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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격 천재 장효조-3할3푼1리 및 7할1푼4리 사이에서!-그 秘話는?-상세 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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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2,249회 작성일 2011-09-10 12:32

본문

 
 
 

@제목: 장효조 선수

 

생애 통산 타율 3할3푼1리는 왜 위대한가?

 

| 2011-09-08 15:40
 

2011090901000663200053631.jpg
장효조는 통산 타율 3할3푼1리로 이 부문 1위를 달리고 있다. 장효조의 이 기록은 메이저리그와 일본 프로야구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스포츠조선 db


@ '타격의 達人',   '안타 제조기',   '영원한 3할타자'.

1.故 장효조 감독에게 붙여진 화려한 수식어다.
 
2.故 장 감독은?
 
1983년 프로 무대에 뛰어들어 92년 은퇴할 때까지 통산 3할3푼1의
타율을 기록했다.
 
3.한국야구위원회의 집계에 따르면?
 
장효조는 통산 3000타수 이상 기록한 타자 가운데 통산 타율 1위에 올라있다.
 
4.961경기에 출전해 3050타수 1009안타를 기록했다.
10시즌 동안 8차례나 3할 타율을 기록했고, 타격왕은 4차례 차지했다.

한미일통산타율1위


4.통산 타율 2위
 
양준혁의 3할1푼6리보타
 
무려 1푼5리가 높다.
 
5.현역 선수 중 타격 능력만큼은
타고났다는
 
lg 이병규와 두산 김동주
 
2011.9.7일 현재 각각 통산타율
3할1푼2리, 3할1푼1리를 기록중인데
 
6.역시 장효조에 비할 바는 못된다. 단일 시즌이 아니라 통산 타율이 이쯤되면 메이저리그나 일본프로야구 기록과 비교해도 수치가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7.메이저리그에서는?
 
3000타석 이상 들어선 선수 가운데 통산 타율 1위가
 
 
ㄱ.3할6푼6리를 기록한 타이 콥이다.
 
 
ㄴ.뒤를 이어 로저스 혼스비(0.359), 조 잭슨(0.356) 등이
     3할5푼대 이상의 고타율을 기록했다.

ㄷ.그러나
현대 야구의 출발점인 1940~1950년대 이후까지 현역 생활을 한 선수 가운데 장효조보다 높은 타율을 기록한 선수는?
 
테드 윌리엄스(0.344),
 
토니 그윈(0.338),
 
스탠 뮤지얼(0.0.331) 등 3명 뿐이다.
 
 
8.현역 메이저리거 중에는?
 
 세인트루이스의 앨버트 푸홀스와 시애틀의 이치로가
 
각각 3할2푼8리, 3할2푼6리를 기록중이다.

9.일본 프로야구(npb) 통산 타율 1위는?
 
지바 롯데에서 11시즌 동안 뛰며 3할2푼을 기록한 레론 리.
 
레론 리는 현재 피츠버그에서 뛰고 있는 데릭 리의 삼촌이자,
 
시카고 컵스의 명스카우트였던 레온 리의 형이다.
 
 
10.이어 와카마츠(0.319)와 일본 최다안타(3085개)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인 장 훈(0.319)이 각각 2,3위에 올라있다.
 
11.세 선수 모두 장효조의 타율에는 미치지 못한다.
 
12.이치로는?
 
오릭스 시절 8시즌 동안 통산 3할5푼3리를 쳤으나,
 
npb가 통산 타율 기준으로 삼는 4000타수에 미달돼
순위에 들지 못했다.

13.물론 한국과 미일 야구의 수준차는 고려돼야 한다.
그러나 한국 내에서도 장효조의 타율은 2위권과 차이가 크게 날 만큼 독보적이다.

14.누가 뭐래도 장효조의 통산 타율이 '전설'로 인정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스포츠 조선: 노재형 기자 jhno@sportschosun.c
om
 
 
 
****************
 
 
 

[중앙일보 노재현의 시시각각]

 

@제목: 타격 천재 장효조에게 명예의 전당을!

입력 2011.09.09
 
 
htm_2011090900174110001010-001.jpg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1.장효조가 아주 멀리갔다.
 
2.고교야구 전성기를 맛본 내 또래 중년들에게 故人에 대한 기억은?
 
아무래도 프로보다는 고교 시절이 더 강렬하다.
 
3.대구상고(현 대구상원고) 시절 장효조는?
 
정말 엄청나게 잘 쳤다.
 
4.키 174㎝, 체중 70㎏. 선수치고는 자그마한 몸인데도
1974년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에서 5할을 때려 타격상을 받았다.
그해 네 번의 고교야구대회를 통틀어 3할8푼3리를 기록했다.
 
5.한양대 2학년이던 76년 백호기(실업및 대학)대회 때는
 
 
무려 7할1푼4리(14타수 10안타)를 기록했다. -천문학적 타율이다.
 
 
 
6.프로로 전향한 뒤에도 여전히 ‘안타 제조기’였다.
“3할을 치지 못하면 은퇴할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다
 
7.92년 타율이 2할대로 떨어지자 미련 없이 은퇴를 선언했다.
 
8.프로 통산타율 0.331은 아직 누구도 깨지 못하고 있다.
일본에도 없고 미국에는 전설적인 타자 타이콥 등 몇 명 안된다.

9.55세라면 요즘엔 요절(夭折)이다.
 
 
 
10.장효조 삼성 2군 감독이 별세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엊그제
프로야구 경기장 분위기는 숙연했다.
 
11.대구구장에는?
 
레전드(legend·전설) 장효조님!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라고 적힌 현수막이 내걸렸다.
 
12.고인의 현역 시절 영상이 전광판을 장식했다.
삼성·한화 선수들이 고개 숙여 선배를 추모했고, 특히 삼성은 치어리더들도 내보내지 않았다. 팬들 사이에서는 추모 동상 건립운동이 시작됐다고 한다.
 
13.그러나 희대(稀代)의 타격 천재를 이 정도로 잠깐 애도한 뒤 며칠 지나 잊어버리면 그게 다일까.
 
14.수많은 국민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주고 떠난 스포츠 영웅이 어디 장효조뿐일까.
 
**수영 영웅 조오련 선수도 이젠 거의 잊혀져만 가고 있지 않은가?
 
 
15.정치·경제·문화예술 분야에서는?
 
큰 인물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일이 이미 보편화돼 있다.
 
16.유독 스포츠 분야만 영웅 모시기에 인색한 풍토가 안타깝다.
 
17.나는 ‘영웅’과 ‘스타’는 구분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김연아·박태환 같은 현역 스타에게는 돈과 명예, 국민적 관심을 보내면서도 장기적 관점에서 사회의 롤(role) 모델로 남을 만한 전설적 영웅들은 기릴 줄 모른다.
 
18.기억은 물론 기록과 유품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다.
우리도 ‘스포츠 명예의 전당’을 하나쯤 가질 때가 됐다는 얘기다.

19.근대 스포츠 역사가 100년을 넘은 만큼 몇몇 개별 종목은 명예의 전당이나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ㄱ.축구는 2005년 서울월드컵경기장 內     2002월드컵기념관에
‘축구 명예의 전당’을 이미 만들었다.   김용식·홍덕영·이회택 등
7명이 1차로 헌액됐다.
 
ㄴ.한국야구위원회(kbo)는?
 ‘한국야구박물관’을 구상하고 있지만 입지 선정 작업조차 지지부진이다. 아마추어 쪽의 대한야구협회도 서울 고척동에 건립 중인 돔구장 안에 ‘야구기념관’을 만들 계획이나 공사 자체가 마냥 늦춰지고 있는 형편이다.
 
ㄷ.게다가 스포츠가 어디 축구·야구뿐인가.
 
ㄹ.비인기 종목과 사회체육도 아우르는 종합적 스포츠 명예의 전당이 꼭 필요하다.
 
20.캐나다·호주·스코틀랜드 같은 곳은?
스포츠 명예의 전당을 이미 갖고 있고,
 
 
21.미국은?
미식축구·야구·농구·테니스 등 종목별 명예의 전당 외에
‘올림픽 명예의 전당’을 따로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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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스포츠 영웅은 성(性)·나이·계층·지역이나 좌우, 진보·보수를 초월한 순수한 즐거움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갈기갈기 찢긴 우리 사회를 통합하는 순기능이 엄청나다.
 
23.청소년들의 역할모델로도 안성맞춤이다.
 
 
 
24.권민혁(단국대 체육교육학과) 교수의 지적처럼
 
상업주의·국수주의로 치우칠 위험성만 배제한다면?
 
스포츠 영웅 선정, 명예의 전당 건립 작업은 지금 당장 시작해야 마땅하다.

25.대한체육회는?
 
다음 달 2011.10월에 충북 진천에 국가대표종합훈련원(제2선수촌)이 문을 열면 시설에 여유가 생기는 태릉선수촌 자리 등 명예의 전당 건립 후보지를 물색하고 있다고 한다.
 
26.정부와 각계의 제도적·경제적 뒷받침이 중요하다.
 
나는 장효조를 그냥 보내고 싶지 않다.
 
27.그의 유니폼·방망이가 손기정 등 전설적 선배들의 유품과 나란히 전시된 ‘영웅들의 집’을 하루빨리 만나 보고 싶다.

노재현 중앙일보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야구전문기자 박동희기자의 mr.베이스볼]

 

@제목:화려했으나 외로웠던 남자, 장효조

기사입력 2011-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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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야구사에 가장 위대했던 타자, 고 장효조(1956~2011)

그는 ‘독종’이었다. 조명탑의 불이 꺼지고, 관중과 선수들이 모두 빠져나가고서도 그는 구장을 나서지 않았다. 라커룸의 커다란 거울 앞에 속옷만 입은 채 섰다. 그리고 무사가 칼을 들듯 배트를 쥐고는 몇 시간이고, 허공을 벴다. ‘타격 달인’, ‘타격 천재’라는 찬사를 수없이 들었지만,
 
정작 장효조를 최고의 타자로 일으킨 건 피나는 노력이
 
었다.
 
生前에 장효조는 이렇게 말했다.
 
 
체구가 작아 언제 선수생활이 끝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을 느끼며 살았다.
 
결국, 나를 키우고 살린 8할은 훈련이었다.”
 
 
사실이었다.
 
한국 프로야구 사상 장효조처럼 지독한 ‘연습벌레’는 없었다.
그는 야구를 위해서라면 개인사도, 친구도 버렸다. 그래서 늘 외롭고 고독했다.
주변에선 그런 장효조를 가리켜 '모난 성격의 소유자', '반골'이라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그런 시선에 불만을 토해내지 않았다. 불평 한마디 없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훗날 자신이 걸어온 길을 누군가 정당하게 평가해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스포츠춘추>
 
2년 전, 故 장효조 삼성 2군 감독을 인터뷰했다.
그는 “아직 삼성에 몸담고 있기에 인터뷰는 차후에 게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차후가 오늘이 될 줄은 그도 <스포츠춘추>도 그 누구도 당시는 알지 못했다.
 
‘독종’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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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쿠바 선수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장효조(사진 가운데)(사진=스포츠춘추)

장효조는 대구 삼덕초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부산고 야구선수 출신인 삼촌의 영향이
 
컸다.
 
 
발이 빠르고 눈썰미가 좋았던 장효조는 가능성이 보였다. 하지만, 작은 체구가 문제였다. 또래 선수들보다 한 뼘이나 키가 작았던 장효조는 보이지 않는 질투에 시달려야 했다.
 
 
“야구부원들 부모님들이 ‘쟤는 저렇게 키가 작아도 경기에 나가고, 우리 아들은 쟤보다 덩치가 훨씬 큰데도 벤치에 있다’며
 
왜 감독은 장효조만 귀여워하느냐’고
 
불만을 털어놓곤 했다.
 
 
감독님이 날 편애한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면 실력으로 내 가치를 증명해야 했다.
 
 
그래서 단체 훈련이 끝나고서도 혼자 남아 개인훈련에 집중했다. 밤에 집으로 돌아가면 어찌나 배트를 휘둘렀는지 숟가락을 들 힘조차 없었다.”
 
 
대구중학교로 진학한 장효조는?
 
 
 
여전히 훈련에 매달렸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입이 쫙 벌어질 만큼의 대단한 선수는 아니었다.
 
 
장효조의 인생을 뒤바꿔놓은 건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대구중 2학년 때 장효조는 아버지를 여의었다.
 
하지만, 장효조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자신이 대구에서 하숙하는 사이 아버지가 서울에서 숨을 거뒀기 때문이다.
 
중학생의 어린 나이였지만, 장효조는 하늘을 보며 아버지와 약속했다.
“아버지가 바라던 데로 ‘최고의 야구선수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아버지는 내가 운동에 전념하지 않을까봐 임종도
 
알리지 말라고 하셨던 분이다.
 
졸지에 혼자가 되신 어머니와 형제들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선수들이 ‘야구는 즐기면서 해야 한다’고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 내겐 야구가 생존의 전쟁이었다.”
이때부터 장효조는 ‘독종’ 소릴 듣기 시작했다. 야구와 관련해선 누구에게도 지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야구와 관계없는 일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1972년 대구상고(현 대구 상원고)에 진학하면서
 
장효조는 드디어 전국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1973년이야말로 전성기였다.
 
 
당시 대구상고는 2학년생 신춘식, 서윤덕, 장효조가 주축이었다.
 
2학년이 주축이라, 아무래도 경험 면에서 다른 팀에 뒤졌다. 선수들도 몇몇을 빼놓곤 ‘아직 실력이 부족하다’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대구상고는
 
그해
 
대통령배
 
봉황대기
 
황금사자기
 
즉 4대 메이저 대회중 3개 대회를  휩쓸며
 
(나머지 하나는? 청룡기 대회)
 
 
전국 최강팀으로 우뚝 섰다.
 
선봉엔 역시 장효조가 있었다.
 
 
장효조는 봉황대기와 황금사자기에서 타율왕에 올랐다. 상대 투수들이 "던질 데가 없다"고 하소연할 정도로 그는 어느 코스에 공이 와도 안타를 뽑아냈다.
 
 
이즈음 장효조의 진가는 일본에도 전해진다. 1973년에 열린 한일 고교야구 친선대회가 발단이었다.
 
 
당시 한국 고교선발팀엔 장효조를 비롯해 김용희, 이광은 등이 버티고 있었다. 모두 쟁쟁한 고교 강타자들이었다.
 
 
하지만, 일본 고교선발군엔 '괴물 투수' 에가와 스구루가 있었다.
 
 
고시엔 대회에서 노히트 노런 9회, 퍼펙트경기 2회를 달성한 에가와는 한국 타자들에겐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하지만,
 
한국은 3차례의 경기에서 2승1무를 기록하며 일본을 압도했다. 당시 일본 기자들은
 
"키가 큰 김용희와 작은 체구의 교타자가 눈에 띈다"고
 
했는데, 작은 체구의 교타자는 바로 장효조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한양대에 입학하며 장효조의 가치는 더 높아졌다. 대학 1학년 때 대표팀에 뽑혔고,
 
 
2학년 때인 1976년 백호기대회에선 타율 7할1푼4리(14타수 10안타)
 
 
라는 거짓말 같은 대기록으로 타율왕에 올랐다.
 
4연타석 2루타는 차라리 덤에 가까웠다.
 
 
 
아마추어 최고의 타자였던 장효조는?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때 삼성에 입단하지 못했다.
 
그해 서울에서 열리는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하려고 프로 입문을 1년 미룬 까닭이었다.
 
사실은?
 
정부에서 국가대표 선수들은 위의 대회 출전 독려를 위해 프로 입성을 강제로 막았다
 
-이 당시 김일권은 대만 전지훈련에서 뛰쳐나와 큰 화제가 된 바도 있을 정도였다고 저  한준구는 기억합니다
 
 
 
장효조는 이 대회에서 발군의 실력으로 한국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역시 장효조'란 찬사를 이끌어냈다.
 
그에게 삼성은 심장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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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효조에게 훈련은 종교 의식이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해야만 하는, 그래야 안심이 되는 숭고한 의식이었다. 장효조는 다른 선수들도 야구를 자신처럼 대하길 바랐다

 
1983년 장효조가 삼성에 입단하자 많은 야구전문가는 '과연 나무배트를 사용하는 프로에서도 장효조가 성공할 수 있겠느냐'며 반신반의했다. 장효조 역시 걱정이 많았다.
 
 
"알루미늄 배트와 나무 배트는 질적으로 달랐다. 타구 궤적도 다르고, 배트에 힘을 쥐는 방식도 판이했다. 다른 수가 없었다.
 
실업에서 5시간 훈련했다면 프로에선 10시간 훈련하면
 
서 나무배트에 적응해야 했다.
 
 
당시 얼마나 많이 나무배트를 휘둘렀는지 손바닥이 악어 가죽처럼 울퉁불퉁했다."
 
 
이번에도 땀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장효조는 그해 5월 10일 대구 ob(두산의 전신) 전부터 15일 대전 ob 전까지
 
8연타석 안타와 3연타석 홈런에 성공했다. 그 여세를 몰아
 
장효조는/
 
 
1983년 입단 첫해 타율 3할6푼9리로 타율왕에 올랐다.
그뿐이 아니었다. 장타율 6할1푼과 출루율 4할7푼5리로 두 부문 1위에 오르며 정규 시즌 mvp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신인왕은 사실 따논 당상 이었으나 장효조는 너무 신인
 
이라기에는 어울리지 않아 평생 누구나 단 한 번 있는
 
신인왕을 다른 선수에게 그냥 도둑(?)맞은 격이었다.
 
참 재미있었던 30년전 쯤의 이야기다.
알루미늄에서 나무로 배트가 바뀌어도 그의 타격 본능은 변함이 없던 것이다.
 
 
장효조는 1985~1987년까지 3년 연속 타율왕에 올랐고,
 
1989년까지 데뷔 이후 7년 연속 타율 3할을 기록했다.
 
특히나 1987년엔 타율 3할8푼7리로 정규 시즌 mvp에 오르는 감격을 누렸다.
 
하지만, 장효조가 자신의 분신처럼 사랑했던 삼성에서 있던 기간은 길지 않았다.
 
그는 1988시즌이 끝나자 롯데로 트레이드됐다.
 
당시 삼성이 내세운 이유는
 
"장효조가 큰 경기에 약하다"는 것이었다.
 
 
삼성은 1986, 1987년 한국시리즈에서 해태(kia의 전신)에 2년 연속 무릎을 꿇었다. 9번의 맞대결에서 단 1승만 거둔 처참한 패배였다. 삼성그룹이 야구단에 특별감사를 실시할 정도로 충격은 컸다.
 
 
삼성은 팀 분위기 쇄신을 위해 베테랑 선수 가운데 한 명을 트레이드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1988년 1월 삼성은 "지난해 정규 시즌 mvp였던 장효조를 트레이드 시장에 내놓겠다"며 "투수 2명 혹은 투수와 포수를 원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삼성은 장효조를 트레이드 대상자로 지목했던 것일까.
 
 
장효조는 <스포츠춘추>와의 인터뷰에서
 
"연봉 협상 문제로 구단과 자주 이견을 보였기 때문"
 
이라고 설명했다.
 
"1983년 입단 이후,
 
구단과 연봉 협상 때마다 부딪혔다.
 
 
 
구단이 합리적인 연봉안을 내놨다면 모를까
 
늘 '이 정도에서 정리하자'는 식으로 얼버무리려 했다. 후배 선수들을 위해서도 내가 총대를 메야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장효조는 자기밖에 모른다.'
 
'이기적이다.', '성격이 좋지 않다' 등의 악담이었다.
 
 
 
1988년 삼성이 나를 트레이드했을 때도 연봉협상에서 대립각을 세우던 때였다. 생각해보라. 전해 정규 시즌 mvp에 올랐는데 연봉 인상 폭이 5백만 원이라면 말이 되나.
 
내가 ‘이번만은 양보할 수 없다’고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트레이드 카드를 뽑았다.
 
일종의 보복이고, 연봉협상에서 구단이 우위를 점하려는 선수 길들이기였다."
 
 
그해 장효조는 우여곡절 끝에 삼성에 잔류했다.
 
연봉은 전해보다 800만 원이 인상된 5천300만 원으로 결정됐다. 구단 측 연봉안이 대부분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결과적으론 '구단이 연봉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려 트레이드 카드를 집었다'는 장효조의 주장이 맞았던 셈이었다.
 
 
이해 장효조는 타율 3할1푼4리로 프로 데뷔 이후 최저 타율을 기록한다. 트레이드 논란 속에 그는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나를 원하지 않는 팀에서 야구를 계속 해야 하나 싶었다. 그 생각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시즌 중반까지 좀체 컨디션이 좋아지지 않았다.
 
그러다 시즌 후반기에 돌입하며 '3할 이하의 성적을 거두면 결국, 내가 구단에 지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남은 기간엔 삼성이란 두 자보단 장효조란 이름 석 자에 집중하기로 했다. 다행히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했지만, 언제 트레이드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의 예상이 적중했다.
 
 
1988년 12월 삼성과 롯데는
 
 2:2 대형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삼성의 장효조와 장태수가 롯데로 가고,
 
 
롯데의 김용철과 이문한이 삼성으로 오는
 
 
맞트레이드였다.
 
 
"배신감이 들었다. ‘삼성이 날 이렇게 버릴 수 있나’ 싶었다. 솔직히 야구를 그만두려 했다. 하지만, 가족과 팬이 눈에 아른거렸다. 삼성에 본때를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많은 이에게 조언을 얻은 결과, 롯데로 묵묵히 가는 것이 진정한 프로선수라는 결론을 내렸다."
 
 
1989년 롯데 유니폼을 입은 장효조는?
 
타율 3할3리로 3할대 타율을 계속 이어갔다.
 
1991년엔 타율 3할4푼7리, 4홈런, 54타점, 11도루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그는 이때 은퇴를 생각했다.
 
 
"늘 절정일 때 옷을 벗자고 다짐했다. 1992년 체력적인 한계도 느꼈고, 이러다 퇴물 신세로 은퇴할지도 모른다는 염려도 들었다.
 
 
시즌 중 롯데에서 코치직을 제안하기에 미련없이 은퇴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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