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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大투수 최동원 죽기 4개월전 상세 인터뷰 내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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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985회 작성일 2011-10-08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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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 기자의 聽談]

 

@제목:생존시-약 4개월전 상세 인터뷰!

 

 

'한국 야구의 영원한 전설'

 

최동원 투수!

  •  

입력 : 2011.05.07 

 

이제 5회말 뛰었다 내 경기는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역의원 출마·사업·방송활동…
10년간의 '외도' 에 후회는 없어
지금 내 명함엔 이름 석자뿐이지만
그 빈자리에 무얼 채워넣을지 준비 중



서울 목동야구장 관중석에서 자신의 이니셜이 새겨진 글러브를 끼고 포즈를 취한‘거인’최동원. 그는“타자가 친 볼에 맞은 적이 있느냐”고 묻자“있다”고 했다. 어딜 맞았느냐고 묻자“급소”라며“그런데도 찬물 좀 뿌리고 간단하게 응급조치한 다음 계속 던져야 했다. 그런 시절이었다”고 말하고는 웃었다.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거인(巨人)'이 건넨 명함은 간단했다. 눈에 익은 '崔東原(최동원)' 이름 석 자와 그 아래 핸드폰 번호가 전부였다.
 
거인은 지금 소속이 없다. 올해 프로야구 출범 30년을 맞아 야구장은 들썩거리지만 정작 한국에 프로야구를 있게 해준 1등공신 최동원(53) '선수'는 야구와의 연(緣)이 끊어져 있었다.

1990년 은퇴 후 광역의원 출마, 사업, 방송 등의 '외도'를 거쳐 2000년대 들어 야구계로 돌아와 한화이글스에서 투수코치와 2군감독을 지냈고 2009년부터 2년간 한국야구위원회 경기감독관을 맡았던 것을 끝으로 일단 야구에서는 한 발 뺀 상태다.
 
 
경기도 일산 집 근처 커피숍에서 만난 밝은 표정의 거인은 "지금도 야구를 생각하고 있고 한국 야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것"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선수로 뛰던 1970년대와 80년대 일간신문의 스포츠면과 스포츠지들은 그를 향한 '헌사(獻辭)'경쟁으로 뜨거웠다. 지금은 이름 앞이 공란(空欄)이지만 당시 신문들은 그 자리에 '초(超)고교급', '국보급'이라는 상투적인 찬사에서 시작해 '황금의 팔', '철완(鐵腕) 혹은 무쇠팔', '삼진 제조기', '수퍼스타', '완벽에 가까운 투수', '마운드의 승부사' 등을 반드시 붙여주었다.
 
 
그가 던지는 공에 대해서도 쾌투(快投), 불꽃 같은 강속구, 마구(魔球),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포크볼, 신기(神技)의 커브 등의 수식어는 필수적이었다. 지금의 30대와 40대가 선동열에 매료됐다면 40대와 50대는 최동원에 홀렸다.

최동원 '선수'는 나쁜 뉴스들도 만들어냈다. 지금 보면 문제될 수준이 아니지만 당시의 도덕감정으로는 조금 앞서 갔던 '튀는' 언행은 심심찮게 비판의 도마에 오르곤 했다.
 
 
야구장에서 보여주는 그의 자신만만함을 거만, 건방짐, 오만으로 보는 시각도 만만찮았다. 비교적 조용했던 선동열의 선수생활과 달리 그의 선수생활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그러나 일산에서 만난 '崔東原'에게는 자신만만함도, 오만방자함도 없었다. 편안한 50대 초반 아저씨였다. 단, 부친 이야기가 나오면 톤이 높아지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선수' 최동원의 영욕(榮辱)
 


―선수로서 최고의 순간을 꼽는다면.

"당연히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다섯번 나가 4승1패를 거두고 극적으로 우승했을 때다. 경기 끝나고 숙소로 올라가는데 쌍코피가 터져 유니폼을 다 적셨다. 양쪽 콧구멍을 솜으로 막은 채 우승 축하연을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인데 원래 다섯 차례 등판이 예정됐던 건가?

"당시 삼성은 열번 붙어 한번 겨우 이길 만큼 막강한 팀이었다. 김영덕 삼성감독이 '정규시즌에서 최동원은 우리와 붙어 재미를 보지 못했다'고 하자 강병철 롯데감독은 '1·3·5·7차전에 최동원을 투입해 4승3패로 이기겠다'고 응수하셨다.
 
나도 놀라 강 감독께 '4차례 등판은 무리 아닙니꺼?'라고 했더니 감독님은 '동원아, 우야겠노 여기까지 왔는데'라며 내 눈을 쳐다보셨다. 결국 나도 '알았심더, 한번 해보입시더'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정상(頂上)에 있었다. 정상이란 뭔가?

"어느 분야건 정상에 오른 사람은 저 위에 떠있는 구름만을 잡고 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피라미드의 중간쯤 있을 때는 목표가 있으니까 위만 보고 열심히 갈 수 있다. 실수하더라도 만회가 쉽다. 그러나 점차 올라갈수록 좁아지면서 마지막에 아주 날카로운 부분에 홀로 서게 된다. 그때 어떻게 하면 여기서 밀려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하게 된다. 안 밀려나기 위해서는 진짜 죽을 사(死)자, 사투(死投)를 한다, 안 죽을 만큼."
 


―그러면 최악의 순간은?
 


"84년 우승한 이듬해 4월 삼성과의 경기다. 5대0으로 앞선 상황에서 7회 구원투수로 나섰다가 5점 내주고 연장 13회까지 가서 7대8로 졌을 때다. 그때 너무 충격을 받아 한동안 잠적했었다."

그러나 최동원의 '영원한 팬'들이 기억하는 최악의 순간은 전혀 다른 장면이다. 1988년 선수협의회 초대회장으로 선출된 그는 결국 '최동원의 롯데'에서 삼성으로 트레이드됐다. 선수로서의 전성기는 이미 끝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1990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이 LG트윈스에게 4전 전패할 때 잠깐 '패전처리'투수로 등판했다. 야황(野皇·야구의 황제)의 처참한 몰락이었다. 직후 그는 8년간 프로통산 103승74패26세이브, 탈삼진1019개, 방어율 2.46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영욕의 마운드를 내려왔다.

―패전처리를 위해 마운드에 올라야 했을 때의 심경은?

"선수는 감독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곧장 미련없이 은퇴하지 않았는가?"

―정말 미련이 없었는가?

"다음 시즌부터 삼성을 맡게 될 김성근 감독이 '1년만 나하고 함께 하자'고 하셨다. 그러나 그때가 은퇴의 적기라고 생각했다."

―운동선수에게 은퇴란 어떤 의미던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쓰라렸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자신의 젊음을 모두 쏟아부은 그라운드를 떠나 홀로 방에 들어와 문을 잠그고 벽에 기댔을 때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린다면 그 선수는 진정 야구를 사랑했노라고. 그 또한 인생의 한 과정이다."

선수 시절‘쾌도난마’의 투구를 하고 있는 최동원 투수.
 
 
◆외모와 동작도 특이했던
 
 
 '투수' 최동원
 
 


―왼발 하이킥과 왼팔을 높이 쳐든 다음 힘차게 던지는 '유일무이한' 폼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궁금하다.

"나는 당시 함께 3총사로 불리던 용남이(김용남)나 시진이(김시진)에 비해 작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원심력을 최대한 이용하고 중심이동도 효과적으로 해서 마지막 순간 손끝에서 '빵'하고 임팩트있게 힘을 발산할 것인가에 대해 많이 연구하고 고민하면서 만들어낸 폼이다."

―경기가 시작되면 잠시 눈을 감고 서 있다가 피칭을 시작했다. 기도를 한 것인가?

"기도는 아니고. 경기장에 들어서면 우선 부모님께 감사인사를 하고 나야 마음이 안정되어 좋은 플레이를 할 수 있었다."

―투수 최동원 하면 자만심에 가까운 자신감부터 떠오른다.

"그것은 연출된 면도 있다. 한 점 앞서 있는 상황에서 1사만루라 해도 내 얼굴 표정에선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을 거다. 포커페이스 유지를 위해 늘 집에서 거울을 보며 연습했다. 거만한 표정, 기분 나쁘게 웃는 표정 등 몇 가지를 집중적으로 연습해 그런 상황이 올 때 반사적으로 그에 맞는 표정이 나오도록 훈련했다.
 
 
그것도 야구의 일부다. 위기상황에서는 상대 덕아웃이나 타자가 기분이 나빠 '저 새끼는 인간도 아니야'라는 소리를 할 정도로 건방진 표정을 지었다. 투수와 타자는 기(氣)싸움이다. 상대 타자가 안 풀린다 싶을 때는 씩 웃는 표정도 갖고 있었다. 어느 쪽이건 먼저 기분 나빠 흔들리는 쪽이 진다."

최동원은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면 일종의 의식(儀式)을 치렀다. 먼저 오른손으로 로진백(송진가루)을 턴 다음, 스타킹을 두어 번 잡아당기고 이어 무테안경을 바로 잡은 다음 모자를 바로 썼다. 그리고 글러브 안의 공을 오른손으로 쥔 다음 허리 뒤춤으로 가져갔다. 투구준비 완료다.

―그 또한 의도된 것인가?

“그렇게 하면 상대를 의식할 필요가 없고 내 몸과 마음의 준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전성기 때 몇 가지 구질을 갖고 있었나?

“난 구질이 많지 않았다. 포크, 투심, 빠른 볼, 슬라이더, 떨어지는 것, 다섯 개 정도. 조금만 잘못 던지면 어깨, 팔꿈치, 손목 나간다.”

―마구(魔球)라는 별명을 들었던 투심은 어떻게 만든 것인가?

“이리저리 해봤다. 실밥 하나 잡고, 두 개 잡고, 안 잡고 던져보면서 시험했다. 새 구질은 꾸준하게 계속해서 손에 익어야만 자기 공이 된다. 몇개 던져서 된다고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우연찮게 이리저리 해보는데 볼이 감기고 말려서 들어갔다. 힘 조절을 했더니 방향을 잘 탔다. 그 후 집중적으로 연습해 내 공으로 만들었다.”

―투수로서 가장 상대하기 힘들었던 타자는 누구인가?

“힘 안든 척해서 그렇지 타자는 다 힘들다. 유명한 타자는 서로 장단점을 잘 알기 때문에 오히려 괜찮았는데 전혀 기록이 없는 신인급 선수들이 ‘못 쳐도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달려들 때 상당히 껄끄러웠다.”

―지금도 선수 때의 스포츠형 머리를 고수하고 있다.

“이 머리도 좀 긴 것 같다. 원래 멋내고 꾸미는 데 별로 관심이 없다. 특히 선수 때는 모자 옆으로 머리카락이 삐져나오는 ‘이중머리’가 보기 싫었다. 축구나 농구는 머리 날리면 멋있지만 모자 쓰고 하는 야구는 깔끔한 게 좋다.”

최동원은 술을 좋아하지 않고 담배도 은퇴 후 잠깐 피우다가 유치원 다니던 아이와의 약속 이후 한 번도 피우지 않았다. 선수 때 선발투수로 예정돼 있으면 전날 밤 10시에 정확히 취침을 했다.
 


◆‘아버지’ 최윤식과 ‘아들’ 최동원에 대한 오해와 진실

―당당함과 오만함이 팬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다. 실제 성격은 어떤 편인가?

“최고의 스타는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것은 나와 부친의 합의된 원칙이기도 했다. 그리고 젊었을 때 아닌 건 절대 아니다는 성격 때문에 거만하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평소의 성품은 결코 그렇지 않다.”

―자신감 있는 모습은 아버지의 영향 같던데.

“맞다. 아버지는 나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신 분이다. 항상 내 어깨를 걱정했고 내 기량의 향상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신 분이다. 그리고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도록 하기 위해 구단과의 갈등도 피하지 않으셨다. 늘 말씀하신 게 있다. ‘넌 주인공이기 때문에 욕을 먹어서는 안 된다. 안 좋은 것은 내가 다 막아낼 테니 넌 운동에만 전념해라.’”

아버지는 최동원을 있게 했고 최동원은 한국 프로야구를 있게 했다. 아버지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었다.

―야구를 하게 된 것도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때는 축구를 했다. 그런데 집에 야구 글러브가 있어 아버지와 캐치볼을 하는데 아버지께서 내가 던지는 공이 중학교 선수 정도임을 알아보고서 야구 쪽으로 돌렸다. 아버지도 군에 계실 때 육군대표 축구선수였는데 결국 교장선생님을 지낸 할아버지가 ‘빌어먹는다’고 유니폼과 스파이크를 똥간에 빠트리는 바람에 축구를 접었다고 하셨다. 그때 결심하셨다고 했다. 이 담에 내 자식은 운동하겠다면 적극적으로 뒷받침하겠다고. 중학교 때부터 안경을 썼는데 투수가 주자 견제를 위해 곁눈질을 해야 하는데 테 있는 안경은 시야가 좁아진다고 당시에는 희귀했던 무테안경을 구하려 아버지는 전국의 안경 공장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셨다. 또 부산에서 시청할 수 있던 일본 방송의 야구중계를 함께 보면서 선진야구를 익힐 수 있도록 통역도 해주셨고.”

―하지만 아버지는 바짓바람의 원조, 본인은 ‘파파보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지금도 가슴 아픈 대목이다. 아버지는 6·25 때 기갑장교로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어 내가 중학교 때 다리를 절단하셨다. 그때부터 의족을 하고서 내 뒷바라지를 했다. 내 연습과 경기 다 지켜보고 저녁에 집에 오면 절단부위가 짓무르고 끙끙 앓으셨다. 자식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한 분이다. 잘린 다리 주물러 드리며 내가 무슨 생각했겠는가? 표현은 못했지만 너무 마음이 아팠다. 이런 부모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을 자식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아버지 뜻에만 맹종했다는 식의 비판은 오해다. 항상 아버지는 ‘네 생각은 어떠냐? 네 인생이니까 네가 결정해라’고 하셨지 이래라저래라 하신 적이 없다. 지금이라도 이런 오해는 제대로 불식됐으면 좋겠다.”
 


◆10년간의 외도(外道)…“후회는 없다”

1991년 초 선수 은퇴 후 최동원의 다음 목표는 당연히 지도자의 길이었다. 그러나 선수협 파동의 후폭풍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를 받아주는 구단은 없었다. 일부에서는 지금도 그가 ‘거만’해서 동료선수들의 질시의 대상이 됐다고 말하지만 1988년 9월 13일 선수협의회 창립총회에서 142명의 선수들이 모여 7명이 입후보한 가운데 최동원이 56표를 얻어 회장에 선출된 것을 보면 그것은 일종의 오해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은퇴 후 첫 행보(行步)는 야구지도자의 길이 아니라 91년 부산 광역의원 출마였다.

“선수협 파동을 거치며 사회문제에 대한 의식이 생겼다. 당선을 위한 것은 아니고 경험 차원이었다. 그 무렵 아버지는 내가 그동안은 야구밖에 몰랐기 때문에 좀 더 넓은 세계로 나가 다양한 경험을 쌓으라고 말씀하셨다. 당선만 생각했다면 경남고 선배님(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표로 있던 민자당으로 갔겠지만 나는 민주당을 선택했다. 타고난 반골기질도 좀 작용했고.”

당시 그가 내건 선거구호는 ‘민주자치의 선발투수, 건강한 사회를 향한 새 정치의 강속구’였다. 6000여표 차이로 낙선했다. 선전한 셈이었지만 그는 선거가 끝나자마자 정계(政界) 은퇴(?)를 선언했다.

―당선됐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 길로 더 갔겠지. 그런데 정치, 그거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해야지 너무 가까이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 하나는 분명히 깨달았다. 언론도 마찬가지지만(웃음). 좋은 경험했다.”

―1995년 초에 신문에 파격적인 광고를 선보이며 사업가로 변신한 적도 있다.

“골프웨어 수입업이었다. 직접 미국 가서 국내 판권 따오고. 돈보다는 사회를 알고 싶었다. 운동만 알아서는 어딜 가서 누굴 만나더라도 대화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성공이나 실패에는 관심이 없었고 경험을 쌓자고 벌인 일이다. 지금 생각하면 평범한 광고인데 그때는 난리가 났다. 백인 여자와 흑인 여자 그리고 백인 아이 뒷모습을 누드로 찍은 사진이었는데 내가 그 회사의 책임자라는 게 알려지자 항의와 비난전화가 쏟아졌다. 결국 얼마 안 가서 사업을 접었다. 그러나 그 또한 경험하고 배우는 과정이었다.”

―이후 방송에 진출해 시트콤, 야구 해설, 라디오 스포츠 MC 등 ‘방송인’ 최동원의 면모도 보였다.

“재미도 있었고 새로운 경험도 했고. 그런데 요즘과 달리 그때는 운동선수가 방송에서 망가지는 모습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불과 10여 년 전인데도.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결국 내가 가야 할 길은 야구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김인식 감독님이 불러주셨다.”

그래서 최동원은 2001년부터 2008년까지 한화 이글스 투수코치와 2군감독 등을 지내며 류현진과 조성민을 가르쳤고 그후 얼마 전까지 한국야구위원회 경기감독관 등을 지냈다.
 


◆2011년, 53세의 최동원…“이제 5회가 끝났을 뿐”

―서울대 음대 출신의 부인 신현주씨와의 결혼도 극적으로 했던 것으로 안다.

“선수협 파동 이후 미국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을 때 이종사촌 집에서 만났다. 결혼식 때가 일곱 번째 만난 것이니까 전광석화처럼 한 셈이다. 지금 잘 살고 있는 걸 보면 선구안(選球眼)이 좋았던 것 아니겠나?”

―외아들도 야구를 했다던데.

“중·고등학교 때 3년 정도 선수 했다. 난 말렸다. 공부하라고. 야구선수 생활이 너무 힘들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야구 해보니 다른 아이들 부모들이 어렵게 뒷바라지하는 것을 보고 자기가 너무 편하게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더니 운동 그만두고 공부해서 지금 대학에 다니고 있다.”

최동원과 선동열은 현역시절 3차례 선발투수 맞대결을 벌였다.
 
1986년 4월 19일 부산 사직구장, 해태 송일섭에게 솔로홈런을 허용한 최동원의 0대 1패, 같은 해 8월 19일 다시 사직구장 최동원의 2대 0승.
 
 
당시 한 신문은 이 장면을 “완봉하는 순간, 마지막 공을 던졌던 최(崔)는 기쁜 나머지 84년 한국시리즈 우승 때보다도 더 신나게 양팔을 흔들고 동료들과 얼싸 안았는데 그 모양이 많은 팬들에겐 좀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두 국보급 투수는 이듬해 5월 16일 사직구장에서 연장 15회, 4시간 56분의 대혈투를 벌인다. 2대2. 이 경기는 배우 조승우가 최동원 역을 맡아 ‘퍼펙트 게임’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다.
 


―종종 비교되는 후배선수 선동열은 벌써 감독을 지내고 그만뒀는데. 최동원과 선동렬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도 제작에 들어갔다고 하고. 선동열과 비교될 때 어떤가?
 


“괜찮다. 좋은 후배가 있다는 게 참 고맙고 좋은 거다. 계속 누군가가 이어가야 한다. 팬들이 야구를 계속 사랑할 수 있도록 해주는 뛰어난 후배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영화와 관련해서는 제작사에서 연락이 왔길래 ‘장난처럼 하지 말고 제대로 볼거리, 가슴 찡하도록 영원히 남길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촬영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1박2일이라도 가서 도와줄 생각이다. 특히 표정 연습 부분.”

―명함 이름 앞의 빈자리에 뭘 채워넣고 싶은가?

“그걸 누가 알겠는가? 지금은 조용히 나를 충전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이런저런 상황이 닥쳐오겠지. 그런 상황과 기회가 왔을 때 내가 어떻게 할 것인지 다양한 시나리오를 두고서 생각 중이다. 내가 준비가 돼 있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기회가 온들 결국 나를 망치고 만다.”

―야구의 이닝으로 보자면 인생 몇 이닝을 뛰었다고 생각하는가?

“지금이 중간쯤이라고 본다. 4회나 5회. 위기상황은 아니다. 책도 보고 야구에 대해서도 공부하며 충실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거인은 지난해 초 주변의 권유로 기독교 신자가 됐다. 망설임 끝에 나가봤더니 마음이 편하더라고 했다. 거인과 헤어진 다음 그의 명함을 다시 꺼내 보았다. ‘과연 崔東原 이름 석 자 앞에 뭐가 채워질까?’ 崔東原이라는 이름은 새로운 도전 앞에 서 있었다.


[인사이드] '무쇠팔 투수' 故 최동원, 그라운드에 영원히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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