
열성 팬이 제일 많은 롯데는 삼성과 함께 프로야구 30년 역사에서 창단 이후 구단주와 구단명이 바뀌지 않은 원년 구단이다. 하지만 1984년과 1992년 두 번밖에 우승을 맛보지 못했다. 올해는 1989년 이후 처음 정규시즌을 2위로 마치고 플레이오프에 직행해 12년 만에 한국시리즈 진출이 기대됐지만 무산됐다.
앞서 지난 9월에는 롯데 출신 ‘불세출의 투수’인 최동원 전 한화 2군 감독이 타계해 부산팬들의 가슴이 허전하던 참이었다. 부산팬들은 이번에 롯데가 고(故) 최동원의 영전에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바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것이다.[인터뷰=엄주엽 부장대우(체육부)]
과거 롯데의 두 차례 우승은 모두 강병철(65) 전임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을 때 이뤄졌다. 바로 1984년 우승은 최동원의 전설적인 역투로 가능했다. 강 전 감독은 최동원의 타계 때 누구보다 가슴 아파했던 야구인이다. 또 이번 롯데의 한국시리즈 좌절에도 아쉬움이 컸을 것이다. 부산 출신인 데다 롯데의 감독을 세 차례나 지내 질긴 인연을 갖고 있다. 지난 24일 잠실구장에서 만났을 때도 먼저 롯데 얘기부터 나왔다.
“롯데는 전성기에 오른 선수들이 많아 전력이 전반적으로 상승했어요. 타격과 수비가 좋은 선수들을 영입해 안정이 됐어요. 그래도 역시 시리즈에 나가려면 마운드가 탄탄해야 하는데, 아직 에이스급 투수들이 약해요. 구단이 투수 쪽에 더 투자를 해야 할 겁니다. 영입이든, 용병이든 마운드를 강화하면 내년엔 더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강 전 감독은 다소 나이 차이는 나지만 김영덕(75), 김응용(70), 박영길(70) 등 초창기 프로야구의 지도자를 지낸 세대와 같이 실업야구를 했다. ‘국민감독’ 김인식(64) 전 한화 감독과는 동기다. 부산 대신중에 다닐 때 야구와 인연을 맺었고 부산상고에서 본격적으로 야구를 했다.
“당시 부산상고 감독이 ‘부산야구의 대부’ 어우홍(80) 감독님이었어요. 나하고는 먼 사돈뻘이죠. 정말 무섭고 근처에도 못 갔어요. 그래도 그 밑에서 야구하고 싶었죠.”
김응용 전 삼성 사장이 부산상고 5년 선배로 그도 어 감독의 제자다. 다른 얘기지만,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바로 강 전 감독과 같은 나이로 부산상고 출신이다. 그는 ‘노통’이라고 불렀다.
“동기동창은 아니고 나이는 같은데 ‘노통’이 한 학년 아래였어요. 그때 상고는 수재들이 많이 왔어요. 실업학교의 장학제도가 괜찮아서 가정이 어려운 친구들이 경남고나 부산고를 포기하고 오기도 했어요. ‘노통’도 그런 경우일 거예요. 시골에서 올라와 공부를 열심히 하는 친구라는 정도로 알았지만, 기억 나는 게 없어요. 그때 학년이 8학급이나 돼 마주칠 기회도 없었고 더구나 나는 운동을 했으니까. 그런데 내가 2006년에 롯데 감독으로 세 번째 컴백을 하니까, 내가 ‘노통’과 동기동창이라서 그렇게 됐다는 터무니없는 소문이 났죠.”
―부산 청룡기 예선 때 만루홈런을 쳤고, 그게 고교야구 최초의 만루홈런이란 얘기가 있던데요.
“지방 예선이라 기록이 남아 있진 않은데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고 3때 청룡기 지역예선 경남고와의 경기였죠. 당시는 한 대회에서 홈런 하나 정도가 나올 정도로 홈런이 귀했어요. 공과 글러브, 배트 등 야구용품을 미군 부대에서 구하던 시절이니, 공 한 박스(12개)로 세 경기를 치르곤 했어요. 그러니 실밥이 터지고 반발력이 떨어져 홈런이 안 나오기도 했고. 그때 제가 만루홈런을 친 거죠. 그 덕분에 경남고를 이겨서 서울 본선에 나가 우승까지 했죠.”
고교 졸업 후 한일은행으로 갔다. 은행이 최고의 직장인 시절이었다. 당시 한일은행은 실업 최강이었다.
“대표적인 선수가 투수에 김영덕, 김성근, 신용균, 타자에 김응용, 나, 같이 간 김인식 등이 있었죠. 김인식은 어깨를 다쳐 1~2년 반짝하고 말았죠. 모두 국가대표급이었어요.”
김영덕과 김응용은 선배이자 스승이다. 두 사람 모두 한일은행 감독을 지냈고 그 밑에서 강병철은 선수생할을 했다. 이들과는 프로에서도 여러 인연이 이어졌고 갈등도 있었다.
“김응용 전 삼성 사장은 선수시절에도 카리스마가 넘쳤어요. 열심히 하는 후배에겐 엄격하고 그렇지 못하면 모르는 체 했어요. 저한테는 무척 엄격했고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셨죠. 한일은행에선 김 전 사장이 4번을 쳤고 나는 주로 1, 3번을 뛰었죠. 국가대표에선 나란히 4, 5번을 쳤어요. 김 전 사장이 프로야구가 출범할 때 ‘야, 프로에서 같이하자’고 해서 ‘좋다’고 했어요. 당시 김 전 사장은 MBC 청룡과 해태 타이거즈에서 감독 제안을 받았는데, MBC로 가는 줄 알고 있었죠. 그런데 이듬해 해태로 갔어요. 집사람이 아무 연고도 없는 광주에는 도저히 못가겠다고 하더군요. ”
당시 강 전 감독은 동아대 감독을 하고 있었는데 이도저도 못하고 공중에 떠버렸다. 그래서 롯데로 가게 된다.
“결국 1983년에 롯데로 가게 됐죠. 감독은 당장 안 되고 코치로 계약을 하자고 해서 5년 계약을 했어요. 롯데 초대 사령탑은 박영길 감독이었는데 박 감독이 문제가 생겨서 그 해 후기리그부터 내가 감독대행을 했죠. 1984년에 새 감독을 모셔 온다는 조건으로 맡았어요. 나이도 젊고, 당시만 해도 코치하면 오래할 수 있는데 감독은 불안하니까, 코치가 더 좋았어요.”
1984년은 롯데나 강 전 감독에게 잊을 수 없는 해다. 롯데는 그 해 말 한국시리즈에 처음 진출한다. 그게 프로야구 역사에서 가장 큰 물의를 빚은 ‘승부조작’사건과 관련이 있다. 그 주인공이 애꿎게도 삼성의 김영덕 감독이었다. 김 감독은 전기리그 우승으로 한국시리즈 직행티켓을 확보한 상태였다. 그런데 후기리그 막판 OB를 탈락시키기 위해 순위경쟁을 벌이던 롯데에 일부러 2경기를 져주는 승부조작을 했다. 김 감독은 OB 원년 우승 뒤 삼성으로 이적하면서 OB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면, 맞상대를 선택할 수 있는 조건에서 누구라도 김 전 감독과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고 봐요. OB와는 감정이 안 좋았고 상대하기도 롯데보다 껄끄러웠으니까. 사실 당시 제주에서 열린 OB와 해태의 경기에서도 비슷한 승부조작을 했어요. 김일권을 도루왕으로 만들어 주는 대신 경기에 져주었어요. 언론의 비난을 안 받았을 뿐이죠.”
강 전 감독은 스승인 김 전 감독을 두둔했다. 결과가 좋았으면 잊어졌을 텐데, 김 전 감독은 한국시리즈에서 자신이 온갖 비난을 받으며 선택한 롯데에 지고 만다. 7차전까지 간 혈투에서 롯데 최동원은 5경기에 출전, 4승을 거두는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무쇠팔’이란 별명을 얻으며 롯데의 우승을 만들었다. 하지만 강 감독에게는 이후 최동원의 부진이 당시의 ‘혹사’ 때문이었다는 족쇄가 채워졌다.
“그때 롯데는 최동원밖에 없었어요. 최동원만 연투가 가능했죠. 프로 초창기에는 하루 던지면 이틀 쉬고 3일째 등판했어요. 요즘처럼 생각하면 안 되죠. 선발, 중간, 마무리 개념도 없었죠. 그때는 다 그렇게 했어요. 또 자원등판이 있었어요. 오늘 던지고 억울하면 내일 또 던지겠다고 했죠. 최동원도 자원등판을 자주 원하는 편이었고요.”
최동원은 롯데에서 지도자의 길을 걷지 못하고 방출된 뒤 사실상 야구계를 떠났고 결국 이리저리 ‘외도’를 하다 지병으로 세상을 등졌다. 이로 인해 프랜차이즈 스타를 거두지 못한 롯데 구단에 대한 팬들의 시선이 아주 곱지 않다. 그런데 강 전 감독은 다른 입장을 얘기했다.
“최동원이 1990년 삼성에서 은퇴하고 이듬해 롯데로 다시 선수로 오려고 했어요. 내가 두 번째 롯데 감독으로 복귀한 때였죠. 최동원과 동문인 경남고 출신 당시 롯데 사장이 ‘어차피 부산 출신이니까 롯데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도록 하자’는 입장이었어요. 일단 선수로 등록을 하고 그 해 개막전에서 은퇴식을 하자는 제안을 했어요. 은퇴하고 일본이나 미국으로 연수를 다녀와서 지도자를 하라는 거였어요. 그런데 최동원의 부친은 선수생활을 더 하고 싶다고 고집해 인연이 안 됐어요. ”
김영덕 전 감독과는 1988년부터 1990년까지 3년 동안 빙그레 감독과 수석코치로 인연을 이어갔다. 더 얄궂은 것은 강 전 감독이 다시 롯데 사령탑을 맡은 후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 한화를 이끌던 김영덕 감독을 상대로 우승을 한 것이다. 두 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이 모두 김영덕 감독을 상대한 것이다.
―좀 미안한 감정도 있을 것 같은데.
“제자들이 김 전 감독을 아버지로 불렀어요. 본인이 그걸 좋아하기도 했지요. 나하고는 한일은행 입단동기였지만요. 그만큼 후배들에게 모범적이었고 존경을 받았어요.”
―김영덕과 김응용 전 감독에 대해 세간의 평가는 엇갈리는데요. 카리스마는 있지만 독선적이다라는 식으로.
“두 분이 스타일은 달라도 모시는 입장에서 까다롭기는 했어요. 개성이 강한 분들이지만 후배들을 아낀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좋아하는 표현을 못해요. 옛날 분들이 대개 그렇잖아요. 김영덕 감독은 더구나 일본에서 자라 우리말을 해도 감정표현은 잘 못해요. 위로를 하러 가서 감정표현이 서툴러 오해를 받는 경우가 많았어요. 김응용 감독은 좋건 싫건 ‘어∼’라는 표현이 전부였어요. 하지만 두 분의 공통점은 따뜻했다는 거죠.”
강 전 감독도 감독시절 더그아웃에서 온화한 표정이지만 별다른 감정표현이 없던 감독이었다. ‘너무 태평하다’는 비난도 들었다.
“보기는 그래도 감독이 태평할 순 없죠. 하지만 김성근 전 SK 감독이 모두 자신이 챙기는 스타일이라면, 나는 코치들에게 모두 맡겼어요. 벤치 사인도 담당 코치에게 줬고, 스타팅 배팅 오더도 타격코치가 가져오면 한 번 체크해 보고 오케이를 했어요. 감독이 그렇게 해야 선수들도 코치를 따릅니다. 스타일마다 장단점이 있지만.”
끝으로 야구를 안 했으면 무엇을 했을까 하고 물어봤다.
“프로야구를 하면서 운이 좋아 두 번 우승을 했지, 저는 특별한 재주가 없었으니 시골에서 농사를 지었을 것 같아요. 아버님도 나에게 농사지을 애는 너밖에 없다고 했어요. 성격상으로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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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철 前 감독은… 실업야구 10년 연속 올스타… 김응용·박영길과 역대최고 클린업트리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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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롯데 자이언츠에서 1984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 당시의 강병철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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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지금은 김해공항으로 편입된 부산 강서구 평강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산 대신중 3학년 때 야구부가 연습경기를 하면서 선수가 부족해 대타로 들어갔다가 선생님의 눈에 띄었다. 야구로 경남고에 보내준다는 꼬임에 넘어가 야구를 시작했다. 운동 특기생에 대한 제도가 바뀌면서 부산상고로 간다.
부산상고 3년 때인 1964년 제19회 청룡기에서 우승하며 이름을 날렸다. 졸업 후 실업팀으로 간다. 크라운맥주와 해병대를 거쳐 1970년 ‘스타군단’인 한일은행에 입단한다. 3루수를 맡아 수비와 타격에서 모두 빛을 발했다. 실업야구 올스타에 10년 연속 선정됐고 1970년 대통령배 실업야구연맹전에서는 최초로 두 자릿수(10개) 홈런을 날리며 홈런왕에 올랐다. 국가대표로 1971년 서울 아시아야구선수권 우승 멤버였다. 3번 박영길-4번 김응용-5번 강병철은 역대 최고의 클린업트리오로 대접 받았다. 1977년 현역 생활을 끝내고 이듬해부터 부산 동아대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동아대 감독직을 맡으며 부산은행 대리직도 수행했다. 당시 동아대는 부산은행의 대주주였다.
1983년 후반기 롯데 자이언츠 감독대행으로 본격적인 프로 무대의 지도자 길을 걸었다. 이듬해 롯데를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지만 당시 최동원을 5게임이나 등판시키며 최동원의 선수 생활을 망쳤다는 비난도 받았다. 빙그레 수석코치를 거쳐 다시 롯데 감독직을 맡아 1992년 한국시리즈 두번째 우승을 이끌었다. 당시 정규 시즌 3위에 불과했던 롯데는 에이스 염종석과 윤학길을 내세워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을, 플레이오프에서 해태를 꺾고 한국시리즈에서 빙그레 이글스를 격파했다. 그 이후 롯데는 우승을 하지 못하고 있다.
1994∼1998년까지 한화 이글스 감독, 2000∼2002년까지 SK와이번스 초대 감독을 역임했다. 2006년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롯데에 의해 세번째 롯데 감독으로 기용됐지만 2년밖에 버티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이대호, 김주찬 등 현재 롯데의 주력군들을 키워놓았다. 김응용과 김성근 감독에 이어 통산 900승을 달성했다.
엄주엽기자 ejyeob@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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